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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한 기억이 하나 있다. 5~6년 전 쯤의 일이다. 퇴근길이었지만 한여름이라 해는 아직 넘어가지 않은 시간이었다. 살고 있는 아파트 후문을 통해 귀가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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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선생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누군가 부르는 말에 고개를 돌렸다. 키 작은 할머니 한 분이 나를 올려다보고 계셨다. 선생님이라니, 고작 마흔 조금 넘은 내 나이도 그렇지만, 연세가 나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할머니가 나에게 붙이기에는 어색한 호칭이었다.


“저 말입니까? 무슨 일 때문에 그러세요, 할머니?”


주위를 한번 둘러본 나는 할머니를 향해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


“선생님, 미아5동 동사무소가 어딘지 아세요? 혹시 아시면 좀 가르쳐주시겠습니까?”


또 선생님 호칭이다. 부담스럽다. 미아5동 동사무소라면 멀지는 않은 곳이다. 무슨 일일까?


“예, 할머니. 이 근처인데 왜 그러세요? 그곳은 왜 찾으시는데요? 알려드려요?”


“네, 선생님. 그쪽에 저희 집이 있는데, 5동 동사무소 옆 놀이터까지만 가면 제가 집을 쉽게 찾는데, 오늘은 길을 잃은 모양입니다. 여기서 어떻게 가야 하는지 설명을 좀 해주시겠습니까?”


이 할머니, 동네에서 너무 멀리까지 오셔서 길을 잃고 집을 못 찾으시는 모양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분 말씀하시는 게 참 점잖다. 자연스럽고 정중한 선생님 소리 때문이기도 하고, 깍듯하게 경어를 쓰는 말투가 그렇다. 입고 계신 옷도 예사스럽지 않다. 여름에 모시적삼을 입는 거야 그렇다 쳐도 빳빳하게 풀까지 먹인 옷이라니. 저렇게 반듯하고 깔끔하게 다린 옷을 본 게 얼마만인지 모른다. 드문 옷차림이다. 곱다.


“할머니, 여기서 걸어가시기는 좀 멀구요. 차 타시기도 그렇고… 혹시 집에 누구 없으세요? 손자 분이나 누가 있으시면, 전화번호 갖고 계시면 줘보세요. 제가 전화를 해볼게요.”


성인 남성의 걸음으로 가도 20분은 걸리는 길이었다. 연세 드신 분이 걷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버스를 타려 해도 오히려 반대쪽으로 한참 나가야 한다. 노인에게는 쉽지 않은 길이다. 택시도 불안하고, 아무래도 누군가 와야 할 모양이었다.


“아닙니다, 선생님. 제가 찾아갈 수 있습니다. 길만 한 번 잘 알려주시면 제가 가겠습니다.”


할머니의 표정과 말투는 단호했다. 나도 모르게 뭔가 기분을 상하게 해드렸나 싶어 조심스러워진다. 할머니의 말을 듣기로 했다. 길을 설명하는 일이 쉬워 보이지는 않지만, 몇 번을 반복해가며 갈 수 있다고 하시니 알려드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천천히 설명해 드릴 테니 잘 들으세요, 할머니.”


“예, 고맙습니다, 선생님.”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나는 양 손을 휘두르며 목소리를 크게 해 길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후문 경비실의 아저씨가 밖으로 나와 우리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십 분 혹은 십오 분쯤 흘렀을까? 나는 지쳐버렸다. 할머니는 설명을 좀처럼 알아듣지 못했다. 처음에는 한 마디 한 마디 야무지게 반응하며 내 말을 되새겼지만, 이야기가 1분을 넘어가면 쉽지가 않았다. 그 전의 이야기를 다시 물었고, 반복해 이야기를 해드려도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되묻곤 했다.


그것의 반복이었다. 할머니에게 집중하느라 몰랐지만 언젠가부터 경비아저씨는 조심스런 손짓으로 나를 부르는 중이었다. 내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뒤늦게 발견한 나는 아저씨에게 다가가 그의 얘기를 들었다.


잠시 후 나는 할머니에게 다시 가 머뭇거리며 인사를 한 채 도망치듯 엘리베이터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경비아저씨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저 할머니, 치맵니다. 그냥 가세요.”


경비아저씨의 말에 따르면, 오래 전부터 한 번씩 나타나는 분이라고 했다. 예전에 이 동네에서 사신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몇 시간씩 동네를 배회하는 모습을 볼 때가 있다고 했다. 그런 후에는 방금 전과 같은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어두워질 시간이 되거나 저녁 먹을 때쯤이 되면, 자식이나 손자로 보이는 분들이 혹은 경찰 분들이 찾아와서 익숙한 몸짓으로 모시고 간다고 한다. 할머니도 거부감 없이 자연스레 같이 가신다고 한다. 만일에 대비해 연락처가 표시된 목걸이와 팔찌들도 할머니의 몸에 잘 붙어 있다고 한다.


여러 해가 흘렀지만 길바닥에 검게 달라붙은 오래된 껌딱지 마냥 머릿속의 그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 날이고 느닷없이 한 번씩 떠오르는 기억이었다. 기억은 그 자리에만 머무르지 않고, 때로는 할머니의 젊은 날을 짐작하게 만들기도 하고, 당신의 자식들을 상상하게 하기도 했다.


할머니는 배운 분이지 싶다. 여고를 고녀라 부르던 오래 전, 그 시대에 적어도 이화나 숙명고녀쯤은 나오셨을 것 같다. 내 어머니 또래의 여성들이 초등학교 조차 겨우 나왔을 법한 그 결핍의 시대에 어쩌면 대학까지도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내 마음대로 짐작해보는 학력에 걸맞게 혹은 그것과 상관없이도 당신은 평생을 겸손하고 예의바르게 살아오셨을 것이다. 적어도 누군가에게 해를 끼친다거나, 상대에 따라 무례하다거나 함부로 대하는 삶은 안 사셨을 것 같다. 그분의 말투와 태도에서 느꼈다. 물론 내 짐작일 뿐이다. 그리고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어떤 인품을 지니고 일생을 살아와야 치매 상태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걸까.


상상은 날개를 단다. 할머니의 자식들은 잘 배우고 바르게 성장한, 그야말로 보기 드문 훌륭한 분들일 것 같다는 생각이 이어진다. 어린 시절 보았던 드라마 <전원일기>가 생각났다. 최불암이 연기한 극중의 김 회장처럼 효성 지극한 분들일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치매 걸린 어머니의 옷차림을 저렇게까지 정성껏 챙기고, 혹시라도 길을 잃으실까봐 이런저런 신경을 써놓은 걸 보면 알 만하다 느꼈다. 어머니를 무척 사랑하는 분들일 거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다. 그만큼 단정한 할머니였다.


노인병원으로도 불리는 요양병원에 가볼 일이 몇 차례 있었다. 오래 되지 않은 일들이다. 요양병원을 다녀온 다음이면 늘 얼마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짧은 몇 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곳의 풍경이 그렇게 만들었다.


대부분의 요양병원에는 공통점이 있다. 가장 높은 층은 중증 환자들에게 배당된 공간이다. 하늘과 죽음에 가장 가까이에 누워 있는 이들, 병과 노환이 몸을 거의 갉아먹어버린 탓에 거동이 불가능한 노인들이, 벗겨진 아랫도리에 기저귀를 깐 채 20~30여 명씩 누워 있는 방들의 풍경은 슬펐다. 양쪽으로 나란히 줄지어선 삼십여 개의 침대가 죽음의 통로를 향해 나아가는 컨베이어 벨트처럼 느껴졌다.


위생과 관리를 위해 머리를 박박 밀고 하의가 벗겨진 채 앙상한 몸으로 수액을 맞고 있는 할머니들의 모습은 서글펐다. 속수무책으로 노출된, 지켜지지 못하는 그들의 자존심이 안타까웠다. 죽음을 기다리는 마지막 삶이었다. 죽기 위해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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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다시 건강해지기를 바라는 이들이 얼마나 있을까하는 생각에 더욱 더 우울해졌다. 언제부터일까? 장수가 미덕인 삶이 이제는 그리 많지 않아 보였다.


층이 낮아질수록 노인들의 상태는 조금씩 나아졌다. 중간층들에서 생활하는 경증 질환 노인들의 공간을 지나 가장 낮은 층에서 생활하는 노인들은 요양병원에서 비교적 젊고 건강한 축에 속했다. 거동이 어느 정도 가능하고 의사소통이 자연스러운 이들이었지만, 그래봐야 결국 똑같았다.


병세가 호전된다고 해서 그들이 퇴원하는 경우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그들은 위층으로 올라갈 날을 향해 살아가고 있었고, 또한 그 위층의 노인들은 가장 위층으로 올라갈 날을 향해 하루하루를 겪어내고 있었다. 요양병원의 노인들은 마치 죽기 위해, 죽으려고, 마지못해 살고 있는 사람들 같았다. 부모들의 층수를 확인하기 위해 가끔씩 자식들이 찾아왔다.


부산의 시인 김언이 쓴 글이 생각났다.


<봄날의 노인병원>


늙어가면서 주름이 깊어가는 건 얼굴만이 아니다. 칠십 평생 노구를 이끌어 온 그 정신에도,
골 깊은 주름이 새겨지면서, 이상하게 골짜기를 만든다. 정신의 어디쯤일까?
뿌리 깊은 기억까지 다 잡아먹는 깊고도 어둑한 그 골짜기에서
우리는 난처한 병명과 마주한다.


제 부모를 요양병원이나 노인병원에 모셔다 놓고 오는 그 길만큼 또 긴 길이 있을까?



경기도 방면의 여러 산 속에 자리 잡은 요양병원을 찾아가는 길에서 영구차를 마주치는 일은 흔했다. 요양병원이 몰려 있는 탓이었다. 요양병원에서의 삶을 마치고 그곳을 떠나는 고인들이었다. 나와는 관계없는 누군가의 영구차를 만날 때마다 누군가에게 속으로 축하를 건넸다. 그들 생의 마지막 집, 요양병원을 떠나는 것에 대한 축하의 의미였다. 고인들도 그것을 원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것 같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이든 부모를 요양병원으로 모시는(?) 자식들을 곱게 보지 못했다. 타인의 일이라 입 밖으로 내기는 힘들어도 심사가 편치 않았다. 저마다의 상황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싶었지만 불편했다. 솔직한 마음이었다.


자식보다 부모들이 요양병원 행을 원한 경우가 더 많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불편한 마음은 여전하다. 지금은 어떤가? 요양병원에 대해 부정적인 나의 생각은 여전한가? 잘 모르겠다. 그리고 자신 없다. 이것 또한 솔직한 마음이다. 다분히 경멸 섞인 시선으로 부모를 요양병원에 의탁하는 타인들을 보았던 내가, 몹시 부족한 사람이라는 사실만을 뼈아프게 반복해서 확인할 뿐이다.


살아오며 보니 나보다 못한 이는 없었다.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이나 불효의 안타까움이 효도는 아니듯, 삶의 여러 숙제들은 말이나 감정만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머니가 갑자기 발음이 어눌해지고 말하는 게 어렵다고 하셨다. 깜짝 놀라 병원에 모시고 갔다. 짐작대로 병원에서는 머리의 MRI 촬영과 치매 검사를 권했다. 곧장 예약을 하고 얼마 후 검사를 받았다. 신경과 의사는 MRI 검사 결과, 어머니의 뇌에 가벼운 뇌졸중이 지나간 흔적이 보인다고 했다. ‘다행’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어진 치매 검사. 치매 검사는 상담사와의 1대 1의 문진으로만 한 시간여 동안 이루어진다고 한다. 나는 진료실 밖의 의자에 앉아 기다려야 했다.


‘내 엄마가 치매라면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할까? 서울로 모시고 가야 하나? 내가 모시고 살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할까? 아내는 동의할까? 아이들은 어떡하지? 만약 치매가 심각하게 진행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치매를 심하게 앓는 엄마를 내가 혐오하게 되지는 않을까? 그런 엄마를 과연 사랑할 수 있을까? 내가 참고 견뎌낼 수 있을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내 엄마를….’


단지 말이 좀 불편해졌을 뿐인 어머니를 검사실 문 안쪽에 두고 나는 몹쓸 생각들을 했다. 살아오며 어머니를 위해 아무 것도 해본 적이 없는 주제에, 어머니의 치매에 대해서는 재빠르게 반응하고 여러 가능성을 고려하는 내가 우스웠다. 결국 내 자신이 힘들어질까 걱정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생각은 다시 꼬리를 물었다. 얼마 전에 보았던 치매 할머니가 떠올랐다. 어차피 걸려야 할 치매라면 내 어머니도 그 할머니처럼 곱게(?) 걸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비록 치매에 걸렸다 한들, 점잖고 고상한 태도가 몸에 밴 치매 환자가 되었으면 싶었다.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 화들짝 놀랐다. 어머니는 평생을 고단하게 살아온 사람이었다. 고생을 벗으로 알고 살아 왔다. 어머니는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이였고,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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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검사를 마치고 나온 어머니가 내게 건넨 첫 마디는,


“점심시간이 지났는데 네가 밥을 못 먹어 어떻게 하냐.”


였다. 나는 나 자신을 걱정하는 사이에 어머니는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몹쓸 자식 놈이었다, 나는.


치매의 검사 결과는 안심단계였다. 별 문제가 없다고 했다. 다행이었다. 어머니는 당신과 자식에게 다행이었고, 나는 나에게 다행이었다. 자식이란 고작 이런 것일까? 이렇게 이기적인 것인가 생각을 하면서 어머니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병원을 나와 어머니를 모시고 늦은 점심을 먹었다. 당신의 치매 걱정을 덜고, 당신 아들의 입에 밥이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어머니의 얼굴이 편해지셨다.


어머니가 치매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사시다 돌아가셨으면 하는 마음이다. 하지만 설사 치매에 걸린다 하더라도 내 어머니의 모습으로 그것을 앓았으면 한다. 내 엄마의 모습으로. 그게 좋겠다.





아직은투아웃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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