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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를 제압하기 위해 먼저 자신의 몸에 상해를 가하는 자해는 상대에게 대단히 강력한 인상을 심어주기 때문에 효과적인 공격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중학교 때 태권도장에서 알게 된 동네 양아치 선배 하나는 싸움의 기술을 알려달라는 아이들에게 자신은 싸움하기 전에 항상 피가 날 정도로 벽에 주먹을 부딪치고 그 피를 혓바닥으로 맛본다고 했다. 왜 그런 행동을 하느냐고 인상을 찌푸리며 묻는 아이들에게 그는 '그래야 상대방이 나를 미친놈으로 보고 겁내기 때문에 싸움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다'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러나 싸울 때마다 자해를 하려면 하는 쪽도 피곤하다. 그래서 조폭들은 몸에 문신을 그려 넣는다. 나는 이 정도의 고통도 참을 수 있는 강한 남자이며, 너의 어설픈 주먹 정도로는 나에게 고통을 줄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런가하면 자해를 아예 일생의 업으로 삼는 이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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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블랙박스 출현 이후에 일개 거리의 개그맨으로 전락하긴 했으나, 그 전까지 저런 유형의 자해공갈단은 선량한 운전자들의 골칫거리였다.


상대의 손을 빌어 자신에게 상해를 입히고 그것을 빌미로 싸움의 명분을 찾으려는 부류도 존재한다. 이런 부류를 일단 '수정주의적 자해공갈단'이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수정주의'라는 용어는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세 개의 관점 중 수정주의적 관점에서 차용했다. 남한은 북한의 남침을 주장하고 북한은 남한의 북침을 주장하지만, 수정주의적 관점은 '미국이 애치슨 선언으로 한반도에서 발을 뺀다는 인상을 심어줌으로써 김일성의 남침을 유도했다'는 관점이다. 즉, 전쟁이라는 행위를 먼저 시작한 쪽은 북한이지만, 그 배후에는 미국의 전략이 있었다는 것이다.


수정주의적 자해공갈단의 전형은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서 찾을 수 있다. 영화 속에서 최민식은 명분이 없다는 이유로 조진웅과의 싸움을 꺼리는 하정우에게 명분을 만들어주기 위해 조진웅의 진영에 침투해 구타를 당한다. 자신이 모시는 대부를 때렸다는 명분을 얻은 하정우는 조진웅의 아지트를 급습, 노른자 위 나이트클럽에서 그의 세력을 몰아낸다.


영화의 내용은 물론 허구지만, 공교롭게도 영화의 배경이었던, 범죄와의 전쟁을 추진했던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는 정부의 주도로 이루어진 유명한 수정주의적 자해공갈 사건이 있었다. 이른바 정원식 총리 폭행 사건.


1988년 총선 때 국민이 만들어준 여소야대의 정국을 뒤집기 위해 노태우는 1990년 김종필, 김영삼과 함께 이른바 3당 합당을 추진했고 새롭게 집권당이 된 민주자유당은 과반을 훨씬 넘는 의석을 지닌 괴물 정당이 되었다.


그러나 국민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집권당 수 불리기에 대학생들은 격렬히 반발했고 90년도는 시위로 모든 대학가가 몸살을 앓았다. 설상가상으로 91년 4월,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 학생이 시위에 참여했다가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머리를 맞아 세상을 떠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의 여파로 87년 6월 항쟁 이래 최대의 인파가 거리로 쏟아져 나와 독재타도를 외치기 시작했고, 곳곳에서 학생들이 분신자살을 했다. 정권 창출 이래 최대의 위기에 처한 노태우 정부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당시 정원식 국무총리 서리를 한국 외대에 '투입'하였다.


명분은 '국무총리에 취임하기 전 가르치던 학생들에게 마지막 수업을 치르기 위함'이라 했지만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사건 2년 전인 1989년 노태우 정부는 당시 새롭게 출범한 전교조를 불법노조로 규정하고 1527명의 교사를 파면, 해임했는데, 당시 정원식은 문교부 장관으로서 일차적인 책임이 있는 위치였다. 91년도 대학 1, 2학년생들에게 정원식은 공공의 적 1순위였고, 정원식의 측근들도 외대 행을 만류했으나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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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일보>)


아니나 다를까 외대 학생들은 극렬히 반발했고 그에게 계란과 밀가루를 퍼부었다. 일부 학생들은 발길로 걷어차기까지 했다. 정부와 <조선일보>는 사태가 발생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발 빠르게 합을 맞춰 외대 학생들을 마지막 수업을 하기 위해 학교에 찾은 노교수를 폭행한 패륜아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정원식이 학생들의 스승을 1500명 넘게 교단에서 쫓아낸 희대의 패륜아라는 점은 감추고 말이다. 이 선전책동은 먹혀들어서 이후 학생 시위는 급격히 힘을 잃었다.


그로부터 25년, 강산이 두 번 바뀌고도 절반이 또 바뀐 2016년, 우리는 다시 정부 기획, 총리 주연의 자해공갈을 목격한다.


사드 배치에 반발하는 경북 성주에 황교안 총리가 찾아갔다가 계란과 밀가루에 봉변을 당했다. 일부 언론과 경찰은 기다렸다는 듯이 '국정 콘트롤타워의 공백' 운운하며 성주 군민들의 폭력사태를 엄중히 책임을 묻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보수단체들은 성주에 찾아가 사드 배치는 축복이라는 것을 전파하겠다고 설쳐대고, 정부의 언어는 하루가 지날수록 거칠어진다. 급기야 황교안 총리가 사드 괴담은 범죄이므로 단호하게 대응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 와중에 경찰청장께서 깨알 개그를 쏟아내기도 한다. 외부인의 집회 참여를 엄중 색출하겠다며, 설사 성주가 고향이더라도 외지에서 산 사람은 외부인으로 간주해야하는 것 아니냐고 질문을 던진다. <곡성>을 너무 많이 보신 탓일까? 뭣이 중헌지도 모름서. 예전에는 말다툼하다가 민증을 까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앞으로는 집회에 참여할 때도 민증을 까서 그 지역 주민이라는 점을 확인시켜야할 모양이다. 도대체 그 지역 출신만이 그 지역에서 시위할 수 있다는 발상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 근거가 되는 법조항을 알려주길 바란다. 없다면 경찰청장은 자의적인 권력행사를 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셈이니 경질되어야 한다.


성주 군민들의 반발엔, 기본적으로 사드배치라는 동아시아 정세에 파장을 미칠 대단히 중대한 사안을 군사작전 하듯, 불시에 기습적으로 성동격서 전략을 통해(마치 영주나 칠곡에 배치할 것처럼 거짓 정보를 흘리다가) 결정해버린 정부와 국방부에 책임이 있다. 성주가 아니라 어디로 결정되었더라도 그곳 주민들은 격렬히 반발했을 것이다.


국민들의 생존권과 직결된 문제를 북한군이 연평도 포격하듯이 기습적으로 관철시켜놓고, 아무런 수습책도 없이 성주 행을 택한 황교안 총리의 머릿속에는 무슨 생각이 있었을까. 성난 주민들이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총리가 친히 방문했다는 사실에 감읍해서 ‘꽃길만 걸으소서’ 외치며 꽃다발이라도 던져주기를 기대했을까? 내가 보기엔 다분히 물리적 충돌을 예상하고 있었다. 기대했던 대로(?) 계란과 물병 투척이 벌어지자, 공안정국으로 이끌만한 적절한 그림 촬영한 뒤 준비된 탄압책을 진행하는 중이다. 처음부터 국민 설득 같은 것은 저들의 머리에는 없었고, 그저 적절한 명분을 얻은 뒤 힘으로 반대 세력을 제압하겠다는 계산만 존재한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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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뉴시스>)


정부의 행동은 대단히 추접스럽다. 나름 소기의 목적대로 진행되는 것 같지만 나는 여기서 한 줄기 희망을 본다.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만 하더라도 정부는 모냥 빠지게 저런 자해공갈을 할 필요가 없었다. 국민의 저항쯤은 얼마든지 철권으로 짓누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87항쟁을 거치고 시민의식이 성숙하면서 정부가 시민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정원식 자해공갈 사건이 있었던 91년도의 시위는 경찰 병력으로는 이미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대규모인데다 격렬했다. 비싼 돈 주고 이스라엘에서 수입한 물대포가 시민들에 의해 허무하게 엎어지고 곳곳에서 전투경찰들은 무장해제를 당했다. 정원식의 외대 투입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뒤바꾸는 나름의 묘수였고, 일정 부분 먹혀 들어갔다. 그러나 국민의 신뢰를 잃은 군부 세력은 그 이후 지배력을 상실했고, 김영삼에게 차기 대권을 물려주어야 했다. 이후 우리 역사에서 쿠데타 출신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일이 사라졌고, 오늘날에는 5공 출신 정치인조차 손에 꼽을 만큼 희귀한 존재가 되었다. 자해공갈 전략은 한 순간 역사의 물줄기를 방향 바꾸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결국 노도처럼 휩쓸어오는 역사의 힘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이른바 콘크리트 지지율을 바탕으로 하는 그녀의 행보에는 거침이 없었다. 본인이 임기제 대통령에 선출된 것인지 종신 황제에 등극한 것인지 당최 구별하지 못하는 언행을 보여주었고, 장판 밑에 숨어 있던 바퀴벌레 마냥 기회만 노리던 유신정권과 5,6공의 잔재들과 기타 인사들은 그녀를 찬양하며 똥덩어리처럼 똘똘 뭉쳤다.


반대하는 시민들에게는 경찰이 물리력을 행사하고, 일베가 비웃고, 일당 이만 원짜리 어버이들이 패악을 부렸다. 계속해서 그런 분위기가 지속되었다면 박근혜 대통령은 더욱 과감하게 유신시절로의 회귀를 감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민들의 민주 의식은 이미 70년대와는 비할 바 없이 성장했다. 문창극이니 윤창중이니 하는 오로지 박근혜 대통령에게 아부한 행적 외에는 아무런 공직자의 자격이 없는 듣보잡들은 줄줄이 낙마하고, 개헌 가능 의석을 노리던 총선에서는 과반도 차지하지 못하는 참패를 당했다. 일개 네티즌에서부터 지식인 사회에까지 일베 문제의 심각성이 논의되었고 어버이들은 맥아더 장군 연설문 한 구절처럼, 다만 사라져 갔다.


결국 박근혜 대통령 일파가 선택한 마지막 방법은 91년도에 한 번 써먹은 적 있는 총리 자해공갈이라 할 수 있다. 애석하게도 당시와는 다르게 이번 자해공갈은 크게 먹혀들지 않는 듯하다. 우선 총리는 스승이 아니고, 성주 군민은 제자가 아니다. 어떻게 용을 쓰든 91년도처럼 성주 군민을 패륜집단으로 몰아가기에는 역부족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정도 자해공갈에 넘어갈 정도로 우리 국민이 어리숙 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제 마지막 밑천을 다 써버린 박근혜 대통령과 그 떨거지들의 등 뒤에 밀어닥치는 역사의 거대한 쓰나미가 눈에 보이는 것은 나 혼자만의 착시일까?




도비공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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