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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최고의 움직임

2013-05-28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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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05. 28.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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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가 된다는 것

 

자신의 분야, 자신의 세계에서 꼭대기에 오른다는 것은 굳이 분석하지 않아도 간지나고 기분 쑝가는 일이다. 대부분의 성장 서사, 특히 무협에서는 주인공이 최고의 위치에 오르면 이야기가 끝나곤 한다. 최고 달성은 이야기의 절정과 결말에 어울린다.

 

 

하지만 세상의 이야기는 결코 멈춤이 없다. 최고가 되면, 되고 난 후의 다음 행보가 문제가 된다. 최고의 다음 움직임을 모두가 주목하게 된다. 그 행동 여하에 따라 최고의 자리를 지켜나가면서 전설이 될지, 최고에서 내려오게 될지가 판가름나기도 한다.

 

 

한국 음악계에서 최고가 된 세 사람이 최근 연달아 신작을 냈다. 이 사람들은 최고로서 어떻게 움직였는지 비교해보고 싶어졌다. 싸이, 조용필, 이효리 말이다.

 

 

왜? 내 맘이다.

 

 




싸이(P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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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제대로 떴다.


 

 

2000년대 한국 힙합 최대의 손실이 싸이가 팝 음악 영역으로 건너간 것이라고 한 비평을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싸이는 그 명제를 진리로 만들었다. 그는 지금, 월드 스타다.

 

 

싸이는 <강남스타일>의 세계적 성공을 사고(accident)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실제로 그랬다. 그는 결코 세계를 목표로 앨범을 만든 것이 아니다. 늘 해오던 작업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운 좋게 떴다. 유학생이 가지고 온 앨범 때문에 미국 성공을 했던 90년대의 스웨덴 밴드 Roxette의 경우와 같다.

 


물론 운만으로 그의 성공을 요약할 순 없다. 그는 성공을 타고 오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대표적인 게 영어인데, ‘Dress classy, Dance Cheesy’라는 간결한 문장을 만들어 말할 수 있는 언어 능력은 그가 미국을 비롯한 각종 영어권 국가에서 쉽게 활동하고 현지 비즈니스를 수행할 수 있게 해줬다.

 

 

근데 여전히 운 때문에 스타덤에 오른 것은 문제가 된다. <강남스타일>은 후속타를 염두에 둔 계획된 비즈니스의 일환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결된 비즈니스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싸이는 의도치 않은 성공 직후 후속작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후속작이 어떻건, 가능한 미래는 딱 두 경우다. 계속 히트해 거물이 되거나 혹은 좀 덜한 히트를 해서 자기만의 영역이라도 구축하여 생존에 성공하는 것. 그리고 후속작에 실패해 스타덤을 잃고 옛날 영웅담의 소재가 되는 것. 제3의 경우, 철수는 불가능하다. 싸이가 “거하게 잘 놀았음. 다들 빠잉~” 이라며 월드 비즈니스를 포기하고 돌아오면 기다리는 건 매장뿐이다. 온 대한민국이 싸이를 문화 수출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었으니까.

 

 

세계를 대상으로 한 창작과 비즈니스를 억지로라도 이어가야 하는 싸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도 딱 두 경우였다. 자신이 보유한 스타일 중 세계 시장에 아직 소개되지 않은 모습을 내보여 작업 영역을 넓히거나, 히트한 전작의 스타일을 이어가 일단 현재의 위치를 방어하거나.

 

 

이 선택지에선 정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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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능력과 외부 영업 역량이 잘 받쳐준다면, 전자를 선택하는 것도 승산이 있다. 타 뮤지션과 콜라보레이션을 하여 히트하거나 기대작 영화의 OST에 참여하거나 하며 다양한 스타일의 작업을 내보이는 건, 싸이의 경력이 증명해주는 그의 음악적 능력으로는 해볼 만한 싸움이다. 하지만 이 경우엔 게임판 위에 올라오는 플레이어가 너무 많아진다. 필요한 영업 비즈니스가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진다.

 

 

반면 후자를 선택하면 신경 쓸 플레이어는 대중뿐이다. 전작의 히트 요소를 계승하게 될 테니 좀 더 길게 미래를 준비해볼 수 있다. 물론 후속작이 전작에 비해 형편없는 성적표를 가져오게 된다면 상당한 추락을 각오해야 한다. 또한 안정성이 위험으로 변할 수 있는 전략이다. 대중은 같은 스타일에 쉽게 질리기 때문이다. 그래도 뿌리박기의 필요성을 미래로 돌려버릴 수 있다는 것은 큰 장점이다. 천천히 준비할 수 있을 테니까.

 

 

<젠틀맨>은 후자, 수성(守成)의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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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현재의 이미지와 위치를 지켜내자는 선택이다.

 

 


<젠틀맨>의 음악적/미학적 수준을 비평하는 것은 그래서 무의미하다. <강남스타일>과 다름없는 스타일/사운드/가사/뮤직비디오다. 다른 것은 <젠틀맨>의 M/V에 성적 코드가 좀 더 들어가 있다는 것? 반면 유재석/노홍철의 출연 같이 전작을 계승하는 요소가 더 많이 눈에 띈다. 내가 클럽 DJ라면 이 두 곡을 연결해 플레이하는 것에 매력을 느낄 법하다.

 

 

<젠틀맨>은 전작의 히트 요소를 계승해 현재의 스타덤을 일시 유지하려는 시도다. 따라서 <젠틀맨>의 비즈니스는 이제 시작이지만, 아직 전작의 그늘이 충분한 시점에 발매한 덕에 리스크는 줄고 안정성은 높아졌다. 아마 전작만큼의 성과는 힘들겠지만 쫄딱 망하지는 않을 거란 말이다.

 

 

무엇보다 싸이는 장기적인 생존 전략을 모색하기까지의 시간을 벌어두게 됐다. 어음이나 수표가 돌아와 지불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지불을 다음 달로 넘긴 정도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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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 아니 후결제... 아, 이게 아닌가?

 

 

 


조용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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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꺄악!”

 

 

 

조용필은 거인이다. 얼마나 거인이냐면, 그를 음악적으로 규정하려 드는 시도는 모두 그의 일부만을 서술하게 될 정도다. 조용필은 자기가 음악을 하며 만난 장르 모두를 집어삼켜 자기 스타일로 소화시키는 괴물이었다.

 

 

조용필은 한국 음악의 저그다. 싸이 역시 진화성장 과정은 다르지만 조용필과 유사한 형태로 자라날 가능성이 있는 사람 중 하나다. 장르 포식자.

 

 

조용필이 짱인 점은, 그렇게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긴 장르에서 모두 정점을 찍었다는 거다. 그렇게 가왕(歌王) 타이틀을 인정받은 사람은, 딱히 새로운 거 안 해도 된다. 그래도 명예는 늘고 돈은 벌린다. 괜히 도전의 리스크를 감수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그는 90년대, 특히 후반부터는 완벽히 정립된 자기 스타일의 음악만을 해왔다. 고딩 때 16집 [Eternally]를 샀다가 도저히 사운드가 안 맞아서 다신 안 들었던 기억이 난다. 17집 `Ambition`, 18집 [Over the Rainbow]에서도 그는 계속 90년대 락큰롤의 조용필식 변주를 해왔다. 매우 높은 성취도만큼이나 자기 스타일의 고수라는 덕목이 있었다. 이후로는 공연만 했다. 조용필은 음악계의 고고한 학 한 마리가 되어 명성을 깎아먹지 않았다.

 

 

정확히 10년이 지나 발매된 19집 [Hello]는 그래서 박수 받아 마땅하다. 그의 원래 스타일은 <어느 날 귀로에서>와 같은 몇몇 트랙에서만 들린다. 선공개된 <Bounce>를 비롯해 <Hello>, <충전이 필요해> 등의 트랙은 지금 막 홍대의 유명 밴드 곡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은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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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도전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리스크는, 조용필의 경우 이랬다. 


1. 바뀐 스타일에 기존 팬들이 실망한다. 

2. 조용필을 옛날 꼰대 가수로 보는 젊은 시선이 바뀌지 않는다. 

3. 비평가들이 호평을 해도 뒤집어지지 않거나 아예 여론을 의식해 비판적인 비평을 내놓는다. 

4. 판매고는 그럭저럭이겠지만 명예는 상당 부분 침식.

 

 

다행히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기본 색은 유지한 채 대부분, 그러니까 사운드와 악기 배열과 가사의 감성을 변신시킨 시도는 조용필을 다시 순위 프로그램 상위에 올려놓아 버렸다. 아이돌 일렉트로닉과 알앤비 발라드의 층을 뚫고서.

 

 

<Bounce>의 경우에는 그럴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일단 10대에게 어필할 수 있는 가사, 그러니까 아이돌 가사스러운 단어 선택이 엿보였다. 맥락 모호한 영어 단어의 사용, 시적 상징으로 쓰이지 않고 직설적인 의미만 담은 단어... 게다가 <Bounce>와 <Hello>를 비롯해 여러 트랙에서 2000년대 일렉 음악이 주로 사용하는 오토튠과 앰비언트 공간감을 가미했다. 기계음에 익숙한 청자를 공략하기 위한 트렌드 반영이었을까. 일단 ‘Bounce’라는 단어, 힙합에서 주로 쓰는 이 단어부터 매우 젊다. (그러고 보니 한국 음악의 저그께옵서 일렉트로니카 요소도 수집하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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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여기까진 도저히 예상을 못했다.

 



도전은 성공했다. 그러나 완전무결한 도전은 없는 법이다.

 

 

일단 조용필 자신의 색이 기초 레벨에서는 유지되었지만 그 이상은 되지 못했다. 트렌드를 자기 식으로 표현하려는 시도 덕분에 좋은 곡들이 나왔지만, [Hello] 앨범은 그의 이전작들과의 연계성은 물론이요 앨범의 통일성도 부족하다.

 

 

앨범을 주욱 듣고 있다 보면 <Bounce>, <Hello>, <충전이 필요해>와 같이 트렌디하고 가벼운 트랙과 <어느 날 귀로에서>와 같은 조용필 오리지널 트랙의 감성이 충돌하는 게 느껴진다. 각각은 좋은 곡이나 한 데 모아두자 같은 앨범의 구성곡이 아니라고 해도 될 만큼. 물론 앨범의 뒤쪽으로 갈수록 조금씩 수위가 트렌드→오리지널로 조절되고 있긴 하지만, 위화감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추가로 <Hello>의 멋진 일렉 요소를 망쳐버린 버벌진트의 랩은 앨범 전체에서 최악이었다. 발음 미달과 언어 파괴로 대표되는 버벌진트의 단점이 드러난 것은 그렇다 쳐도, 짧은 브릿지였던지라 버벌진트가 자기 플로우를 제대로 풀어내지 못했으며, 랩을 처리한 효과 또한 랩이 자기 역할을 하기 힘들게 했다. ‘맘을 열어’ 한 마디 외에는 아무 것도 전달된 게 없는 랩이었다.

 

 

그래도 조용필의 도전은 성공적이다. 성공 여부를 완전히 규정하기엔 약간 이른 싸이의 수성과 비교해보면 재미있는 비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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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으로 치면 공격군에 해당하는 싸이는 성공적인 점령 후엔 수성을 통한 굳히기에 들어갔다. 매우 모범적인 행보라 탓할 것이 없다. 반면 이미 오래 군림하고 있던 왕 조용필은 이미 명예가 완숙하여 정벌을 나갈 필요 없는 노무사였으나 보무도 당당하게 진군했다. 행보의 질에 있어 아쉬움은 있으나 충분한 노익장을 발휘하여 명예를 더했다.

 

 

처한 입장이 서로 달라 완전한 비교는 불가능하겠지만, 예측불허 이미지의 싸이는 공격자 입장에서 정석에 가깝게 움직이고 진중한 큰형님 같은 조용필은 안주해도 되는 입장에서 과감한 도전에 나섰다. 



그리고 이제 세 번째 최고 인물이 움직임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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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이다.

 

 



이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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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좀 힘들었다.


 

 

이효리를 수식하는 단어 중에는 ‘걸그룹의 롤모델’이 있다.

 

 

물론 그녀가 아이돌계에서 독보적인 창조성을 보여준 것은 아니다. 이효리에게는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비욘세 놀즈라는 레퍼런스가 있었다. 제대로 된 모방은 이미 그 자체로 창조인 법, 이효리는 이 레퍼런스를 모방/발전시키는 데에 크게 성공했다. 그 결과, 이후 한국의 모든 아이돌 걸 그룹은 이효리의 그늘 아래 놓이게 됐다.

 


이효리를 이론의 여지없이 최고의 자리에 확고부동하게 올려놓은 앨범은 3집 [It’s Hyorish]였다. <U-Go-Girl>의 사운드와 퍼포먼스뿐 아니라, 앨범의 수록곡 모두가 적당적당한 곡이 아니었다. 이효리는 이 앨범을 통해 자신의 목표 이미지가 2000년대 힙합임을 확고히 알렸다. ‘트렌드한 니키 미나즈의 이미지? 집어쳐. 그보다는 90년대 릴 킴에 2000년대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따라갈 거야. 이런 음악에 이런 이미지 소화할 수 있는 아이돌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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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었다.(물론 곧 빅뱅과 현아가 따라잡지만)

 


흔히 아이돌을 폄하하는 논리 가운데에는, ‘작사작곡도 못하는 주제에’가 있다. 이 주장에 대한 평가는 논외로 하고 문장의 의미를 뜯어보면, 음악 연예인을 둘로 나누는 심리가 숨어있음을 알 수 있다. 창작을 하는가 하지 않는가. 더 정확히는, 자기가 하는 음악에 자기 주관이 들어가있는가 아닌가. 그리고 전자에게는 ‘뮤지션’ 혹은 ‘아티스트’라는 칭호를 헌정한다.

 

 

실제로 이건 유용한 기준이다. 그런데 기준의 의미를 정확히 규정할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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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능력이 있는 싱어송라이터라 해도 상업적인 이유로 혹은 소속사의 요구에 의해 자기 주관을 포기할 수도 있고, 창작 능력은 있지만 아예 주관이 없는 독특한 경우가 가끔 있다. 반면 창작 능력은 없다 해도 작곡가와 곡을 고르고 자기 앨범의 프로듀서를 ‘임명’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아이돌 중에서 그런 권력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 중에 이효리(그리고 여기서 다룰 건 아니지만 박정아)는 꼭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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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s Hyorish] 앨범은 이효리가 <10 Minutes>부터 관심을 보여온 2000년대 힙합 사운드에 대한 선호를 확실히 드러내어 자기 캐릭터의 색을 확정한 시점이었다. 덕분에 지난 앨범에서 불거져나온 표절 시비를 털어버릴 수 있었다. 게다가 이효리는 자신이 힙합 장르와 사운드를 아주 잘 이해하고 있음도 증명해냈다.

 

 

하지만 다음 앨범인 [H-Logic]은 재앙이었다.

 


이효리가 새앨범을 위해 작곡가와 곡을 고르던 중 바누스 바큠이라는 작곡집단의 곡이, 특히 리더인 바누스의 곡이 괜찮게 들렸다. 그래서 그들의 곡을 6곡이나 받아왔다. 이게 전부 표절이었다. 이번엔 시비 수준이 아니라 제대로 증명된 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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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작곡가는 내게 200곡을 들려줬는데 그 200곡 모두가 표절이었다.”

 

 

‘단 한 곡도 무난하게 가려는 곡이 없다’는 평을 받은 [It’s Hyorish] 직후 앨범에서 이런 사단이 나자, 그냥 쌩까고 활동을 하겠지라는 예상과 반대로 이효리는 활동을 전면 중단해버린다. 최고의 위치에 있던 여왕이 사라져버렸다.

 

 

싸이가 개척지를 점령한 사령관이고 조용필이 오래 존경받은 왕이었다면, 이효리는 실수로 왕좌에서 추락한 여왕이었다. 따라서 이효리는 싸이/조용필과 같이 여유롭지 못하다. 그녀의 선택지는 잔혹하다. Do or Die. 자신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다시는 최고의 자리를 갖지 못하고 적당한 예능인으로 흘러가 사라질 것이다.

 

 

2집 [Dark Angel] 후에도 표절 시비로 인해 유사한 벼랑에 몰린 적은 있었고, 그때는 이 실린 [It’s Hyorish]로 방어에 성공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이효리에게 있어서는 핑클 해체보다도 강한 타격이다. 그럼 최고가 되어봤던 여왕은 어떻게 복권을 시도할까?

 

 

얼마 전 그녀의 새 앨범에 수록된 <미스코리아>가 선공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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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난 의문에 빠져들어갔다.

 

 

여전히 성적 코드를 앞세우는 점은 그녀의 이전작과 동일하다. 곡의 화자가 당당한 여성 계열인 것도 동일하다. <미스코리아>의 곡과 M/V에 등장하는 화자는 자신과 자신의 상황을 비판한다는 정도의 차이점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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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사운드는 상당히 바뀌어있었다. 예상했어야 했다. 유기견 보호 캠페인을 하면서 그녀가 재능기부 명목으로 발매했던 두 곡에서, 이효리는 어쿠스틱 악기 기반의 부드러운 모던 락 사운드 위에 노래를 했다. <미스코리아> 역시 같은 스타일이다.

 

 

아이돌 중 힙합을 가장 잘 이해했던 여왕이 변한 걸까?

 


<미스코리아>의 음악적 덕목은 이효리의 보컬에서 목소리의 감성이라는 요소를 잘 부각시켰다는 점이다. 본디 가창력이 주된 요소가 아닌 이효리가 보컬로서 선택하는 길은 크게 둘이었다. 빠른 비트와 단순한 멜로디로 사운드와 퍼포먼스를 거들도록 하던지, 아니면 음색을 앞세워서 감성과 전달력에 집중하던지. 그리하여 후자에 해당하는 곡을 처음으로 냈다. 이건 이효리가 자신의 음악적 노선을 변경하겠다는 신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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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이런 케이스를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다. 박지윤은 당대 최고의 아이돌이었고, 루머의 집중포화에 낙마했다. 박지윤의 선택은 복권 시도를 포기하는 것이었고, 그녀는 기타 한 대 들고 인디씬에 들어가 부드러운 모던 락을 시작했다. 박지윤 역시 어쿠스틱 악기와 잘 붙는 자기 목소리에 집중하여 좋은 앨범을 낸 바 있다.

 

 

이효리도 같은 시도를, 다만 영역을 바꿔 메이저 씬에서 하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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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십거리에 일희일비하는 미디어의 흰 쥐가 된 기분을 잠시 만끽했지만, 타이틀곡이라는 <Bad Girls>의 티저(!)가 공개되자 혼란은 더 커졌다. <미스코리아>와 정반대였던 것이다.

 

 

거리가 먼 두 스타일이 한 앨범에 있으면, 당연히 통일성을 걱정하게 된다. 조용필의 <Bounce>와 <어느 날 귀로에서>의 거리보다 더 먼 곡들이 한 앨범에 있으면 구성을 걱정하게 될 거다. 하지만 그건 조용필에게 어울리는 우려지 이효리에겐 어울리지 않는다. 어차피 이효리는 앨범 단위보다는 곡 단위로 어필하는 경우다.

 

 

어쨌든 <Bad Girls> 티저가 공개된 시점에서는, 이효리의 새 앨범이 어떤 식일지 예측할 수가 없어졌다. 자신의 이전 작과 동일한 노선인지, 아니면 이상순의 영향으로 보이는 변화가 가미되었을지, 아니면 아예 노선을 ‘이상순 방향’으로 크게 수정했을지.

 

 

이효리의 새 앨범 [Monochrome]이 발매되었다. 두 가지 상반된 감성과 스타일을 갖고 있을 것으로 예측됐던 이 앨범은 제목만 보면 마치 크롬 브라우저를 권장하는 것 같지만 이효리로서는 유의미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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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면, 그녀는 힙합을 덜어냈다. 그리고 변화의 결과는 박지윤의 그것과 유사하다.

 

 

팝적인 요소가 줄어들고(아마 뮤직비디오에서나 볼 수 있겠지) 빅 밴드라거나 어쿠스틱 모던 락이라거나 하는, 인디 씬에서 좀 더 많이 접할 수 있는 요소들이 늘었다. <사랑의 부도수표> 같이 복고풍의 유치한 요소를 사용한 예가 있으며, 어쿠스틱 넘버인데 이전작들과는 달리 상당한 완성도를 보여준 <묻지 않을게요>와 같은 예가 있다.

 


힙합을 상당히 포기한 것이 그녀의 변화 포인트이며, 이 부분은 힙합의 팬으로서 아쉽다. 아이돌 대선배로서서 빅뱅/현아 같은 흐름의 제일 앞에 있는 사람인 이효리가, 힙합 장르와 그 사운드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아이돌로서, 대중에게 힙합의 여러 요소를 익숙하게 예방접종해준다면 한국 힙합으로서는 큰 도움이 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하지만 [Monochrome]에서 힙합 요소가 많이 쓰인 곡은 <Bad Girls>와, 최근 젊은 래퍼 중 가장 핫한 빈지노가 참여한 <Love Radar> 정도다. 그나마 <Bad Girls>도 티저 공개 당시의 예상과는 달리 힙합 요소가 기대 이하로 적다.

 

 

결국 ‘이상순 효과’가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인지는 확실치 않아도(아니 뭐가 확실치 않아!) 확실한 것은 이것이다. 이효리는 힙합을 통해 트렌드를 쫓아왔고, 이젠 그런 경향을 버렸다. 트렌드를 정복해 노익장을 과시한 조용필과도 구별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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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인 점은 이효리가 나름 지켜온 내적 서사가 아직 일관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효리는 미국 힙합의 여성 화자들의 캐릭터를 잘 이어받아, 적극적이고 당당한 캐릭터를 노래해왔다. 이런 캐릭터는 이효리, 박정아 시절의 쥬얼리 등이 가장 완성도 높게 구현해냈고, 이후 아이돌 걸 그룹들이 따라오고 있다. 자기비판 중인 <미스코리아>의 화자와, 그냥 나쁜 여자를 넘어서 반란군 수준의 <Bad Girls> 티저 속 캐릭터 등 이효리 캐릭터의 내적 통일성은 변함없는 상태다.

 

 

그리하여 이효리의 복귀는 흥미진진하다.

 

 

싸이는 점령을 안정화하기 위해 수성에 들어간 것이라 재미가 덜 하고, 도전에 나선 조용필은 사기 캐릭터라 재미가 덜 하다. 반면 권좌에서 오래 떨어져있던 여왕의 복귀전은 기대가 될 법한데, 게다가 상당한 변화를 동반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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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와신상담이 있었을 것이고, 그녀 개인적으로도 어쿠스틱 음악 하는 연인이 생긴 덕에 주변의 인적 풀(pool)이 다양해졌을 것이며, 사회적 활동을 통해 활동 중단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이슈화 되어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은 상태다.

 

 

환경은 나쁘지 않은 상태고 그녀의 캐릭터 능력은 충분하니, 음악과 퍼포먼스의 질이 높다면 충분히 승산이 높다. 경쟁 아이돌들이 꽤 성장한(그리고 여전히 젊은) 상태이기 때문에 필요 수준이 좀 높아졌긴 하다.

 


어쨌든 이효리가 힙합을 덜어내고 다양한 장르의 요소를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게임은 흥미로워졌다. 트렌드 쫓기를 상당히 포기한 것은 힙합의 입장에서는 아쉽지만 이효리라는 가수가 자신의 음악 자원을 다양화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트렌드를 정복하여 여왕이 되었던 사람이 지배 영역을 늘여보겠다는 야심을 드러냈다고 비유할 수 있다.

 

 

결국, 싸이의 수비 - 조용필의 공격 중에서 이효리는 후자에 가깝다. 왕좌에 복귀해야 하는 당면과제를 놓고, 좀 더 멀리 욕망하며 더 큰 게임을 하려는 결기를 보여주었기에, 이번 앨범의 방향에 찬성한다. 그리고 변화의 시작이 이번 앨범이니 다음 작업을 더욱 기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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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하는 자에게 축복 있으라. 특히 최고이거나 최고였던 도전자들에게.

 

 

그들은 스스로에게 도전하는 것이니까.

 

 


 

 

 

 

카인

트위터 : @Kain_Sul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