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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말, 기타 좀 퉁기고 노래 소리 좀 난다는 이들은 거의 대학가요제의 무대를 꿈꿨다. 심지어 대학가요제에 나가기 위해 대학에 가겠다는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가수가 되는 경로가 지금보다도 더 좁고도 험했던 시절, 대학가요제는 가수가 합법적으로, 그리고 각광을 받으며 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학생들의 신선한 무대로 관심을 끌었던 대학가요제는 그 행사 무대가 커지고 화려해질수록, 정작 무대의 주인공들인 대학생들로부터는 점차 비판과 외면의 대상이 되어 간다. 대학생임을 내세울 뿐 실상 대학의 분위기와 유리되었고, 지식인으로서의 대학생의 고뇌나 사회비판 의식을 담은 노래는 대학가요제에 발을 붙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79년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탄 노래는 김학래와 임철우의 듀엣 <내가>였다.



“이 세상에 기쁜 꿈 있으니 가득한 사랑의 눈 내리고 우리 사랑에 노래 있다면 아름다운 생 찾으리라..... 내가 말 없는 방랑자라면 이 세상에 돌이 되겠소. 내가 임 찾는 떠돌이라면 이 세상 끝까지 가겠소.”



방랑자, 떠돌이, 기쁜 꿈, 아름다운 생, 온정, 신실과 믿음...... 대학가요제 사상 대학의 낭만을 가장 잘 표현했다고 얘기되는 이 노래가 대상을 획득한 1979년의 대학가요제가 열린 것은 8월 25일, 바로 그 2주일 전에는 생존권을 외치며 야당 당사에서 농성하던 여성노동자들이 공권력에 의해 무참히 진압되고 그 와중에 한 명의 여성 노동자가 목숨을 잃은 이르바 YH 사태가 일어났다. 


소리 낼 수 없는 울분의 시기, 유신 시대의 대학생들에게 술 한 잔 먹고 기타 두드리며 “내가 말 없는 방랑자라면”을 목 터져라 노래하는 것은 일면 놓칠 수 없는 해방감이었지만 또 다른 한 면으로는 참기 힘든 자괴감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그를 입증하는 하나의 에피소드를 소개해 보자. 


<내가>가 1979년 대학가요제 대상을 타던 때, 원광대학교 학생들의 노래는 동상을 받는다. 노래 제목은 <소외된 인간>. 그 가사를 소개하면 이렇다.



“이 세상 어느 곳에 말 없이 태어나서 병들고 굶주리는 사람 있네. 그들의 마음에는 사랑이 무언지 행복이 무언지 알 수가 없다네. 그들이 무얼 생각하며 무엇을 보고 살겠나. 숨겨진 그늘 속의 아픔아. 세상 사람들이여 누가 그들을 그렇게 저 하늘에 별들이여 누가 그들을 아는가. 그들의 바램을, 그리움을, 그들도 웃으며 느끼고 서로를 보는 마음을. (하략)” 



요즘 보면 별스런 감흥조차 들지 않는 공자님 말씀이지만 이 노래는 당당 동상을 받았음에도 음반에 실리지 못했고 방송에서도 사라졌다. 수출 백억 불을 달성하고 바야흐로 선진조국의 광채가 빛나는 판에 소외는 무슨 놈의 소외란 말인가. 대학생이면 대학생답게 연애나 하고, 사랑 타령이나 하면 될 것이지! 병들고 굶주리는 사람을 너희들이 왜 생각하는 거냐? 가 당국자들의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대학가요제’이기도 했던 것이다.


MBC 주최 79년 대학가요제가 끝난 두 달 뒤 10.26 사태가 발발한다. 그리고 짧았던 서울의 봄이 지나고 광주의 피바람과 함께 1980년대가 열린다. 1980년 대학가요제의 대상 곡은 대학가요제의 상징처럼 남아 있고 노래방에서 자주 불리워지는 노래 베스트에서 절대로 빠지지 않는 노래 <꿈의 대화>다. 


<꿈의 대화>는 대학가요제가 낳은 최고의 명곡 중의 하나이면서 가장 그 이상(?)에 걸맞는 노래였다고 하겠다. 출연자였던 두 의대생에게 대학 가요란 상업적인 대중가요와는 달리 학생들이 “쉬는 시간에 부르는 노래”였다. (연세춘추 1980년 11월 17일 인터뷰) 노래를 좋아했던 이 의대생들은 음대에 있는 피아노나 기타를 찾아다니기 위해 학교 안을 뛰어다니며 연습을 했고 시간을 쪼개 작업을 하느라 마감 4시간 전에야 대학가요제 출전을 위한 악보를 제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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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용과 한명훈


노래의 작사 작곡가였던 이범용은 엄청나게 엄한 아버지 때문에 “내 머리통 위에서 기타 세 대가 깨져나갔다.”고 회고하거니와 자신도 상업적인 무대로 나가기를 거부하고 의업의 길을 갔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음악의 길을 포기한 데에는 뜻밖의 이유가 있었다. “딴따라는 내 길이 아니었다. <꿈의 대화>는 슬픈 노래였는데 사람들은 밝은 느낌이 좋다며 대상을 줬다. 그래서 ‘아 나는 이길로 나가면 안 되겠구나’ 했다.”는 것이다. (의협신문 2008.1.21)


그에 따르면 <꿈의 대화>는 그 흥겨운 리듬과 신나는 멜로디에도 불구하고 슬픈 노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이어 이렇게 말한다.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었던 시절, 노래에선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었지. <꿈의 대화>는 그런 노래야. 현실에서 못하는 말을 꿈에서 마음껏 해 보자는. 내 꿈에선 내가 주인공일 수밖에 없지만 네가 들어와서 함께 주인공이 되어 보자고” 그래도 연세대학교 의대씩이나 간 아들이 공부 안 한다고 기타로 머리통을 두들기던 아버지와 “정당한 이유 없이 수업에 빠지면 사형까지도 가능했던” 그 시대의 슬하에서 <꿈의 노래>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노래했고, 현실에서 나눌 수 없는 대화를 읊조렸기에 그 노래는 슬픈 노래였던 것이다. 


“외로움도 없어라 너와 나의 꿈속에. 서러움도 없어라 너와 나의 눈빛에” 라고 노래했지만 이범용은 자신의 주변과 넓은 세상에 산재한 외로움과 서러움을 역으로 노래했던 것이고, 그 노래의 ‘밝은 느낌’을 찬미하는 이들에게서 자신의 음악적 한계(?)까지 읽어 버렸던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었던” 시대는 그 후로도 이어진다. 


1981년 대학가요제의 대상은 정오차라는 한양대학생이 부른 <바윗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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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러 굴러 굴러라 굴러라 바윗돌 한 맺힌 내 청춘 부서지고 부서져도......” 구성지게 부른 이 노래는 사실 할 말을 노래 속에 숨기고 있었다. 정오차는 이렇게 얘기한다.


“무섭고 암울한 시기였기에 5.18 희생자 묘는 방치돼 있었어요. 사람 손이 타지 못한 비석과 묘는 황폐해져 있었죠. 그걸 바윗돌로 형상화했고 바위가 구르고 굴러 민주화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가사를 썼죠.” (광주일보 2008. 5.30) 이 사연이 알려진 즉시 <바윗돌>은 금지곡이 되고 만다. 


극악한 시대는 그에 상응하는 변화를 낳는다. 대학가요제 출전을 결심하고 만든 노래가 5.18의 아픔을 담은 것처럼, 1979년도 대학가요제에서 은상을 차지했던 ‘영랑과 강진’의 멤버 김종률이 그의 대학가요제 은상 곡보다 백 배는 더 많이 알려지고 1만 배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불리워질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작가가 되었고, 80년 대학가요제에서 <바람개비 인생>으로 동상을 탔던 고려대 노래모임 ‘석화’는 아예 운동권 노래패로 진화했던 것은 그 많은 편린 중의 하나다.



* 이 글은 서울문화재단 블로그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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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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