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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30대 초등교사가 아내와 두 살짜리 아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러 구속됐다. 기가 막힌 것은 그의 아내가 경찰에 신고하기 전 수차례 도움을 요청했으나, 학교와 교육청이 이를 방관했다는 사실이다.

 


자상한 선생님인 남편…집에서는 악마였다(연합뉴스)

 

<학교 관계자>

"학생이 관계되는 일은 아니었거든요. 그 당시에는 부부관계의 일이라서 저희도 어떻게 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고…"

 

<교육청 관계자>

"전화가 온 적은 있는 것으로 압니다. 저희들이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닙니다. 학교에서 그런 문제가 생겼으면 모르지만…"


 


나는 이 뉴스 속의 학교와 교육청 관계자의 반응이 그다지 놀랍지 않다. 지금껏 내가 겪어온 학교와 교육청의 모습들이 딱 이러하기 때문이다.

 

‘교육청 배구대회 때문에 학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첫 마디에 ‘교육감님도 관심을 갖고 계신 큰 대회입니다’라고 말하던 교육청이다. ‘제 남편이 초등학교 교사인데요, 집에서 저와 두 살짜리 아이에게 폭력을 휘두릅니다’라고 하소연하는 사람에게 ‘집안일에는 저희가 관여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을 모습이 안 봐도 뻔하다.

 

상식적인 상황이라면, 학교와 교육청이 피해자를 돕고, 그 교사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추가적인 피해를 입지 않도록 발 빠르게 움직였어야 한다. 아동학대를 저지르는 교사라니. 가당키나 한 말인가. 그러나 부끄럽게도 교육계에서 이런 민첩함은 고사하고, 상식조차 기대하기 힘들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 내가 사는 지역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다 해도 같은 결과가 있었을 것이다.

 

지난 글에서도 주장했다시피, 관성에 젖어, 하던 대로만 하는, 극도로 경직된 교육계가 변화하려면 교사와 학생들뿐 아니라 학부모와 시민들의 교육에 참여해야 한다. 특히 학부모는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을 하지 못하게 하는 힘이 존재한다.



극성맞은 학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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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학부모’라는 이미지가 주는 느낌은 어떤 것들인가? 극성맞다, 자기 자식밖에 모른다, 우악스럽다 등등이다.

 

언론이 다루는 학부모의 모습, 심지어 학부모 자신들이 말하는 다른 학부모들의 모습도 어째 다 상식과 교양이 없고, 무례하고, 이기적인 모습들뿐이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리는 심리적 쏠림 현상은 당연하지만, 이건 좀 심하다.


학부모들이 모조리 극성맞고, 우악스럽고, 이기적이고, 상식 밖이고, 교양이 없을까? 그럴 리가. 적어도 내가 만난학부모들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학교에 참여하고 목소리를 내면서 학교가 잘 돌아가게 된 경험이 더 많다.

 

함께 근무한 교사 중 자신의 종교를 학생에게 강요하고, 아침 시간에 학생들을 데리고 기도를 한다거나, 다른 종교를 비하하는 등 종교 편향적인 발언과 행동을 하는 교사가 있었다. 그의 기행은 한 학부모가 전화로 항의하는 바람에 알려졌다. 몇몇 고학년 교사들이 학생들을 잡는답시고 엎드려뻗쳐와 같은 얼차려를 주고, 학생들 마음에도 없는 반성문을 쓰도록 강요한 일도 학부모들의 항의로 알려지게 됐다(학교에서 남발하는 ‘학생들을 잡는다’는 표현은 교사들이 하루바삐 폐기해야 한다. 학생들은 쥐가 아니다).

 

위 사례들 모두 학부모들이 가진 ‘종교의 자유’, ‘인권’, ‘비폭력’이라는 진보적인 가치를 보여준 예다. 사회에 만연한 군대문화, 식민 시대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교육에 대해 건전한 비판의식을 가진 학부모들도 많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째 이런 좋은 사례들은 ‘어떤 애 엄마가 자기애랑 사이가 안 좋은 애를 다른 반으로 보내버리라고 했다더라’는 극단적으로 이상한 학부모들의 사례만큼 진지하게 논의되지 않는다.

 

내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이런 사례들은 교사나 학교의 관심을 강력하게 붙잡지도 못했고, 이를 발판삼아 한 단계 성숙하려는 움직임도 없었다. ‘교사들이 일부러 그러는 건가?’라는 의심을 품었던 적도 있지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잘 살펴볼수록 학교뿐만 아니라 사회전체에 ‘좋은 학부모’에 대한 프레임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해, 우리 사회에 학부모에 대한 건전하고, 책임감 있고, 공정하고, 헌신적인 모습의 이미지, 프레임 자체가 없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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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진실에 입각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프레임’을 통해 생각한다. (참고: 조지 레이코프 '코끼리는 생각하지마') 우리 사회에 ‘극성맞은 학부모’ 개념만 존재하다 보니, 교육에 헌신적이고 진보적인 학부모들이 주장하는 신념과 가치는 ‘극성맞은 학부모’ 프레임 밖으로 튕겨져 나간다.

 

학부모들이 건전한 항의와 생산적인 제안을 해도 사람들 머리 속에 남는 건 오로지 ‘극성맞게 전화를 걸어 학교와 교사를 달달 볶는 학부모’의 모습뿐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프레임

 

교권문제와 교실붕괴의 근본원인은 교육계의 총체적 무능, 교사들의 전문성 부족에 있다. 교육이 ‘삼년지소계’라는 말이 있을 만큼 정신없이 바뀌는 대학입학전형은 교육계의 무능함을 보여주는 처절한 예다. 현재의 교육대학 시스템은 교육에 필요한 지식, 성찰, 특히 최소한의 현장 경험도 갖추지 못한 학생들을 임용시험만 통과하면 무방비 상태로 현장으로 던져놓고 있기 때문에 학교에서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수없이 발생한다.

 

이런 진실을 마주할 용기도, 의지도 없는 교육계와 현재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최선인 보수 세력이 만들어낸 프레임이 ‘못된 아이들’, ‘당하는 교사’, ‘극성맞은 학부모’다. 마치 모든 잘못이 아이들, 교사, 학부모들에게 있는 것처럼 말이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 ‘극성맞은 학부모’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극성맞다는 것은 지나치게 적극적이라는 뜻이다. 이 ‘지나치게 적극적’이라는 기준은 누가 정한 것인가? 예를 들어, 일부 교사들은 초등학교 입학 전에 한글을 못 배우고 올라온 아이들의 부모에게 ‘무책임’하다고 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지식을 가르치는 일의 책임은 학교에 있다. 무책임한 건 가르침의 의무를 가정으로 떠넘기는 교사이고, 교사들이 쓸데없는 서류 속에 파묻혀 있게 하는 학교와 교육부다.

 

어떤 이들은 아이의 머리를 때리지 말라고 요구하는 부모에게 ‘극성맞다’고 한다. 하지만 학교에서 아이가 신체적 폭력을 당할 때 가만히 있는 것은 내 아이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학대를 방관하는 일이 된다. ‘지나친 적극적임’, 이 말의 반대인 '무책임함'의 주체와 맥락들이 완전히 뒤바뀐 것이 아닌가?

 

학부모들이 극성맞다고 주장하는 세력들이 내심 하고 싶은 말은 ‘우리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참견하지 말라’, ‘뭣도 모르는 당신들은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 아닌가?

 

학부모는 아이 맡긴 죄인이 아니다. 학교를 비롯한 사회의 모든 인프라는 학부모가 낸 세금으로 이루어진다. 학부모는 자녀의 교육에 반드시 참여할 의무와 권리, 책임이 있다. 그래서 누군가 학부모들에게 학교 일에 왜 이리 극성을 떠느냐고 말하면,

 

‘난 학부모로서 내 아이가 학교에서 어떻게 공부하고, 어떤 밥을 먹고, 어떤 환경에서 살아가는지 알고, 보살피고 싶다. 학부모와 교사가 협력해서 많은 아이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다면 좋지 않겠는가!’

 

라고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교장들이 현장으로 나오라

 

건전한 공동체를 위해 쌍방향 의사소통은 필수다. 학교는 더 많은 정보를 공개해야 하며, 교사와 학부모는 근본적으로 ‘협력자’ 관계를 맺어야 한다. 하지만 교사 혼자 수십 명의 학부모들을 상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교사가 확고한 원칙과 철학을 가지고 있더라도 학부모들의 의견이 워낙 다양해 힘에 부칠 수 있으니 말이다.

 

또 이상한 사람들이 도처에 있다 보니, 가끔은 정말 개념을 말아 자신 학부모들도 분명 나타난다. 그래서 학부모들과의 관계 맺기에 교감과 교장과 같은 관리자들은 함께 해야 한다.

 

미국의 교육체제도 우리만큼 많은 문제를 안고 있지만, 그래도 그중 부러운 점이 있다면 총 책임자인 교장이 학생지도와 학부모 상담에 직접 참여한다는 점이다. 학생들 간에 다툼이 있거나, 학생이 수업 중 문제행동을 보일 때 교장이 직접 개입해서 지원을 하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학생과 학부모들이 자연스레 교장실을 방문한다.

 

사실 많은 나라들이 그렇다. 한국은 교실에서 문제가 일어나면 일단 교사의 탓이 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학급에 문제가 있을 때 교사들이 관리자에게 문제를 상의하고, 도움을 요청하기가 몹시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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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시 무겁게 느껴지는 이곳

 

성과급제도 따위 뒤에 숨어 교사들 줄 세우기나 하지 말고, 관리자들이 모든 현장의 전면에 나서야 한다. 핀란드 교장들처럼 직접 수업하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일 년에 단 몇 분이라도 교사와 학생들이 어떻게 수업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제대로 들여다보길 바란다. 뒷방 마님처럼 앉아 있다가 수학여행 업체 선정할 때나 나타나서 감 놔라, 배 놔라 훈수질 하지 말고. 관리자로서 본인들의 역할이 무엇인지 제발 깊은 고민들을 해 주시길.

 


학부모는 교육의 협력자다

 

지금 내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는 급식실 문제로 시끄럽다. 수년간 방치된 문제가 학부모들의 항의로 인해 수면위로 불거졌다. 일부 교사들은 ‘주객이 전도됐다’며 학교를 시끄럽게 하는 학부모들을 비난하지만 사실 우리 학교 급식 문제를 이 지경까지 몰아간 건 쉬쉬하며 몇 년간 미봉책으로만 대응한 교사와 관리자들이다.

 

한 학부모에게 왜 교사들에게 연락하지 않았는지 물었더니, 학부모들은 교사들과 연합하려 했지만 학교 측에서 막았다며, 아무래도 팔은 안으로 굽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교사들은 빼고 본인들끼리만 해결하는 걸로 합의를 봤다고 한다.

 

팔이 안으로 굽는 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학교의 모든 일은 ‘학생 쪽으로’ 굽으면 된다. 싸울 일이 있으면 싸우더라도 모든 갈등 해결의 목표를 ‘학생의 안전과 성장’에 놓는다면, 서로 존중하는 문화 속에 교사와 학부모는 얼마든지 소통할 수 있다.

 

협력자가 되어야 할 사람들이 손을 잡지 못하도록 하는 힘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직시해야 한다. 선량한 교사와 학부모들이 이렇게 많은데 왜 여전히 학교는 이상한지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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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coco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