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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마을의 양치기 소년이 소리쳤다.


 “늑대가 나타났다! 늑대가 나타났다!”


마을 사람들은 깜짝 놀라 무기될 만한 것을 들고 헐레벌떡 소년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늑대는 없었다. 소년이 거짓말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로도 소년은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늑대가 나타났다며 거짓 소란을 피웠고 몇 번이나 헛걸음을 한 마을 사람들은 이제 소년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양떼 앞에 진짜 늑대가 나타났다. 소년은 다급히 외쳤다. 


 “늑대가 나타났다! 진짜 늑대가 나타났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누구도 꿈쩍하지 않았다. 소년의 거짓말일 게 뻔하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늑대는 양들을 모두 잡아 먹은 후 사라졌고, 양치기 소년은 그제서야 자기의 거짓말을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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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쩌면 양치기는 외로웠던 건지도 몰라.


사람들을 골탕 먹이기 위해 거짓을 떠벌린 게 아니라, 허술한 거짓을 동원해서라도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는 얘기야.


그렇잖아. 어린 소년이, 말도 안 통하는 양들과, 하루 종일 밖에서 보냈을 거잖아. 


처음에는 신났겠지. 지겨운 공부를 안 해도 되고, 힘든 농사일을 도울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 툭하면 술에 취해 손찌검하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날 절호의 기회였을 수도 있고. 


하지만 기쁨은 잠시였어. 날이 갈수록 양치기는 외로웠거든. 양들을 돌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양들과 친구가 될 수는 없는 거니까 말이야. 당연하지. 아무리 굉장한 동물애호가라도 양들과 속 깊은 고민을 나누거나 농담 따먹기를 할 수는 없는 거잖아. 무슨 타잔도 아니고 말이야. 설령 타잔이라 쳐도, 타잔에게는 제인이라도 있었잖아.


게다가 양들의 식성은 엄청났어. 엄청난 식성은 양치기를 더욱 외롭게 했지. 그러니까 마을 가까운 들에서 풀을 뜯길 때만 해도 양치기는 마실 나온 사람들과 자주 마주칠 수 있었어. 하지만 양들이 살찌는 속도만큼 양치기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거야. 엄청난 식탐으로 마을 가까운 곳의 풀은 이미 초토화가 되었으니까.

 
양들이 풀 뜯는 모습을 보며 흐믓해 하던 양치기는 이제 작작 좀 처먹으라며 양들에게 욕을 퍼부었어. 그리고 더욱 쓸쓸했던 건 하루 중에 그렇게 욕을 퍼부을 때나 자기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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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에-


물론 일과를 마치고 복귀하면 마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어. 하지만 반가워하는 건 양치기뿐이었지. 마을 사람들에겐 양치기의 귀환이 딱히 특별할 이유가 없었거든. 양치기가 밖에서 외로움과 사투를 벌이다 돌아왔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도 없었고 상상할 필요도 없었다는 얘기야. 그러거나 말거나. 


게다가 마을 사람들도 고된 하루 일을 마치고 녹초가 된 터라 양치기의 외로움 따위 안드로메다에서나 벌어지는 일이었던 거지. 그러니 양치기는 더욱 외로워질 수밖에. 


일이 외로운 건 그렇다 치고 그걸 알아주는 사람도 없으니 더욱 외로워지는 거지. 그렇다고 그 외로움을 솔직히 털어놓기도 힘들었어. 원래 외롭지만 외로운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은 거잖아. 관심받고 싶지만 관심받고 싶은 마음을 들키기는 싫은 거고.


하지만 결핍은 욕망을 낳고 욕망은 때로 무모한 용기를 낳곤 하지. 마침내 양치기는 마을 사람들에게 심경을 털어놨어. 너무 힘들다고 말이야. 지루해서 힘들고, 심심해서 힘들고, 외로워서 힘들다고. 


사람들은 멍한 표정이었어. 자기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나 싶어 양치기는 거듭 자세히 설명해줬지. 마을 사람들은 듣다못해 버럭 화를 냈어.


“네가 배가 불렀구나. 온 종일 양들과 노닥거리는 놈이 힘들기는 무슨. 심심해서 힘들고 외로워서 힘들어? 네 눈엔 농사일로 등골 휘는 사람들이 안 보이는 게냐?”


양치기는 전략을 바꿔야 했어. 정공법이 먹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엔 페인트 작전을 동원했지. 페인트칠이 얼마나 재밌는지를 과장 광고해 동네 애들을 모여들게 했던 톰 소여(Tom Sawyer)의 그 페인트 작전 말이야.  


“아줌마, 남쪽 언덕엔 정말 신기한 풀과 꽃이 많아요. 아마 깜짝 놀랄 걸요. 양들이 다 먹어 치우기 전에 빨리 와서 봐야 해요.”


“얘들아, 양은 정말 놀라워. 언뜻 보기엔 다 똑같이 보여도 사실은 저마다 다르거든. 얼굴도 다르고 목소리도 달라. 심지어는 털의 윤기와 굵기도 제각각이지. 정말 신기하지 않아? 내일이 마침 털을 깎는 날이니…”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어. 양치기가 왜 자꾸 신기하고 놀라운 걸 보여주려 하는지는 몰랐지만, 한낱 양치기의 일상에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 없을 거라는 건 잘 알고 있었거든.


외로운 양치기는 더욱 외로워졌지. 이제는 단순히 누군가 곁에 없어서 느끼는 외로움이 아니었어. 이 외로움이 어쩌면 영원히 지속될 지도 모른다는 절망감까지 더해진 외로움이었지. 자기가 외롭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이 찾아올 일은 결코 없을 거란 진실을 깨달았으니까. 마을 사람들에게 중요한 건 양이지 양치기가 아니라는 진실을 깨달았으니까.  


그리고 바로 그때 양치기에겐 이런 생각이 떠올랐어.


‘진실은 내가 원하는 걸 줄 수 없어. 오히려 비웃음만 살 뿐이지. 그렇다면 늑대가 나타났다고 소리치면 어떨까. 아마 그러면 사람들은 만사를 제쳐두고 뛰어오겠지. 물론 날 보러 오는 건 아니겠지만… 뭐 그럼 어때. 적어도 내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내가 마을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줄 수는 있잖아.’


하지만 양치기는 하나 걱정되는 게 있었어.


‘사람들이 왔을 때 늑대는 어딨냐고 물어보면 어쩌지? 어디 가서 늑대를 데려올 수도 없고.’ 


잠시 고민했지만 답은 금방 나왔어.


‘그래! 내가 용감하게 맞서 싸우다 지금 막 쫓아냈다고 하면 되지. 그럼 더욱 칭찬해줄 거야. 어쩌면 큰 상을 줄지도 모르고. 헤헤헤.’


양치기는 상기된 얼굴로 마을을 향해 돌아섰어. 그리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지. 암컷에게 구애할 때 가슴을 부풀리는 비둘기처럼.


"늑대가 나타났다! 늑대가 나타났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허위사실을 유포해 공동체 구성원 대다수를 멘붕에 빠뜨렸던 양치기 소년의 엽기적 사기행각은 어쩌면 이렇게 시작된 걸 수도 있다는 얘기야.  



2.

양치기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양치기가 잔인한 진실을 깨달았던 시점, 그러니까 나의 처절한 외로움이 남들에게는 그냥 아무것도 아니란 걸 깨달았던 바로 그때 말이야. 그때 외부의 위협(늑대)을 이용해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할 수도 있을 거라는 순진한 희망이 스쳤지만, 양치기는 금세 고개를 저었어. 거짓말이 가져다 줄 사람들의 관심을 기대하기엔 당장의 절망이 훨씬 컸기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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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에 대한 절망이기도 했고,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이기도 했지.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혹은 하지 않는 타인에 대한 절망이면서, 그런 타인에 대해 아무 영향력도 없는 자신의 초라함에 대한 절망이기도 했다는 얘기야.
그래서 양치기는 늑대가 나타났다고 소리치고 싶은 욕망까지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 그러고 나면 자신이 더 미워질 것 같아서. 거짓말이 나쁜 짓이라 더 미워질 것 같았을까? 안타깝게도 그건 아니었어. 극심한 외로움은 종종 사람의 눈을 멀게 하거든. 외로움에 눈먼 사람이 선과 악을 가늠해 이성적 판단을 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 얘기야. 


정확히는 거짓말을 해도 존재감을 획득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절망감 때문이었어. 더불어 성공 보장도 못 하는 거짓말까지 동원해 마을 사람들에게 관심을 구걸하려는 자신을 용납하는 게 싫었던 거지. 그깟 마을 사람들이 뭐라고.


‘그래. 마을 사람들이 대체 뭐라고. 진실을 얘기해봐야 진실을 알아들을 귀가 없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무슨 얘기를 한단 말인가. 오직 자기 재산만 중요할 뿐 사람에게는 개뿔 관심도 없는 이들에게 대체 무슨 기대를 한단 말인가. 게다가 나는 그들이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양을 지켜주는 사람 아닌가. 배은망덕한 돈벌레들 같으니라고! 그런 버러지들한테 굽신거리며 애정을 구걸했던 꼴이라니.’ 


그런 생각까지 미치자 양치기는 스스로 뺨을 때려가며 욕을 했지. 


"이런 병신!"


늑대가 나타났다 소리치던 양치기가 허세의 양치기였다면, 지금의 양치기는 아마도 자학의 양치기쯤 될 것 같아. 
허세의 양치기 때만 해도 나름 낭만이 있었을 거야. 허세란 일종의 구애니까. 


누군가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허세를 부리는 거잖아. 잘 보이고 싶어서 혹은 무시 받기 싫어서 자기가 실제 갖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걸 갖고 있는 것처럼 부풀리는 거잖아. 


물론 어리석은 구애기도 하지. 거짓을 이용해 구애를 했다가는 오히려 더 못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외면하는 게 또 허세니까. 


그런 면에서 자학의 양치기는 허세의 양치기보다는 현명했던 것 같아. 허세의 거짓말이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걸 간파했던 거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학의 양치기가 덜 외로워진 건 아니었어. 당연하지. 할 수도 있었던 거짓을 포기했다고 해서 그걸 알아줄 사람은 없는 거니까. 외롭고 싶지 않은 욕망을 포기한 게 아니라 그 욕망을 이뤄줄 수단 중 하나를 포기한 거에 불과했으니까. 


오히려 더 큰 외로움의 덫에 빠져버린 건지도 모르지. 자학의 양치기는 잠시 잠깐 마취제 역할을 해줄 수도 있었던 허세마저 스스로 포기한 셈이니 말이야. 마취를 포기했다고 해서 고통이 사정을 봐주는 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허세를 포기했다고 해서 마을 사람들에 대한 갈증이 저절로 사라지는 건 아니었어. 그 갈증의 크기와 정확히 비례하게 자학했던 거지. 얻을 수 없지만 그래도 얻고 싶어하는 자신이 미우니까 말이야. 


그렇다고 자학에서 끝나는 것도 아니었어. 모든 건 한계가 있는 법이잖아. 자살을 선택하지 않는 이상 자학의 구원은 다른 누군가를 증오하는 거였어. 정확히는 증오의 대상이 자기에서 타인으로 확장되었다고 말하는 게 맞을 거야. 물론 증오의 대상이 자기에서 타인으로 확장되었다고 해서 자기에 대한 증오가 줄어드는 건 또 아니었어. 더욱 강력해졌지. 마치 서로 마주 본 거울처럼 증오의 대상은 무한대로 반사됐던 거야.


왜냐면 증오의 대상을 사랑했던(어쩌면 여전히 사랑하는) 자신이 어딘가에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었어. 자신을 증오했다가, 자신을 증오하게끔 만든 마을 사람들을 증오했다가, 다시 증오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갈구했던 자신을 증오했다가, 다시 또 이렇게까지 자신을 비참하게 만든 마을 사람들을 증오했다가. 


그야말로 증오를 증오로 돌려막기 했던 게지. 그러니 자기 증오와 타인에 대한 증오는 마주 선 거울처럼 무한히 핑퐁을 칠 수밖에. 



3.


그렇게 증오의 뫼비우스 띠에 갇혀 지내던 양치기에게 어느 날 갑자기 양들이 눈에 들어왔어. 


‘그래, 그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그것은 바로 양들….’


양치기는 위험한 생각을 이어가다 이렇게 소리쳤지.


"그 양들을 응징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배은망덕한 마을 사람들에 대한 정의의 심판 아니겠는가!"


물론 그동안 돌본 양들과 정이 없던 건 아니었어. 하지만 증오의 양치기에게는 그보다 탈출구가 먼저였어. 나의 존재감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곳으로 통하는 문 말이야. 


물론 이런 인과관계의 묘사는 양치기가 아닌 작가의 언어일 뿐이야. 당시 양치기에게 탈출구니 존재감이니 하는 관찰자의 언어는 존재할 수 없었어. 존재했다면 칼 대신 펜을 들었겠지. 


당시 양치기는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어. 앞뒤 맥락은 이미 부서진 채 순간의 진심만 있었던 거야. 그래, 잔혹한 범죄를 거대한 운명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순간의 진심 말이야.


"양들한테는 좀 미안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지. 주인들을 잘못 만난 탓이니."


그로부터 얼마 후, 마을 신문에는 이런 기사가 보도됐어.



늑대에게 잡혀간 줄 알았던 방앗간 집 양 사라(3세)가 야산에서 변사체로 발견돼 충격을 주고 있다. 


담당 경찰에 따르면 지난 XX일 오후 8시 15분께 야산에서 약초를 캐던 주민의 신고로 변사체의 신원을 확인한 결과, 치열이 실종된 사라의 그것과 일치했다고.


경찰은 사라의 털과 고기가 그대로인 점, 고문 흔적이 곳곳에 보이는 등 잔인한 수법으로 살해된 점을 미루어 원한 관계에 의한 범죄로 보고 방앗간 집 내연남과 주변 외상 고객들을 중심으로 조사 중이나 이렇다 할 증거를 찾지 못해 수사에 난항을 겪고 있다. 


이에 담당 경찰은 “많은 사체를 봐왔지만 이렇게 잔인한 수법은 처음이다. 사이코패스의 소행일 가능성도 열어두고 수사 중이다.”라고 밝혔다.


한편, 사라를 돌봤던 양치기는 유독 잘 따르던 양이라 예뻐했는데 이렇게 처참한 모습으로 돌아오다니 너무 가슴이 아프다며 오열해 주위를 숙연케 했다. 


마을의 중요 재산인 양에 대한 살해, 강간 등 강력 범죄만 올해 들어 벌써 아홉 번째. 수사당국의 신속하고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는 바이다.



만약 양치기가 범인이었다는 게 밝혀진다면 마을 사람들은 충격을 먹겠지. 그리고 캐물을 수밖에 없을 거야. 대체 왜 이런 배은망덕한 짓을 저지른 거냐고. 


아마도 양치기는 진실을 얘기할 수 없을 것 같아. 대체 왜 그랬던 건지 이 사건의 최초 발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양치기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사랑받고 싶어서요."


사랑받고 싶어서 사랑받고 싶은 사람들의 어린 양들을 강간하고 죽이다니. 이런 말도 안 되는 개소리가 또 어딨겠어. 하지만 진실일 것 같아. 이해할 수 없는, 혹은 이해하기 싫은 진실이겠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건, 사랑받고 싶었다고 해서 사랑을 줄 대상이 특정 됐던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야. 그러니까 양치기가 사랑받고 싶었다고 해서 그게 꼭 마을 사람들의 사랑을 갈구한 건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얘기지. 


물론 양치기는 지금까지 꾸준히 마을 사람들에게 구애를 해왔어. 하지만 양치기가 원한 건 자신의 존재를 향한 주변의 관심 그 자체였을 수 있어. 특정인에게 꼭 사랑받고 싶었던 게 아니라 누구에게든 사랑받고 있는 나를 꼭 확인하고 싶었던 거일 수 있다는 얘기지. 


그렇다면 양치기는 현재 접근 가능한 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구애를 한 것일 뿐 구애의 대상이 꼭 마을 사람들이어야 할 이유는 애초에 없었던 건지도 몰라. 구애의 대상 범위는 얼마든 확장될 수 있을 거라는 얘기임과 동시에 아무리 확장되어도 양치기는 구애 대상을 찾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얘기야. 양치기가 원한 건 자신의 존재감 결핍을 해갈시켜줄 사랑 그 자체를 원한 거지 꼭 구애대상이 정해진 건 아니었다는 얘기야.


배고픔이 꼭 밥으로만 해결되는 건 아닌 것처럼 말이지. 빵으로 해결될 수도 있고 고기로 해결될 수도 있잖아. 하지만 무얼 먹든 어김없이 배고픔은 다시 찾아오는 법이고. 


그래서 양치기가 어린 양들을 죽일 수 있었던 건지도 몰라. 양치기에겐 사랑의 ‘목적에 해당하는 마을 사람들’의 소중한 재산인 양을 죽인 게 아니라, 사랑의 ‘매개’에 불과한 마을 사람들’의 양을 죽였던 거지. 


아무튼.


문제는 양치기가 잡히지 않은 경우겠지. 


양치기는 범죄를 거듭하면서 이제 양들에 대한 한 줌 미안함도 사라진 지 오래야. 양을 고문하고 죽이는 과정에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했거든. 양을 보호하던 순박한 양치기에서 양의 생사를 결정하는 냉혹한 도살자로서의 자신을 말이야. 외로움의 인과관계가 뒤틀리며 새로운 세계가 탄생됐다고나 할까. 물론 어둠의 세계가.


“크크크. 오늘은 대장간 집 양으로 할까, 아니면 세탁소 집 양으로 할까.”


마치 부채도사라도 된 듯, 양치기는 누군가의 운명을 선택하는 시간이 즐거웠지.


“맞다. 얼마 전 방앗간 집 큰딸이 날 놀렸지. 내 몸에선 늘 양의 분내가 풍겨 다가오기 싫다고 말이야.”


참신한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 같아 양치기는 즐거워했어.


“그래, 그럼 그 집 사라의 피를 적신 후 물어보면 어떨까. 오늘은 내 몸에서 대체 무슨 냄새가 나는지. ㅋㅋㅋ”


뿐만 아니었어. 존재감 결핍에 시달리던 양치기에게는 살육의 과정 자체가 매우 달콤한 시간이었어.


‘누구도 내게 뭔가를 부탁하거나 나의 생각을 존중한 바 없었어. 하지만 양들은 달랐지.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양들은 특히 더 달랐어. 동물의 눈이지만 공포와 불안이 가득한 눈망울로 마치 나한테 정중히 부탁하는 것 같았거든. 아니, 애원이란 표현이 더 적당할 것 같아. 제발, 제발 살려 달라고. 그때 나는 멈칫했어. 순간 난생 처음 사랑받는 느낌이 들었거든. 그리고 아주 중요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지. 그래서 가급적 그 시간을 오래 갖고 싶더라고. 죽일 수도 죽이지 않을 수도 있는 그 결정의 시간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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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죽이려 한 양을 살려 보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양이 양치기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시간은 자신이 칼을 쥐고 있는 그때 뿐이라는 걸 양치기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때 양치기에게는 정말 위험한 생각이 떠올랐어. 


‘만약 지금 내게 애원하는 상대가 말 못하는 양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어떨까. 사람의 말과 감정으로 그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면 정말 끝내줄 텐데….’


이제 양치기는 이전의 양치기가 아니었지. 허세의 양치기도 자학의 양치기도 아니었어. 지금의 양치기라면 ‘괴물’, 혹은 ‘사이코패스’라 불러도 이상할 게 없을 것 같아. 


하지만 외로움의 관점, 혹은 존재감 차원에서 양치기의 맥락을 확장해보면 우리가 알던 사이코패스가 적어도 이해 불능의 ‘괴물’은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아.


어쩌면 괴물은 태어난 게 아니라 만들어진 건지도 몰라. 애정결핍에서 생성된 어둠의 존재감이 만들어낸 괴물. 혹은 괴물이어야만 이해가 가능한 관객들이 이해 못 할 괴물로 만든 걸 수도 있고. 







편집장 너부리

트위터 : @newtoil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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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사람들끼리 사이좋게 지내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