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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 십자군의 출정 그리고 1957 대선


1956년 11월 15일, 렉토가 대통령 출마를 선언한다. ‘민족주의 십자군’이라고 불리는 운동의 시작이었다.


야심찬 기세와는 다르게 그를 지원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으며 대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막사이사이의 인기는 절대적이었다. 자유당과 국민당 모두 막사이사이에게 대선후보직을 제안하고 있었고, 주류 정치인들은 막사이사이의 재선을 당연한 것으로 보고, 그 다음의 대선과 총선의 스탠스를 잡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렉토의 출마선언도 대통령이 되길 원한다기 보단 정치적 기반을 쌓기 위한 제스쳐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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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사이사이 대통령의 장례 행렬


1957년 3월 17일 막사이사이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다. 필리핀 정치권은 혼돈의 상황으로 접어들었다. 막사이사이의 부통령이었던 가르시아가 국민당의 새후보가 되었고, 자유당 후보로 호세 율로(Jose Yulo)가 출마했다. 거기에 독자노선으로 대통령을 준비했던 렉토, 진보당의 마나한까지 출마했다.


가르시아는 막사이사이 정권에서 부통령과 외교부 장관을 겸임했지만 전형적인 예스맨이었을 뿐 어떤 정치적 능력도 보여주지 못했다. 미국에겐 가장 적합한 후보였지만 대통령으로 나서기에는 정치적 역량과 능력이 부족했다.


호세 율로는 일본 점령시기 친일부역을 했던 인물 중 하나였다. 정치적 역량은 가르시아보다 나았고 상하원의 다수당인 자유당의 후보였지만 과거 행적으로 인해 대중의 반감을 사고 있었다. 렉토는 뛰어난 정치적 역량을 보여주었지만 정치적으로 극단적인 주장을 내세우고 있었고, 무엇보다 미국이 지원하지 않을 것이었다.


미국은 렉토의 당선을 저지하겠다는 결정은 쉽게 내릴 수 있었지만, 율로와 가르시아 중 누구를 지원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결국 CIA는 대통령으로는 자유당의 율로를, 부통령으로는 국민당의 디오스다도 마카파갈(Diosdado Macapagal)을 지원하기로 한다. 가르시아는 무능력했고, 자유당의 율로에 전권을 주기에는 그의 정치성향이 의심스러웠다.


1957년의 대선은 예상치 못한 결과로 흘러간다. 가르시아 자신도 당선을 예측하지 못했음에도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다. 진보당의 마나한(Manuel Manahan)은 20%의 지지를 얻으며 3위를 기록했고, 렉토는 8%의 지지를 얻었다. 


가르시아의 당선엔 자신의 인기나 역량보다는 정치공학적인 부분이 컸다. 막사이사이의 정치적 후광을 통해 농민과 노동자의 지지를 얻었고, 필리핀 기득권층은 미국이 지원하지 않는 독립적인 후보를 원했다. 자유당은 막사이사이의 정권에서 분열되었고, 렉토를 지지하기엔 미국의 눈치가 보였다. 남은 것은 가르시아 밖에 없었다.


호세 라우렐 주니어를 제치고 마카파갈이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CIA는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반쯤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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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스다도 마카파갈


1957년의 대선으로 CIA는 필리핀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상당히 잃었지만 마카파갈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며 장기적 계획을 성공시켰다. 가르시아는 무능력했고 파벌주의에 전면적으로 노출된, 약한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다. 렉토의 반미민족주의 노선은 독자생존하기 어려워졌고 진보당의 성장은 반미대항세력을 약화시킬 것이었다. 미국으로서는 1957년 대선의 결과가 여전히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CIA나 미국과의 생각과는 다르게 가르시아 정권이 예측하지 못한 쪽으로 흘러갔다.


민족주의 십자군으로 분당했던 렉토에게 먼저 화해를 하자고 제안한쪽은 가르시아였다. 렉토는 이전 구 체계 기득권층을 대표하는 교회의 지원을 받고 있었고, 이는 국민당의 주류 정치기반이었다. 막사이사이가 강력한 정치력을 가진 렉토를 쉽게 무시할 수 있었던 것은 절대적인 인기와 미국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가르시아에겐 둘 다 없었다. 선거기간 중 렉토는 미국의 지원을 받는 자유당과 진보당의 집중 포화를 받았고, 교회와 그의 지지층들은 가르시아로 지지를 돌렸다. 렉토와 가르시아 모두 서로의 정치적 영향력과 정치적 기반이 필요했고, 이것은 렉토의 가르시아 정권 합류와 함께 가르시아 정권이 필리핀 민족주의 노선을 걷게 만들었다.



필리핀인이 먼저! (Filipino First)


1958년 8월 28일 필리핀의 국가 경제 위원회에서 204번 결의안, 통칭 ‘필리핀인이 먼저(Filipino first)’가 통과된다. 외환 환전에 있어 필리핀인이 우선권을 가진다는 내용의 시행령이었다. 필리핀의 외환 보유고가 1957년 IMF에 긴급지원을 요청해야 할 정도로 위태했고(미국의 반대로 거부됨), 무역적자가 한계상황에서 계속 머물러 있었다는 상황을 생각해보았을 때 이는 얼핏 필리핀 경제의 보호를 위한 시행령으로 보였다.


법령이 통과되자 당연히 외국계 사업가들은 반발했다. 미 상공회의소 회보의 Hartendorp 편집장은 국가경제위원회의 결의안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지역의 소수 자본가들에게나 어울리는 전형적인 파시스트 슬로건입니다. 이것은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여 힘들게 사는 이들의 돈을, 아무런 권리가 없음에도 필리핀이란 이름만으로 강탈하는 짓입니다. 이 슬로건은 진실한 민족주의자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애국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탐욕과 욕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1959년 이 법안에 따라 필리핀인에게 할당된 외환액은 전체외환액의 51% 가량이었고 이전보다 높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 정책으로 이익을 본건 투자회사를 가지고 있던 매우 제한된 필리핀인 자본가들뿐이었다.


가르시아의 ‘필리핀인 먼저’ 정책을 비롯한 민족주의 경제 정책과 함께 필리핀 자본은 괄목할만한 성장을 했다. 경공업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고 국내 자본이 차지하는 시장 또한 성장했다. 무역의 다변화를 통해 대미무역의존도를 1945년 80%에서 50%까지 줄인 것도 주목할 변화였다. 이 과정에서 다른 산업화 시기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국산품 애용과 근면이 강조되었고 저축과 민족자본이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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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P. 가르시아


하지만 이는 과거와 분명한 차이를 보여준 정책도 아니었고 민족 경제성장을 만들어냈는 지도 의문스럽다. 막사이사이 정권부터 성장한 민간주도의 소규모 사업체들은 미국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독립될 수 없었고 그러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정치적‧외교적으로 가르시아의 국민당 정권은 대미 관계 이외에 다른 대안을 찾지 못했고 경제 또한 미국에 대한 수출과 국내 소비 대체 이외에는 발전이 없었다.


이런 관계에서 국내 정치에서의 반미구호는 다시 필리핀 정부에 대한 압박으로 돌아왔고 내외부의 압박으로 인해 민족주의 이념을 외치는 가르시아 정권의 리더쉽은 당연히 무너졌다.



1960년 가르시아 정권 때의 필리핀의 GNP는 820불 정도였다. 당시 대한민국이 700불 가량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사실상 큰 차이가 없다. 인구수도 2500만 가량으로 두 국가가 비슷했고 미국의 지원금에 의존했다는 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역전되는 것은 마르코스가 집권을 하는 1965년도였고 그 후에도 두 국가가 비슷한 경제수준을 한동안 유지했으니, 굳이 이야기 하자면 필리핀 경제는 몰락했다기 보다는 ‘성장이 느렸다’고 하는 게 정확할 것 같다. 아니, 그보다 대한민국이 특이한 케이스다.


필리핀은 보편적인 포스트 식민지시대의 신생국가가 걷는 길을 걸었을 뿐이다. 공산주의 내전과 끊임없는 사회갈등, 당연히 따라오는 독재정치와 부패, 의존적 경제와 그것을 가리기 위한 민족주의 연막 이념대결까지.


이것이 ‘보편’이라면 우리는 어떠했을까? 이 전형적인 역사와 우리의 역사와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남겨놓고 그만 연재를 접으려고 한다. 그동안 부족한 글임에도 읽어준 독자들에게 고맙다고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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