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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은 무조건 서울로 가라.”는 말이 많습니다.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라’고 하죠. 근데 왜 나는 제주도로...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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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있는 병원이 좋은 건 사실입니다. 의료뿐만 아니라 패션, 경제, 문화 등에서 서울이 지방보다 좋지요.


“병원은 무조건 서울로 가라.”는 말에 대해 얘기하기 전에 한 가지 구별해야 할 게 있습니다. 병원은 ‘서울vs지방’이 아니라 ‘서울의 메이저 병원 vs 기타 대형 병원’으로 나누는 게 더 맞습니다. 메이저 병원과 서울의 비메이저 병원의 갭이 서울의 비메이저 병원과 지방 국립대 병원의 갭보다 더 크니까요.


서울의 메이저 병원도 2~30년 전에는 지금처럼 ‘넘사벽’은 아니었습니다. 아산 병원이나 삼성 병원이 크게 된 데에는 모기업의 자본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타병원의 우수한 교수급 자원들을 돈으로 스카우트 해오고, 신설 의대임에도 전액 장학금, 교수 채용 등을 미끼로 우수 자원을 입학시켰으니까요. 짧은 기간에 서울대병원과 비교될 정도로 컸습니다.


메이저 병원 급으로 성장한 병원은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입니다. 야구 선수들이 메이저 리그를 꿈꾸듯 지방의 의사들이 메이저 병원을 꿈꾸고, 환자들 역시 메이저 병원에만 몰립니다.


환자들은 좋겠죠. 어차피 건강보험 당연지정제 하에서는 비급여를 제외하고 모든 의료기관의 의료비가 거의 같으니, 제주도의 이름 모를 의사에게 진료 받느니 서울대 유명한 교수님께 진료를 받고 싶을 겁니다.


이런 병원들 덕에 한국에서 쓸만 한 논문이 단일 의료기관 연구임에도 쏟아져 나옵니다. 진단 방법, 치료 방법 등에 있어서도 한국이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분야가 꽤 생겼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존스 홉킨스, 엠디 엔더슨 같은 병원이 있다는 자부심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비대해진 것도 사실입니다.


제가 의대생일 때 판독을 기가 막히게 하는 영상의학과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넘사벽의 실력이었습니다만, 몇 년 후 서울 S병원에 스카웃 되셨고, 복부 관련 임상 과들은 몇 년 간 애를 먹어야 했습니다. 군의관을 마치고 내과 레지던트하던 시절에 만났던 교수님도 비슷한 실력을 갖고 계셨었죠. 복부를 담당하던 그 교수님 역시 서울의 A병원으로 스카웃 되셨습니다. 중소기업의 기술을 대기업이 빼먹는다고 뭐라고 하지만 메이저 병원의 인력 빼먹기 역시 우려할 만한 사항입니다.


지방의 명의들이 죄다 서울 메이저 병원으로 가버리면 서울 사람들은 좋지만 지방 사람들은 타격이 크겠죠. KTX도 뚫려 있으니 지방의 대도시에 사는 분들은 서울에서 진료 받으면 되겠습니다만, 몰림이 더할수록 지방 대학병원들은 더욱 어려움을 겪을 겁니다.


모든 진료의 질은 대개 비슷한 수준으로 맞춰지니 평소 중증 질환, 희귀 질환을 자주 보던 병원이 응급 상황에서도 잘 처치하는 것은 당연한 거겠죠. 하지만 응급 질환이 발생했을 경우 여러분들을 도와줄 곳은 가장 가까운 대학병원, 종합병원입니다.


국제 학회에서, 메이저 병원 출신이 논문을 발표하면 외국 의사들이 놀란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케이스를 한 병원에서 또는 한 의사가 볼 수 있느냐고 말이죠. 조작 의혹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케이스 숫자를 줄여서 발표한다고 하네요.


메르스 때 메이저 병원에서의 환자 쏠림이 문제가 되었죠. 메이저 병원이었던 S병원을 통해 전국으로 메르스 환자가 퍼졌으니까요. 전국의 환자들에게 S병원이 허브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있을 응급 상황을 생각해서 지방에서 치료 받으시라는 게 아닙니다. 중증 질환, 희귀 질환이라면 메이저 병원에 가서 2차적인 의견을 들어보는 것도 좋지만, 아무 질환이나 서울이 최고라고 올라가지는 말라는 거죠.


지방 병원이 실력이 없으니 서울로 가는 건지, 서울로만 몰리니 지방 병원이 실력이 없게 된 건지, 답을 찾기가 어려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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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레지던트 시절 수많은 암환자들을 봤는데, 이미 암 4기로 수술을 하기 힘든 상황에서 몇 개월 남지 않았다고 얘기를 해드렸더니 서울로 가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가서도 대부분 똑같은 답변을 듣고 오셨습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병원에서 ‘해드릴게 없다’는 얘기를 들었으니 죽음을 준비하는 분들도 계셨을 테지만요.


일부는 표준 가이드라인 보다 공격적인 메이저 병원의 치료를 받다가, 비용은 비용대로 쓰고 고생은 고생대로 하다가 일찍 운명을 달리하기도 합니다. 지방에서는 ‘얼마 안 남았으니 준비하시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서울에서 한 번 해보자고하니 얼마나 기쁨이 크겠습니까.


좀 안타까운 환자는 제주도 병원을 못 믿겠다고, 비행기 타고 서울에 가서 대장내시경을 예약하고 오는 환자였습니다. 어차피 가도 1~2년차 전임의한테 받고 올 텐데, 차라리 집 가까운 곳의 스킬 좋은 의사에게 받는 게 백배 낫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P.S

댓글에 지방 병원에서 오진을 받고, 서울 가서 치료 받은 사례들이 올라올 듯 합니다. 그런 사례들을 못 봐서 이런 글을 쓴 게 아닙니다. 메이저 병원에서 실수한 걸 모교 병원에서 바로 잡은 케이스가 없어서 본문에 올리지 않은 것도 아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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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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