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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이 몰아치고 있습니다. 현재 네트워크 상에서 벌어지는 메갈리안과 페미니즘에 대한 논쟁이 레진코믹스에 대한 불매 운동까지 진행 됐습니다. 사실 논쟁이라기 보다는 이미 사람들은 무엇을 적으로 또는 아군으로 할지 구분 짓는 이분법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분법이 어제오늘일은 아니겠지만 여느 논쟁이 그렇듯 특정 사건을 계기로 수면위로 그 민낯이 드러나 버린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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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블로그 이웃분과 길고 긴 논쟁을 마쳤습니다. 그분은 파시즘을 두려워하는 입장에서 메갈리아(그분은 이 단어를 여성우월주의자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에 대한 반대 논리를 펼쳤습니다. 파시즘을 증오하는 그 의견을 존중해 그분의 행동을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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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무언가 찜찜한 마음이 계속 남습니다. 저와 논쟁했던 그분의 입장도 받아들였지만 그럼에도 부정할 수 없는 이...



증오의 논리를 말입니다.



메갈리아 논쟁(정확한 용어인지는 모르겠습니다)에 가담한 사람들의 의견에서 저는 증오의 논리를 확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서로 팩트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만 그것이 본인들의 논리를 강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팩트일 뿐, 대화해보고, 팩트를 확인해 보는 식의 지성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있다고 하더라도 자극적인 정보가 1순위로 유통되는 현 SNS의 상황에서 그 움직임은 제대로 파악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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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상황에서 누가 먼저 증오를 시작했는지, 피해자와 가해자는 누구인지 따지는 것만으로는 답을 낼 수 없습니다. 이미 사람들은 미워하고 싶은 사람을 미워하고 싶어서 비판할 뿐입니다. 물론 본인들의 철학을 가지며 움직이는 분들도 있겠지만 이미 거대한 흐름 가운데 증오의 논리는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저 저는, 이것이 그저 하나의 담론이 정리되기 전에 있는 혼란의 상태. 폭풍이 그치기 전 가장 맹렬한 상태라고 믿고 싶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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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가운데 배 안의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창고 옆에 자는 돼지가 가장 편한 존재였죠. 어쩌면 입을 닫고 있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일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말해야겠다는 강한 의지를 느낍니다. 이 폭풍은 결국 우리 모두가 같이 만들어낸 폭풍이니. 사회와 함께 살아가는 개인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한다는 생각으로 부족하지만 글을 남겨 봅니다. 인간 사회에 새벽을 만드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의 몫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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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저는 메갈리아 사태와 논쟁에 대한 정확한 입장을 제시하지 않을 겁니다. 입장 제시라고 한다면 “당신은 어느 쪽을 지지하느냐.”라고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을 말합니다. 솔직히 말해 저는 어느 쪽이 옳은지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어느 쪽을 지지하느냐가 이 현상에 답을 전해 줄 거라고 보지도 않고요. 대답을 회피하는 비겁한 선택으로 보실지 모르지만 입장을 정할 수 없는 저로서 말 할 수 있는 건 답이 아니라 그저 뻔한 방법론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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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에 꽂힌 책을 다시 읽게 됐습니다. 작년에 형에게 받은 로지코믹스라는 책인데 논리철학의 역사를 다룬 그래픽노블입니다. 그래픽노블 치고는 글이 엄청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소재가 소재이다 보니 시간을 들여가며 읽을 수밖에 없던 그런 책입니다. 논리철학자들이 발전시킨 논리철학에 대한 이야기인데, 인생에 한 번 꼭 읽어볼 만한 훌륭한 작품이라고 평가합니다. 이 로지코믹스를 인용하며 이번 주제를 이어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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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지코믹스는 버트런트 러셀이라는 논리학자의 인생 여정을 다루면서, 당대 있었던 논리철학의 발전과정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화이트헤드, 비트겐슈타인, 쿠르트 괴델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의 논쟁과정을 지켜볼 수 있는데, 처음 볼 때는 몰랐지만 이때의 대화들이란 지성사적으로 거대한 족적을 남긴, 철학계의 어벤저스와 같은 엄청난 스펙터클이었습니다. 물론 스펙터클이라고 하더라도 학문의 스펙터클이다 보니 그 모양새는 조금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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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나치 독일의 선전포고로 2차 세계대전은 시작 됐습니다. 당시 여전히 경기 불황을 겪고 있던 미국에서는 참전에 대한 반전 여론이 드셌습니다. 이런 가운데 이미 유명한 지성으로 알려졌던 버트런트 러셀에게 사람들은 “참전을 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 당신의 입장을 얘기해 달라.”고 질문을 합니다. 러셀은 답을 결정하는 데 자신의 강연을 들어보면 도움이 될 거라며 시위하는 시민들을 강의실로 들이고 강연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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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내용은 논리철학의 발전 과정이었고 그 중심에 서 있었던 러셀의 인생 여정 또한 내밀하게 보여줍니다. 이런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로지코믹스가 선택한 방식은 액자식 구성입니다. 워낙 방대한 지식을 아우르는 작업이다 보니 총 4명의 작가(아포스톨로스, 크리스토스, 알레코스, 애니)의 합작을 통해 작업이 진행 됩니다.


이들의 대화를 통해 버트런트 러셀의 삶을 살펴보게 됩니다. 버트런트 러셀의 강연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어느 순간 러셀의 인생 여정으로 들어가고 다시 4명의 대화로 갔다가 다시 강연 장면이 나오고... 이렇듯 로지코믹스는 [현재의 대화 – 러셀의 강연 – 러셀의 인생 여정]이 교차되면서 보여주는 2중 액자식 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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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지코믹스는 총 9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8장 불완전성에 가면 논리철학의 클라이막스를 확인하게 됩니다.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을 비롯 수 많은 사람들에 의해 발전된 논리철학이 쿠르트 괴델에 의해 본질적인 불완전성이 있음을 증명하게 되었는데 이는 기존 논리철학의 종지부이자 새로운 시작을 알려준 대목이었죠. 그리고 세계는 점차 2차 세계대전의 광기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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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만화를 읽으며 인상 깊게 봤던 장면을 한 번 공유해 보겠습니다. 러셀의 논리학에 중요한 영향을 준 인물로 고틀로프 프레게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무척이나 철두철미하게 이성을 중시한 인물로 간식으로 나오는 비스켓 수와 식사 시간마저도 규칙적으로 지켜왔던 사람이죠. 그런 그가 후반에 편집증을 겪게 되면서 시작하게 된 작업은 의회민주주의와 외국인, 유대인을 공격하는 광적인 저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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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게의 광기를 다시 읽었을 때 기시감과 함께 답답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물론 모든 논리들이 이런 식으로 극단적인 전개를 보일 리는 없겠죠. 하지만, 논리가 인간성을 담보하는가에 대해서는 깊은 의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논리는 물론 중요합니다. 언어라는 부분을 정교하게 만드는 가장 기초적인 부분이죠.


하지만 인간의 삶이란 언어의 정교함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논리가 다른 대상에 대한 배타성을 가지게 됨으로써 가지게 되는 폭력성, 그것이 집단적인 실체로 발현되는 것을 파시즘이라고 사람들은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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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논리의 불완전성과 한계를 직시한 인물로 비트겐슈타인이 있습니다. 항상 진리에 목말랐던 이 젊은 학자는 인간 언어의 한계를 직시하게 되고 <논리철학논고>라는 희대의 저작을 남기게 되지요. 논리학의 중요한 업무를 마쳤다고 생각한 비트겐슈타인은 스위스 시골의 교사로 일하게 됩니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의 지적수준은 시골 어린아이들이 만족시키기에 너무 높았고, 매번 수업시간이면 체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마을 사람들의 논의 끝에 비트겐슈타인은 교사 자격을 박탈당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아이들의 비이성을 책임지기에는 지나치게 논리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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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을 살펴보면서 저는 많은 질문을 던지게 됐습니다. 프레게와 비트겐슈타인의 사례에서 저는 논리의 폭력성에 대한 의문을 가졌습니다. 어떤 논리는 프레게와 같은 구부러진 인간성을 생성해 냅니다. 구부러진 인간성이란 폭력을 행사하는 인간성을 말하는데, 그렇다면 구부러진 인간성을 해결하는 용도로서의 교육이란...


결국엔 차선책일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인간의 행동양식을 사회에 맞게 변화하는 과정에서 교육이 내포한 강제성과 폭력성을 부정할 수 없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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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가 만들어낸 폭력과 그 논리를 방어하기 위한 차원의 교육. 그러나 둘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인간성을 잃게 되면 폭력만 남게 됩니다. 현재 인터넷의 상황이 딱 그런 모습이지요. 둘 다 논리를 이용해서 폭력을 비판하고 명분을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서로 증오의 논리로 바라보며 적과 나를 구분하는 상황으로 이끌어나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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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저는 “둘 다 논쟁을 그만 하거라. 둘 다 병신이니라.”라는 식의 방관자적 결론을 내리려는 게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논쟁이 더 벌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다만 현재와 같은 증오의 논리를 확장하는데 급급한 방식이 아닌, 말 그대로 서로의 논리를 확인하고(論) 서로의 지식을 확인하며 싸우는(爭), 참된 언어 사용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깊고 넓은 논쟁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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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문제에 대해 러셀은 “문제에 대답을 내는 존재는 당신이다.”라는 말로 강연을 마칩니다. 사회는 정교한 합의체가 아닙니다. 얼기설기한 개인 관계의 집합이지요. 그런 관계가 조밀해지기 위해서는 결국 충분한 대화와 논의 과정을 담보로 합니다. 그런 논의 과정 없이 지난 세월을 지내왔고, 그것이 하나의 문제로 터지게 됐습니다.


결국 문제 해결의 왕도는 없습니다. 서로의 입장을 보고 논의하는 과정을 통해 사고를 확장시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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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지코믹스의 마지막장에는 연극 오레스테이아의 피날레를 보여줍니다. 지혜의 여신 아테나는 복수의 여신들과 재판을 열게 됩니다. 살인자 오레스테스에 대해 복수의 여신들은 죽음을 주장하지만 최종 선고를 하게 된 아테나는 무죄를 선고하게 되지요. 복수의 여신들은 분노하며 아테나에게 항의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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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나가 복수의 여신들에게 제안한 내용은 “함께 이 아테네를 이끌어 나가자.”였습니다. 반대 의견을 가진 상대에게도 지혜와 권력을 나눠가지게 되어 아테네는 더욱 강하고 지혜로워졌습니다.


그런 사회를 만드는 과정은 쉽지 않습니다. 직접 해 본 논쟁 과정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움의 연속이더군요. 그래도 조금 더 용기를 냈으면 좋겠습니다. 확실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조금 더 검색해 보고, 검색해 봐도 시원찮으면 직접 한 번 조사를 해 봅시다. 자신의 지혜가 항상 최선일 수는 없다는 그 전제를 염두에 두면서 지혜로운 자가 되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배워나가도록 합시다.


모두를 지혜롭게 만드는 건, 우리 스스로의 몫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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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켈켈박사


편집 : 딴지일보 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