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05. 20. 월요일
장지갑
이젠 너무도 오래된 일이라, 국민-_-학교 때 우리가 어떻게 시험을 치렀었는지, 언제가 처음 본 시험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들이 시험을 치르는지 어쩌는지 도통 관심이 없었는데,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몇 달 전, 집에 갔더니 마눌님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이다.
첫째가 초등학교 3학년인데, 입학하고 난 후 처음으로 시험을 치렀단다. 무슨 무슨 굉장히 길고 어려운 이름의 시험인데, 이게 총 3~4일에 걸쳐 여러가지 과목들의 시험을 종합적으로 치른 후에 자신이 어느정도 수준에 위치해 있는지 점수와 등수가 백분율로 대충 계산되어 나온다.
워낙에 애미애비를 닮았다면 공부로 대성할 아이는 아닌 걸 알고 있기에, 웬만해선 공부 열심히 하라는 둥, 선생님 말씀 잘 들으라는 따위의 스트레스를 애들에게 주지 말자는 주의라서, "그냥 재밌게 놀다와. 길 건널때 조심하고, 친구들 괴롭히지 마." 정도가 아이들에게 당부하는 모든 것인데, 아! 이게 성적이 계량화되어 눈에 보이는 숫자와 그래프로 떡하니 펼쳐지니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들끓어 오르는 분노를 제어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비록 니가 어떻게 공부를 하던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겠지만. 얘야. 산수, 그러니까 수학도 아닌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하는 산수를 21점. 그러니까 30점 만점이 아닌 100점 만점에 21점을 받아오면. 자, 이 아빠가 이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니?
퍼센티지로 보니까 그 시험을 친 모든 3학년 학생들 중에서 하위 2%안에 들었더구나, 장하다 내 딸!
나 역시 공부를 잘하는 인생을 살아온게 아니라서 뭐 딱히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특정과목을 21점 받아오는 아이가 우리 집안에 있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기에, 이 건은 아무래도 좀 짚고 넘어가야할 것만 같았다.
조용히 딸만 따로 불러내서, 집 앞 커피가게로 갔다. 내 앞엔 라떼, 그리고 딸아이 몫으로는 핫쵸코를 시켜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 산수가 어렵니?
- 아니, 별로 안어려워.
- 근데 너 점수 알고 있어? 너 21점이야. 산수가.
- 어, 알어, 근데 그거 좀 불합리 한 것 같아.
- 그게 뭔소리야?
- 아니, 더하기 문제 5개가 나오면 그 중에 한 개만 풀어도 나머지 문제는 다 알고 있다는 걸 증명한 거잖아. 근데 왜 나머지 4개를 더 풀어야해? 그래서 비슷한 문제는 한 개씩만 답했지 뭐. 나는 그 시간에 그림그리는게 더 좋아. 그래서 얼른 풀고 그림을 그렸지.
- 그래서 니가 아는 문제를 안풀고 그냥 풀고싶은 거 골라서 몇개 풀고 말았다는 거야?
- 응, 내가 알고 있으면 되는 거지, 왜 한 개 한 개 다 풀어서 시험지나 선생님에게 증명해야 해?
- 그럼 ‘문장 이해’ 과목은 왜 다 잘 풀었어?
- 그건 재밌잖아.
- (-_-);;;;
아이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스토리가 여기서 끝났다면 훈훈한 마무리겠죠. 아이들의 풍부한 상상력을 시험이라는 잣대로 제어해 버리는 획일화된 어른들. 뭐 이런 정도의 스토리와 점수가 모든 걸 말해주지 않는다는 교훈 같은 게 곁들여져서 말이죠.
하지만 인생은 늘 생각처럼 흘러가지는 않습니다.
바로 며칠 전 학기말 시험이 다시 다가온 거죠. 이번엔 산수시험 잘치면, 바비 재봉틀 세트를 사주겠다는 엄마의 약속이라는 충분한 동기부여도 있었고 스스로도 이번엔 자신이 얼마나 산수를 잘하는지 여러 친구들에게 증명하고 싶다는 소소한 포부도 있었으니 말이죠.
이번엔 35점!
야, 뭘 그렇게 어렵게 얘기했어? 증명이 어떻고 뭐가 어째? 그냥 산수 못하면 못한다고 할 것이지.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우리 아이가 이런 면이 있었다니 하며 몇 개월을 살아온 생각을 하니,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영혼의 빡침이 올라옵니다.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그럴듯한 변명을 하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장지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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