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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영국 사이의 ‘1812년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814년 9월 13일, 미국인 변호사 프랜시스 스콧 키는 한 미국인 포로를 석방하기 위해 볼티모어 항구 앞 바다에 있는 영국 전함에 승선했다. 그 날 밤 그는 배에 억류당한 상태로 영국이 맥헨리 요새를 포격하는 현장을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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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새벽 그는 근심에 가득찬 시선으로 영국군의 포격을 받은 요새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곳에 거대한 성조기가 힘차게 펄럭이고 있지 않은가? 그 광경은 미국이 전쟁에서 지지 않았다는, 미국이 결국 승리할 것이라는 신호였다. 그는 감동해서 급히 갖고 있던 편지봉투의 뒷면에 시를 끄적거렸다. 그 시로 그는 훗날 미국 국가의 작사자라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전체 4연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연은 다음과 같다.


오, 말해다오! 어제 마지막 황혼의 빛 속에서
우리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환호했던 깃발이 이른 새벽 빛 사이로 보이는가?
넓은 줄무늬와 빛나는 별들이 새겨진 깃발이 치열한 전투 중에도
우리가 사수한 성벽 위에서 당당하게 나부끼고 있는가?
로켓의 붉은 섬광과 창공에서 작렬하는 폭탄이
밤새 우리의 깃발이 그곳에 있었음을 증언했다.
오, 말해다오. 성조기는 지금도
자유의 땅과 용사들의 고향에서 휘날리고 있는가?


며칠 후 키는 <멕헨리 요새 방어>라는 제목으로 시를 발표했으며, 곧 여러 신문에 실렸다. 그 후 영국 작곡가 존 스탠퍼드 스미스가 작곡한 축배의 노래인 <천상의 아나크레온에게>의 곡을 빌어 <별이 빛나는 깃발>이라는 제목의 노래로 널리 불리게 되었다.


1931년 미국 의회는 이 노래를 국가로 지정했다. 전쟁과 축배라는 언뜻 보면 전혀 맞지 않는 조합이 묘하게도 한 나라의 국가로 녹아들었다. 전쟁을 축제처럼 벌이는 나라여서 그런가? 아무튼 들어보면 장중하다기보다는 흥겨운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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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선전포고문


미국은 1812년 6월 18일에 영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1814년 12월 24일 평화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두 나라는 만 2년 반 동안 전쟁을 했다. 미국의 대영 선전포고는 하원에서는 찬성 79표, 반대 49표로 통과되었으며, 상원에서는 19표 대 14표라는 간발의 차이로 통과되었다. 이 전쟁이 절대다수 미국인들의 지지를 받은 게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부와 남부의 농업에 기반을 둔 주민들은 전쟁을 지지했던 반면 북동부와 중부의 상공업에 바탕을 둔 주민들은 격렬하게 반대했다. 전쟁이 선포되자 서부와 남부에서는 환호성이 터졌지만 동부에서는 전쟁을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났다. 미국은 이 전쟁을 두고 극심한 분열을 겪었으며, 전쟁기간 내내 지속된 분열로 국가는 붕괴의 위기에 내몰렸다. 미국은 그만큼 충분한 준비를 갖추지 않은 채 전쟁에 뛰어들었다. 왜일까?


‘1812년 전쟁’은 프랑스 혁명의 와중인 1793년부터 나폴레옹이 몰락한 1815년까지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의 연장선장에서 일어났다. 1793년 프랑스 왕 루이 16세가 혁명 정부에 의해 단두대에서 처형되자 혁명이 자국으로 확산되는 것을 두려워한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가 동맹을 맺고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유럽은 길고도 지루한 전쟁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었다. 그 전쟁에서 프랑스는 연전연승을 했지만 1805년 트라팔가 해전에서 넬슨이 이끄는 영국군에 패배했다.


뜻밖의 패배로 대서양의 제해권을 상실한 프랑스는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1806년과 1807년에 잇달아 대륙봉쇄 조처를 했다. 영국 배 뿐만 아니라 영국에 기항하는 모든 중립국의 배는 프랑스가 통치하고 있는 유럽의 어떤 항구에서도 물건을 선적하거나 하역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것이었다. 유럽 대륙과 영국 사이의 교역을 사실상 금지하는 조처였다. 이에 맞서 영국은 나폴레옹이 장악하고 있는 유럽 항구에 운송되는 모든 화물은 반드시 영국 상선이나 영국 항구에 기항하는 중립국 상선만으로 운반하게 하는 조처를 취했다. 장군 멍군이었다.


프랑스와 영국의 이런 조처로 미국은 샌드위치가 되었다. 미국 선박들은 유럽으로 항해할 때면 영국 해군에 나포될 위험을 감수해야 했으며, 반대로 영국 항구를 경유해 항해하면 프랑스에 나포될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미국은 이래저래 자국과는 관계가 없는 전쟁으로 유럽과의 무역을 사실상 중단했다. 프랑스는 1810년에 미국의 해상 운송을 간섭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영국은 봉쇄조처를 계속했기 때문에 영국에 대한 반감이 쌓였다.


미국과 영국 사이의 관계를 악화시킨 또 다른 요인은 영국 해군이 대서양에서 미국 함선이나 상선을 강제로 세워서 그 배에 타고 있는 영국 탈영병들을 수색한 것이었다. 당시 영국 해군 함선들은 ‘떠다니는 지옥’이라 할 만큼 열악한 상황이었으므로 강제징집을 당한 많은 해군이 탈영하여 미국 상선에 타거나 미국 해군에 입대하였다. 이에 맞서 영국은 공해상에서 임의로 미국의 상선과 함선을 나포해 탈영병들을 잡아갔다. 영국은 그 과정에서 영국 탈영병이 아닌 미국인들까지 수천 명이나 납치하여 영국 해군에 강제로 편입시켰다. 당연히 미국인들의 공분을 샀다.


전쟁의 원인엔 이런 외부적인 요인만 있는 건 아니었다. 미국 내에서도 영국과의 전쟁을 요구하는 강한 요인들이 있었다.


미국은 독립 이후 영토를 서부로 확장하려는 야망에 불탔다. 영국과 인디언은 미국의 영토 확장을 저지하기 위해 애를 썼다. 영국은 캐나다와 미국 서부 지역에서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인디언과 동맹하고 그들에게 무기를 공급해 미국과 대항하게 했다. 또한 미국의 중서부 변경에 완충지대로서 인디언 국가의 창설을 꾀했다. 반면 서부로의 팽창을 열망하는 미국인들은 변경 지역의 인디언을 선동하는 영국을 견제하고 더 나아가 캐나다를 편입시키려고 했다. 그들에겐 캐나다를 흡수하는 것만이 영국과 인디언의 위협으로부터 미국을 안전하게 지키는 길이었다.


한편 남부의 백인들은 플로리다 지역(현재의 플로리다 주와 다른 일부 지역)을 미국에 편입시키려는 욕망을 갖고 있었다. 당시 플로리다는 영국과 동맹을 맺고 있는 스페인의 소유였는데 남부 백인들에게는 끊임없는 위협(남부의 흑인 노예들은 국경을 넘어 플로리다로 도망을 쳤으며, 그곳의 인디언들은 국경 너머의 백인 정착촌을 자주 기습하였다)인 동시에 아주 매력적인 곳(남부 백인들은 수로가 발달된 그곳과 연결된 멕시코 만의 항구들을 탐냈다)이었다. 그러므로 플로리다를 스페인으로부터 탈취하기 위해서는 영국과의 전쟁이 필요했다.


동북부와 중부 해안의 주들은 이해관계가 달랐다. 상업과 공업이 발달한 이 지역은 유럽과의 교역이 중요했으므로 전쟁을 반대했다. 해상무역에 이해가 걸려 있는 그곳 상인과 해운업자들에게 영국과의 전쟁은 파산을 의미했다. 설상가상으로 유럽의 전쟁에 휘말려들기를 꺼린 미국 정부가 1807년에 미국 선박들이 외국의 항구로 가지 못하게 막아버려서 그 지역들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 봉쇄령은 1809년 영국과 프랑스를 제외한 모든 나라와 교역을 허가하는 통상금지법으로 대체되었지만 전쟁 기간 내내 그 지역의 불만 요인이 되었다.


전쟁은 크게 세 곳의 전선에서 진행되었다. 한 곳은 동부의 대서양 연안이었다. 그곳에서 영국은 미국 해안을 봉쇄했다. 오대호 일대를 중심으로 캐나다와 미국의 접경지대에서도 대규모 충돌이 일어났다. 플로리다와 카리브 해 지역에서도 미국과 영국 군대가 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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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초기에는 영국은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인해 대규모 군대를 동원할 여력이 없었으므로 주로 방어적인 전투에 주력했지만, 1814년 4월에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미국에 전력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개전 초부터 고전을 면치 못했으며, 전쟁 기간 내내 오대호 연안의 풋인베이와 남부의 뉴올리언스 전투에서의 승리 이외에는 뚜렷한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이 전쟁에서 미국이 거둔 최대의 승리는 ‘뉴올리언스 전투’였다. 1815년 1월 8일에 벌어진 전투에서 앤드루 잭슨은 4500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수적으로 우세한 영국군을 격퇴했다. 해당 전투에서 영국군은 700여 명이 사망하고 1400여 명이 부상을 입은 반면 미군은 8명이 사망하고 13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이 전투가 벌어지기 전인 미국과 영국이 평화조약을 체결하였기 때문에 번외 싸움이 되고 말았다. 통신의 미비로 휴전 사실을 모르고 양쪽이 싸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잭슨은 영웅이 되었고 나중에 대통령까지 된다)


나폴레옹 전쟁을 끝낸 영국은 캐나다로부터 남쪽으로, 중부 해안으로부터 워싱턴으로, 남부해안에서 내륙으로 총공세를 펼쳐 미국을 몰락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공세의 일환으로 일단의 영국 함대는 체사피크만을 따라 진격해서 8월 24일에 워싱턴을 점령하고, 정부청사를 불태웠다. 그리고 미군이 캐나다의 요크(지금의 토론토)를 불태운 것에 대한 보복으로 백악관을 비롯한 여러 공공건물에 방화를 하였다. 미국은 수도를 점령당하고 파괴당했다. 그러나 영국은 이 총공세에서 미국의 완강한 저항에 막혀 기대한 만큼의 전과를 올리지는 못했다.


전쟁 기간 내내 뉴잉글랜드의 여러 주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미국이 전쟁을 계속하면 분리 독립도 불사하겠다며 정부에 종전을 압박했다. 그 대표들이 1814년 12월 15일 코네티컷 주 하트포드에서 모였다. 회의는 전쟁이 헌법에 위배된다고 선언하고, 의회의 결정이 주의 이익을 침해하면 주는 의회의 결정을 무효화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때 맞춰 평화조약이 체결됨으로써 그들의 열망은 행동으로 표출되지는 않았다. (다만 그들의 분리독립 논리는 남북전쟁 직전 남부 주들이 분리하는데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 그들의 주장이 엉뚱한 데서 결실을 맺은 셈이다)


영국은 1814년의 총공세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과의 오랜 전쟁에 지친데다 빚더미를 얻어 미국에서 계속 전쟁을 할 여력이 없었다. 미국 역시 나폴레옹 전쟁을 끝낸 영국은 더 이상 미국의 통상을 방해할 리 없기 때문에 전쟁을 계속할 이유가 없었다. 더욱이 미국은 극심한 여론의 분열로 국가 해체의 위기마저 겪고 있었다. 결국 두 나라는 1814년 12월 24일에 벨기에 겐트에서 평화조약을 체결한다. 전쟁이 어정쩡한 조약으로 끝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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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겐트에서 있었던 미-영 평화협상


이 전쟁은 미국과 영국 모두에게 별다른 실익이 없었지만 미국인들의 애국심을 한껏 고취시키는 효과는 거두었다. 미국인들은 이 전쟁을 흔히 ‘제2의 독립전쟁’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미국은 유럽을 상대로 싸우면서 강한 민족의식을 지니게 됐고 하나의 국민국가로 발전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미국 군대는 이 전쟁을 계기로 민병대 체제에서 벗어나 근대적인 군대 체제로 개편돼, 군사력이 강화되었다. 산업이 빠른 속도로 팽창해서 산업혁명의 여명에 본격적으로 접어들었다. 유럽 국가들은 새롭게 부상하는 미국의 힘을 의식하고 미국의 정책과 통상에 함부로 개입하지 못했다.


미국 소설가 허먼 멜빌은 이 어수선한 시대를 배경으로 <빌리 버드>라는 짧은 소설을 썼다. 때는 영국과 프랑스가 한창 전쟁을 벌이던 1797년 대서양의 선상이다.


영국 상선의 젊은 선원인 빌리 버드는 영국으로 귀항하던 중 영국 함선에 해군으로 강제 차출된다. 그는 상선에서 그랬던 것처럼 함선에서도 쾌활하고 순수한 성격으로 군인들의 인기를 독차지한다. 그런데 그를 차출한 선임 위병 하사관인 클래가트는 이유도 없이 그를 미워하고 파멸시키려고 애쓰며, 마침내 그가 선상 반란을 모의했다는 누명을 씌워 선장에게 고발한다.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선장실에 불려간 빌리가 흥분으로 입이 굳어서 말을 하지 못하다가 클래가트를 주먹으로 치는데, 클래가트가 쓰러져서 그대로 죽고 만다. 빌리는 상관 살해죄로 기소되어 선상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된다. 비어 선장은 빌리가 누명을 쓴 것을 알고 그를 동정했지만 재판에선 단호했다. 그는 빌리의 상황에 동정적인 재판부에게 ‘군법을 어기는 것은 군의 명령 체계를 위험에 빠뜨린다’며 전시의 군법에 따라 재판부가 빌리에게 사형을 선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이 소설에서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이 불완전한 세계에서 인간의 순수성은 지켜질 수 있는가? 인간이 만든 법이 인간을 단죄할 수 있는가? 국가는 국가라는 이름으로 개인을 파괴할 수 있는가?


빌리는 순수 그 자체다. 그는 어떤 악에도 물들어 있지 않다. 그가 있는 곳에는 늘 평화가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빌리의 순수함은 오히려 그로 하여금 악의 본질을 파악할 능력을 갖지 못하게 했으며 궁극적으로는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어쩌면 클래가트로 대변되는 순수한 악도, 빌리로 대변되는 순수한 선도 이 불완전한 세상에는 어울리지 않는지 모른다.


빌리는 예수와 같이 불완전한 사회의 희생자다. 예수가 죄 없이 빌라도의 방관과 유대인들의 증오심에 희생되었듯이 빌리는 모함에 걸려들었다. 그 사실을 선장은 알고 있지만 끝내 빌리의 사형을 주장한다. 선장에게 빌리는 선상으로 대변되는 사회의 존속을 위해 희생되어야 할 존재였다. 물론 빌리는 클래가트를 죽임으로써 법적으로는 분명히 범죄를 저질렀다. 선장의 판결 역시 이 법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빌리를 사형시킨 그 법이 과연 옳은가?


이 소설은 전쟁을 배경으로 비인격적이고 권위적인 국가가 무기력한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을 고발하고 있기도 하다. 국가를 대변하는 선장은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개인의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국가는 전혀 그럴 의사가 없는 사람을 국가라는 이름으로 강제로 전쟁에 끌어들이고 마침내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것은 거대한 제도화된 폭력에 불과한 게 아닌가?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이런 일들을 한 번쯤 의심하고 문제를 제기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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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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