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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갑질의 왕국

2013-05-14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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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05. 14. 화요일
정치부장 물뚝심송







가끔 나이 많은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아주 흔하게 발견되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옛날이 좋았어..."


이런 얘기는 어쩌면 인간의 본질과 맞닿아 있는 얘기일 수도 있다. 언제나 사람은 지금 당장의 현실은 괴롭고 힘이 든 반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간 뒤에 생각해 보는 과거는 아름답고 풍요롭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심지어 그 고통스러웠던 군시절의 얘기도 술자리에서 흔히 유쾌한 화제로 떠오르지 않는가 말이다. 물론 듣는 사람들은 고통스럽긴 하다. 

그러나 초고속으로 국가 경제의 규모를 키워가던 시절이 불과 수십년 전인 우리 사회에서 저 "옛날이 좋았어..." 라는 말이 약간 색다른 의미를 가지고 다가오게 된다. 

실제로 옛날이 좋았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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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아니 최소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나는 사람들을 대략 우리 민족이라고 쳐보자. 혈통이야 단일민족일리가 없으니 좀 잊어버린다 쳐도, 꽤 긴 시간동안 한반도를 무대로 문화 공동체를 만들고 살아온 사람들은 다른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과 약간은 다른 특질을 지니게 되기 마련이다. 

이거 굉장히 무리할지도 모르는 가정이지만, 난 이 사회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과 실제로 살짝 다른 특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기 싫어하고, 남들에게 굽히기 싫어하고, 욕 먹기 싫어하고, 신분 상승의 욕구가 강하다는 점. 사실 거의 다 비슷한 얘기들일 뿐이다. 한마디로 얘기해서 그냥 별 쓸모도 없는 자존심이 무척 강한 사람들로 보인다. 

이 특질은 매우 긍정적으로 발현되기도 한다. 강한 교육열로 나타나거나, 현재의 고통을 참고 미래를 위해 무척이나 열심히 노력을 한다거나, 조금 어려운 말로 아주 강한 성취동기로 나타나기도 한다. 

반면, 이러한 특질이 부정적으로 나타나는 측면도 많다. 교육열이 강하다보니 자식 교육에 지나치게 많은 투자를 한 결과, 사교육 시장을 비대하게 성장시키기도 하고, 성취를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다 보니 사회적 약자들을 모두 게으름뱅이로 간주하기도 한다. 사실 이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는 사회복지, 사회안전망의 확대가 어렵게 되는 측면도 있다. 

또 성취를 중요시 하다 보니 모든 분야에서 지나친 경쟁이 벌어지고, 정당한 방법에 의한 경쟁을 넘어 반칙을 일상화하기도 한다. 결국 내 성취가 중요한만큼 남의 성취도 중요하다는 점을 잊어버린 나머지 타인의 기회를 빼앗아 버리는 행태가 일상화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이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고 증오범죄의 발생율을 높이는 식으로 발현될 수도 있다고 본다. 어쩌면 이미 그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찌되었거나 그런 특질을 가진 사람들의 눈으로 이 사회를 보자면, 확실히 지금보다는 80년대가 좋아 보이게 된다. 

핵심은 삶의 질이나 소유한 돈의 양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칠팔십년대가 지금의 우리 사회보다 훨씬 더 힘들고 가진 게 없던 시절이었다. 

일단 주거 상태도 비교가 안된다. 각종 전자제품들, 모바일 디바이스, 피씨등도 그렇다.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80년대만 해도 승용차는 부의 상징이었으나 지금은 운송수단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물론 고급 외제 승용차는 아직도 부의 상징이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의 사회보다는 당시의 사회가 좋다고 추억하는 사람들이 더 많고, 나는 실제로도 그게 맞는 얘기라고 판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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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당시에는 기회가 열려 있었고, 사람이 모자란 시대였다. 거의 모든 기업들이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던 시절이며, 매년 수천 명의 대졸 신입사원을 뽑던 시대였다. 중소기업들 역시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던 시절이며 사람을 구하기가 힘들었던 시절이다. 

여기저기서 새롭게 돈을 번 부자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던 시절이며(물론 그 중의 상당수는 갑작스러운 땅값 상승으로 인한 졸부였다 하더라도...) 언제 저 사람이 갑자기 사회적 상류층이 되어 나타나게 될 지 모르던 사회였다.

보편적으로는 누구나 착실하게 일만 해도 안정된 삶을 꾸려갈 수 있는 사회였고, 술, 도박, 마약, 여자문제(여성에게는 남자문제)만 잘 피하면 나락으로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서로간의 암묵적인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청계천이나 공장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조차 언젠가는 그 현실에서 벗어나 여유있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작은 희망이 살아있던 시절이다.

전태일 열사가 그렇게 도와주고 싶어하던 청계천 여직공들조차 어느 순간 동대문 시장에 가게를 내고 돈을 쓸어 모으는 점주가 될 수 있었고, 그들 역시 그렇게 되길 바라고 있었으니 말이다. 

간단히 얘기해서, 현실은 시궁창이지만 언제든지 벗어날 기회가 열려 있었...(실제로 그런 기회가 있었는지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다. 그러니 단정하지는 말자.) 최소한 그렇다고 사람들이 믿었고, 그렇게 벗어난 사람들의 얘기를 주변에서 흔히 발견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은 현실을 참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즉, 돈이 많고 삶이 안락해서 "옛날이 좋았어.." 가 아니라, 비록 돈도 없고 살기도 더 힘들었지만, 변화의 가능성이 존재했기 때문에 "옛날이 좋았어.." 가 성립한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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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우리 사회에는? 

확실히 수십년 전에 비교해서 그 가능성의 폭이 좁아졌다. 실제로 더 좁아졌는지는 정량적인 비교를 해 봐야 겠지만, 최소한 사람들은 그 폭이 훨씬 더, 매우 좁아졌다고 느끼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그만큼 사회가 안정되기 시작했다는 뜻이고, 이 말은 사회가 정체되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으며 좀 더 심하게 표현하자면 이제 우리 사회가 퇴보하기 시작했다는 말로 강하게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능성과 기회의 축소는 필연적으로 사람들을 절망에 빠트린다. 

지금 현재 우리의 사회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래서 불행하다. 그리고 자신들이 불행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꾸 "옛날이 좋았어.."를 되뇌이는 것이다. 





얘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갈수록 가능성과 기회가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끼고 있는 사람들은 방어적으로 변한다. 앞으로 내가 더 가질 기회가 줄었다면 지키는 것이 급선무가 된다. 지금 가진 것이라도 빼앗기기 싫다는 뜻이다. 

이 사람들은 남의 입장도 역시 그러할 것이라는 점을 잘 안다. 이 사회가 성장하지 못하고 정체하거나 퇴보할 것이라는 예측은 쉽게 말하자면 이 사회에 이제 먹을거리가 더 생기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기존에 있던 먹을거리를 서로 빼앗으려는 싸움이 벌어질 것이라는 얘기다. 

속되게 표현하자면, 과거에는 이런 말이 가능했다. 

"더러워서 네 돈은 안 먹겠다. 대신 내가 다른 곳에서 너보다 더 많이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마." 

그러나 현재에는 상대의 돈을 빼앗지 않고서는 -기존에 있던 가치들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돈을 벌 방법이 매우 희박해졌다는 것이다. 있는 사람들은 없는 사람들이 내 돈을 빼앗는 방법 이외에 다른 방법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고, 없는 사람 역시 있는 사람의 돈을 빼앗지 않고서는 돈을 벌 방법이 없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리고 서로 이 점을 인식하고 있다. 

이게 성장이 멈춘 사회에서 벌어지는 비극이 된다. 

그리고 이 비극은 우리가 흔히 '갑질'이라고 부르는 비도덕적 행위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일을 도와주는 사람에게 가혹하게 대하는 것, 갑질에 대한 정의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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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도 갑이라고 쓰는구나..

나하고 아무 관계없는 사람들에게는 갑질을 하지 않는다. 하청업체, 대리점주, 거래처 직원, 심지어 자신과 같은 회사에 속한 부하직원, 내가 구매하는 모든 종류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서비스업 종사자, 콜센터의 텔리마케터 등이 갑질의 대상이 된다. 

과거에는 적대시 할 이유가 없었던 사람들이다. 저들 역시 뭔가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고 나하고 상관없이 돈을 벌고 잘 나갈 수 있는 걸로 보였기 때문이다. 적대시하기는 커녕, 잠재적인 성장의 동반자로 간주하곤 했었다. 

"같이 잘 먹고 잘 살아야지." 라는 말이 과거의 시각을 대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바로 그 사람들이 이제는 "네가 가진 돈"을 빼앗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잠재적인 경쟁자로 보이게 된다. 그들에 대한 적개심은 이런 과정을 거쳐서 탄생하고 증폭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갈수록 관계가 험악해진다. 

혹시라도 규정된 합의사항에 미달되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내 돈을 날로 먹으려고 하지는 않는지 의심의 눈초리를 번득이게 되고, 그런 사기를 당하지 않기 위해 내가 가진 권력을 최대한 동원하게 되고, 내가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수시로 언성이 높아지며 깐깐하게 대하게 된다. 그리고 규정 이외의 것을 하나라도 더 얻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그게 안되었을 경우 '당했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사실 당한 것 하나도 없고 규정대로 잘 된 경우에도 그런 불길한 의심을 지울 길이 없어진다. 

모두가 다 날카로워진 것이다. 

그렇게 서로가 날카로워진 상황에서 갑질이 발생하고, 그 갑질이 사회에 만연해지면서 아예 시스템에 반영되기 시작한다. 갑을 관계 하에서 발생하는 권력의 비대칭이 점점 심화되면서, 감정적 충돌의 양상까지 발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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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모두가 피해자가 된다. 

어떤 사람도 모든 분야에서 갑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갑이라면 저기에서는 을이 되기 마련이다. 그게 이 복잡한 현대사회의 기본 구조이기도 하다.극소수의 부자들을 제외하면 이 사회는 피라미드라기 보다는 서로가 물고 물리는 환형 구조로 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갑질을 심하게 할 수록, 나한테 당한 을 역시 어디선가 그 분풀이를 해야 할 것이고, 그렇게 보편적인 갑질이 사회에 만연하게 될 수록, 내가 을이 되었을 경우 당하는 고통의 양도 늘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멍청한 불행의 재생산 고리 속에서 탈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가 손해를 보고, 모두의 인권이 파괴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최근에 우리 주변을 스치고 지나간 사건들을 돌이켜 보자. 

이젠 잘 기억들도 못하시겠지만, 줄을 이어 자살하고 있는 편의점주에 대한 기사가 나온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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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편의점 체인을 운영하는 대기업은 가맹점주들의 성공과 운명을 같이하는 기업 공동체에 속한 존재이다. 즉, 가맹점주들이 잘 나가야 기업도 사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가맹점주들이 자살을 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상황에 빠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기업에서는 오히려 가맹점주들을 더 억압을 하고 쥐어 짜내고 있는 중이다. 왜 그럴까? 

이 역시 앞서 설명한 불행의 재생산 고리에 빠져들고 있다는 걸로 설명이 된다. 

편의점주들을 상대로 하는 본사의 영업사원들의 고충을 들어보자면, 편의점주들이 자신들을 얼마나 속이고, 규정을 어기고, 본사에게 손해를 입히는지 하소연이 멈추지 않는다. 본사에서는 영업사원들을 믿지 않고, 영업사원들은 점주들을 믿지 않고, 점주들은 경제적인 이유로 자살을 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그 와중에 아직은 그나마 버티고 있는 점주들은 영업사원들에게 갑질을 당하고, 영업사원들은 본사의 간부사원들에게 갑질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편의점 주인만 자살을 했는가? 아니다. 

롯데백화점에서 고급 매장을 운영하는 사람도 자살을 한다. 직접적으로 자신을 압박하던 백화점측 관리자에게 유서까지 남기고 옥상에서 뛰어 내린다. 과도한 매출 압박이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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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 모는 갑질의 현장이다. 현실적으로 달성이 불가능한 목표를 세워놓고 관리직들에게 갑질을 하는 임원들이 있었을 것이고, 거기서 당하고 와서 자신에게 을인 사람들에게 또 증폭된 갑질을 하는 관리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사건이 발생하면 백화점 측은 어떻게 해서든 이 소문이 세간에 퍼지지 않도록 눌러 덮으려고 노력을 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들에게 갑은 또 소비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갑의 눈치를 보고 있는 중이고 스스로 갑질을 당하는 중이다. 

불매운동으로까지 이어지던 남양유업의 사건도 이러한 맥락에서 아주 쉽게 이해가 간다. 

나이 지긋한 대리점주에게 쌍욕을 퍼붓던 영업사원의 음성이 생생하게 녹음되어 공개되는 바람에 다수 대중의 분노를 폭발시켜서 사건이 확대된 것 뿐이지, 사실 이러한 행태는 해당 업계뿐 아니라 자사의 상품을 대리점을 통해 유통시키는 거의 모든 종류의 업계에서 공공연한 관행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이다. 

더 우스운 것은 이러한 반인권적인 행태에 분노한 소비자들이 회사를 상대로 압박을 가하자, 회사측은 고위임원들을 동원해서 사과를 하는데 그 대상을 찾지 못하고 헤매이기 시작한다. 즉, 잘못을 저질러서 사과를 하는데 그 대상이 자신들이 벌였던 잘못된 행동에 피해를 입은 피해자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피해자는 을이었다. 하지만 을에게는 사과할 이유가 없다. 다만, 갑(소비자)의 분노에 놀라 갑(소비자)에게만 사죄를 하는 것이다. 자신들에게 돌아올 갑질(불매운동)이 두렵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갑질은 어느 새 우리 사회의 일상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예의, 인권, 해서는 안될 수준의 나쁜 짓, 이런 모든 도덕적 기준들이 붕괴하고 그 자리에 갑과 을의 관계가 들어서 버렸다. 무슨 짓을 해도 갑에게만 용납이 되면 괜찮은 것이고, 사과를 하더라도 갑에게만 하는 거지 을에게는 신경을 쓸 이유가 없다. 

그 결정타는 대통령이 방미를 하는데 수행하러 따라간 청와대 대변인이 현지 대사관이 고용한 인턴직원을 상대로 갑질을 해 버린 윤창중 사건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윤창중 전 대변인이 무슨 섹스중독증 환자라서 40살 가까이 차이가 나는 젊은 여성 인턴사원에게 몹쓸 짓을 한 거라는 생각은 잘 들지 않는다. 

그는 단지, 자신이 생각하는 을의 롤모델을 제대로 다하지 않는 인턴사원에게 화가 났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꾸, 업무에 지각을 했다는 둥, 불성실하게 수행을 했다는 둥, 자신이 그 점을 야단쳤다는 둥, 야단을 치고보니 불쌍해서 술을 사줬다는 둥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대사관에 인턴직을 지원하고 높은 사람들을 수행하는 직무를 하게 된 그 인턴사원은 스스로 을을 자청한 것이고 그것을 잘 수행해서 갑이 되고자 노력하는 중일테니, 자신 정도로 성공한 높은 갑(청와대 대변인)에게는 '몸과 마음'을 바쳐 성실히 을의 역할을 수행해야 되는데 그걸 제대로 안하고 있으니 강제로라도 시키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윤창중은 세상의 모든 일을 다 '갑을의 논리'로 보고 있고, 자신도 모르게 갑질을 하면서도 그것이 정당한 사회적 행위라고 판단을 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결국 자신이 한 행위가 들통이 난 뒤 귀국을 종용하는 자신의 갑, 이남기의 행동에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는 중이고, 이 모든 사건에 대해 자신의 수퍼갑 박근혜 대통령에게만 사과를 하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윤창중만 그러한가? 

청와대의 공식 사과문 역시 이 갑을의 논리를 정확하게 따르고 있다. 이들은 원칙적으로 자신들의 갑인 유권자들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당장 자신들에게 임명장을 준 자신들의 갑, 대통령만을 두려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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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ㄷㄷ

그렇기에 청와대 차원에서 행해지는 공식 사과에서도 대통령에 대한 사과에 비중을 더 두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 을 중에서도 수퍼 을인 피해 여성에 대한 사과가 들어갈 여지는 전혀 없다. 

심지어 자신들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에도 관심이 없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들이 관심있는 것은 이제 자신들이 어떤 갑질을 당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 논리라면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사과를 해야 되는 거 아니냐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물론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을 갑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 왜냐면 이 국민, 혹은 유권자라는 갑 집단이 자신에게 갑질을 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왜냐고? 단임제 하에서 선거는 끝났고, 과반 여당의 존재로 인해 탄핵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재 상황, 유권자의 입장에서 대통령에게 갑질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고, 대통령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또 방법이 있다 하더라도 50%가 넘는 유권자들은 대통령에게 갑질을 할 생각이 전혀 없다. 오히려 대통령에게는 그런 정도의 갑질을 할 자격이 있다고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론적으로 현직 대통령에 대한 갑이지만 현실적으로 갑질을 할 방법이 없는 상태, 즉 '현실적인 갑'은 아니다. 





우리는 갑질의 왕국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논리인 이 갑질의 논리가 점점 더 강화되면서 우리 사회에 속한 거의 모든 사람들의 목을 죄고 있는 중이다. 

당장에도 이 갑질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고, 이 갑질로 인해 불행한 삶을 살고있는 사람들이 수두룩하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갈면서 "나도 갑이 되겠다"고 외치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당신은 이미 갑이다. 갑질로 인해 피해를 보고 있는 당신 역시도 어느 순간 누군가 다른 을의 목을 죄고 있는 또 하나의 갑일 뿐이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을 해 보시라. 지금 이 순간에도 터무니없는 근무조건에 항의하면서 싸우고 있는 택배기사들이 있다. 그 분들에게 지금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이 늦게 도착한다고 짜증을 부렸던 적은 없으신가?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면서 불친절한 가게 점원의 횡포에 화가 치밀어 올라 컴플레인 제기라는 미명하에 인간적인 모멸감을 주며 거칠게 항의했던  적은 없으신가? 핸드폰 구매를 권유하는 텔리마케터의 귀찮은 전화에 열받아서 화풀이를 하신 적은 없으신가? 누군가 그런 상황에서 손해를 감수하며 인간적인 자세로 착하게 행동하면 바보라고 비웃은 적은 없으신가?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을이면서 동시에 갑이다. 그리고 꼬리를 문 뱀들처럼 빙빙 돌면서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이 더러운 갑질의 논리는 어느새 우리 모두의 머리속에 가득차 있기도 하다. 갑질이라는 것은 일그러진 자본과 권력의 오만한 행동에 붙여진 또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갑이라는 것은 그 알량한 권력에 취해 사람을 괴롭히는 악당의 다른 이름에 불과한 것이다. 

이 갑질의 논리를 무너트리는 첫 걸음이자 유일한 방법, 그리고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는 그 방법은 바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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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잊어 버리고 있는, 돈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아주 단순한 사실, 갑을 관계 이전에 저 사람과 나 모두가 다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상기하는 것. 사람에 대한 예의, 사람에 대한 존중, 사람에 대한 연민, 사람이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것, 다른 모든 사람을 모두 소중하게 대하고 나서야 비로소 나 자신도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아주 쉽고 명확한 논리. 

이것만이 우리 사회를 갑질의 논리에서 구원해 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좀 바보같아 보여도 그것만이 해답이라고 믿는다. 






물뚝심송
트위터 : @murutuk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