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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05. 09. 목요일

산하



 

 

 

 

강소천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시는지.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열에 두 셋일 테지만 그의 작품을 들이대면 장담컨대 열 명 전부 아! 그 사람이야? 하면서 고개를 상하로 크게 끄덕일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을 만난다면 다이얼 111을 돌려 국정원에 간첩 포상금 신청해도 된다. 그는 이 노래들의 작곡가다.



“토끼야 토끼야 산속의 토끼야. 겨울이 되며는 무얼 먹고 사느냐. 흰 눈이 내리며는 무얼 먹고 사느냐.” 


“코끼리 아저씨는 코가 손이래 과자를 주면은 코로 받지요.”



 내친김에 더 가보자. ‘한겨울에 밀짚모자 꼬마 눈사람’을 우리들에게 선물한 것도,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고 꼬마들로 하여금 떼창을 하게 했던 이도 강소천이다. “옥속에 갇혔어도 만세 부르다 푸른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라는 슬픈 유관순을 노래한 이도 같고 ‘부모님의 은혜’와 늘상 헛갈리는 노래이면서 한국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노래 중의 하나인 (존경하는 스승 없는 사람은 예외) ‘스승의 노래’도 강소천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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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강소천이 어느 정도로 대한민국 사람들의 동심에서 어느 정도의 영역을 차지하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는 함경도 고원의 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후일 공산 정권의 탄압을 받고 월남한 것으로 미뤄 기독교 집안에 더하여 꽤 유복한 환경이었던 듯 싶다. 그의 어린 시절 벗 가운데 유명한 사람이 오리 전택부다. YMCA 총무와 사상계 주간을 지냈고 추억의 토크쇼 <사랑방 중계>에서 영화 평론가 정영일과 원종배 아나운서와 호흡을 맞췄던 그분. 이분은 조선 학생 차별대우에 항의하여 스트라이크를 조직했던 강골이었지만 그 친구 강소천은 이렇게 부드러운 동시로 일제에 반항한다.



이 몸은 무궁화에 벌이랍니다 /고운 꼿 피여나라 노래부르며

 

이꼿서 저꼿으로 날러다니는 / 조고만 무궁화에 벌이랍니다.

 

이 몸은 무궁화에 나비랍니다 /고운 꼿 피여나라 춤을추면서

 

이꼿서 저꼿으로 날러다니는 / 조그만 무궁화에 나비랍니다. 


(하략 - 무궁화에 별나비 중)



대한제국 애국가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이 등장한 이래 무궁화는 금기어에 가까운 단어였다. 무궁화 보급 운동을 폈던 남궁억이 고초를 겪은 일이야 다 아는 일이지만 일제는 “보기만 하면 눈에 핏발이 선다”는 헛소문까지 퍼뜨리며 옛 나라의 상징 무궁화의 기억을 즈려밟으려 들었던 것이다. 그 시절에 ‘무궁화’를 노래한다는 것은 심약하기만 한 사람으로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재미있는 일화 하나. 친구 전택부는 강소천이 누군가를 평하며 “아직 거칠기는 하지만, 매우 좋다.”고 표현한 적이 있다고 한다. 강소천의 영향을 받아 동시를 끄적이던 강소천보다 두 살 연하의 문학청년. 그는 윤동주였다.



해방 이후 함경북도 청진에서 교편을 잡았지만 그의 출신성분은 북한 정권에서 그다지 플러스 요인이 못되었다. 기독교인에 대지주 집안. 국군과 UN군이 북진했다가 급히 후퇴할 때 그 역시 필사적인 철수에 동참하고 ‘눈보라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서 기적적으로 LST에 올라탔던 피난민 중의 하나가 된다.



강소천이 초주검이 되어 상륙한 것은 거제도였다. 지주의 아들로 커서 분필만 잡았던 이 서생은 살기 위해서 무엇이든 해야 했다. 그 절박한 생존의 위기에서도 그는 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건 밝게 뛰어노는 아이들. 그 해맑은 미소를 가까이에서 보려고 학교에 찾아가지만 교장 선생이 뒷덜미를 잡는다. 그때 어영부영 이름을 밝히게 됐을 때 교장은 깜짝 놀란다. “강소천 선생님이십니까?” 놀란 것은 강소천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도 나를아는구나! 강소천은 다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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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남에 정착하고 다시 글을 쓰게 됐지만 언제까지나 그의 관심은 어린이들을 위한 노래와 동화였다. 그의 일생을 관통하는 단어는 ‘어린이’였다. 어른들이 벌인 전쟁통에 산산조각난 동심들을 어루만지고 다독이고 어깨를 두드리고자 하는 것이 그의 작품 활동의 목표였다. 


“어린이의 자유스런 성장과 발전을 돕기 위해서 아동문학가는 좋은 작품으로 꿈을 일깨워주고 용기를 북돋워 주어야 한다.”


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의 친구 최태호에 따르면 강소천은 항상 어린이들의 생활과 심리를 연구했다. 함께 얘기하고 글짓기 작품을 열심히 읽고 아동 심리 관련 도서를 읽고 아동 전문가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읽힌 뒤 비평을 요구했다고 한다. 또 어린이들이 읽을 수 있는 쉬운 글과 표현에 '병적일만큼‘ 집착했다니 그야말로 어린이를 위한, 어린이에 의한 동화와 노래를 위해 강소천이라는 돌을 스스로 다듬고 깎아 냈던 것 같다. “도대체 아이들에게 왜 어려운 한자를 가르치는가. 우리 글처럼 쉽고 아름다운 글이 어디에 있다고!” 그는 당연히 한글 전용 찬성론자가 된다.



전쟁과 복구, 가난과 시련의 1950년대 전국에는 고아들이 넘쳐났고 장바닥의 시레기 한 줄기를 가지고도 굶주린 부랑아들간에는 혈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동생 업은 열 살 소녀가 시장바닥에서 구걸했고 빵을 훔쳐서는 두들겨 맞으면서도 입에 구겨 넣고 우물거리며 씹으며 우는 아이들도 흔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강소천은 어린이 헌장을 작성한다. 그는 마치 작품 활동을 하듯 꼼꼼하게, 정성스럽게 글의 바느질을 완성한다. 그리고 이는 1957년 5월 5일 한국동화작가협의회의 이름으로 발표된다.



“어린이는 인간으로서 존중하여야 하며 사회의 한 사람으로서 올바르게 키워야 한다.

 

어린이는 튼튼하게 낳아 가정과 사회에서 참된 애정으로 교육하여야 한다.

 

어린이에게는 마음껏 놀고 공부할 수 있는 시설과 환경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어린이는 공부나 일이 몸과 마음에 짐이 되지 않아야 한다.

 

어린이는 위험한 때 맨 먼저 구출하여야 한다.

 

어린이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악용의 대상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굶주린 어린이는 먹여야 한다. 병든 어린이는 치료해주어야 하고, 신체와 정신에 결함이 있는 어린이는 도와주어야 한다. 불량아는 교화하여야 하고 고아나 부량아는 구호하여야 한다.

 

어린이는 자연과 예술을 사랑하고 과학을 탐구하며 도의를 존중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어린이는 좋은 국민으로서 인류의 자유와 평화와 문화발전에 공헌할 수 있도록 키워야 한다.“



일평생 어린이를 사랑했던 그는 말년에 가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자아냈던 고향에 대한 강렬한 향수를 드러낸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꿈을 찍는 사진관>이 그렇고 “내 고향 언제 가나 그리운 언덕 옛 동무들 보고 싶다, 뛰놀던 언덕, 오늘도 흰 구름은 산을 넘는데, 메아리 불러 본다, 나만 혼자서.”라고 노래한 <그리운 언덕>이 그렇다. 결국 1963년 어린이날을 하루 지난 5월 6일 강소천은 세상을 떠난다. 어쩌면 그는 떠나면서도 슬퍼하는 동료들 위에서 동요를 부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금강산 찾아가자 1만 2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그러면서 아무것도 모른 채 뛰어노는 아이들 위에서 이렇게 읊조렸을지도 모르지. 



“하늘 향해 두 팔 벌린 나무들 같이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들같이.... 새나라의 기둥 되자 우리 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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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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