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3.30.토요일
필독
오랜만에 휴가를 다녀왔다. 여행기라는 게 그렇다. 그 자체가 개인이 경험한 소소한 사건과 풍경들의 컴필레이션에 불과한 것이라, 이게 기삿거리가 되는지, 주제를 어떻게 잡아야 할 지 판단하기가 애매하다.
그러나 쓰기로 했다. 여행을 갔다온 기자가 업무에 가장 빨리 복귀하는 방법이 바로 여행기 원고 마감이 아니겠는가. 편하게 읽고 즐겨주시면 되겠다. 본디 여행기란 그렇게 재밌거나 그렇게 유익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쓸데없거나 그렇게 재미없지도 않는 관계로다가.
2월 27일 수요일. [더 딴지]발매 시기만 되면 여지없이 찾아오는 일주일 간의 밤샘 야근에 더해 여러분의 구매를 독촉하는 공지 기사(클릭)까지 쓰고 있었음에도 한 가지 할 일이 더 있었으니... 비행기 티켓을 2월 28일 목요일로 맞춰놓았기 때문이다. [더 딴지] 발매 당일엔 모두 약속이나 한 듯 기절해 연락이 두절되는 수뇌부의 행태를 이용한 휴가일수 늘리기였다. 일년 반 만의 외출이라, 일주일 휴가를 물에 젖은 건빵마냥 부풀리고 싶었다.
마침 3.1절이 금요일이었다. 즉, 목요일 출국해 다다음주 월요일 새벽 인천공항으로 귀국하여 배낭을 그대로 메고 바로 출근하자는 심산이었다. 이렇게 되면 일주일이, <목금토일월화수목금토일월>의 11박 12일이 된다. 실제 여행 기간을 열흘 정도 건질 수 있다.
여행에 관해선 태생이 배낭족이라, 이번에도 혼자 싸돌아댕기기로 했다.
급하게 방콕행 비행기표를 건졌다. 방콕은 여행자의 아지트이자 배낭여행의 총 본산이다. 굳이 태국을 여행하지 않을 때에도 방콕을 찍으면 모든 여행을 쉽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가장 싼 항공권은 죄다 방콕에 몰려 있다. 전 세계의 덤핑 티켓이 결국은 방콕으로 흘러들어오기 때문이다. 나는 방콕에서 남미까지 40만원밖에 되지 않는 항공권을 본 적도 있다.
이런 식이다. 몇 개월의 세계여행 일정이 있으면, 일단 가장 저렴한 티켓으로 방콕에 간다. 거기서 값싼 여행자 숙소에 묵으면서 세계 각지로 가는 티켓을 물색하며 여행 경로를 짠다. 여행 일정과 항공권이 정해지면, 출발일시까지 놀면서 준비하는 식. 이런 이유로 만약 세계를 돈다고 하면, 두세 번은 방콕을 거칠 확률이 높다. 방콕의 가치는 그 뿐만이 아니다. 여행자의 성지-성지는커녕 세상에서 가장 시끄러운 돗대기시장이지만-라 불리는 카오산로드(현지 발음으로는 '까우싼'이지만)엔 여행을 시작하거나, 도중이거나, 정리하려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모든 걸 갖추고 있다.
일례로 세계 각국 대학의 학생증도 염가에 뚝딱 맞출 수 있다. 물론 불법이다. 세계 어디서나 박물관이나 유적지 등에 입장할 때 대학생 할인이 많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돈을 굳히려고 이런 짓을 하는 거다. 하여간 이 정도다. 길거리 좌판에서 세계 각지의 여행 가이드북(주로 론리 플래닛)이 사고 팔린다. 단, 카오산로드에 머무르려면 안전사고는 좀 신경쓰자. 뜨내기들로 이루어진 동네다보니 절도사건(특히 여권)이나 기타 여러가지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다. '좀'이라는 말이 좀 애매하긴 한데, 사실 카오산로드가 얼마나 위험한지 자체가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 일부러 애매하게 표현했다. 물론 조금만 신경쓰면 위험한 수준은 아니다. 다른 건 몰라도 여권과 지갑은 웬만하면 몸에 붙이고 돌아다닐 것.
나는 세계를 누빌 처지가 아니라, 이번에도 동남아를 선택했다. 만약 유럽 등 먼 곳에 간다면 오며가며 대략 2박 3일을 희생해야 한다. 어쨌든 안 가본 곳을 경험하고 싶었다. 일단 방문 국가는 라오스와 캄보디아, 태국으로 잡았다. 여행기간 내에 비행기를 이용해도 되겠지만 그럴 경우 티켓에 일정이 맞춰지게 된다. 해서 여행을 하면서는 무조건 육로로 움직이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잘 한 선택이 됐다.
최초 기착지는 물론 방콕이었다. 카오산로드를 거칠 필요는 없었고, 방콕 쑤완나품 공항에서 바로 방콕 북부터미널로 이동해 라오스 남부로 갈 생각이었다.
라오스를 방문한 적이 있었지만, 북부만 갔었지 남부는 처음이었다. 비엔티엔(원래 발음으로는 '위엥짠'), 방비엔(왕위엥), 루앙프라방(루앙빠-방)에 갔었는데 특히 루앙프라방을 추천한다. 도심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이곳은 경주와 같은 전통의 고도이다. 고지대에 위치한 공중도시이면서, 도시 자체가 문화재다. 거리마다 묘한 기품이 서려 있다. 숙소는 저렴하고 품위있다. 재래시장엔 싼값에 득템할 수 있는 문화재가 굴러다닌다. 주변엔 아름다운 자연이 있고, 사람들의 품성은 순하고 선량하다. 꼭 가 보시길 바란다.
어쨌든 나는 남부로 간다. 여기서도 방콕의 메리트가 빛을 발한다. 일단 라오스 국제공항으로 가는 항공료가 비싸다(취항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또한 라오스 북부에서 국내 남부로 이동하는 것보다, 방콕에서 국경을 넘어 이동하는 것이 훨씬 편하다. 방콕의 버스터미널(북부, 남부, 동부터미널 세 곳이 있다.)은 여행자를 주변국으로 곧잘 옮겨다준다. 라오스의 고물 버스를 타고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도로 위로 십수 시간 이상을 여행하면서 사경을 헤매 본 나로서는, 이번에는 방콕의 여행 인프라의 혜택을 받고 싶었다.
짐은 별로 고민하지 않았다. 가벼울수록 좋고, 준비물 없어도 어디 가서 안 죽는다. 어디나 사람 사는 데라, 어딜 가나 큰일 날 일은 없다는 게 신조. 그러나 의약품은 챙길 걸 그랬다. 그 이유는 여행기 보다 보면 나온다. 소형 여행배낭에 모두 쑤셔넣어도 빈 공간이 남을 만큼의 짐을 챙겼다. 반바지 두 벌, 티셔츠 네 장, 치약과 칫솔, 그 외엔 별거 없다.
무거운 게 귀찮아서 캐논 EOS도 포기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사진을 잘 찍지 못한다. 내 실력으로는 DSLR 성능의 50%도 쓰지 못한다. 오래 전에 십 만원도 안 되는 돈을 주고 산 똑딱이를 간택했다. 500만 화소이지만 내 실력엔 충분한 화질인데다가, 어차피 컴퓨터 화면으로 여행을 복기하기에 그 이상의 화질은 필요 없다. 게다가 SD카드 메모리도 덜 잡아먹는다.
집에 있는 SD카드는 1기가 짜리와 8기가 짜리가 있었다. 두 개는 귀찮아서 카메라에 장착한 채로 끝까지 쓰기로 했다. 그래서 결론은 1기가. 사진 찍는 시간이 불필요하게 내 여행을 잡아먹게 하고 싶지 않았다. 충전기와 충전지도 귀찮아서 패스. 그냥 여벌 배터리 들고 갔다.
여행용 칼은, 맥가이버 나이프가 있었지만 짐을 부치고 다시 찾는 번거로움이 싫었으므로(기내에는 금속제 칼을 지참할 수 없으니까) 아래 사진의 것을 준비했다. 생일케잌을 사면 딸려오는 그것. 열대과일 잘라 먹기에 좋다.
그리하여 짐을 다 싸 보니,
정말로 저게 다였다. 베낭 바깥에 묶어놓은, 명색이 아쿠아슈즈는 동네 잡화점에서 만원 주고 샀다.
고민했던 것은 모바일 기기였다. 꼴에 글쟁이랍시고 어디 가서 글 쓰지 못하면 불안하다. 꼭 쓰는 건 아닌데, 쓰지 못해서 안 쓰고 있으면 갑갑하다. 노트북을 챙겨 갈까, 아님 이참에 아이패드나 하나 지를까 고민하다가 놀라운 결론에 도달했다.
... 바로 인류역사를 통틀어 가장 신뢰성 높은 모바일 기록 도구인 종이노트. 전력의존도 전무, 충전이 필요없으며 고장율은 0에 가깝고 무엇보다 가볍다. 키보드 따위도 필요 없이 그 자체로 완벽하다. 언제든 넣다 꺼냈다 펼칠 수 있으며 전원도 부팅도 없다. 고온과 극저온에도 기능을 잃지 않으며 사용의 자유도도 무궁무진하다. 물과 불에 취약하지만 그건 여타의 전자기기도 마찬가지. 참고로 물의 경우는 걍 말리면 된다.
그래도 아쉬운 부분이 있으면 그건 내 아이폰이 충분히 땜빵해줄 터. 거기에 내 오랜 벗인 모나미153 볼펜을 액세서리로 추가한다. 여타의 터치펜에 비해 현실에 가까운 정도가 아니라 현실 그 자체인 사용감을 자랑하며, 가볍고 튼튼하고 편리하다. 작심하지 않는 한 망가지지도 않는다.
이렇게 여행 준비는 대략 30분만에 끝났다.
2월 28일 목요일. 인천공항에서 타이항공 여객기를 타고 홍콩을 경유해 방콕에 도착한다.
쑤완나품 공항
여행의 총 본산인 방콕으로 연결되기에 세게에서 가장 유명한 공항 중 하나지만, 당일 인천공항을 이용한 후라... 해외로 입출국 해보면 인천공항의 뛰어남을 새삼 깨닫는다. 그저 직관적으로 당연히 '이 쪽이겠거니'하고 이동하다보면 어느새 출국 게이트에 서 있거나, 입국이 완료되어 공항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렇게 넓은 공항에서 말이다. 이걸 팔아치우려고 한 누군가에 대한 분노는... 인천공항을 이용해보면, 그 훌륭함 때문에 자연히 느끼게 된다.
여하튼 쑤완나품 공항은 실패작으로 유명할 만큼 여러 모로 후지다. 많은 돈을 들인 거대한 규모의 공항이지만 설계의 질이 다르다. 잠시 울나라 공무원들에게 감사하는 시간을 갖자. 여튼 공항 바깥으로 빠져나와 37도의 혹서를 경험한다.
담배 한 대 태우고, 방콕 북부터미널로 이동한다. 상당히 불편하다. 방콕 시내 각지로 연결하는 공항버스도 사라졌고, 현지 버스를 타고 이동하기도 복잡하다. 그래서 많은 여행객들이 울며 겨자먹기로 택시를 이용하곤 하는데, 한국 돈으로 이만원이 안 되는 액수지만 어쨌든 제도적 바가지다. 난 그럴 필요가 없어서 현지 버스 갈아타가며 방콕 북부터미널에 갔다. 어차피 9시에 출발하는 버스가 목표인지라 시간이 좀 남았거든.
9시에 출발하는 버스가 있다는 사실은 국내 최대의 태국여행 커뮤니티 '태사랑'에서 찾았다. 방콕 및 동남아 일대(중국 남부까지 커버한다)를 여행하려면 반드시 태사랑을 기웃거려라. 그 자세함과 친절함은 세계 최고다. 커뮤니티의 정보력과 속도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특히나 각지의 정보를 수록한 지도는 각종 가이드북과의 비교를 불허한다.
참고할 것 하나. 방콕을 거칠 때는 현지인들의 친절함을 십분 활용하기 바란다. 태국인들은 친절하고 낙천적이다. 여러분의 콩글리쉬나 바디랭귀지를 인내심 있게 해석하며 도움을 주기 위해 최대한 노력한다.
물론 관광대국인지라, 국민소득이 높은 외국인들의 지갑을 노리는 사기꾼들도 많다. 하지만 친절한 와중에 사기를 친다. 사기를 치려고 친절한 게 아니라, 친절한 면과 사기를 치는 양심을 모두 갖고 있다. 관광업에 관련된 태국인들은 외국인들을 등치는 걸 당연시한다. '우리도 먹고 살아야 하는데 당연한 거 아냐?'라는 심리가 있는 모양이다. 그건 그거고, 친절한 건 친절한 거다. 거래는 거래인 만큼 영악하게 하되 인간적으로 도와줄 일에 있어서는 여전히 양심적이다.
또 한 가지 팁. 어려움에 빠진 채 장사꾼을 만났다면, 먼저 도움을 청한 후 흥정을 하는 편이 좋다. 도와주다보면 어디서 왔는지, 여행은 즐거운지 등 인간적인 이야기를 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약간이나마 인간적인 관계가 생겨 버린다. 이들도 사람인지라, 그 후에 흥정을 하면 야멸차게 값을 올리지 못한다. 이 상태에서 권위적으로 대하지 않고 웃으면서 가난한 대학생이니 봐달라는 식으로 농반 진반 앙탈을 부리면 값이 쓱쓱 내려간다. 반대로 잘 사는 나라에서 왔다고 있는 티 내며 상관처럼 굴다간 그야말로 가차없다.
그런 흥정도 하기 싫다면, 경찰이나 제복을 입은 공무원들을 찾으면 된다. 이들은 사기를 칠 일도 없거니와, 무조건 성심성의껏 도와준다. 그 나라의 공항에 세금(공항세)을 물면서 시작한 여행이니만큼, 그 나라 국민의 세금을 활용하는 걸 주저하지 말자. 나도 북부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찾은 게 경찰이었다. 라오스 남부의 도시 '빡세'에 간다고 하자 티켓 구매에서부터 해당 버스를 타는 곳까지, 나를 끌고다니다시피 하며 안내해주었다. 이럴 때 부담갖지 말고 도움을 받으면 된다. 단, 기본적인 예의가 있다면 감사하다는 인사는 빼놓지 않는 게 좋겠다.
(일전에 태국에서 웬 한국 어르신의 추태를 본 적이 있는데... 이런 식으로 경찰의 도움을 실컷 받아놓고는, 팁 주듯 뻣뻣하게 소액 지폐 몇 장을 꺼내 흔들며 감사히 받으라는 식으로 구는 양반을 본 적이 있다. 경찰의 반응은? 당연히 어처구니가 없어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하더라. 경찰은 공무원이지, 거지가 아니잖아. 서양인이 여행 와서 울나라 경찰 도움 받고 몇 달라 흔들면서 그딴 식으로 행동했다고 생각해 봐라.
그 경찰은 친절한 표정을 버리고 팔짱을 끼더니 문제의 한국 분을 응시하다가 딱 한마디만 묻더라.
... "웨어 아 유 프롬?"이라고.
부디, 부디 재팬이라고 대답해주길 바랐지만...)
친절한 것은 버스 기사도 마찬가지여서, 외국인이 여행가방을 짐칸에 실어놓으면 실종되었다 하더라도 출발시간이 1~20분 지날 때까지는 꾹 참고 기다려준다. 늦게 나타나도 크게 화내지 않는다. 그렇다고 일부러 늦고 그러진 말아야겠다. 민폐인데다가 인정사정 없는 기사님들도 있다. 그래도 외국인 여행자가 짐을 잃어버리면 어떤 고초를 겪을 지 뻔하기 때문에, 가방은 가까운 사무소나 역무원에게 맡겨 놓고 떠나곤 하지만.
어쨌든 태국에 온 기념으로 팟타이(볶음국수) 한 그릇 먹고,
그리하여 버스에 올랐다. 복잡한 시내를 벗어나기 전부터 태국어인지 라오스어인지 모를 현지 뽕짝이 흘러나왔다. 이 뽕짝 리듬과 함께하는 육로 국제여행. 그래도 밤에서 새벽까지는 잠들 자라고 안 틀어주더라. 현지 분위기 체감용으로 함 들어보시라.
그렇게 이동한다. 알고 보니 라오스에 입국하는 버스라 그런지, 기사님과 차장 누님이 라오스인이었다(글타. 어느 버스에나 차장이 있다.). 버스의 국적도 라오스. 그렇다면 저놈의 뽕짝의 국적도 라오스인가.
위 사진은 버스 안에서 친해진 라오스 베이뷔. 라오스 일가족에게 포위된 형국의 자리였다. 바디랭귀지로 이 가족과 친해지는 과정이 꽤 재밌었다. 참고로 아이 엄마가 입고 있는 저 군복 명찰에 한국 이름 쓰여 있더라. 소속부대는 마크가 떨어져 있어서 확인할 수 없었다. 아마 예비군 끝난 양반이 군복을 처분했고(필시 의류수거함일듯), 그게 여러 경로를 통해 라오스인들의 생필품이 된 거겠지.
새볔에 태국의 휴게소에 도착했다. 국경버스는 밤버스가 많아 사람들로 북적였다. 쌀국수(포) 한 그릇 먹고(아래 사진),
이렇게 국수를 한 그릇 사다가 중간 테이블에 놓인 양념을 취향대로 추가해서 먹는 시스템.
휴게소의 쌀국수는 즉석에서 익혀주기 위해 매우 얇다. 그리고 그 특유의 맛이 상당히 좋다.
새벽의 휴게소엔 엉뚱하게도 과일 시장이 성황이었다.
라오스인들을 위한 과일시장이다. 가난한 라오스인들은 태국에서 일하면서 비축한 거금을 풀어 과일을 양껏 사가지고 가족에게 간다. 라오스는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이고, 태국은 동남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다(시장경제에 각성한 베트남에게 신나게 밀리고 있지만). 당연히 라오스가 과일이 더 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과일값을 결정하는 가장 큰 요소가 '유통'이기 때문이다. 라오스의 교통시스템으로는 다양한 과일을 한 자리에서 싸게 구입할 수가 없다. 즉 이 휴게소는 라오스인들에게 면세점이나 마찬가지인 셈. 그러니 한밤중에도 성황일 수밖에.
아침이 되자, 국경에 도착했다... 고 생각했지만.
공산국가 라오스의 휴게소에 태국 국왕의 사진이 걸려있을 리 만무. 아직 태국이었다.
(태국의 금상(今上)인 '푸미폰'은 성군이나 명군까지는 아니더라도, 국왕이라는 자리에 걸맞는 통치력과 카리스마는 있다(물론 그 권위주의가 좋다는 건 아니다.). 그래도 왕은 왕이구나, 라는 생각은 들게 만드는 양반이다. 입헌군주국이지만 그 권위와 영향력은 전제군주국에 뒤지지 않는다. 일례로 돈빨로 총리 된 세계구급 재벌 탁신(그 유명한 제지회사 'Double A'가 이 사람 꺼.)이 왕한테 심심하면 개겼다가...
"야 저 새끼 좀 정리하지?"
라는 어명에 군 수뇌부는 탁신을 몰아내는 왕실친위쿠데타를 일으켰다. 물론 저런 어명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지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한다. 군부가 쿠데타에 성공하자마자 국왕에게 깍듯이 보고하고, 승인을 하사받자 임시권력을 재깍 민간에 이양하고 본업으로 돌아간 걸 보면... 태국에서 국왕과 군의 관계는 5공 시절 전두환과 육군의 관계보다 더 내밀하다. 군은 태생적으로 보수적 집단인데, 태국은 왕정국가다. 국왕은 군권을 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따라서 최고권력자는 죽었다 깨나도 국왕이다.
우리의 탁신... 합법적으로 선출된 권력이지만, 진짜 권력을 몰라보고 깝친 게 문제다. 깝쳤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이 양반이 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 왕실의 봉권적 권력에 문제제기를 한 게 아니라, 봉건적 권위보다 자신의 돈이 더 파워풀하다고 믿었던 게 사태의 근본 원인이라 말이지.
덧붙여 이 쿠데타에 태국 국민들의 반응은 '탁신 고놈 감히 우리의 폐하께 개기더니 자업자득'이라는 게 일반적. 물론 반 쿠데타성향의 국민도 있지만 소수다. 하여간 이런 이유 때문에 태국에서 국왕 모독은 '위헌'이다. 외국인들은 태국 어디에나 있는 국왕의 사진에 대고 실수하지 말도록 하자. 외국인이라서 봐주기는 커녕 외국인이라서 더 안 봐준다. 국적과 상관없이 얄짤없다. 웬 서양인 하나가 얼마 전에 술 취해서 국광 사진에 노상방뇨 했다가 지금 실형 살고 있다.
아 그리고... 태국인들의 고민은 국왕의 건강이 날로 악화되고 있다는 거. 그리고 국왕 서거시 왕통을 이어받게 될 왕세자가 답이 없는 개차반이라는 거. 만취상태로 오토바이 몰고 선량한 시민을 쳐 죽이고도 죄책감을 못 느끼고 또 사고치는, 뭐 그런 인간이니 말 다했다. 무엇보다 이렇게 개념없는 국왕에게도 군부가 지금처럼 충성을 바칠까? 푸미폰 국왕은 자식농사를 그래도 반은 성공했는데, 공주마마가 상당한 개념인이다. 그래서 태국 왕실은 현재 여왕 승계도 고려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라오스가 가까워지니 슬슬 빈티지 버스가 보이기 시작.
보기엔 예쁘지만, 비슷한 버스를 타 본 적이 있는 나로선... 에어컨도 선풍기도 없이, 좌석마다 고무줄 달린 부채 매달려 있더라. 승차감은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체력이 남아돌 때 재미를 위해서만 두어 번 타보도록 하자. 사실 고물인 것 자체는 별 상관 없는데, 뭣보다 동남아인들의 날렵한 체형에 맞춰 좌석을 좁게 개조해 놓은 게 문제다. 여객기 이코노미 클래스의 괴로움 정도는 출발 후 20분이면 찜쪄먹으니 참고하시길.
아, 그리고...
국경 넘어가기 전에 태국 경찰이 버스를 세우고 문제가 있는 라오스인이 없는지 수색하더라.
아무래도 라오스인들이 가까운 태국에 돈 벌러 많이 다니다 보니, 신분증명이 확실치 않은 불법체류 노동자를 색출하는 듯했다. 그리고 웬 아줌마 하나가 무척이나 곤란한 표정으로 끌려나갔다. 운전기사를 포함한 라오스 사람들은 끌려나간 아주머니를 걱정스럽게 쳐다보았지만, 뭘 어쩌겠는가. 그냥 버스 출발할 수밖에. 차마 이 광경은 사진으로 찍을 수 없었다. 뭐 신나는 일도 전혀 아니고...
경찰은 버스 안에 있던 단 두 명의 외국인, 나와 영국인 여성에 일절 관심이 없었다. 경찰의 권위적인 태도와 그 앞에 숙연해지는 라오스인들을 보자니 양국의 국력 차이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남아 국가 중 유일하게 식민지를 거치지 않고 독립을 유지했으며, 근대적 기업활동의 역사도 나름 깊은 태국의 인구는 7000만 명에 육박한다. 그에 비해 라오스의 인구는 고작 600만. 10분의 1이 안 된다. 이래저래 밀리는 처지. 역사적으로도 전쟁만 하면 태국에 삥 뜯기는 빵셔틀 신세였다.
(태국이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눌린 샌드위치 신세로 허덕대고 있을 때, "이때다! 설욕의 기회는 지금뿐이다!"하고 태국을 선제공격한 라오스 왕이 있었더랬다. 결과는? 제대로 역관광당했다. 전쟁에서 진 걸로도 모자라 체포되어 태국의 감옥에서 생을 마쳤다. 라오스와 주변국들의 역사를 보다보면 어느새 눈물을 머금고 라오스를 응원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라오스가 아직 살아남아 있는 건, 동남아에서 유일하게 척박한 고산지대에 국토 대부분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 즉 유혈을 감수하며 정복할 만한 땅이 아니었던 거다... 라오스 땅은 주류에서 밀려난 마이너 민족들의 좋은 도피처였다. 물론 그 대표적인 게 라오 족.)
거기다가 라오스라는 국명 자체가 '라오 족의 나라'라는 뜻인데, 외려 태국에 사는 라오 족의 인구가 2000만 명이다. 라오스가 얼마나 소국인지 알 수 있는 사례. 그래서 태국인과 라오스 이야기를 할 때, 웃으면서 '아이구~ 그 가난한 양반들?'하는 반응이 아니라 따뜻한 시선으로 대하는 이를 만난다면, 라오 족일 확률이 무척 높다. 참고로 '안녕하세요'는 태국어로 '사왓디캅(남성형)', '사왓디카(여성형)'이고 라오스어로는 남성형 여성형 구분 없이 '사바이디'이다. 비슷한 발음에서 직관적으로 알 수 있듯 가까운 친척 언어다(통역이 필요 없을 정도라고 한다.). 태국에는 '사바이디'라는 이름을 단 외국인용 숙소가 꽤 눈에 띄는데, 이 경우 주인집의 출신 종족이 라오족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듯.
우쨌든 국경에 도착했다. 소박한 출입국 사무소에서 간단한 절차를 밟고,
아래 사진의 귀여운 터널을 통과하면 라오스 땅을 밟는다.
라오'스'(laos)는 서양식의 복수형. 단어 뒤에 '-s'를 붙이는 언어규칙이 없는 현지인들은 영어로도 그냥 '라오'라고 한다.
불과 수십 미터, 라오스 땅에 접어들자 마자 일이십년 세월을 타임머신을 타고 비포장길이 여행객들을 맞는다.
태국의 출국사무소보다 훨씬 더... 음... 동네 버스터미널 같은 라오스 입국사무소.
저게 입국 신고서를 작성하라고 놔 둔 테이블이다. 뭐 정겨워서 좋더라.
이렇게 라오스 직항보다 훨씬 저렴한 방콕행 비행기 값에, 국제버스비 900바트(한국 돈 3만 2천원 가량)를 더해 무엇보다 더 빠르고 편하게 라오스 남부에 도착했다. 승객들처럼 나름의 출입국신고를 마치고 대기하고 있는 버스(그러니까 태국에서부터 타고 온 버스)를 다시 타고 국경 도시 빡세로 간다.
빡세는 원래 프랑스가 라오스 남부를 통치하기 위해 만든 행정 용도의 도시였다. 이제는 태국 - 캄보디아로 연결되는 국경도시로 관광객 머니에 관심이 생겨가는 도시. 여하튼 빡세 버스터미널에 도착해 다시 쏭테우(픽업트럭을 개조해 만든 현지 버스. 태국이 원조다.)
소박한 숙소를 잡았다. 졸라 허름하지만 혼자서 디비자기엔 나씽 매뤄. 하룻밤 우리돈 7000천원 가량. 이것도 라오스에서는 비싼 돈이다. 관광 인프라가 태국보다 워낙 부실하기 때문에, 오히려 관광객 물가는 태국에 비해 결코 싸지 않다. 이제 서울에서부터 1박 2일의 이동을 끝내고 목적지에 다다랐다. 아래는 이를 기념한 맥주 한 잔. 라오스의 베스트셀러 '라오 맥주'는 쌀로 만들어 그 맛이 묵직하면서 깨끗하다. 대략 칭따오 맥주와 비슷하면서, 더 단단한 맛(칭따오 맥주도 쌀을 쓴다.).
라오스는 밀이나 보리를 생산하지 않는다. 뭐 생산이 전혀 없을 것 같지는 않지만 맥주를 제조할 만큼은 아니다. 가난한 나라에서 비싼 밀 수입하느니 걍 쌀로 만든 맥주. 더 특이하게도 찹쌀로 만든 맥주다. 라오스에서는 '입안에서 날리는 쌀'인 안남미 대신 주로 찹쌀이 난다. 독특한 맛이 일품으로, 강력히 추천하는 바다.
숙소 라운지에서 맥주와 함께 지도를 펴 놓고 드디어 여행 일정을 짠다. '씨판돈'에 가기로 결정했다. 씨판돈은 섹계 관광객들에게 알려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오지로, 글자 그대로 풀면 '4천 개의 섬'이란 뜻이다. 라오스는 바다가 없다. 동남아 유일의 내륙국이다. 사천 개나 되는 섬은 어디 있을까? 중국 남부에서 시작되어 동남아 일대를 관통하는 메콩강에 있다. 외부인에게 개방된 곳은 단 세 개.
'돈 콩'
'돈 뎃'
'돈 콘'
이다. '돈'은 현지어로 섬이란 뜻이다. 우리말과 다르게 형용사가 명사를 뒤에서 수식한다. 동남아 문명권의 젖줄인 메콩 강 한가운데에 몰린 섬들. 이곳에 가기로 결정하자, 가보지도 않은 곳이 마구 좋아지기 시작했다. 겨우 휴가 이틀째였고, 나는 자유다.
내가 맥주를 마셨다는 사실도 망각한 채(그래선 안 되었거늘...) 단촐한 시내에 나가 오토바이를 구할 수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금방 찾았다. 서양인 여행자가 출몰하는 곳은 반드시 개인 탈것을 대여해주는 곳이 있다. 하긴 서쪽 양반들은 몰려다니는 거 유난히 싫어하니까(개인주의가 꼭 좋은 건 아니다. 이러다가 사고들 많이 친다.).
나는 어느 지역에 짐을 풀면 꼭 내가 뭔가를 몰아서 주변 구석구석을 쑤셔봐야 직성이 풀리는 습관을 갖고 있다. 그래야 포만감이 든다. 식사도 그러고 오토바이를 하나 건져 키를 받자 마자 시내 바깥으로 내달렸다. 목표는 빡세 주변에 있다고 지도에 수록된 네 개의 폭포였다.
'오늘은 폭포 물에 네 번 몸 적시고, 내일부터는 섬이다!"
우하하하 푸켈켈켈 나는 자유다~
한국의 루저들아.. 사무실 꺼져, 공장 꺼져, 학교 꺼져...
이 몸은 라오스 시골길을 질주하신다! 음홧홧홧~'
하는 생각에 금세 나타난 시골길을 신나게 달렸다.
소들이 한가롭게 거니는 도로. 왼 쪽에 보이는 포장길을 따라 국도를 달린다. 90km까지 달렸다. 라오스는 도로가 패이고 무너지고 끊기는 곳이 다반사인 나라인데... 비포장 도로가 나올때도 그냥 조낸 달렸다. 글타... 내가 미친 놈인 거다.
첫 번째 폭포에 도착했을 때까지는 좋았다.
오오
가파른 계단도 오오
내려가 보니... 오오 폭포수가 여기서 한 번 모였다가 밑으로 장렬히 떨어진다.
바로 이곳이 수영 포인트!
신비의 산천에 나밖에 없으니 옷 벗고 입수하고 혼자 소리치고 아주 기냥 폭포 하나를 나 혼자 다 가졌다. 죽지 않는 돌고래 보고 있나? 물론 넌 볼 수 없겠지. 딴지 사옥에서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어야 할테니 말이야. 네 몫의 풍경까지 충분이 눈에 담아줄게. 그것이 나 대신 고생하고 있는 너를 위한 예의일 테니...
첫 번째 폭포에서 기어나와 다시 질주. 두 번째 폭포까지도 괜찮았다.
이번에도 나 혼자였다.
이번엔 숫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간다. 폭포 일대를 내가 사유지로 구입한 양, 밀림에서 들려오는 맹렬한 벌레소리와 새소리를 배경으로 아까처럼 혼자 생쇼를 시전했다.
노랫가락과 옷을 훌훌 벗어던지며 요런 다리를 건너면,
아아 신이시여... 현지인 일가족이 유람을 나와 있다.
이거 똑딱이라 그렇지 저 사람들 보이는 위치보다 훨신 가깝다. 하필 여자아이도 있었다. 반쯤 벗은 팬티를 몸을 돌림과 동시에 쓰러져가며 추켜올렸다. 그래, 이럴 때는 꼭 팬티가 잘 안 올라가지. 강자갈 위를 무릎으로 기어가며 필사적으로 젖은 팬티를 잡아올렸건만, 첫 번재 폭포에서 젖은 천쪼가리는 무릎에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하더라. 그 자세로 애벌레처럼 부비적거리며 몇 미터를 처절하게 기어갔다. 고개도 한 번 쳐박아가며.
혹여 어디서 왔냐고 물어봤을 때 정답은 코리아일까, 재팬일까 고민하고 있는데 그저 측은한 얼굴로 바라봐 주더라. 그래 그런 얼굴이 차라리 고마웠다. 여자아이도 있던데 노출 범죄자보다는 바보가 되는 편이 나았다...
단전호흡하듯 숙연한 자세로 맑은 공기와 물소리를 음미하고 나왔다. 가장 되시는 아저씨가 "까울리?(태국어/라오스어로 한국)"라고 묻길래 고개 쳐박느라 흙 묻은 얼굴로 베시시 웃으며 "재팬"이라고 했다. 독자여러분은 부디 나의 몰양심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용서해라. 정말이지 그 면상으로 조국의 이름을 입에 올릴 수 없었다.
그리고 또 달린다.
이번에 찍어온 아래 사진처럼, 라오스엔 어딜 가나 동물들이 도로를 걍 건너댕긴다. 소, 돼지, 닭, 개, 오리 등 농경지역의 전형적인 가축들이 어디든 태평한 얼굴로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라오스인들은 가축을 별달리 가두지 않고 풀어놓곤 한다. 가축들이 알아서 지 할일 하다가 집에 돌아가기도 하거니와, 남의 가축을 업어가는 사람들도 없다. 남의 재산에 당연하단 듯이 손을 대지 않는다. 시골은 더욱 그렇다.
그러니 차가 다니는 도로에 동물들이 아무렇지 않게 나타나는데, 차나 오토바이도 알아서 멈추거나 피해간다. 굳이 동물에게 경적을 울리거나 짜능을 낼 필요성을 못 느낀다. 여기까진 참 후덕한 풍경이나... 내가 무절제하게 속도를 높인 게 문제였다.
세 번째 폭포를 향해가는 중,
여남은 마리의 소들이 한 줄로 뛰듯이 나타나 도로를 가로지르는 게 아닌가. 게다가 중간의 너댓 마리는 새끼였다. 물론 그냥 치어버리는 게 나한텐 나을 수도 있으나... 사람의 본능이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도로 양 옆은 가드레일도 없이 낭떠러지 수준으로 깍여 있었다. 이걸 계속 보면서 달리던 터라, 피하는 건 옵션이 아니었다. 그랬으면 몸이 남아나질 않았을 거다.
소들이 바로 앞에 있는데, 리어브레이크 밟아봐야...
아뿔싸. 본능적으로 리어 브레이크 밟는데, 리어 브레이크가 없다. 하필이면 남는 오토바이가 그거라고, 오토 그러니까 평소 안 몰던 일명 스쿠터를 타고 있었던 거다. 이걸로 한 템포 놓치고 말았다.
"아오 씨바..."
하면서 오른 손 핸드브레이크 잡았다. 다행인 거 두 번째. 브레이크 잡은 직후에 만세 불렀다. 튕겨나갈려구. 급정지하면서 핸들 계속 잡고 있으면 오토바와 일심동체가 되어 구르니까. 철없을 적에 오토바이 타고 꼴에 무슨 스피드 레이서랍시고 까불다가 날아가 본 적이 있어서 본능적으로 손 올린 거다. 오토바이에 깔리면 반드시 크게 다치고, 날아가면 떨어지는 곳에 무엇이 있는지가 얼마나 다칠지를 결정한다. 암튼 이런 생각까지 할 계재는 아니었고 나도 모르게 대한 독립 만세 자세로,
날아갔다.^^
일단 순간적으로, 넘어지는 오토바이에 발이 꼈다. 계속 끼어있었으면 날아가려는 몸의 하중과 효과를 일으켜 아마발이 박살났을 거다. 다행스럽게 신발이 벗겨지면서 오토바이와 떨어졌고, 나는... 그 왜 슈퍼맨 자세로다가 온 몸으로 바닥을 훑으며 앞으로 장렬히 나아갔다.
자세만큼은 이에 뒤지지 않았다.
정말로 딴지스로서 부끄럽지 않은 자세였다.
비포장 구역에서 슈퍼맨 비행, 즉 땅집고 헤엄이 아니라 땅 집고 날아가기를 거쳐,
아찔한 건지 우스운 건지 중간에 있던 소 한 마리의 앞다리와 뒷다리 사이 배 밑을 통과해,
아스팔트 포장 구역에서 비행을 마치고 착륙했다(사고 지점이 마침 경계선이었음).
아팠다. 진짜 인간적으로 더럽게 아팠다. 비명이 나오는 게 아니라 쌕쌕대며 식도를 거꾸로 타고 들어가더라. 아래는 숙소 와서 찍은 사진.
발은 아쿠아 슈즈의 지퍼에 패여 구멍이 뻥 뚤렸다.
사고 당시엔 피칠갑이었는데 결과적으로 별 거 없었다.
발목과 발등 두 군데에 염좌가 생겼는데 뭐 알아서 낫고 있다.
왼쪽 팔꿈치. 한번 지혈하고 소독약으로 씻어낸 결과
귀찮게도 크고 아름다운 딱지가 내려앉았다. 오른쪽도 마찬가지.
다리는 괜찮았다. 그 대신 청바지가 무릎 부분이 확 찢어졌는데, 착용자의 살을 지키고 스스로를 희생한 청바지여 칭송을 받을지어다. 사실 한국에서 입고 간 그대로 신나게 오토바이 탄 건데... 그 성급함이 이렇게 되돌아올 줄이야.
그리고 나중에야 알았지만, 이때 갈비뼈 세 군데에 금이 갔다.
또한 슈퍼맨 비행 중 말라 붙은 나무뿌리에 머리를 크게 부딪혔다. 그런데 머리 뿐 아니라 목도 아무렇지도 않다. 오토바이 빌릴 때 덤으로 얹어준 헬멧 덕분이다. 여러분, 오토바이 탈 땐 헬멧을 꼭 착용합시다. 여러분의 생명을 살립니다. 그 전에 먼저 저처럼 나대지 마시고요.
그리고 이 개시끼... 아니 소새끼들아. 이 개만도 못한 것들아. 엄마소 너 애들한테 길 건널때 오른쪽 한 번 왼쪽 한 번 보라고 안 가르쳐주냐. 눈도 좌우로 길 건너기 좋게 붙어있어가지고 정말, 야, 이 일도 안 하는 것들아. 라오스는 거친 계단식 논이거나 질긴 물논이라 황소 대신 힘 좋은 물소가 쟁기를 끈다! 너 이새끼들은 농사일도 안 하는 것들이 무단횡단까지 하냐 이 씨바들아!
이만한 게 정말 다행이었지만... 사고 직후의 고통에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쓰려져 있자니 공포가 밀려왔다. 일단 내가 얼마나 다쳤는지도 모르겠는데다가, 말도 안 통하는 오지에 손하나 까딱 못하고 쓰러져 있잖은가. 둘러맨 쌕에서 여권이며 지갑이며 카메라며 다 튀어나가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는데... 문제의 소들이 저 멀리 걸어가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와중에 쓰러져서 끙끙 앓고 있자니, 근처 오두막 등에서 동네 사람들이 뭔 일인가 나와 내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흙 섞인 침을 흘려가며 중얼거렸다. "헬프 미, 헬프 미"
그러자 라오스 농부들은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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