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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하스(Roxas:독립 이후 필리핀 초대 대통령)정부는 Huk. 게릴라를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잇따른 군사작전의 실패와 경제적 실패는 사태를 갈수록 악화시켰다. 48년도에 이르면 필리핀 70여 개 주중 25개 주가 반군에 통치하에 있었고 HMB(Huk.와 PKM 무장병력이 합세한)는 6개 사단규모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정작 이 사태를 촉발시킨 로하스는 48년에 4월 17일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그의 후임으로 부통령인 Elpidio Quirino(엘피디오 퀴리노)가 권력을 이어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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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리노는 이미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성장한 반군과 협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된다. 그러나 상황을 HMB 입장에서 보자면, 혁명은 목전에 있었고, 무능한 필리핀 정부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보였다.

 

때는 1949년.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한다. 중화민국의 난징이 공산당 혁명군에 의해서 함락되고 중국이 공산화된 것이다. 급박해진 미국은 필리핀과 일본을 공산주의 위협으로부터 동아시아의 자유진영을 방어하는 최전선으로 삼는다. 따라서 미국은 필리핀의 공산반군(사실관계가 어떻든 미국은 HMB를 공산반군으로 보고 있었다)의 말살과 필리핀의 친미정부의 방어를 당면과제로 삼았다.

 

필리핀 경제는 내전과 Bell Trading Act에 의해 나락에 떨어진 상황이었다. 1949년 필리핀은 10억 불 가량의 대미 무역 부채를 지니고 있었는데, 외환 보유액은 단 1400만 불에 불과했다. 미국은 필리핀을 자신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정도로 성장시키고 싶지 않았지만, 공산주의의 혁명이 일어날 정도로 몰락하게 둘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부터 미국은 필리핀 경제에 대해 실질적인 지원을 한다.

 

많은 사람들이 필리핀의 경제가 몰락한 것이 마르코스 독재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다. 경제란 단순한 현상적인 변화보다는 훨씬 더 많은 역사적 이유가 존재한다. 그리고 좀 더 구조적으로 살펴볼 때 필리핀은 100년 전이나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한 구조를 가진 경제체계에서 각 시대적 변주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가장 잘살았다고 하는 70년대나 지금이나 100년 전이나 필리핀의 경제 구조가 다를까? 아직도 미국회사의 필리핀산 바나나를 사 먹고 있는 우리는 경제구조가 필리핀과 크게 다르다고 볼 수 있을까? 어찌 됐거나 미국계 회사의 필리핀에 대한 광범위한 경공업 투자가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이때부터이다.

 

1950년이 되면 다시 한 번 국제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인한 한국전쟁은 필리핀으로서는 결정적인 기회이기도 했다. 아직 내전이 해결되지 않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필리핀은 7000여 명의 병력을 한국에 파병한다. 그 과정에서 미국의 군사 및 경제 지원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필리핀이 잘살았다고 하는 우리의 배경지식의 근거에는 6.25 때의 아시아 국가로서는 대규모의 파병을 하고 미국에 의해 현대화된 병력을 가지고 있던 필리핀에 대한 동경이 있었으니 알게 모르게 우리와 필리핀은 많이 연결이 되는 것이다.

 

미국은 필리핀의 대규모의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했지만 퀴리노 정부의 정치 역량은 여전히 의심스러웠고 반대 정당의 호세 라우렐은 친일 행적으로 믿을 만한 인물로 보이진 않았다. 미국의 CIA는 정치 공작을 통해 미국에 충성스러울 뿐만 아니라 능력이 있는 새 인물을 필리핀의 다음 대통령으로 밀어 올리겠다는 계획을 짠다. 미-일 전쟁에서 미국의 장교였고 이후에는 게릴라 활동을 한 라몬 막사이사이(Ramon Magsaysay)는 모든 면에서 적절한 인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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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미국 여행(그때에 CIA 국장과의 면접이 있었다) 이후 그는 전격적으로 퀴리노 정부의 국방부 장관에 임명된다. 초선 하원의원 이란 정치적 경력을 고려해보았는데 이는 파격적인 임명이었다.

 

CIA의 막사이사이에 대한 지원은 이미 퀴리노 정부 때부터 그를 정치적 실세로 만들었다. 퀴리노 정부는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원조를 받기 위해 막사이사이에게 권력을 넘길 수밖에 없었고, 원조를 통해 얻어진 성과는 언론을 통해 막사이사이의 업적이 되었다. 53년 필리핀 대선에서의 막사이사이의 승리는 막사 이사이가 장관에 임명되었을 때부터 이미 약속된 것이었다. 다만 문제는 그와 미국이 어떤 정치적 지형을 그리고 있는가였다.

 

막사이사이는 장관이 된 후 미국의 막대한 지원에 힘입어 HMD에 대한 공격을 가속화했다. 단순한 군사적 공격뿐만 아니라 EDCOR(Economic Development Corps)를 통한 유화 정책도 시작되었다. 이 정책은 "땅을 땅이 없는 소작농에게" 라는 슬로건 속에 공유지를 항복한 HMB 소작농에게 분배함으로서 이들의 항복을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 슬로건은 단지 선전뿐이었고 HMB 소작농들에게 분배된 것은 1/4에 불과했으며 1959년까지 이 해택을 받은 전체의 인구가 5175명뿐이었으니 실제로는 많이 보아도 300여 가구의 HMB 소작농들만이 해택을 본 정책이었다.

 

그외에도 10 centavo 전보(1000원 상담의 의미, 농민의 법률지원), " Well in every barrio" (군 변호사들이 농민에 대한 소송을 변호) 등의 정책이 막사이사이의 주도로 이루어졌고 이는 중산계급뿐만 아니라 농민층이 막사이사이를 압도적으로 지지하게 만들어 주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CIA와 CIA에 조종을 받는 필리핀 언론들이 이를 막사이 사이의 업적으로 치켜 올리고 그 성과를 과장한 건 말할 것도 없다.

 

막사이사이의 집권에는 3가지의 길이 있었다. 첫 번째는 현재 소속되어 있는 자유당의 퀴리노를 통해 집권하는 길이었다. 당시의 퀴리노 대통령은 이미 재선을 포기하고 부통령으로서 러닝메이트에 나서겠다는 제안을 한다. 막사이사이는 자연스럽게 퀴리노 내각을 인수해서 정권을 그대로 승계할 수 있었다. 다른 길로는 퀴리노 대신 자유당을 장악하여 대선에 나서는 길이었다. 이 방법으로 퀴리노와의 마찰은 있지만 다수 여당의 정치적 기반을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었다.

 

또 다른 대안은 야당이었던 국민당(Nationalista)으로 대통령에 나서는 일이었다. 이미 국민당 또한 막사이사이를 다음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겠다는 뜻을 비추어왔고 이 경우 퀴리노 정권의 무능함과 분명한 차이를 둘 수 있었다.

 

막사이사이는 결국 세 번째 길을 선택한다. 국민당과 자유당에 있어서 정권이 간절했던 쪽은 국민당이었다. 국민당은 행정부의 전권을 막사이사이에게 위임하겠다 약속한다. 필리핀의 정치와 사회를 개편하겠는 생각으로서의 막사이사이와 미국으로서는 친미색체가 강한 자유당보다는 오히려 국민당을 통해 개혁을 진행하는 게 유리했다는 점도 하나의 이유였다.

 

막사이사이의 선거운동인 MPM(Magsasysay for President Movement)는 여야의 모든 정당의 정치인과 학생 농민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지 속에서 결성되었다. 막사이사이는 젊고 정치적 경험이 없는 지도자였으나 막대한 선거자금과 지지자들을 모을 수 있었다. MPM의 지지시위엔 학생 5만여 명이 모였고 정당의 경선에서만 30만 페소를 쓸 수 있었다. 지금의 150만 불에 이르는 금액이다. 실제 선거에서는 미국계 기업가들의 후원만 25만 불(현재가치 250만 불)을 받았으니 그의 당선은 당연했다.

 

CIA는 그런 지형속에서도 당선이 되지 않는 최악의 경우에는 군부를 장악하고 있는 막사이사이를 통해 쿠데타를 일으키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70%의 지지율로 막사이사이가 당선이 되었기에 CIA가 그 계획을 실행할 필요가 없어졌을 뿐이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 아이젠아워는 언론에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원한 선거 결과입니다."라고 발표했으며 막사이사이와 CIA의 마닐라 지부에 축하 메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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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년 대선 때가 되면 HMB의 반란은 사실상 종결된다. 그러나 각성한 민중들의 민족과 계급에 대한 의식은 가볍게 지워질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친미적이었던 로하스는 민중들이 반미 제국주의를 외치게 만들었고 그 반미제국주의는 필리핀 민족주의라는 아주 오래된 영혼을 다시 되살렸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막사이사이와 미국이 준비한 HMB 말살 정책은 성공을 거두었고 소수의 공산주의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민중들은 다시 미국의 식민체계로 들어오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Huk.의 반란은 초기부터 정치적 의식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들은 철저하게 생존을 위해 강제로 게릴라전에 나선 것뿐이었고 생존에 관련된 문제가 해결되면 언제든 다시 돌아 올 수 있는 이들이었다. 그것이 장기화되면서 계급운동과 반미운동이란 의식화가 나타났을 뿐이었다. 원래의 근거가 된 생존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면 이는 언제라도 다시 친미주의자나 식민지 시대의 의식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었다. 믿을만한 유능한 리더와 미국이라는 강대한 힘과 생존을 보장하는 유화책은 필리핀 반란세력에 있어서 총칼보다 더 커다란 무기였다.

 

재밌는 점은 이 정책에 성공을 거둔 미국은 동일하게 이를 베트남 정부에 적용했다는 점이다. 미국은 필리핀의 성공적 사례를 통해 베트남에서도 현지 친미정부를 수립하고 막대한 군사 물자 지원과 투자를 통해 그를 지원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이를 통해 미국의 포스트 식민화와 공산주의 반군을 같이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베트남의 민중은 공산주의를 통해 철저하게 반미 민족주의로 의식화되어 있었고 현지정부에는 서구를 제대로 이해하는 정치적으로 유능한 리더도 없었으며 무엇보다도 필리핀 민중이 미국에 가지고 있던 선민화 된 감정들이나 식민지인으로서의 의식들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결과는 참혹했고 그로 인해 한국에 버전 2.0의 현지화된 반공정책을 펴게 되니 참 많은 것들이 연결이 되는 것이다.

 

미국은 1950년까지 6억 5천만 불을 필리핀의 재건과 산업시설의 복구를 위해 지원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도로 등의 인프라 건설과 미국인 사업가들이 투자했던 설비에 대한 보상금액으로 책정되었고 그나마 그것도 내전으로 새로운 투자가 지연되었으니 그동안은 실제적인 복구가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이후 다시 적극적인 투자가 이루어지면서 경제적 축이 기존의 지방의 토지에서 도시의 산업시설로 옮겨가기 시작한다. 물론 이 산업시설이라는 것은 대부분이 미국의 소유자에 의해 소유된 시설이었다. 기존의 토지는 미국 사업가들의 소유도 있었지만 미국 사업가들에게 특정지역이 아닌 농촌의 필리핀 토지를 소유한다는 것은 매력적인 일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에 농업과 토지경제는 필리핀의 지주계급이 소유하고 있었다.

 

그동안 수많은 논란 속에서도 심지어 소작농에 의한 반란까지 있었음에도 토지개혁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필리핀 정치는 토지소유에 자신의 경제적 근거를 두고 있는 지주계급들이 지배적인 정치적 힘을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사이사이나 미국으로서는 이에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필리핀을 철저한 반공주의 국가와 안정된 포스트- 미식민지 국가로 개혁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지주-소작농의 구 식민지 경제체계보다는 소규모의 가난한 자영농과 미국사 업가들에 공장에 일하는 필리핀 노동자들이 더 안정적이고 유용한 국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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