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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04. 12. 금요일

너클볼러

 

 





 


지난 시간 선수


천하장사 이봉걸


 




 

 

투르 드 프랑스 Tour De France


매년 프랑스 파리에선 두 가지 죽음의 랠리가 화려하게 벌어진다. 하나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파리를 출발해 지중해를 건너 사막을 헤치면서 3주간 12,000km~14,000km를 달리는 파리-다카르 랠리(정식명칭은 Raid Marathon Pioneer Paris Dakar)고, 또 다른 하나는 7월, 프랑스 인근 국가(ex 네덜란드)에서 시작해 3주간 매일(딱 이틀 쉰다) 5시간 이상씩 총 3,600km를 달려 파리로 입성하는 장거리 자전거 경기인 투르 드 프랑스(Tour De Franc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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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투르 드 프랑스 코스

 


 

1979년 창시자인 프랑스의 모험가 티에르 사빈을 비롯, 지금까지 레이서 40여명의 목숨을 빼앗아간 다카르 랠리를 두고 사람들이 '죽음의 랠리'라 부르는 것처럼, 200여명의 참가자 중 100여명 남짓밖에는 완주하지 못하는, 수명의 선수들이 경기 중 사망한 투르 드 프랑스를 두고 사람들은 '죽음의 레이스'라 부른다.



다카르 랠리가 내연기관을 장착한 자동차를 사람이 운전하는 컨트롤의 레이스라면, 투르 드 프랑스는 페달과 크랭크로 구성되어 있는 동력기관(사이클)을 사람이 직접 작동시키며 운전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개입이 훨씬 더 큰 극한의 레이스라 할 수 있겠다. 투르 드 프랑스가 인간의 한계를 경험, 확인하는 레이스라 불리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원래 투르 드 프랑스는 최근 출발지를 인접국가로 하는 경우(2010년의 경우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출발, 프랑스 파리까지 총 3,642km)도 있지만 프랑스 파리를 출발해 인접국가를 돌아 다시 파리로 입성하는 코스가 주를 이뤘다. 1903년 프랑스 신문사 L'Auto의 공동창립자였던 Henri Desgrange가 처음으로 개최한 것이니 당연한 것.

 

 

3000~4000km, 그러니까 선수들은 서울과 부산을 4-5회 정도 왕복하는 것과 맞먹는 거리를 페달을 밟으며 쉼 없이 달린다. 잘 포장된 평지는 물론, 자갈길에, 해발 2000m가 넘는 알프스와 피레네 산맥의 가파른 오르막길에서조차도 짧은 찰나의 쉼조차 선수들에게 허용하지 않는다. 3주 내내 평균시속 4-50km를 유지하며 5-6시간 동안 페달을 졸라게 돌려대는 것이다. 게다가 가만히 서있기도 뜨거운 7월에 열린다. 타짜의 고니 말처럼 애초에 '쫄리시면 뒈져야 하는' 레이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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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관.리

 

 

 

인간의 한계를 마주하겠다는 기질은 투르 드 프랑스에서 종종 드라마가 펼쳐지는 이유가 된다. 선수들은 마빡이 깨지고, 어깨가 탈골 되고, 손목이 부러져도(2012년 토니 마틴은 1구간에서 낙차 해 왼쪽 손목이 부러졌는데도 9구간까지 마쳤다), 4-50km로 달리는 사이클에서 낙차 해 별의별 사고가 나더라도 당연하다는 듯 레이스를 포기하지 않는다.

 

 

교통사고를 당해 한쪽 다리가 3cm가 짧아 사이클선수로는 치명적인 신체조건에도 불구하고 우승을 거머쥔 이탈리아의 마르코 판타니도 그 예 중 하나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한계를 마주한 인간의 순수한 의지라 표현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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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판타니

 

 

 

하지만 그 과정은 한계와 의지라는 단어만으로 모두 표현되지 않는다. 투르 드 프랑스가 유럽에서 F1에 버금가는 인기(현장에만 천만 명 정도의 관객이 찾고, 수백 만 명이 TV 앞에 앉아 시청한다)를 얻게 되면서, 광고수입도 그에 비례해 기하급수적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수많은 기업의 후원으로 인해 선수들의 유니폼, 시상대는 온갖 로고들로 도배된다. 도배가 꼼꼼해질수록 상금도 오른다. 총상금액 25억, 개인우승자의 경우 3-4억에 이른다. 수십 팀, 수백 명의 플레이어를 초청하고 운영하는 비용이 400억 원에 이른다. 그렇게 투르 드 프랑스는 유럽에서 인기 쩌는 거대 사업이 되었다.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4-5000km짜리 레이스가 거대한 사업이 되면서 인간의 한계와 대면하고자 하는 선수들 역시 늘어났다. 1903년 1월, '지구상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사이클 대회인 투르 드 프랑스'라고 일간지 마빡에 걸고 거창하게 시작을 알렸으나 참가자는 고작 15명, 상금을 높이고, 7월로 늦춘 결과, 겨우 60명을 모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투르 드 프랑스의 2012년 99 시즌엔 총 22개팀 198명의 선수가 참가했다. 그것도 엄격한 기준에 엄선된 초청된 선수들이다. 198명 중 완주한 선수는 153명, 완주를 포기한 선수들 중 상당수는 낙차로 인한 부상자였고, 일부는 기존의 병이나 통증으로 인해 포기한 선수였다. 물론 파이방 칸첼라라(Fabian Cancellara)와 같이 둘째의 출산을 지켜보기 위해 경기 도중 돌아간 선수도 있다.

 

 

그리고...

 

 

지난해인 2012 시즌에도 여지없이 금지약물 스캔들이 발생했다. 프랭크 쉴렉은 소변 샘플에서 금지약물인 시파메드(Xipamide)가 발견되어 자진해서 경기를 중단했고, 레미 그레고리오(Remy Di Gregorio)는 호텔에서 휴식 중 경찰에게 약물복용으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3개월 뒤,

 

 

2012년 10월 22일. 세계사이클연합인 UCI는 미국반도핑기구(USADA)의 랜스 암스트롱에 대한 약물 사용 증거와 요구에 응하며, 랜스 암스트롱의 1998년 8월 이후의 모든 기록을 삭제, 이후로 UCI(국제사이클연맹) 관련 사이클 대회와 업종에 종사할 수 없음을 발표하였다. 이 발표로 랜스 암스트롱의 투르 드 프랑스 7연패(1999~2005)라는 전대미문의 기록은 박탈당했고, 17년간 사이클 팀에 후원해온 업체에선 '이제 끝이다'고 발표하며. '프로 사이클링은 심각한 상태이며, 이것이 가까운 미래에 회복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3개월 뒤,

 

 

2013년 1월 15일 랜스 암스트롱은 오프라 윈프리와의 인터뷰에서 '투르 드 프랑스에서 우승하기 위해 약물을 복용했다'고 시인했다. 현역 초기 시절 '무모한 질주자'란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페달을 때려 밟은 선수였던 그다. 사이클의 '사'에도 관심 없던 미국의 사이클 선수로서 국민영웅으로까지 불리기도 했다.

 

 

어디 그뿐인가. 96년, 25세의 나이에 암이 뇌까지 퍼진 고환암 진단을 받고 뇌조직 일부를 도려내는 대수술을 받은 뒤 99년, 다시 지옥의 레이스에 복귀에 2005년까지 7연패 달성. 실력에 인간승리라는 서사까지 덧붙여 선수 자신이 곧 투르 드 프랑스가 되버린 영웅 중의 상영웅이었던 그다. 레이스에 참가한 모든 선수가 '듣보'가 될 수 밖에 없게 했던 그다.

 

 

그런 그가 약잔치의 주최자였단 사실을 실토한 것이다. 한때 미국의 스포츠 영웅이었던 그는 졸지에 미국인이 가장 싫어하는 스포츠 스타가 되었다(포브스지 조사. 2위는 풋볼 선수 만티 테오, 3위는 타이거 우즈). 그렇다고 그가 영웅으로 살아왔던 시기마저 도려 낼 수는 없는 터, 약물 복용을 실토하던 랜스 암스트롱의 모습을 보며 그 영웅으로 인해 가려져 있던 2인자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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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약물(EPO)를 복용했나요? '예'

 

 




2인자


2003년 투르 드 프랑스. 허구한날 1위인 랜스 암스트롱 덕에 만년 2위였던 얀 울리히는 이번 레이스 역시 줄곧 2위를 달리고 있었다. 그들이 맞이한 15구간은 해발 2000m, 총거리 159.5Km로 피레네 산맥까지 진행되는 일명 '고통의 레이스'.

 

 

이 지긋지긋한 오르막길을 암스트롱이 1위로, 얀 울리히가 15초 차이인 3위로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랜스 암스트롱은 관람하던 아이의 가방에 걸려 넘어지고, 뒤따라오던 선수가 함께 넘어지는 사고가 발생한다.

 

 

결국 결승점을 8-9km 앞둔 상황에서 얀 울리히가 넘어진 두 선수를 살짝 비켜 1위에 오르는 극적인 순간. 동시에 만년 2인자를 응원하던 팬들이 환호하던 바로 그 순간. 얀 울리히는 페이스를 줄이며 랜스 암스트롱을 기다린다. 뒤늦게 선두그룹에 합류한 암스트롱은 폭주한 에바 초호기 마냥 페달을 밟아 결국 1위를 차지했고, 암스트롱의 선두 진입과 함께 동시에 페이스를 올린 얀 울리히는 2위를 기록했다.

 

 

사람들은 이 드라마틱한 광경에 '위대한 멈춤'이란 닉을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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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진 1등과 2등, 간신히 피한 3등, 얀 울리히

 


 

가장 아쉬워했던 팬들은 다름아닌 얀 울리히의 고향인 독일 팬들이었다. 독일 팬들은 얀 울리히가 미국의 암스트롱을 재껴주길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물었다.

 

 

'도대체 왜 기둘리고 있었던 겨?'

 

 


'나는 타인의 실수로 우승하고 싶지 않았고, 오직 내 실력으로 우승하고 싶었다'

 

 

'사고로 우승자가 결정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페어플레이는 자전거 경기에 있어서 자전거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사실 2001년 투르 드 프랑스에선 코스를 이탈해 넘어진 얀 울리히를 랜스 암스트롱이 기다렸었다(물론 우승은 랜스 암스트롱의 몫이었다). 얀 울리히는 자신을 기다려준 암스트롱에 감사를 전했고, 기다린 이유를 묻는 기자들에게 암스트롱에 요렇게 말했다.

 

 


'누가 사고를 당하더라고 사이클에서는 추월을 하지 않는 게 신사적인 행동입니다.'

 

 


이 두 일화로 랜스 암스트롱은 스포츠 스타를 뛰어넘는 영웅이 되었다. 그런 탓에 얀 울리히는 랜스 암스트롱의 그늘에 가려 만년 2인자의 설움에 시달리지 않았다. 얀 울리히 역시 2인자가 아닌 스포츠맨쉽의 표상이 된 것이다.

 

 

하지만 1인자가 너무나 강력했던 터, 1인자의 약물 복용이라는 잘못 쓰인 역사의 이면에 감춰져 있던 2인자의 능력과 슈퍼 파워를 마구 끄집어 내보고 싶었으나 얀 울리히는 암스트롱보다 6년 앞선 2007년, 약물복용 혐의로 이미 은퇴한 뒤였다.

 

 

에라이...




얀 울리히(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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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울리히 (Jan Ullrich)

 

 

2007년 2월 27일. 랜스 암스트롱이 아메리카 영웅이었듯 한때 F1의 황제 미하엘 슈마허를 뛰어넘는 국민영웅이었던 얀 울리히의 은퇴기자회견은 차분하고 어두웠다. 얀 울리히는 그 자리에서 은퇴를 공식 발표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이클 선수로서 내 인생은 그 순간 무너졌다. 

왜 내가 레이스에 나설 수 없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

 

"나는 오늘 프로 사이클리스트로서의 경력을 마감하려고 한다. 

나는 사이클리스트로서 단 한번도 속임수를 쓴 적이 없다."

 

 

랜스 암스트롱은 1999-2005년까지(그때 당시엔) 기적적인 7연패 달성 후 투르 드 프랑스를 떠났다. 당연 모든 팬들의 시선은 독일의 사이클 영웅, 만년 2인자, 사이클 계의 살리에리(베토벤의 라이벌)인 얀 울리히에게 향했다.

 

 

2005년 얀 울리히는 '컨디션은 좋지 않지만 7연속 우승을 기대하고 있다'며 출사표를 던진 랜스 암스트롱을 향해 '랜스의 7연패를 바라는 팬들도 있겠지만, 그것을 막아내기를 기대하는 팬들도 있다'며 의지를 불태웠으나 3위에 그치고 말았다.

 

 

랜스 암스트롱은 말하자면 넘사벽 중의 넘사벽이었던 것이다. 현실이 그러니 얀 울리히 역시 넘사벽이 떠난 투르 드 프랑스의 우승 생각이 절실했다. 하지만 2006년 투어 시작 전 Operacion Puerto라 알려진 약물복용사건(당시 프리메라리가의 스타들이었던 지단, 호나우지뉴, 에투, 라울 등에게도 약물을 공급했다는 폭로로도 유명했던 에무페미아노 푸엔테스라는 브로커가 약물을 공급했다고 한다.)에 연루되어 소속팀 T-MOBILE로부터 출전 금지 조치 당했다.

 

 

결국 얀 울리히는 은퇴를 선택했다. 같은 사건에 연루되었던 이반 바소가 이탈리아 사이클링 연맹으로부터 혐의 없음 판정을 받고 디스커버리팀과 계약한 것과는 대조되는 행보였다. 스스로 억울함을 호소했고, 그를 사랑했던 팬들은 함께 억울해하며 그의 퇴장을 침통해 했다.

 

 

그는 그렇게 떠났다.

 

 

시간을 거슬러 1997년, 당시 독일 국민들은 살짝 허전했다. 테니스 슈퍼 스타 보리스 베커와 슈테피 그라프가 떠난 공백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었다. 1980년대 심각한 경제위기에 놓였던 서독 국민들에겐 그들의 불안을 잠식시켜줄 슈퍼스타가 필요했고, 때마침 보리스 베커와 슈테피 그라프라는 테니스 스타가 등장한 것이다. 이 둘의 등장에 언론은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무 잘못 없이 IMF를 정통으로 후려맞은 국민들의 허탈한 민낯을 '찬호박'과 '세리박'으로 메이크업 했듯 최고인기종목이었던 축구로도 때우지 못한 서독 국민들의 뚫린 슴가를 두 명의 남녀 테니스 스타가 때워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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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피 그라프

 

 

하지만 영원한 것이 없듯 보리스 베커가 떠났고, 슈테피 그라프도 부상의 늪에 빠지자 그들로 인해 채워져 있던 뜨거운 슴가는 썰물 빠지듯 또다시 허전해지고 있었다.

 

 

바로 그때 23세의 얀 울리히가 등장한 것이다.

 

 

1997년 7월 25일, 투르 드 프랑스에 참가한 얀 울리히의 우승이 확실시되자 독일언론은 일제히 대대적 보도에 나섰다. 독일 선수로서 투르 드 프랑스 첫 우승이었으며, 개최국이자, 동시에 라이벌 국가인 프랑스의 리샤르 비렝크를 따돌린 우승이었다.

 

 

프랑스를 여행 중이던 독일인들이 레이스의 종착지인 파리의 개선문으로 향해 얀 울리히의 우승을 축하했고, 언론은 테니스 스타가 떠난 빈자리를 새로운 사이클 스타로 채워 넣었다. 독일인들의 슴가엔 '얀 울리히'라는 이름의 밀물이 거침없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슈퍼스타의 등장이었다.

 

 

다음해(1998년) 투르 드 프랑스 2위. 얀 울리히는 반짝 스타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했다. 하지만 1999년, 투르 드 프랑스에 랜스 암스트롱이 돌아왔다.

 

 

복귀 후 랜스 암스트롱은 2005년까지 단 한번도 우승을 다른 선수에게 양보하지 않았다. 투르 드 프랑스의 모든 것이 그의 이름을 통해 보도되었다. 그렇다고 얀 울리히가 양지의 1인자에 철저하게 가린 응달의 2인자는 아니었다. 2001년엔 랜스 암스트롱이, 2003년엔 얀 울리히가 서로를 기다린 일화 등을 통해 1인자를 빛내주는 각광받는 2인자가 되었다.

 

 

시카고 불스의 스코티 피펜이 한창도 교수(전 SBS 농구해설위원)에 의해 늘 마이클 조던에 가려지지 않을 수 있었듯 말이다. 독일국민들 역시 2인자가 아닌 스포츠맨쉽의 표상으로 얀 울리히를 칭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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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통산 투르 드 프랑스 우승 1회, 준우승 5회, 3위 1회, 4위 1회, 에스파냐 투어 1회 우승,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개인도로 부분 금메달까지... 랜스 암스트롱의 이름만 걷어내면 온통 얀 울리히의 이름으로 도배되고도 남을만한 성적이었다.

 

 

그런 탓에 얀 울리히는 2003년 독일스포츠 기자들이 선정한 올해 최고의 남자 선수에 선정되기도 했다. 2위는 F1의 황제 미하엘 슈마허, 5위는 NBA에 진출한 댈러스 메버릭스의 독일병정 '덕 노비츠키'였다. 2005년 투르 드 프랑스를 끝으로 랜스 암스트롱이 떠나자 얀 울리히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될 것이라고, 그도, 팬들도 예상했다.

 

 

하지만 예상은 비극적으로 빗나갔다.




약물의 레이스

 

 

얀 울리히는 은퇴를 발표한 자리에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하지만 그의 약물 소동이 처음은 아니었다. 투르 드 프랑스의 첫 우승으로 순식간에 국민 영웅이 되었던 1997년 랠리 참가 직전인 1996년. 아틀랜타 올림픽 출전을 앞두고 약물검사에 양성반응을 보여 올림픽 출전이 무산되었다는 스캔들이 터졌다.

 

 

물론 얀 울리히는 약물 검사를 받은 적도 없고, 올림픽은 '투르 드 프랑스나 올림픽 중 하나를 택하라'는 독일 사이클 연맹의 권유에 따른 것이라 말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2002년엔 무릎 수술을 받은 뒤 재활 과정에서 암페타민을 복용한 것이 문제가 돼 6개월 자격정지를 받기도 했다. (기록향상이 아닌 재활을 위한 약물복용이라는 점이 인정돼 제재가 풀림) 결국 2006년, 다시 붉어진 약물사건으로 인해 결국 은퇴를 선언한다.

 

 

얀 울리히의 팬들이 그를 추앙했던 이유는 바로 편법에 의존하지 않는 페어 플레이였다. 팬들에게 그의 은퇴가 아쉬운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가 호소한 억울함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일까, 불명예와 오해가 뒤섞인 은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은퇴 후 곧바로 바닥으로 곤두박질치지 않았다. 은퇴 후 자동차 레이서로의 제 2막을 열어 재꼈고, 결혼도 했다. 늘 2인자일 수 밖에 없었던 현역 시절이나, 은퇴 뒤나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사실확인은 몇 년 뒤에나 가능했다.

 

 

2012년 9월, 국제스포츠중재재판소의(CAS)는 얀 울리히에 대해 금지약물복용을 이유로 2005년 투르 드 프랑스 동메달을 박탈했다. 동시에 이미 은퇴한 선수에게 2년간 투르 드 프랑스의 출전을 금지시켰다.

 

 

그 뿐 아니었다. 2010년 투르 드 프랑스 우승자였던 스페인의 사이클 스타 알베르토 콘타도르에게도 유죄 판결, 2010년 투르 드 프랑스 우승을 박탈했다. 그리고 일년 뒤인 2013년 슈퍼 영웅 랜스 암스트롱이 약물복용을 시인하게 된다. 투르 드 프랑스 7회 연속 우승이라는 기념비적인 업적에 맞먹는 위대하고 악랄한 약물복용이 등장한 것이다.

 

 

인간의 한계를 시험한다는 투르 드 프랑스의 약물 스캔들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다. 1988년 우승자 페드로 델가도(스페인)는 도핑 양성반응이었으나 당시 그의 소변에서 검출된 프로베네사이드가 금지약물이 아니라서 처벌받지 않았다. 1998년 우승자 마르코 판타니(이탈리아)는 적혈구 수치를 높여 폐활량을 증가시키는 금지약물 EPO를 사용했다는 혐의로 대회에서 탈락했다. 2004년에는 제2의 랜스 암스트롱으로도 불리었던 타일러 해밀턴(미국)이 도핑 양성반응 판정으로 2년간 출전 정지 당하기도 했다.

 

 

수많은 선수들이 인간의 한계를 테스트하기 위해 3주간 쉼 없이 페달을 밟아야 하는 420억짜리 레이스를 진행하고 한편에선 또 다른 많은 선수들이 한계를 극복하고 우승하기 위해 약에 의존해왔던 것이다. 약물에 의존했던 수많은 선수들이 최고라는 명예와 부를 누리는 동안 이를 악물고 한계를 향해 페달을 밟은 수많은 선수들이 '듣보'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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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표는 랜스 암스트롱이 7연패를 했던 1999-2005년도까지(위로부터 7째 줄까지), 맨 마지막은 알베르토 콘타도르가 우승했던 2010년도의 투르 드 프랑스의 1-10위까지 선수 중, 약물에 관련된 선수들을 검은색으로 표시한 것이다.

 

 

랜스 암스트롱은 2013년에 약물복용이 공식화되어 2011년에 작성된 이 리스트엔 하얀색으로 되어있다. 랜스 암스트롱을 포함해 약물에 관련한 모든 이들을 거둬낸 뒤 약물과 무관한 선수들을 우승자로 올려보면 이렇다.

 

 

Fernando Escartin (ESP) --  3위 / 1999년



Fernando Escartin (ESP) --  8위 / 2000년



Andrei Kivilev (KAZ) --         4위 / 2001년



Jose Azevedo (POR) --        6위 / 2002년



Haimar Zubeldia (ESP) --      5위 / 2003년



Jose Azevedo (POR) --        5위 / 2004년



Cadel Evans (AUS) --          8위 / 2005년



Andy Schleck (LUX) --         2위 / 2010년

 

 

 

약물복용을 시인하믄 뭐하나. 약물영웅들에 가려졌던 이들이 갑자기 '짠'하고 나타나 영광을 누리게 될 리도, 약물우승자의 이름을 걷어낸 공란에 그들의 이름이 올라갈 리도, 약물우승자들이 뱉어낸 상금이 다시 돌아올 리도 없다. 우승자였을지도 모를 이름들은 그저 수많은 참가자 중 하나로 남을 뿐이다. 하지만 우승자로 박수 받아야 했을지도 모르는 이름들이다. 동시에 이 늦은 야밤에 노가다를 해가며 소개하고 싶었던 선수들이기도 하다.

 

 

영국의 BBC 방송은 랜스 암스트롱이 7연패하던 당시, 3위 안에 든 선수 중 금지약물을 복용하거나 추문에 휘말리지 않은 선수는 단 한 명뿐이라 밝혔다. 단 한 명은 1999년 대회에서 3위를 차지한 Fernando Escartin (스페인)을 말하는 것일 테다. 사실 우리가 기억해 줘야 할 이름이 그뿐이 아니다. 적어도 8명이다. 꼼수 없이 한계를 마주했던 이름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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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rnando Escartin

 

 

 

그러고 보면 스스로 한계라 말하고, 스스로 한계를 극복했다고 말하는 것부터가 인간의 오만함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편집부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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