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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서 문헌 기록으로 고구려의 동진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번엔 문헌 기록을 뒷받침할 고고학적 근거, 그 중에서도 성곽을 집중해서 파악해보겠다. 글은 최대한 줄이고, 사진 자료를 많이 넣어서 써 보겠다. 백문이 불여일견 아니겠는가? 글쓰기 귀찮아서 그러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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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강지역과 압록강 상류 지역의 고구려 성 위치

 

고구려의 동진과 관련한 구역을 세 곳으로 나누어 보면 임강 지역, 연변 지역, 그리고 연해주로 나눌 수 있다. 임강지역의 성들은 구불구불한 압록강 상류 유역의 평지성들이다. 아무래도 땅이 좁디 좁은 동네다 보니 성들의 규모도 다 고만고만해서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곳들이다. 사실 주목하고 싶어도 현재는 흔적 찾기도 힘들 지경이다. 이 성들이 고구려 초기의 성들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고구려가 아니면 여기에 성 지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고구려가 행인국을 꿀꺽하고 북옥저 쓱싹 프로젝트를 가동할 때를 돌이켜보면, 아무래도 행인국은 이쪽 어딘가에 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어찌 되었건, 이 성들의 주목적은 모텔을 겸하는 거점이라 할 수 있다. 위의 지도에서, 3번 지역으로 나가면 백두산의 험준한 산세를 북으로 우회하여 연변으로 가는 루트가 열린다. 동시에, 13번을 비롯해서 압록강을 따라 백두산 기슭까지 성이 이어지는데, 이는 압록강 수운을 이용한 특급 고속도로라 할 수 있다. 백두산 유역은 초기 고구려에 있어 꽤 중요한 곳이였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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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변의 뗏배. 그 때에도 압록강변에는 이런 배들이 흘러가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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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피전자고성(樺皮甸子古城) 위 지도에서 3번 위치다

 

보시다시피 이 지역의 성의 보존상태가 대략 이러하다. 아니, 대부분 평지성들의 현재 모습이 이러하다. 앞의 강은 압록강이므로, 강 건너는 북한땅이다. 가평의 개천 같은 저 강물을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세상이 되었다니, 아이러니할 따름이다. 물론, 이러한 평지성들은 중국 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북한 지역에서도 있다는 것이 육안으로 보일 정도다. 못 가니까 문제지. 중국 쪽의 성들은 그저 중국 측의 발굴결과를 받아야만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통일 후 이 지역의 북한 성들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가 시급하다. (과연, 통일이...될..읍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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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특혁부성은 이미 거주지로 뒤덮여서 흔적을 찾기 힘들지만,

쌍둥이성인 비우성은 경작지였기 때문에 그나마 성벽의 흔적은 확인 할 수 있다.


온특혁부성은 훈춘시 고성촌이라는 두만강을 끼고 있는 작은 마을에 있다. 보시다시피 마을과 경작지에 묻혀 간신히 흔적만 찾아볼 수 있는 이 성은 전편에서 수차례 언급한 책성의 유력한 후보지이다. 책성을 하나의 성으로 볼 것인가, 여러 성을 포함하는 하나의 지역으로 볼 것인가는 확실한 결론이 없지만, 그 규모로 볼 때 지역 일대의 행정중심지였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바로 옆에 비우성이라는 발해시대의 성이 존재한다. 다만 온특혁부성에서 출토된 기와의 양식이 전형적인 고구려 양식이기 때문에 온특혁부성은 고구려성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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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모습인 데도 불구하고 나름 보호지역이긴 하다.

대체 뭘 보호하는지 모르겠지만..


비우성과 은특혁부성처럼, 길림 지역의 많은 성들이 발해의 성인지 고구려의 성인지 불분명한 케이스가 많다. 주로 출토되는 유물이 발해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때로 고구려의 유물이 출토되거나, 고구려의 양식을 따를 경우 고구려성을 발해가 개축 또는 증축하여 사용한 것으로 이해한다. 몇몇 성들은 발해멸망 이후 금나라도 사용하기까지 했다. 시대에 따라 빈성털이가 빈번했던 지역이 길림 되시겠다. 뭐, 사실 그것은 길림지역뿐 아니라 한반도 역시 그러했던 일이니. 다만 이 평지성들은 행정의 중심지였으니 만큼, 국가가 멸망할 때 자연스레 사라진 것이 당연한 일일 지도 모른다. 우리 역시 일제시기 사용하던 대부분의 동사무소를 이전해왔고, 총독부 건물도 시원하게 날려 버리지 않았던가. 좀 늦긴 했지만. 다만 보다 군사적 목적을 가지고 지어진 성들은 인수인계를 착실히 받아서 비교적 보존이 양호하게 남았다. 뭐, 사람 손이 덜 탔다는 게 가장 주된 이유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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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사진으로 봐도 위성으로 봐도 남아있는 게 없다. 기와편이 나오지 않았다면 누가 저 곳을 성벽으로 보겠는가. 그냥 둑이지. 왜 저런 모양만 남았는고 하니, 토석혼축이였기 때문이다. 몽촌토성을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쉽다. 온특혁부성도 건재했을 때엔 꽤 괜찮은 외관을 갖추고 있었을 테지만, 이제 그 흔적을 찾기에는 너무나 많이 사라져 버렸다. 왕이 수차례 행차해 세력을 다진 곳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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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 지역의 고구려 성곽 분포도


연변 일대의 고구려 성곽들은 온특혁부성을 중심으로 포진되어있다. 온특혁부성이 책성의 유력 후보지로 지목되는 이유는 온특혁부성을 중심으로 방어적 성격의 산성들이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 때문이다. 특히 국내성에서 연변으로 이어지는 백두산 우회루트를 따라서 성곽이 축조되어 있는데, 요동지역의 성들이 중국이라는 명확한 적을 대상으로 한 방어선을 구축했다면 연변지역의 성들은 뚜렷한 방어선이 나타나지 않아 보급지역으로써의 기능을 했다는 가설을 더욱 뒷받침한다.

 

연변지역의 성들은 후일 발해 건국 후 증축되어 보다 주요하게 사용되었다. 고구려 시기 연변의 위치가 후방보급소였다면, 발해 시기에는 경제적 중심지 중 하나로 위상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훈춘지역은 한때 발해의 수도였던 동경이었고, 신라와의 교역을 잇는 중심지였다. 또한 일본과의 교역로도 동경을 거쳐서 나갔다. 이렇게 고구려-발해를 거쳐 사용되어온 성들 중 일부는 훗날 요나라, 금나라가 또 고쳐서 사용하기도 했으니, 고구려인들이 터를 잡아 세운 성곽의 위치들이 꽤 적절했음을 알게 해준다. 

팔련성_위성사진_(구글_어스).jpg발해의 동경 팔련성 위성사진. 팔련성은 온특혁부성과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다

 

압록강 상류에서 연변으로 이어지는 교통로 지역에 위치한 성들과, 연변 지역 내에 있는 성들에 대한 고고학적 근거는 충분하다. 아직 조사결과가 부족하고 또 옛날 것이라 언젠가 보다 면밀히 조사해야하는 지역이지만, 문헌상으로 확인된 고구려의 옥저 공략과 이후 경영에 대한 근거로는 충분하다 할 수 있다. 다만, 전편에서 이 글을 쓰게 한 동기였던 연해주 지역의 고구려 성들은 자취를 찾기 매우 힘들었는데 2004년 동북아역사재단이 러시아와의 합동발굴을 시작한 크라스키노 성에서 그 실마리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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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스키노 성터와 위성 사진

 

크라스키노 성은 발해 염주의 중심지였다. 2011년까지 발굴한 크라스키노 성에서 다량의 발해유적이 확인되었다. 연해주 일대의 발해성들은 이후 금나라가 재활용했는데, 특이하게도 이 성은 발해멸망 직후 폐기되어버렸다. 성을 없애고 주민을 강제 이주해야했을 만큼 발해의 중요한 교역 거점이였음을 알려준다. 염주(鹽州)라는 지명에서 보듯 이 일대의 만은 소금생산지역으로써, 주변의 바다와 염도가 달랐다. 따라서 겨울에도 얼지 않았고, 러시아가 그토록 찾던 부동항이었다. 연변지역에서 두만강을 거쳐 바다로 나가는 것보다, 육로를 통해 크라스키노 성을 거쳐 바다로 나가는 것이 훨씬 시간이 단축된다. 이런 저런 이유로 발해에게 있어 이 성은 몹시 중요한 거점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인천이나 부산만큼 중요한 항구였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나' 인데, 유구 속에서 수습한 목탄의 연대측정 결과가 굉장히 중요하다. 서울대 기초과학공동기기원 AMS 측정에 대한 결과에 의하면, 제5 문화층은 640 A.D., 제6 주거지는 740 A.D.로 나타났다. 또 37구역 역시 제12 분층의 연대가 680 A.D.와 690 A.D.로 나왔다. 즉, 고구려 멸망년도인 668년을 전후해서 급속히 커진 곳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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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스키노성의 위치


이 크라스키노 성은 책성과 몹시 가깝긴 하다. 크라스키노 성을 필두로 동해안을 따라 고구려 성의 특징이 나타나는 발해 성들이 잇따라 확인된다. 다만 어디까지나 고구려 양식과 발해 양식이 혼재되어 있는 성이지, 고구려가 쌓은 성이라 확신하기엔 매우 회의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성들은 아무리 빨라도 고구려 후기, 대게는 멸망 후에 지어진 성이기 때문에 고구려가 북옥저를 쓱싹할 때, 즉 고구려 초기에 연해주까지 진출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 뭐, 사실 크라스키노 성만 보면 책성과 거기서 거기인 거리지만, 크라스키노 성이 고구려계 발해성의 시작점이라는 것을 생각해볼 때 경계가 명확하게 그어지게 된다.


아무튼 고구려 멸망 후 유민들은 빠르게 북상하여 자신들의 집단 거주지를 만들고, 방어를 위하여 성곽을 쌓은 것 같다. 그것도 매우 빠르게. 고구려 멸망이 고구려에 살던 이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였는지, 얼마나 큰 혼란이 일어났는지 추측할 수 있겠다. 고구려 유민이 대거 당나라에 끌려간 것도 이들의 엑소더스를 유발한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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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동해연안의 고구려-발해계 성 분포도



이상을 종합하여 처음 '연해주 일대의 고구려 진출'에 대해서 결론을 내려보면,

 

1. 고구려가 북옥저를 냠냠할 때 두만강 너머 연해주 지역까지 먹었다는 확실한 근거는 없다는 것.

 

현재까지의 발굴 결과를 볼 때 그러한 가설을 뒷받침할 만한 고고학적 근거가 매우 적다. 물론 고구려 사람들이 건너가서 살았을 가정까지 제외할 순 없지만, 적어도 국가적 차원의 영토확보는 아니였던 것 같다. 또한 전편에서 언급하였듯이, 북옥저민의 철기문화인 '단결-크로노프카' 문화가 연해주 지역에서 점차 쇠락하며, 읍루의 '뽈체문화'에게 흡수되는 경향을 볼 때 연해주 지역의 북옥저 계열 사람들은 고구려로 포섭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적절한 것 같다. 물론 이후 고고학적 근거가 새로이 나오면 다시 파악해 봐야겠지만.

 

2. 고구려인들이 연해주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은 고구려 말기였다는 것

 

수-당 전쟁을 거치며 국력이 점차 쇠퇴하던 고구려 사람들이 점차 연해주 지역으로 이동했다는 것이 크라스키노 성의 발굴 결과에서 볼 수 있는 가설이다. 그 이유는 권력 다툼에서 패한 세력의 이탈일 수도 있고, 전란에 휘말린 유민의 이동일 수도 있고, 새로운 전략 지역을 확보하려던 고구려의 국가적 정책일 수도 있다. 이렇게 연해주 지역으로 흘러들어 간 고구려 사람들은 훗날 발해의 건국주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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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니까 우리는 이런 지도 봐도 믿지도, 본 척도 하지 말자...


연해주 지역이 고구려에게 비교적 낮은 관심지역이였던 이유는 지정학적 이유가 가장 크다. 일단 그다지 비옥하다고 볼 수 없는 경작지와, 동해안 지역에 이미 존재한 수많은 항구들은 연해주의 필요성을 떨어뜨리게 한 요인이었다. 다만 호전적이였던 읍루의 존재가 있던 지역이니만큼, 경계는 늘 했겠지만 시간이 흐른 후 고구려와 말갈의 유대적 관계를 생각해볼 때 연해주 지역의 거주민들을 경계해야 할 필요성이 없을 정도로 친화적이였을 가능성도 떠올려 볼 수 있다. 물론 이 같은 가정은 매우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하겠다. 조또 모르겠어서 그냥 성급히 내린 결론이라는 느낌이 들면 그건 독자제현의 기분 탓이다.

 

이상으로 고구려 동진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기록이 희박하고, 고고학적 근거도 빈약하여 앞으로 연구 과제들이 쌓여 있는 부분이라 글이 미흡해질 수밖에 없는 점 변명으로 삼아본다. 그러나 언젠가(언젠간 되겠지 뭐..) 통일이 된다면 압록-두만강변의 고구려 유적을 조사해본다면 보다 더 자세한 과거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기다려보자.



 

참고 및 출처


-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 발해성 발굴 보고서> 동북아역사재단

- <연변 지역 고구려 유적의 현황과 과제> 양시은(동북아역사논총 38호)

- <渤海 建築遺蹟에 關한 南韓의 硏究成果> 이병건(동북아역사논총 16호)

- 공석구 교수님 블로그 http://cafe.hanbat.ac.kr/cafe/19911009/

- 네오님 블로그 http://tadream.tistory.com/

- 이은정의 문화재사랑 블로그 http://blog.joins.com/media/index.asp?uid=dang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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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딴지일보 coc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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