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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부의 난(1170, 고려시대 문신귀족정치에 반발해 일어난 난. 무신정권의 시대를 열었다) 이래 나라의 공경대부(公卿大夫. 벼슬에 있는 사람을 일컬음)는 노예계급에서도 많이 나왔다. 왕후장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 때가 오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주인의 매질 밑에서 근골(筋骨, 근육과 뼈, 신체)의 고통만을 당할 수는 없다. 최충헌을 비롯하여 각기 자기 상전을 죽이고 노예의 문적(文籍)을 불 질러, 우리나라로 하여금 노예가 없는 곳으로 만들면 우리도 공경대부 같은 높은 벼슬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1198년. 개경에 살던 노비 만적은 나무하던 뒷산에 모여 이렇게 외친다.


“씨바. 죽창, 죽창을 들자!”


다들 아시다시피 이 난은 이렇다 할 결과 없이 시작 단계에서 일망타진 되었지만, 만적의 난 이후로 고려는 전국적인 민란에 시달려야했다. 왜냐고? 정치가 막장이었으니까.


사회가 혼돈의 구렁텅이로 빠져들 때엔 대다수의 많은 이가 고통을 받지만, 한편으론 공고하던 기득권이 무너지며 로또 맞는 사람도 있다. 중국은 춘추전국시대 이래로 수차례 혼돈의 도가니 속에 말려들어갔고 그 과정에서 한고조 유방 같은 이는 흙수저에서 다이아몬드 수저가 되기도 한다. 중국 대륙에선 오랑캐라 무시 받던 이들이 천하를 주름잡아 황제의 위엄을 뽐낸 일도 있었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시기에 필요한 것은 오로지 실력. 다들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던 시절이었다.


그에 반해 한반도는 내부에서 붕괴한 사례가 많지 않다. 길었던 삼국시대에도 골품제의 벽은 강고했고, 조선은 나라가 휘청하는 순간에도 신분제의 한계에 가로막혀 발전가능성을 잃어버렸다. 반면 다이나믹한 역사를 가진 고려에서는 간간히 이런 자들이 있었다.


노비 만적이 “정중부의 난 이래 나라의 공경대부(公卿大夫)는 노예계급에게서도 많이 나왔다.”라고 말한 것처럼 고려의 노비들에게 역대급 인생역전 롤모델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이의민’이다.


이의민은 경주 사람이다. 그 부친 이선(李善)은 소금과 체를 팔아 생계를 이었으며, 모친은 연일현(延日縣) 옥령사(玉靈寺)의 노비였다. 그가 어릴 때 이선이 자기 아들이 푸른 옷을 입고 황룡사 구층탑으로 올라가는 꿈을 꾸고서 아들이 필시 귀한 신분이 될 것이라고 여겼다. 장성해서는 키가 8척이고 완력이 빼어나 두 형과 함께 마을에서 횡포를 부리는 통에 사람들의 두통거리가 되었다.


이의민의 본관은 정선(旌善)이다. 족보에 따르면 시조 이양혼은 베트남 태자 출신으로, 왕위 다툼에서 밀려 북송으로 망명하였고, 송나라가 금나라의 빵셔틀이 되는 과정에서 고려로 들어온, 고달픈 인생을 산 인물이었다. 그니까 이의민은 그래도 나름 괜찮았던 가문인데, 선조 대에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아무튼 노비였다. 소금장수와 사노비 사이에서 태어난 이의민과 형제들. 하지만 이 흙수저에게 주어진 하나의 명제가 있었으니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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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민은 수박(手搏, 우리나라 전통 무예 중 하나. 수격이라고 부르기도 함), 격투기의 달인이었다. 한국판 효도르와 형제들은 경주 일대의 무뢰배들과 의기투합하여 온갖 깽판을 저지른다. 지방 조폭은 예나 지금이나 골칫덩이임과 동시에 군부독재의 맛있는 먹잇감이 아니던가. 이의민과 형제들은 안렴사 김자양에게 고된 고문을 받는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두 명의 형은 고문을 이기지 못해 죽었으나, 가진 것이라곤 단단한 몸뚱아리가 전부였던 이의민은 이 모진 고문에서 살아남는다. 이의민의 인생을 바꾼 찬스였다.


“어허, 저 놈 몸빵 세네. 데려가서 탱커로 써 먹어야겠어.”


김자양에 의해 이의문은 경군으로 뽑혀 파티원이 돼 식구들과 함께 개경으로 상경한다. 다 죽었다고 생각했을 터인데 갑자기 관직을 얻고 개경으로 간다니, 이의민의 가족들은 참 황망했을 것이다.


아내를 데리고 남부여대하여 서울에 이르니, 마침 어두운 밤이어서 성문이 이미 닫혀 있었다. 성의 남쪽 연수사(延壽寺)에 들어 자게 되었는데, 꿈에 긴 사다리가 성문에서 대궐에 이르는 것이 있어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보았는데, 깨고 나서 이상하게 여기었었다.



그렇다. 이의민의 꿈은 현실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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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왕은 의종이었다. 즉위 초 의종은 인종 시대의 잦은 내란으로 인해 실추된 왕권 회복을 위해 노력했지만 영 시원치 않은 방향으로만 흘러갔다. 의종의 왕권을 위협하는 문벌귀족을 견제하기 위해 그가 택한 아군은 친족(!)과 환관(!), 그리고 무신이었다. 의종은 유교를 도외시하고 불교, 음양설, 도교 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1154년 중흥사, 1158년 중흥궁은 왕권강화의 기치를 내건 프로젝트였지만 재정만 축낼 뿐 효과는 미비했다. 명나라 F4(정덕제, 가정제, 만력제, 천계제)급의 암군포스라 할 수 있다.


의종은 젊은 시절부터 오렌지족 기질이 있었다. 힘이 세서 강궁을 잘 다뤘고 방 안에 촛불을 켜놓고 활시위를 당겨 촛불을 꺼버리는 묘기를 선보이기도 한다. 기마술과 격구에도 능했다. 이런 무인 기질에 오렌지족 특성이 결합하여 수박희 같은 격투기 행사를 자주 연다. 이 수박희 행사에서 이의민은 천하제일무술대회의 손오공처럼 좌중을 압도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어 의종에 의해 경군에서 종9품 대정(隊正), 종9품 대정에서 정7품 별장(別將)으로 3계급 특진한다. 자연스럽게 의종의 경호원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의종이 무신들을 중용하며 시도한 왕권강화 책은 문벌 귀족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의종은 문신들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는데, 이건 줬다 빼앗는 격이 되어 무신들의 불만이 높아졌다. 그래도 인종의 잔치는 지속되었으니, 결국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용춤을 추던 정중부의 수염을 태워먹는 사태까지 가고 만다. 무신정변 직전엔 종5품 새파랗게 젊은 문신이었던 한뢰가 종3품 상장군 이소응의 귀싸대기를 갈기는 일이 있을 정도였다. 이 사태는 무신정변이라는, 향후의 고려사를 지배하는 일대 사건으로 터지게 된다.


1170년 8월, 정중부를 중심으로 뭉친 무신들은 광기의 살육을 벌였다. 여기엔 이의민도 가담했다. <고려사>에는 이의민이 죽인 사람이 가장 많아 이 공(?)으로 중랑장이 되었고, 곧 장군으로 승진시켰다고 나온다. 이의민은 노비에서 죄수, 종9품 대정, 정7품 별장. 종5품 중랑장을 거쳐 장군까지 된 것이다.


장군이 되기까지 이의민이 한 것은 경주 일대에서 깡패짓하고, 고문을 견뎌내고, 수박을 졸라 잘하고, 살인을 잘 한 것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하에 수많은 병력을 둘 수 있는 장군으로 임명되니, 무신정변은 시작부터 막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참, 문신들이 50여 명이나 죽어나가던 보현원에서 의종은 악사들의 연주를 들으며 깊은 수면을 취하고 있었다(...).


쿠데타 세력은 개경에 입성하였고, 의종이 총애하였던 환관들의 반무신 쿠데타를 간단히 진압한 뒤 의종을 폐위해 거제에 유폐한다. 의종에 입장에선 ‘길러준 개가 주인을 물었다’였겠지만, 무신들 입장에선 ‘그니까 평소에 개 좀 잘 기르지 그랬어’ 였을 지도. 쿠데타 세력은 의종을 유폐한 후 동생인 명종을 옹립한다.


1173년, 무신들의 정변에 반발한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은 의종 복위를 시도하며 거제에 유폐되어있던 의종을 경주로 모신다. 이에 이의민이 진압군과 함께 자신의 고향인 경주로 내려가지만, 손쓰기도 전에 지역 세력이 복위 세력을 자체진압 해버렸다. 지역 세력은 이들의 머리를 길 양 옆에 늘어놓고 이의민을 맞았다. 거기서 이의민은 의종을 만난다.


그들의 인도를 받아 성으로 들어온 이의민은 곤원사(坤元寺)의 북쪽 연못가로 의종을 끌어내어 술 몇 잔을 올리고는 그의 척추를 꺾어 버렸는데 손놀림에 따라 지르는 비명소리를 들으며 껄껄 웃기까지 했다.


박존위가 의종의 시체를 이불에 싸서는 가마솥 두 개와 함께 묶어서 연못 가운데로 던져 넣자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크게 일면서 모래먼지가 마구 일어나므로 사람들이 모두 소리를 지르며 흩어졌다. 절의 승려 중에 헤엄 잘 치는 자가 가마솥만 건져내고 시체는 버렸는데 시체가 여러 날 동안 물가로 떠올라 있어도 물고기나 새들이 뜯어먹지 않았다. 전 부호장(副戶長) 필인(弼仁) 등이 몰래 관을 마련해 물가에 묻어 주었다.


사람의 허리를 완력으로만 끊어 살해할 수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이런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는 그의 성정이 더 놀랍다. 이미 최소한의 도덕적 개념이 사라진 살인병기가 되어버렸는지도. 이 ‘킹슬레이어’라는 악평은 두고두고 이의민의 약점이 되지만, 어쨌든 이 사건 이후 스스로 공을 내세워 대장군으로 승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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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조위총이 다시 군사를 일으키자 이의방(무신정권의 1대 집권자)은 이의민을 정동(征東) 대장군(大將軍)·지병마사(知兵馬事)로 임명했다. 이의민이 군사를 거느리고 전투에 나섰다가 날아온 화살에 눈을 맞았으나 철령(鐵嶺)으로 진군한 후 사방에서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며 서경군을 공격해 크게 격파하였다. 연주(漣州)를 공격하자 흥화도(興化道)의 반군 수천 명이 와서 북천(北川)에 진을 치고서 구원에 나섰다. 이의민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방어하면서 칼날을 무릅쓰고 적진으로 들어가 말 탄 장수 한 명을 베니 적병들은 퇴각해 버렸다. 이후로는 적이 이의민의 부대가 왔다는 말만 들으면 그때마다 도망쳐 숨어서는 감히 대적하지 못했다. 이 전공으로 이의민은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다.



조위총의 난에서 이의민은 큰 활약을 펼친다. 그는 병법이나 전략을 배우진 못했어도 부하들을 통솔하는 카리스마는 있던 것 같다. 이의민이 장수로서의 능력을 보여준 것은 사실 조위총의 난 진압과정이 유일하지만 이의민은 무신이 오를 수 있는 최고계급인 상장군으로 임명된다. 1170년 무신정변부터 1177년 조위총의 난 진압까지, 이의민은 출세의 탄탄대로 코스를 밟으며 권력의 달콤한 향기를 맡았을 것이다.


그런데 1179년, 무신정권에 지각변동이 생긴다.


명종 9년(1179), 경대승이 정중부를 죽이자 조정의 관료들이 궁궐로 나아가 하례했다. 그러나 경대승이 “임금을 시해한 자가 아직도 살아있는데 무슨 축하인가?”라고 하므로 이 말을 들은 이의민이 크게 겁을 집어먹고 날랜 군사들을 자기 집에 모아 대비했다. 또 경대승 휘하의 도방(都房) 사람들이 자기들을 싫어하는 사람을 해치려 한다는 말을 듣자 더욱 겁을 낸 나머지 거리마다 큰 문을 만들어 두고 야간 경비를 세웠다. 이를 여문(閭門)이라고 불렀는데 개경의 동리들도 모두 이를 본 따 대문을 세웠다.



무신협동조합장인 정중부를 중심으로 뭉쳤던 무신들은 9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국가를 운영하는 최소한의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고, 20대 중반의 젊고 개념 있는 참군인 경대승이 무신정변 주도자와 자신의 라이벌들을 싹 죽이는 사태가 일어난다. 그 때까지 숨죽이고 있던 문신 세력은 경대승을 환영했고 축하하는 행사를 연다. 이 자리에서 경대승은 “킹슬레이어가 버젓이 살아있는데 축하는 뭔 축하?”라고 발언한다. 한미한 출신 성분과 급속 승진 테크를 탄 이의민은 자신에 대한 스트레스가 꽤 심했던 것 같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는 격언을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는지도. 경대승이 실권을 틀어잡자 이의민은 고향 경주로 낙향한다.


경대승은 집권 후 무신들의 협의체인 중방을 날려버린다. 무신정변 이후 최대의 권력기관으로 부상한 중방은 정중부 등이 혼자서 권력을 독점하지 못하는 무신들의 협의기관이었다. 경대승은 이 중방을 약화시켜서 자신에게 다시 도전해올 수 있는 무신들의 팔을 잘랐으나, 정상적인 권력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하고 4년 만에 병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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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정권 시기 무신들의 협의기관 계보


이에 명종은 저승에 가서도 고려 백성에게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을 선택을 한다. 이의민을 다시 부른 것이다.


왕이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경대승이 죽은 뒤에도 나가지 않았다. 반란을 일으킬까 겁을 낸 왕이 그에게 공부상서(工部尙書) 벼슬을 주고 사자까지 보내 잘 달래자 그제야 돌아와 편전(便殿. 왕이 평상시에 거처하는 궁궐)에서 왕을 뵈었다. 왕이 속으로는 두려워하고 싫어하면서도 겉으로는 친근히 위로하니 온 나라 사람들이 왕의 나약한 태도를 한탄하였다. 얼마 후에 수사공(守司空)·좌복야(左僕射)로 승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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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대승이 중방을 약화시킨 뒤 이의민이 권력을 독차지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이후의 무신정권은 모두 1인 독점체제로 진행되었고 고려가 패망하는 제1원인이 된다. 이의민이 집권한 뒤 개경은 개판이 되었고, 중신이 된 무신들은 여전히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며 국사를 멀리했다. 최고 권력자인 이의민도 그러했다.


어느 날 이의민이 두경승과 같이 중서성에 있는 자리에서, “어떤 자가 자기가 힘이 세다고 뽐내기에 내가 이와 같이 때려 눕혔소.”하고 자랑하며 주먹으로 기둥을 치니 서까래가 흔들거렸다. 이를 받아 두경승이 “언제 적 일인데 내가 맨 주먹으로 치니 사람들이 다 달아나 버렸소.”하고 벽을 치니 벽에 구멍이 뚫렸다. 뒤에 이의민이 두경승과 함께 중서성에 앉아 일을 의논하다가 서로 의견이 갈리자, “네가 도대체 무슨 공로를 세웠기에 나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했는가?”하며 주먹으로 기둥을 쳤다. 당시 사람들이, “궁중에는 이의민과 두경승이요, 추밀원에는 손석(孫碩)과 김영존(金永存)이다.”라고 말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이런 시를 지어 조롱하기도 했다.


나는 이의민과 두경승이 두려우니

그 당당한 모습이야말로 진짜 재상답도다.

황각(黃閣. 재상이 정사를 돌보는 곳)에서 서너 해 있으면

만고에 제일가는 주먹바람 날리도다.



그야말로 엉망진창이다.


이의민은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는 야심을 갖는다. 이씨가 왕이 된다는 ‘십팔자위왕설(十八子爲王說)’이라는 유언비어를 널리 퍼뜨리고, 경주 지역의 무속신앙이었던 ‘두두리’란 나무귀신을 집에 사당을 차려놓고 밤낮으로 섬겼다고 한다. 특히 남부지역에서 신라 부흥을 기치로 일어난 효심-김사미의 난에 은근히 식량과 무기, 정보를 제공했다는 설도 있다. 김사미의 난도 양민반란이었기에 어쩌면 그들과 동병상련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계략을 품었는지도(진압이 쉽지 않았던 것을 훗날 이의민에게 뒤집어씌운 것이라는 설도 있다).


아들 이지순도 매우 탐욕스러운 자라 반적들이 재물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는 그것을 갈취하려고 몰래 연락을 주고받으며 의복과 식량 및 신발과 버선 등의 물자를 보내니 반적들도 금은보화를 보내왔다. 이 때문에 아군의 정보가 매번 새어나가 거듭 패배를 당하기에 이르렀다. 전존걸은 지략과 용맹으로 이름을 떨치던 장군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자,


“만약 법으로 이지순을 치죄하면 그 아비가 반드시 나를 해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적이 더욱 기세를 떨치게 될 것이니 그 죄를 누가 덮어 씌겠는가?”


라고 분개하다가, 기양현(基陽縣)에 이르러 약을 마시고 자결했다.



진압군으로 파견된 이의민의 아들 이지순이 이렇게 행동한 데엔 이의민의 지시가 있었을 것이다. 효심-김사미의 난을 이의민이 지원했다는 가설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이의민과 그 일가의 막장력은 날이 갈수록 더해갔다. 이의민이 인사권을 제멋대로 휘둘러 모든 정치가 뇌물로 결정되었고, 조정의 신료들은 테러 위험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백성들의 거주지를 쓱싹해 저택을 짓고 남의 토지를 빼앗으니 온 나라가 두려움에 떨었다. 이의민의 처는 여종을 시샘해 때려죽이고 남종과 간통하였고, 이의민은 남종을 죽이고 처를 내쫓은 후 부인을 계속 바꾼다. 아들 이지영과 이지광은 패악질이 심해 세간에서 쌍칼이라 불렀다 했으니, 역시 조폭의 섭리는 동서고금 언제 어디서나 맞닿아있다. 특히 이지영은 밥 먹던 중에 최신윤이란 자의 멱살을 잡고 때려죽이려 했으며, 실패하자 그의 부하를 죽인다. 이런 식으로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사람은 모조리 살해하니, 이 시기가 이의민의 패악질이 가장 극심했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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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가 지나치면 항상 화가 되는 법. 문제아였던 이지영이 운명의 장난인지 권세 있는 가문인 최충수의 비둘기를 뺏어가는 사건이 발생한다.


명종 26년(1196), 장군의 지위에 오른 이지영이 최충수(崔忠粹)가 집에서 기르던 비둘기를 강탈해가자 성이 난 최충수가 자기 형인 최충헌에게 이의민 부자를 죽이겠다고 알려 허락을 얻었다. 이의민이 마침 미타산(彌陀山) 별장에 있었으므로 최충헌 등이 찾아가 그를 죽인 후 큰 거리에 목을 전시했다.


당시 이지순은 대장군, 이지광은 장군으로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는 가동(家僮)들을 거느리고 길에서 싸움을 벌였으나 이지순이 최충헌 쪽의 군세가 강함을 보고는 이기지 못할 것이라 판단하고 이지광과 함께 도망쳤다. 앞서 이지영은 벽란강(碧瀾江) 보달원(普達院)을 자신의 원찰(願刹)로 삼았는데 강을 건너 그리로 갈 수 있는 다리를 놓으려고 했다. 기녀까지 끼고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로 가서 향리들에게 다리 놓을 비용을 도우라고 다그치자 해를 당할까 겁을 낸 관리와 백성들이 백금 70금을 추렴해 주는 등 그 폐해가 극심했다.


최충헌이 장군 한휴(韓休)를 보내어 그를 체포하게 했는데 한휴가 밤에 도호부로 들어가니 이지영이 마침 태수 허대원(許大元)과 함께 잔치를 열고, 머리에 꽃을 꽂은 채 술을 들이키고 있었다. 한휴가 그를 죽이고 머리를 개경으로 보내니, 안서의 백성들이, “이지영이 죽었으니 이제 걱정거리가 없어졌다.”며 기뻐했다.



정중부는 정변 후 9년 만에 죽었고, 경대승이 죽은 것이 4년 뒤인 1183년, 이의민이 죽은 것은 1196년이었으니 참으로 권불십년(權不十年. 권력은 십 년을 못 간다)이라 할 만하다. 노비에서 시작해 초고속 승진을 거쳐 결국 공신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니, 왕후장상 영유종호(王侯將相寧有種乎.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겠는가)라고도 할 만 하다. 그러나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은 너무나도 허망하게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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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있는 유일한 고려 경번갑, 정지장군 갑옷


어쩌면 이의민이란 입지전적인 인물에게 고려의 개혁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할 수 있지만, 필자가 어린 날 처음 이의민의 기록을 접했을 때 언젠가 개념을 찾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었다. 전날의 과오를 뉘우치고 집중된 권력을 올바르게 사용한다면, 아니, 최소한 경대승처럼만 해줬어도 고려의 이후는 꽤 괜찮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쌓은 출세의 길은 피가 낭자한 살인의 길이었으니, 그에게 치세와 개혁은 은전 하나만큼도 가치가 없는 것이었으리라. 의로움이 없는 권력, 의로움이 없는 출세가 어떤 테크트리를 따르게 되는 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비단 이의민 개인의 문제만 아니라, 이후 고려는 몽고의 핍박을 받으며 전국토가 유린당하고, 전국민이 고통 받는다. 몽고가 물러가자마자 전국에서 왜구의 국지도발이 일어나 결국 망국이 된다.


노비 만적은 이의민으로 대표되는 신분상승 사례에 영향을 받아 신분제 전복의 뜻을 내비쳤지만, 대의에는 닿지 못했다. 이 시기의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는 한 때 유행한 “범죄 좀 저지르면 어때 갱제만 살리믄 짱이지”처럼, “사람 좀 직이믄 어때 출세만 하믄 그만이지”였는지 모른다. 춘추전국시대라는 지옥도에서 꽃핀 제자백가처럼, 인간의 성품과 도리를 파헤치는 성리학이 발달한 것도 위와 같은 시대양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의민의 일대기를 한 줄 요약하자면,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


끄읏.



* 참고 및 출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고려사>(http://db.history.go.kr/KOREA/) - 이의민 열전 등

<고려 의종 시해의 영향과 의미> 방병준, 국민대학교 대학원

고려 명종 23년의 `신라부흥운동` 사료 검토, 김호동




빵꾼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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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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