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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은 차(茶) 때문에 일어났다. 무슨 뜬금없는 이야기인가? 그렇지만 그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니다. 차는 두 번이나 세계사를 바꾸어놓았다. 한 번은 아편전쟁이고 또 한 번은 미국 독립전쟁이다. 유럽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기호식품 중 하나가 차인 것은 대부분 아는 이야기이다. 이 차가 주로 중국에서 수입된다는 것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차하면 중국 아닌가? 그 차가 제국의 식민지배 전쟁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옥순이 쓴 <인도현대사>를 보면 아편전쟁의 정황을 대충 그려볼 수 있다. 영국에서 차가 크게 유행하면서 막대한 국부가 유출되었다. 그러자 영국 정부는 차 수입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인도의 벵골지역에 아편을 재배해 그것을 중국에 팔았다. 그리고는 그 돈으로 영국으로 차를 수입해갔고, 또 영국에서 생산된 직물을 인도에 팔았다. 즉, 차-아편-직물의 삼각무역을 하였다.

 

아편전쟁 무렵 중국인 중 아편 상용자가 1200만 명이었으며 영국이 판 아편의 양은 1844년에 무려 약 300만 kg이었다. 한 마디로 중국인들은 영국의 인도 지배를 위해 필요한 희생물이었다. 1840년에 일어난 중국과의 아편전쟁은 영국 식민주의의 그런 연장선상에 있었다. 견디다 못한 청나라가 아편 수입을 규제하자 그것을 빌미로 영국이 일으킨 전쟁이 아편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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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제국에 대해 가끔 환상을 갖는다. 제국은 나쁘지만은 않다. 제국은 식민지들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말이다. 그러나 어떤 논리를 끌어들이더라도 제국은 본질적으로 악하다. 제국은 타민족에 대한 수탈체제이다. 제국은 항상 천문학적인 식민지 지배 비용을 식민지 자체에서 조달한다. 거기에다 본국을 위해 막대한 이익까지 챙겨야 한다. 그러므로 식민지에 대한 수탈은 필연적이다. 제국이 식민지를 수탈하기 위해 만들어 쓰다가 버리고 간 공장과 철도 같은 시설들이나 제도가 식민지에 일정한 도움을 주었다고 해서 식민 지배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제국은 식민지만 수탈하는 게 아니다. 제국은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자국민도 수탈한다. 아사오 나오히로(편)의 <새로 쓴 일본사>에 따르면, 일본제국은 1931년에 일으킨 만주사변에서 1945년의 제2차 세계대전 패전 때까지의 15년 전쟁으로 310만 명의 일본인들과 2000만 명의 아시아인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침략한 이후 16세기부터 서구 열강들은 비유럽 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으며 그 와중에 남미와 아시아와 아프리카가 차례로 유럽 국가들과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독립전쟁 무렵 미국은 식민과 피식민이 첨예하게 얽힌 이중 식민지였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백인들은 그곳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을 상대로 식민주의적 팽창 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모국인 영국을 상대로 독립운동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인디언은 식민지인 미국의 내부 식민지의 피식민지인으로 전락했다. 미국의 독립은 이런 모순 속에서 배태되었다.

 

우리가 미국의 독립이라 할 때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독립과는 다르다.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독립국가로 존속해오다가 근대에 와서 잠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후 1945년에 해방을 맞이했다. 유대인들은 2천 년 가까이 나라 없이 유럽을 떠돌다가 1948년에 미국을 등에 업고 팔레스타인 땅을 탈취해 나라를 세웠다. 반면에 미국은 주로 영국인들이 아메리카에 건너가 인디언을 학살하고 그곳에 정착한 후 모국인 영국에서 떨어져 나왔다.

 

18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식민지 미국의 사정은 영국에 비해 그리 나쁜 편이 아니었다. 경제적으로 영국보다 여유가 있었고, 정치적 자유도 더 많이 주어져 있었으며, 신분차별도 별로 없었다. 식민지들은 영국의 지배하에 있긴 했지만 식민지마다 영국 의회를 모방한 독자적인 의회를 가지고 있었으며 영국의 직접적인 간섭은 별로 없었다. 그러므로 식민지인들이 특별히 독립을 바랄만한 요인이 없었으며, 실제 독립에 관심을 가진 식민지인도 거의 없었다. 그런 영국의 북아메리카 식민지가 18세기 중반에 갑자기 독립을 꿈꾸게 된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영국과 프랑스가 벌인 일련의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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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프랑스는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패권을 두고 오랫동안 서로 경쟁하는 관계였다. 프랑스는 버지니아에 영국 식민지 제임스타운이 건설된 다음 해인 1608년에 이미 지금의 캐나다 퀘벡에 식민지를 개척했다. 그들은 영국인들과는 달리 원주민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그들의 관습을 존중했기 때문에 아메리카 내륙 깊숙이까지 진출해 원주민들과 교역하고 선교할 수 있었다. 그런 가운데 17세기 말에 프랑스 탐험대가 지금의 미국 중부 지역의 광활한 땅을 탐험해 루이 14세를 기려 루이지애나라는 이름을 붙이고 프랑스 식민지로 삼았으며, 그 후에도 루이지애나 주변의 많은 지역을 식민지로 개척했다. 그 면적이 우리나라 남북한을 합친 것보다 열 배가 넘는다. 프랑스가 미국 땅에 개척한 대표적인 도시가 1718년에 미시시피 강 하구에 세운 뉴올리언스로 그곳에 거주한 프랑스계 백인들은 크리올(Creoles)로 알려지게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식민지 쟁탈전에도 불구하고 17세기 말까지는 비교적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 세기가 끝날 무렵부터 영국과 프랑스는 유럽에서 간헐적으로 충돌하게 되었으며 그 여파가 식민지에까지 밀려들었다. 특히 1701년부터 12년간 벌어진 '앤 여왕의 전쟁'으로 영국은 남부에서는 스페인과 싸우고 북부에서는 인디언과 합세한 프랑스와 싸워야 했다. 또한 1744년부터 48년까지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벌어진 '조지 왕의 전쟁'에 미국 식민지도 원치 않게 끌려들었다. 이런 계속된 전쟁으로 인해 그동안 비교적 평온하게 유지되던 영국과 프랑스와 인디언 사이의 세력균형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1756년에 오하이오 계곡에서 프랑스 군대와 영국군대가 충돌하면서 영국은 프랑스와 북아메리카의 패권을 두고 '프렌치-인디언 전쟁'이라고 불리는 7년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이 전쟁은 카리브 해, 인도, 유럽으로까지 확대되었지만 북미대륙에서의 싸움이 가장 치열했다. 영국은 그 물러설 수 없는 전쟁에서 마침내 승리해 북미대륙의 패권을 차지했다. 프랑스는 1763년에 체결한 평화조약으로 캐나다와 카리브 해와 인도에 있는 대부분의 식민지를 영국에 양도했으며, 미국 대륙의 미시시피 강 이동의 식민지도 영국에 양도했다. 사실상 아메리카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은 끝이 났다.

 

그 전쟁은 영국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식민지 사이에 깊은 불신과 분열을 낳았다. 영국은 식민지가 전쟁 중에 지원을 제대로 하지 않고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했다고 비난했으며, 식민지는 식민지대로 전쟁 중에 본국이 식민지인들을 마음대로 징집하고 식민지인들에게서 전쟁 물자를 강제로 조달받고 민가에 임의로 군대를 주둔시킨 것에 불만을 품었다. 또한 영국이 프랑스로부터 양도받은 광활한 땅에 대해 식민지와 영국은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대립했다. 식민지는 늘어나는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영국이 새로 양도받은 애팔레치아 산맥 서쪽 지역으로 진출하기를 바랐지만 인디언과의 관계를 염려한 영국 정부는 그것을 반대했다. 무엇보다도 영국 정부는 오랜 전쟁으로 막대한 재정 적자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식민지에 이런저런 명목으로 과세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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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독립할 무렵인 18세기 중엽에 영국 인구는 600만이 조금 넘은 반면에 미국 인구는 200만이 넘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영국이 그 당시 새삼스레 미국에 눈독을 들인 이유를 이해할 만하다. 한 마디로 식민지를 쥐어짜면 먹을 것이 나온다는 계산을 했을 것이다. 목이 타면 마른 수건이라도 짜야 하는 법이니까 말이다.

 

저항의 시발점은 1764년의 '설탕법'이었다. 프랑스와의 7년 전쟁이 끝난 1763년에 영국 정부의 부채는 1억3000만 파운드에 달했다. 부채를 갚기 위해 영국은 식민지에 들어오는 설탕, 포도주, 직물, 커피 등에 관세를 부과해 식민지인들의 분노를 샀다. 다음 해인 1765년에는 '인지세법'을 제정해 식민지에서 나오는 신문, 팸플릿, 계약서, 대학 졸업장 등에 인지를 붙이도록 해 영국 상품에 대한 불매운동을 포함한 더 큰 저항을 낳았다. 특히 이 인지세법은 영국이 식민지에 과세하는 것의 정당성에 대한 논란을 일으켰다. 즉, 미국 식민지는 영국 의회에 대표를 파견하고 있지 않으므로 영국 의회는 식민지에 과세를 할 권한이 없다는 것이었다. '대표 없는 곳에 과세는 없다'는 논리였다. 이런 주장에 대해 영국은 국회의원은 선거구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전국을 대표하므로 당연히 영국의회는 제국 안의 어떤 식민지에도 세금을 부과할 수 있다고 맞섰다.

 

인지세법은 식민지인들의 거센 저항으로 1767년에 사실상 폐지되었지만 그 대신 같은 해에 영국은 타운센드 법을 제정했다. 그 법은 영국으로부터 식민지에 수입되는 차, 종이, 유리, 납, 페인트 등에 관세를 부과했다. 그 돈으로 식민지 관료들의 월급을 주려 한 것이다. 게다가 1763년에는 식민지인들이 애팔래치아 산맥 넘어 서쪽 지역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았으며, 1765년에 영국은 '숙영법'을 제정해 영국군대의 식민지 주둔 비용을 식민지에 떠넘겼다.

 

이런 영국의 일방적인 경제적 수탈과 간섭에 분노한 식민지인들이 1770년 보스턴에서 영국군과 충돌해 시위자들 중 4명이 총에 맞아 죽고 8명이 부상당했다. 이른바 보스턴 학살사건이다. 그 사건은 일부 부두 노동자들이 관세청에 돌을 던지면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었지만 선동가들의 활동으로 인해서 영국에 대한 식민지인들의 불신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겉으로는 잠잠했지만 밑에서부터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영국이 1773년에 차세법(Tea Act)을 제정하면서 영국과 식민지의 관계는 사실상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극동무역을 독점하고 있었는데 차의 재고 누적으로 파산에 직면해 있었다. 이에 영국 정부는 동인도회사를 살리기 위해 그 회사에 무관세로 식민지에 직접 차를 수출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그것은 사실상 동인도회사가 식민지에 차를 독점적으로 판매할 수 있는 특혜를 부여한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차를 수입해 판매하던 식민지 상인들이 피해를 입게 되었다. 가뜩이나 그사이 온갖 형태의 세금을 부과하는 데 불만이 있던 식민지인들은 동인도 회사만 관세 면제 혜택을 받고 식민지 상인들은 관세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 조치에 항의한 150명의 보스턴 시민들이 마침내 11월 말 밤에 보스턴 항구에 정박한 동인도 회사의 배에 올라가 차를 모두 바다에 던져버렸다. 그것이 유명한 보스턴 차당(Tea Party)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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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으로 인해 영국 정부는 보스턴 항구를 폐쇄하는 강경책을 쓰게 되었으며 그것이 오히려 식민지인들을 단결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항의에서 식민지인들이라고 그렇게 정의롭지는 못했다. 시위대는 배를 습격하면서 인디언으로 변장했다. 자세한 이유야 알 수 없지만 혹시라도 잘못되어 문제가 생기면 그 책임을 인디언에게 떠넘기려는 의도였을지 모른다.

 

아무튼 이 사건을 계기로 식민지인들은 다시 영국 상품 불매운동을 벌였다. 이 운동은 차를 주로 구입하는 여성들이 주도했다. 그들은 "우리는 자유를 위해 차를 끊겠다"고 외치며 불매운동에 앞장섰으며, 그때부터 미국인들은 차 대신 커피를 더 즐겨 마시게 되었다. 하나의 사건이 미국인들의 기호식품마저 바꾸어놓은 셈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영국과 미국 식민지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이제 남은 것은 총성이었다.

 

영화 <라스트 모히칸>(1992)은 바로 영국과 프랑스-인디언 연합군 사이에 벌어진 7년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때는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인 1757년이다. 이야기는 조지 호 근처에 있는 영국의 윌리엄 헨리 요새로 사령관인 아버지를 찾아가는 두 딸 앨리스 먼로와 코라 먼로의 여정에서 시작된다. 그들은 가는 도중에 길잡이인 인디언 마구아의 배신으로 그 부족의 기습을 받아 수행원이 몰살당하고 두 자매와 던컨 소령만이 어디선가 나타난 내티 범포와 인디언인 칭가추크와 웅카스 일행의 도움으로 살아나 요새로 간다. 그러나 그 요새는 곧 프랑스-인디언 연합 군대의 공격을 받게 되어 영국군은 항복하고 철수한다. 그러나 도중에 프랑스의 암묵적인 동의를 받은 마구아가 이끄는 휴런 족 인디언의 기습으로 전멸한다. 자매와 던컨 소령은 또 다시 내티 일행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지만 결국 휴런 부족 마을에 끌려간다. 그곳에서 던컨 소령은 산 채로 화형을 당하고, 앨리스는 자살하고 코라는 내티 일행에게 구출된다. 마구아는 웅카스를 살해하지만 결국 칭가추크에게 살해당한다.


이 영화는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 동안 영국 식민지 군과 미국 민병대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다. 식민지인들은 영국의 강요에 의해 마지못해 전쟁에 끼어들지만 그들의 관심은 그 전쟁이 아니라 가족의 안위이다. 영국과 식민지의 갈등 못지않게 이 영화는 프랑스와 영국, 인디언 종족들 상호 간, 인디언과 영국 사이의 복잡한 갈등양상까지 보여준다. 그러나 정작 영화는 인디언 잔혹사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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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 인디언 마구아가 백인들에게 보이는 거의 맹목적일 정도의 냉혹함과 잔인함은 사람들을 소름 끼치게 만든다. 심지어 마구아는 영국 요새의 사령관을 살해하고 그 심장을 도려내 보란 듯이 들어 올린다. 또한 휴런족 인디언들이 기습 공격으로 백인들을 칼로 무자비하게 살해할 때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 벌거벗은 '야만인'들에 대한 공포와 증오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에서 백인인 영국인들과 프랑스인들은 문명인이고 인디언은 야만인이다. 백인들은 서로 당당하게 싸우는 반면에 인디언은 야비하게 기습 공격을 해 무고한 양민까지 학살한다. 전쟁 장면에서도 백인들 사이의 충돌장면은 가능한 카메라에서 멀리 두어 그 폭력성을 완화시킨다. 반면에 인디언이 칼로 적을 찌르고 목을 벨 때는 장면을 최대한 카메라에 가득 채워 잔인함을 극대화한다. 심지어 마구아 일행은 포로로 잡은 던컨 소령을 산 채로 불태워 죽인다. 그러나 사람을 산 채로 불태워 죽이는 것은 중세 이래 백인의 관습이지 인디언의 관습이 아니다. 그런데 영화는 그런 장면을 슬쩍 끼워 넣어 인디언의 잔혹함을 강조한다.

 

이 영화에서 총과 대포를 동원한 백인의 폭력은 축소되고 칼로 가하는 인디언의 폭력은 극대화되어 있다. 정말 총이나 대포와 활과 칼 중 어느 게 더 폭력적일까? 답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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