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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제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을 드라마화한 <뿌리>가 아닐까? <뿌리>는 1750년부터 1960년까지 200여년에 걸친 원작자 헤일리 집안의 이야기를 추적하면서 미국에서 자행된 노예제도를 고발하는 작품이다. 단순히 미국 남부의 한 흑인 가문의 이야기가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에서 벌어진 노예제도의 진상을 보여주는 대서사시로, 한 때 우리나라에서도 인기리에 방영되면서 노예제도의 실상뿐만 아니라 ‘뿌리 찾기’ 열풍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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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한 추장의 아들인 주인공 쿤타 킨테는 노예 사냥꾼들에게 잡혀 미국으로 가는 배에 타게 된다. 선상에서 다른 노예들과 반란을 일으키지만 진압당하고 미국의 한 농장에 팔려간다. 그는 그곳에서 백인 주인이 새로 붙여준 ‘토미’라는 이름을 완강히 거부하고 자유를 찾아 끝없이 탈출을 시도한다. 주인이 아무리 채찍질을 하고 고통을 주어도 자유를 향한 열망을 꺾지 않았지만, 주인이 도끼로 그의 한 발을 반쯤 잘라버렸을 때는 탈출을 포기하고 노예의 삶을 살아간다. 백인들이 흑인 노예제도를 정당화하기 위해 흑인은 열등하며 노예로 사는데 적합한 종족이라고 아무리 강변해도 백인의 폭력에 의해 노예로 길들여졌다는 명백한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노예제도는 인류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고대 로마의 노예에서 중세유럽의 농노를 거쳐 조선의 노비에 이르기까지, 이름과 양태는 다를지라도 수많은 문명국들은 어떤 형태로든 노예제도를 유지해왔다. 우리가 찬미하는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도 사실은 노예제도에 바탕을 둔 자유민들만의 제도였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노예제도는 전쟁 포로나 같은 집단 내의 ‘열등한’ 사람들을 노예로 부리는 것을 의미한다. 타민족이나 종족을 의도적으로 대규모 약탈하거나 사서 노예로 부리는 근대적인 의미의 노예제도는 15세기 중엽 유럽에서 시작되었다.


포르투갈은 노예거래의 선두주자였다. 그들은 주로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동남아시아까지 원정을 와서 교역을 했다. 그 교역품목 중에 중요한 것이 노예였다. 임진왜란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도 3만여 명이 노예로 팔려갔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당시 일본 항구에 포르투갈의 노예선들이 진을 치고서 일본인들이 잡아온 조선인들을 노예로 사들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임진왜란을 다른 말로 ‘노예전쟁(Slave War)’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가 잊어버린 슬픈 역사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가기 반세기 전인 1441년, 포르투갈 선원인 곤잘브스(Antoni Gonsalves)는 흔히 항해왕(the Navigator)이라고 불리는 헨리(Henry) 왕자의 명을 받고 아프리카 서해안에 가죽과 기름을 구하러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약간의 사금과 노예 10명을 싣고 돌아왔다. 근대 흑인 노예제도의 기원이다. 그 후 유럽은 19세기까지 350여 년에 걸쳐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잡아 아메리카와 유럽에 팔았다.


벤자민 콸스의 <미국흑인사>에 따르면, 노예로 잡혀온 대다수의 흑인은 세네갈 강으로부터 앙골라 남단까지의, 약 5000km에 이르는 아프리카 서해안 지역 출신이었다. 아메리카로 건너온 이 서해안 출신의 흑인들은 키가 크고, 곱슬머리에, 펑퍼짐한 용모, 두툼한 입술, 얼굴이나 몸에 털이 거의 없는, 진한 검은 피부를 지녔다. 흑인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쉽게 연상하는 용모다. 그 외에도 아프리카 전역이 노예사냥터였다고 할 만큼 노예사냥은 아프리카에서 광범위하게 자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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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흑인 노예산업은 포르투갈이 가장 먼저 시작했지만, 17세기에는 네덜란드가 주도권을 차지하고, 18세기에는 영국이 장악했다. 스페인과 프랑스를 비롯한 일부 나라들도 노예무역으로 부를 축적했다. 건강한 남자 흑인은 약 60달러, 여자 노예는 15달러 정도에 팔렸다. 노예를 실은 항해를 통해서 보험료와 수수료를 포함한 모든 경비를 제외하고도 1달러 당 30센트의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평균 수익률 30%라면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산업이다. 백인들은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노예산업에 뛰어들었다.


이런 노예산업은 다니엘 드포의 유명한 소설인 <로빈슨 크루소>(1719)에서 어느 정도 유추해볼 수 있다.


크루소는 영국 요크의 부유한 중산층 출신으로, 모험심이 강하여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배를 탄다. 네 번째 항해에서 터키 해적선에 붙잡혀 살레 섬의 토인에게 노예로 팔려가지만 그 섬에서 탈출하여 브라질로 가는 무역선에 구출된다. 브라질에서 토지 구하고 담배와 설탕을 재배해 한 밑천 잡는다. 그러나 흑인 노예장사를 하기 위해 기니 섬으로 가는 길에 배가 난파되어 혼자 남미 해안의 한 무인도에 떨어진다. 그곳에서 24년간이나 혼자 힘으로 살던 크루소는 식인종에게 끌려온 토인을 구해주고, ‘프라이데이’라고 이름을 붙인 뒤 함께 산다. 몇 년 후 크루소는 한 상선에 구출되어 귀국한다. 귀국 후 결혼도 하고 사업도 순조롭게 하지만, 아내가 죽은 후 육지에서의 단조로운 삶에 싫증이 나 다시 항해에 나선다. 그는 옛날에 살던 섬을 방문하고 중국과 시베리아를 여행한다.


이 시기 유럽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향해 빠르게 나아가고 있었다. 크루소는 그 새로운 시대의 자립적이고 자율적인 인간을 대변한다. 그는 유럽의 새로운 자본가를 모델로 하고 있다. 이들 부르주아 계급은 식민지를 개척하고 유럽의 가치, 종교, 행동을 그곳에 이식한다. 원주민인 프라이데이는 크루소의 노예가 되며 열등한 존재로 낙인찍히고 그의 종교는 조롱거리가 된다. 크루소는 그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기독교 교리를 주입하고 문명화해 유용한 노동력으로 이용한다. 이처럼 크루소로 대변되는 근대 산업부르주아는 노예산업과 긴밀하게 결탁되어 있었다.


크루소는 노예산업의 산물이다. 그는 본인이 노예로 산 경험이 있으면서 노예장사에 뛰어들었다. 노예거래가 수지맞는 장사라는 것을 알고 직접 뛰어든 것이다. 그가 브라질에서 담배와 설탕을 재배했을 때의 노동력은 거의 틀림없이 흑인 노예였을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의 플랜테이션 농업이 노예제도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설탕, 담배, 면화 산업과 그것에서 파생되는 모든 근대 산업은 흑인 노예 노동의 산물이었다.


당시 유럽인들은 유럽-아메리카-아프리카를 잇는 삼각무역으로 돈을 벌었다. 유럽에서는 모직, 면직, 비단, 단도, 총기, 화약, 술, 장신구, 유리구슬, 거울 등 온갖 잡다한 상품을 싣고 아프리카에 가서 원주민 추장들과 거래했다. 그리고 노예를 실은 배가 아메리카에 도착하면 다시 설탕과 담배와 면화 같은 상품을 실어서 유럽으로 건너왔다. 결국 아프리카의 노예는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에서 구입할 설탕과 담배와 면화의 비용을 충당하는데 쓰였다. 크루소는 그런 무역 시스템에 편승하려 했다.


유럽인들은 얼마나 많은 흑인들을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약탈했을까?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를 보면, 유럽인들이 지난 수백 년간 노예로 약탈한 흑인의 수는 약 5000만 명이다. 그 중 실제 유럽이나 아메리카로 팔려간 흑인들은 약 1500만 정도이고 나머지는 잡거나 수송하는 도중에 모두 죽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숫자에 입이 벌어질 뿐이다.


아프리카에서 잡혀온 대부분의 흑인들은 카리브 해의 섬 지역이나 브라질에 팔려갔다. 사탕수수 농업에 많은 흑인 노동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브라질은 남미 어느 나라보다도 흑인 노동력의 비율이 높았다. 자연스럽게 백인과 흑인 사이의 혼혈인 물라토(mulatto)가 많이 태어났다. 현재 브라질 인구의 38.5%가 물라토라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콜롬비아는 전체 인구 중 14%가 물라토다.


백인들은 아프리카 해안에 교역소를 설치하고 잡아온 노예들을 가두어 둘 창고를 짓고는 아프리카인을 이용해 내륙의 흑인들을 노예로 잡아 날랐다. 백인들은 질병이나 흑인들이 가할지 모르는 위해를 두려워해서 내륙으로는 잘 들어가지 않았다. 이렇게 아프리카에서 잡힌 노예들은 노예선의 갑판 밑 어두운 선실에서 쇠사슬에 손발이 묶인 채 일렬로 다닥다닥 어깨를 맞대고 누워 몇 달이나 항해해야 했다. 노예를 장작을 늘어놓듯이 태우면 큰 배에는 200명 정도 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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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이렇게 배에 태우고 항해했다


여자 노예들의 경우는 선원들의 성희롱과 강간의 대상이 되었다. 수송 도중에 사망한 노예는 그대로 바다에 버려졌다. 스스로 바다에 뛰어드는 노예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노예선 뒤에는 상어 떼가 따라다녔다. 어떤 이들은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배 주위에 설치한 그물에서 뛰어내려 자살하기도 했다. 살려는 의지를 상실한 사람도 있었다. 우울증을 경계하기 위해 피들, 하프, 백파이프에 맞춰 억지로 뛰어 오르내리게 하는, ‘춤추는 노예’로 알려진 의식을 하기도 했다. 단식투쟁을 시도하는 노예에게는 타고 있는 석탄이 들어 있는 ‘입열개’를 동원해서 강제로 먹이기도 했다.


수송시설이 워낙 열악하고 수송기간이 길어서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살아있는 건 30퍼센트 정도였다. 배에 전염병이 퍼지면 몰살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해적들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버려진 배들이 유령선이며, 유령선들 중 상당수는 노예선이었다. 음침하고 기괴하며 해골과 유령이 득실거린다는, 유럽의 근대소설이나 동화에 자주 등장하는 유령선은 문학적 허구가 아니라 어두운 역사를 반영한 것이다.


수백 년에 걸친 유럽인들의 노예사냥으로 아프리카의 사회제도, 가족제도, 경제제도는 근본에서부터 붕괴되었다. 게다가 유럽 강대국들은 19세기에 아프리카를 분할해 식민지로 삼기까지 했다. 분할과정에서 적대적인 부족들이 같은 식민지에 함께 묶이거나 같은 종족이 분할되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며, 그것은 아프리카 식민지들이 독립한 후 정치적 분쟁과 종족간의 피비린내 나는 투쟁의 원인이 되었다. 오늘날 아프리카의 빈곤과 분쟁이 유럽인들의 노예사냥에서 시작되었다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미국으로 가보자. 미국에 흑인노예가 처음 수입된 것은 1619년이다. 8월 어느 날, 버지니아 식민지의 제임스타운에 네덜란드 국적선의 노예선 한 척이 도착해 20명의 흑인을 팔아넘겼다. 그때부터 링컨 대통령이 노예제도 폐지를 선언한 1863년까지 250여 년간 노예제도는 지속되었다.


17세기 말까지 미국에는 소수의 노예만 유입되었다. 1700년까지 2만 8000명의 흑인이 미국으로 이주해왔다. 그러나 18세기에 미국 남부에 플랜테이션 농업이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유입되는 노예수가 빠르게 증가했다. 1760년 흑인의 수는 25만 명에 달했고, 남북전쟁 무렵인 19세기 중엽에는 수백만 명이 되었다.


초기에 미국으로 넘어간 흑인들의 신분은 유동적이었다. 흑인들은 백인 계약하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정기간 일하고 기간이 끝나면 자유민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미국에서 흑인 노예제도가 정착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말부터다. 그 무렵부터 흑인과 백인이 인종적으로 명확하게 분리되었다.


주인들은 백인들을 부릴 때와는 달리 이런저런 핑계로 흑인들을 계약하인의 신분으로 계속 묶어두었으며, 법이 그것을 강요하기도 했다. 또한 흑인들이 인종적으로 열등하다는 생각을 확산시키면서 흑인의 노예화를 합리화했다. 18세기 초에는 식민지 의회들이 앞 다투어 흑인들을 영구적으로 노예화하는 법을 만들었다. 노예제도는 법적 제도로 자리 잡아갔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흑인을 영구적으로 노예화함으로써 값싸고 안정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같은 백인을 계약하인으로 부리는 것보다 피부색이 전혀 다른 흑인을 노예로 부리는 것이 그들에게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도 더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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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aves Waiting for Sale, Richmond, Virginia, 1861


미국 내에서의 흑인의 위치는 남부와 북부에 따라 어느 정도 차이가 있었다. 남부는 담배와 쌀과 면화 산업이 번창했으므로 흑인 노예들은 주로 들에서 노역을 했다. 일부 흑인들은 농장에서 자체적으로 필요로 하는 목수, 무두장이, 재단사, 벽돌공 같은 일을 맡기도 했다. 반면 북부에서는 농사 외에도 많은 흑인 노예들이 잡역부로 일했다. 그들은 목공, 고기잡이, 고래잡이, 마부, 요리사, 집사, 세탁부 같은 일에 종사했다. 흑인들의 그런 잡역부의 일은 노예해방 이후 하층 백인들의 노동과 겹쳐서 인종 간 충돌 요인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일반적으로 우리가 백인과 흑인을 구분하는 기준은 피부색이다. 피부가 희면 백인이고 피부가 검으면 흑인이라는 식이다. 하지만 미국에서 흑인과 백인을 구분하는 선은 피부색과 무관하다. 노예제 시절부터 미국에는 ‘한 방울의 원칙(one drop rule)’이라는 것이 있었다. 아무리 피부색이 하얗더라도 흑인의 피가 한 방울만이라도 섞여 있으면 그는 흑인으로 분류되어 노예로 살아야 했다. 그 유산은 지금도 암암리에 이어지고 있다. 피부색이 하얀 흑인이 백인 행세를 하기 위해서는 몸속에 흐르는 흑인의 피를 숨기고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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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