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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재의 결론을 먼저 내리는 것은 아니지만, <일소중립조약> 이야기가 나왔으니 '국제정치의 본질'을 확인하기 위해서 또 그 당시 일본 군부의 국제외교 이해 수준을 확인하기 위해 일소중립조약 파기 과정을 살펴보자.


 

스탈린

 

1941년 12월의 소련은 풍전등화의 위기였다. 독일군은 모스크바 근방 80km 앞까지 진격해 있었고, 국제사회에서는 곧 소련이 히틀러의 손에 떨어진다는 말이 오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연합국은 소련에게 엄청난 지원을 하게 된다. 미국이 무기대여법으로 100억 달러 상당의 각종 무기와 물자를 보냈고, 영국도 자신에게 할당된 미국의 무기뿐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전쟁물자도 소련에 보냈다.

 

독소불가침 조약이 체결되고 유지됐던 기간은 불과 17개월이었다. 그 사이 독일은 프랑스를 점령하고, 영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독일 공군의 전투기들은 런던 상공에서 본토항공전을 치르고 있었고, 독일 유보트들은 대서양에서 영국 상선들을 격침하고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스탈린은 히틀러에게 석유 865,000톤, 목재 648,000톤, 망간 원석 14,000톤, 구리 14,000톤 그리고 거의 1,500,000톤에 이르는 곡물을 보냈었고, 독일이 구매하지 못했던 다른 원료나 물자들을 미국이나 일본 등지에서 대신 구매하여 넘겼다. 이것도 모자라 독일이 영국 본토 항공전을 치루는 기간 동안 소련은 기상 정보까지 제공하였고, 해군은 쇄빙선과 함께 무르만스크 부근의 해군기지 하나를 제공해서 독일 해군의 무장상선들이 재급유를 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과 독일이 전쟁을 시작하자 미국과 영국은 두 팔 걷어붙이고 소련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한때는 자본주의 세계를 위협하는 ‘빨갱이’라며, 소련이란 나라가 건국되기 전부터 이 나라를 없애기 위해 내전을 지원했고, 이후에도 수많은 외교적 압박과 국제적 고립을 유도했었던 그들이 방금 전까지 자신들의 적을 도왔던 이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적의 적은 친구”


 

였다. 물론, 여기에는 스탈린의 노련한 외교 감각도 한몫을 했다. 루즈벨트가 무기대여법을 통한 물자지원을 하면서 스탈린에게 요구했던 한 가지가,  “일소중립조약의 파기”였다. 아니, 파기는 아니어도 의도적인 무시를 원했지만 스탈린은 요지부동이었다. 스탈린은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었고, 국제정치 속에서 소련이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일본이란 카드는 아직까지는 버리기 아까운 카드였다. 적어도 1945년 2월까지는 말이다.

 


일본의 착각

 

1944년 말, 1945년 초가 되면 일본은 패전 직전의 상황까지 몰리게 된다. 이제 일본 본토에 B-29 폭격이의 은빛 날개가 보이기 시작했고, 바다의 해상 항로는 미국 잠수함이 깔아놓은 기뢰와 어뢰 공격으로 전쟁 물자뿐만이 아니라 병력의 이동도 제한을 받던 시절이다.

 

그 무렵 미국, 영국, 소련의 3개국 정상들이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회담을 가지게 된다. 독일 패망 직전인 1945년 2월의 일이었다. 삼국 정상들이 모여 독일 패망 이후 유럽의 전후 처리와 소련의 대일 참전에 관해 논의하던 자리에서, 루즈벨트는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대가로 소련이 러-일 전쟁 당시 잃어버린 만주 일대와 남사할린섬의 반환, 쿠릴열도의 이양 등을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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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은 독일 항복 이후 2~3개월 뒤에 대일전 참전을 약속했다. 당시 일본 지도부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럼 그때까지의 일본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시시각각 다가오는 미국 기동함대의 그림자 속에서 일본이 유일하게 희망으로 삼고 있었던 건 ‘일소중립조약’이었다. 얄타에서 스탈린, 처칠, 루즈벨트가 전후처리와 대일전 참전에 관한 논의를 할 즈음, 일본 대본영에서는 이후에 길이 남을 그들만의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바로 이후 지켜야 할 전쟁지도 요강이었다. 그 내용의 핵심은 간단했다.

 


 “본토에서도 결전태세를 확립하여, 끝까지 전쟁을 완수하라!”


 

당시 일본 육군은 본토 결전에서 그때까지의 열세를 만회하고, 이를 가지고 종전협상까지 끌고 가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단 한 번의 승리를 해야만 했다.

 

이때 핵심이 됐던 게 소련과의 외교 관계 유지였다. 즉, ‘일소중립조약’의 유지였던 것이다. 원래 일소중립조약은 1941년 4월 13일 발효한 후 5년 동안 유효했고, 향후 상대방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경우 자동적으로 5년 연장이 된다.

 

문제는 당시 일본의 상황이었다. 태평양 전선에서 미국에게 판판히 깨지며 후퇴하고 있는 일본을 소련이 ‘의리’만으로 끝까지 받아 줄까? 만약 그 이전의 외교관계가 좋았어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일본은 소련이 조약파기를 할까 두려워했다.

 

당시 주 소련 특명대사였던 사토 나오타케(佐藤 尚武)는 일본의 명운을 걸고, 일소중립조약의 연장을 위해 뛰어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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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총영사, 국제 연맹 사무국장, 런던 해군 군축 조약 사무총장, 프랑스 특명 전권대사, 외무대신 등등 그의 이력은 국제정치 무대에서 활약으로 빼곡이 들어차 있는 외교통이었다. 그런 그가 태평양 전쟁 개전 직후인 1942년부터 주 소련 특명대사로 모스크바에 파견돼 있었다.

 

이 당시 일본 지도부도 소련과의 관계가 이번 전쟁에 성패를 가늠할 것이란 판단이 있었다. 만약 1942년의 상황이었다면, 소련은 조약의 연장을 인정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945년 2월 22일의 상황은 달랐다. 사토 나오타케는 당시 소련 외상인 몰로토프와 만나 중립조약 연장을 요청했으나, 몰로토프는 모호한 반응을 보였다.

 

이미, 스탈린은 대일전 참전을 약속한 상황. 아니, 그 이전에 소련 외무부는 일본과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을 먹고 있었다. 1944년 7월 주일 소련대사 마리크는 몰로토프에게,


 

“일본의 패전은 불 보듯 뻔하다. 전후 예상되는 미소 간의 대립을 염두에 둔다면, 만주, 조선, 쿠릴열도 등을 잃어버린다는 건 우리나라의 이익과 안전에 있어 중요한 문제다.”


 

란 보고를 했다. 그리고 1945년 1월 10일 소련 외무부 차관이었던 도조프스키는 외상이었던 모로토프에게 의견서를 제출한다.

 


 “일소중립조약의 연장은 소련에게 결코 이득이 될 수 없다. 4월까지 조약 폐기를 일본에 통보해야 함.”


 

소련은 일본을 버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대목에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이 당시 일본의 외교정책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는 것이다.

 

일본이 국제연맹을 탈퇴한 직후부터 일본은 ‘독일’ 일변도의 외교정책을 펼쳤다. 이때 이를 주도한 것이 군부였다. 1936년 체결한 독일방공협정(소련을 가성적국으로 한)의 배후에는 일본 군부가 있었다. 당시 독일주재 육군 무관이었던 오오시마 히로시(大島 浩)였다.

 


독일! 독일!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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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독일인으로부터 독일어를 배운 오오시마 히로시는 원어민 수준의 독일어를 구사했는데, 육군대학 졸업 후인 1923년부터 부다페스트와 오스트리아 빈으로 나가 일본 주재 무관이 됐다. 당시 그는 히틀러의 외교 담당 비서였던 리벤트로프(Ulrich Friedrich Wilhelm Joachim von Ribbentrop)와 친구가 된다.

 

이 친분을 배경으로 히틀러와도 친해지게 된다. 독일과 체결한 방공협정, 삼국동맹은 그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가 일본의 무관이 됐다는 건 추축국에게는 악몽이고, 연합국에게는 축복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연합국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더 많은 피를 흘려야 했을 것이다. 오죽하면, 대전 당시 미국의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던 마샬 원수가,

 


 “히틀러의 의도에 관한 정보의 기초적 원천”

 


이라고 말했을까? 그는 1940년에 미국에 의해 뚫린 퍼플 암호기를 가지고 일본 본국에 정보를 타전했는데, 자신이 히틀러와 나치 고위간부에게 얻은 자료들을 그대로 보낸 것이다. 그는 미드웨이, 사이판, 스탈린그라드, 임팔 전투 등에 관한 중요 정보를 계속해 보냈는데, 최고 압권은 1943년 11월 히틀러가 연합군의 제2 전선을 방비하기 위해 만든 대서양 방벽의 병력 배치도를 일본 본국에 타전했던 것이다. 이를 연합국이 낚아채 노드망디 상륙작전 계획을 짰던 것이다.

 

각설하자.

 

어쨌든 1940년의 오오시마 히로시는 일본 군부의 영웅이었다.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독일과의 동맹을 성사시킨 일등공신이었다. 이제 일본은 영국 대신 독일이란 든든한 파트너를 얻게 된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일본 외교의 한계를 경험하게 된다. 아니, 군부의 입맛대로 흘러갔다고 해야 할까? 브레이크를 뽑아냈다는 것이 적확한 표현일 것이다. 바로 마쓰오카 요스케(松岡 洋右)의 등장이다.

 

그는 미국 오리건 주 포틀랜드로 건너가 미국에서 고등학교와 로스쿨을 졸업한 후 일본으로 돌아와 외교관이 된다. 18년간 승승장구하던 그는 1921년에 외교관을 퇴직하고, 남만주 철도 회사의 간부가 된다. 이후 만철을 퇴사한 후 중의원 선거에 출마 당선된다. 그는 1933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이후 만주국 건국에 따른 국제여론의 악화를 빌미로 국제연맹 탈퇴를 주도했다. 그리고 나선 의원직을 사퇴. 다시 만주로 건너가 남만주 철도의 총재가 된다. 이때 그가 만난 이가 관동군 특무장교였던 도조 히데키였다(아, 가혹한 운명이여).

 

이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이후 고노에 후미마로의 2차 내각에서 마쓰오카 요스케는 외무대신이 된다. 그는 외무대신이 되자마자 외교쇄신이란 명목 하에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는 외교관 40명을 한꺼번에 경질해 버린다.

 

당시 마쓰오카의 생각과 맞지 않는다는 건 어떤 의미였을까? 그는 삼국동맹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였다.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 상황에서 미국의 압박을 견뎌내려면, 삼국동맹이라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당시 경질된 40명의 외교관들은 그 당시 독일 일변도의 외교로 전쟁을 향해 달려가던 일본을 막아서려던 인재들이었다).


 

 “미국을 견제하기 위한 균형추로 삼국동맹만 한 건 없다.”


 

그는 독일을 사랑했고, 독일만이 일본의 활로를 뚫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 그를 일본 군부는 사랑했다. 그리고 히틀러도 그를 사랑했다.

 

소련과의 전쟁을 시작한 히틀러는 일본에게 소련을 공격해 달라고 요청하게 된다. 이때 이 요청을 강력히 지지했던 이가 바로 마쓰오카였다(어쩌면, 마쓰오카의 판단이 옳을 수도 있다. 소련과 미국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소련이다. 1941년 가을의 동부 전선 전황을 보자면, 그나마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소련이었다. 최악과 차악 중 하나를 고르라면 당연히 차악이지 않을까?).

 

마쓰오카의 행보를 보면, 그가 과연 일국의 외교를 총괄하는 외무대신인가라는 의문이 든다. 외교관이라면, 최후의 최후의 순간까지 상황을 냉철히 판단해 국익에 도움이 되는 최선의 결과를 도출해 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마쓰오카는 군인보다 더 강경하게 전쟁을 주장했다. 당시 내각 수반이었던 고노에 후미마로(近衛 文麿)는 이 당시 고민에 휩싸이게 된다.

 

마쓰오카는 소련을 공격하자는 입장이었고, 당시 일본 군부는 남방작전. 즉,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포함한 자원지대의 공략을 주장하고 있었던 상황. 고노에는 소련과의 전쟁 대신 미국과의 전쟁을 선택한다. 그 결과 소련 공격을 주장하던 마쓰오카는 경질할 수밖에 없었다(마쓰오카를 경질하기 위해 내각을 해산해야 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한 나라의 외교정책이 어느 일방에 경도 돼 진행되는 것의 위험함을 알 수 있다. 당시 일본은 군부의 주도로 국가가 운영되던 상황. 거기에 외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일본 군부는 국제사회에 화려하게(?!) 등장한 히틀러와 나치 독일에 열광했고, 이를 통해 전쟁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했다. 그리고 모든 걸 독일에 걸었다.

 

한 나라의 외교는 이런 식으로 진행 되선 안 된다. 언제나 그렇지만, 전쟁은 그 시작보다 끝내는 게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외교란 전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최후의 외교 수단이 전쟁이라면, 그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수단도 외교인 것이다.

 

그러나 일본 군부는 태평양 전쟁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독일 위주의 외교를 생각하고 있었다.

 






1부 

[러일전쟁]


2부

드레드노트의 탄생

1차 세계대전, 뒤바뀐 국제정치의 주도권

일본의 데모크라시(デモクラシー)

최악의 대통령, 최고의 조약을 성사시키다

각자의 계산1

8년 의 회, 던 축 

일본은 어떻게 실패했나2

만주국, 어떻게 탄생했나



외전

군사 역사상 가장 멍청한 짓

2차대전의 불씨

그리고, 히틀러

실패한 외교, 히틀러를 완성시키다

국제정치의 본질



3부

태평양 전쟁의 씨앗1

태평양 전쟁의 씨앗2

도조 히데키, 그리고 또 하나의 괴물

일본을 늪에 빠트린 4명의 '미친놈'

대륙의 각성완료, 다급해진 일본

대동아(大東亞)의 환상에 눈 먼 일본

일본,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다 1

일본,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다 2

일본의 패배





 *참고자료

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3.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황금알

4.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이북스펍/ 이윤섭

5. 조선역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이상태

6. 다시 쓰는 한국근대사/ 평단문화사/ 이윤섭

7. 대본영의 참모들/ 나남/ 위텐런 지음, 박윤식 옮김

8. 나모위키

9.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 추수밭/ 이노세 나오키 지음

10. 『중일 전쟁』 용, 사무라이를 꺾다/ 미지북스/ 권성욱 지음

11.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 서해문집/ 김효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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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더가 디비주는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조약, 테이블 위의 전쟁

러시아 vs 일본 한반도에서 만나다






펜더


편집: 딴지일보 coc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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