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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대화에 관하여

2015-06-11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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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6. 11.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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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항상 노크하지 않고 내 방에 들어온다. 가끔 불쑥 들어와 내 담배를 한 대 꺼내 가면서 청소 좀 하란 잔소리를 덧붙인다. 불쑥 들어온 아버지를 내가 놀랜 눈으로 보면 아버지는 왜 자기 부모 보면서 놀라느냐고 도리어 나를 타박한다. 짜증일 날 때도 있지만 고치시라 말하지 않는다.


물론 아버지가 갑자기 내 방문을 연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내가 야동을 보는 것도 아니지만, 괜히 아이가 된 기분이 들어서다. 검사를 당하는 어린아이의 느낌과 비슷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소리를 치거나 노크 좀 하시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나는 아버지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아버지의 마음도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나와 아버지는 대화를 한다.


아버지는 가족 간에 노크하는 것에 대해 거북스러워한다. 노크가 매너라는 것을 본인도 인정하지만 어릴 때부터 대가족의 구성원이던 아버지는 노크를 하지 않는 생활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렇다고 한다. 가족 간에 노크가 없는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그리고 왠지 모르겠지만, 자식의 방에 노크를 하고 들어온다는 것을 쑥스러워한다. 그래서 잔소리도 덧붙이는 거다. 내가 어른이 된 지 한참이 지났지만, 아버지의 생각 속에는 나는 아직 어린아이라 그럴 것이라 이해한다.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린다. 그리고 이해한다. 가족이라는 것은 나에게 포근함과 따듯함 그리고 약간의 불편함을 준다. 완전히 독립하게 된다면 겪지 않을 불편함이지만 내 불편함을 들여다보고 찬찬히 살피면 따듯한 불편함이라 말할 수 있다. 아버지의 쑥스러움을 이해하며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고 아버지와의 유대를 이어간다.


나와 아버지는 대화를 한다.


아버지는 ATM으로 인출하는 법을 모른다. 기계치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배우려 하지 않는다. 현금이 필요할 땐 어머니나 내가 인출해 드린다. 가끔 귀찮을 때도 있지만 배우시라고 재촉하지 않는다. 아버지 자랑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자발적으로 월급을 받으면 어머니께 다 드리고 용돈을 타서 쓴다. 1원 한 푼 허투루 쓰지 않는다. 젊었을 적엔 하루 삼천 원으로 생활하며 돈을 모았다고 한다. 배가 고프면 회사 근처 식당에서 물을 얻어 마셨다고 한다. 그 돈으로 집에 맛있는 반찬을 사서 들어갈 때 행복했었다고 한다. 그 돈을 모아 작지만 서울에 우리 집을 마련했다며 뿌듯해 한다. 아버지는 인출 방법을 일부러 배우지 않는다. 아직도 한 푼을 허투루 쓰지 않는다는 자부심과 어머니께 모든 월급을 드려 우리를 생활케 했다는 증거로서 인출을 하지 못한다. 가끔 귀찮긴 하지만 아버지를 이해한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내가 아버지를 이해하게끔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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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어바웃 타임>


나와 아버지는 대화를 한다.


친구네 아버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한 친구의 집안 분위기. 중학생 시절 친구네 집에 잠시 들렀을 때의 차가운 공기가 아직도 기억난다. 친구와 친구의 아버지는 인사 이외에는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는다. 내 인사도 “어~그래.” 로 받고 만다. 우리 집과 상당히 대조되는 무거운 공기에 눌려 당황스러웠다. 친구는 아버지와 대화가 1년 동안 없었다고 이야기했다. 그전에도 별로 없었지만 지금은 거의 인사만 하는 수준이라고 했다. 다들 우리 집 같은 줄 알았다. 끝없이 이야기가 오고 가는 우리 집과 타인의 가정이 비슷하리라 생각했었다. 모든 집이 우리와 같지 않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우리 집의 분위기와 대조적인 집을 보고 느낀 점은 상대적 우월감이 아니라 평소에 나의 아버지 이야기를 자주 했던 것이 친구에게 상처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그리고 나의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에게 자랑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머리에 새겼다. 민감한 것에 대한 조심스러움은 나이에 비례해 갔다.



대화가 없는 집….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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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연합뉴스


며칠 전 스치듯 본 뉴스에서 힘들 때 도움을 청할 사람이 통계적으로 가장 적은 국가가 대한민국이라는 내용을 보았다. 정부 대책 문제일 수도 있고 너나 할 것 없이 살기 어려워져 그럴 수도 있지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삭막해져 가는 사람과 사람이었다. 너와 나는 적이며 만인이 만인에 대해 적개심을 가지고 싸운다. 모두가 사람이며 장, 단점을 가진 존재이나 타인의 단점을 그저 단점 날 것으로 보고 날것 그대로의 언어로 비난과 욕설을 한다. 무언가가 빠진 기분이 든다.


예전 자식 연합이라는 키치적인 모임이 TV에 나온 적이 있다. 어디서 언제 나왔는지는 가물가물하다. 가물가물한 정도가 심해 TV이었는지 인터넷이었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무튼, 자식 연합과 어버이 연합 사람 중 일부가 서로 만나는 구성이었다. 자식 연합의 사람들은 당당해 보였으며 어느새 내가 자식 연합이 된 것 마냥 감정 이입을 하게 됐다. 자식 연합이 논리로 어버이 연합 할머니, 할아버지를 굴복시키길 바랐다. 말 그대로의 굴종이 아닌 생각의 전환을 맞게 해줬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그게 감정 이입한 내 입장에선 굴복이나 다름없으니까.


역시나 할머니 할아버지는 논리가 없었다. 그저 자신들 이야기만 이야기하더니 추억에 젖은 것 마냥 울기 시작했다. 눈물은 비논리의 결정체라 여겨 좋게 보이질 않았다. 하지만 자식 연합의 태도에서 감정 이입이 깨져버렸다. 자식 연합 사람들이 할머니, 할아버지를 위로하기 시작해서였다. TV라 출연진이 의식해서 달래는 시늉을 했을 수 있지만 나는 무언가 가슴을 콕콕 찌르는 한 가지를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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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일(79) 어버이연합 수석지부장과 자식연합 김남훈(39) 프로레슬러

출처 - SBS 다큐 <만사소통>



논리적 대화가 모든 대화의 우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


비논리적 대화로 대표되는 막말 싸움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싸움과 반대되는 감성이 바탕이 되는 대화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감성이 바탕이 되는, 그러니깐 상대를 이해하려는 마음가짐으로 시작하는 대화의 필요성을 깨닫게 됐다. 아버지와 언쟁이 있으면 그날 항상 아무렇지 않게 은근슬쩍 먼저 말을 걸어오는 것은 대부분 아버지였다. 먼저 말을 거는 것은 아버지 입장에선 지는 것도 뭐도 아닌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아버지로서의 감성으로 나를 대한 것이며 그동안 쌓아왔던 나에 대한 이해도 밑바닥에 깔려 있던 것이다. 비언어적 대화로 아기였을 때의 나와의 교감, 내가 성장하면서 느꼈을 감점, 오랜 시간 꾸준한 대화를 했던 습관으로 아버지는 말이 아니어도 나와 대화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와 아버지의 대화를 아주 작은 단위의 대화라고 보고 조금 더 넓은 단위인 이웃 간의 대화로 확장할 수 있지 않을까? 매우 어렵지만 가능하지 않을까 희망을 걸어본다. 어릴 적만 해도 이웃 간에 꾸준히 대화했었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이는 먼 과거의 전래 동화 같은 일은 아니더라도 자그마한 집단의 이웃 간의 대화는 늘 있었다. 서로 사소한 부탁을 하고 서로 간 작지만 마음이 보이는 선물을 교환하며 데면데면하지 않은 사이로 지냈다. 하지만 지금은 나도 그렇고 타인도 그렇고 모두가 내 주위에 분명 있지만 존재하지 않은 사람처럼 지낸다. 단절된 대화.



이제는 대화를 하는 사람이 적다.


단절된 대화를 찾아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싸움이란 단절을 보게 됐다. 일상생활을 지인과 같이 나누는 대화는 많지만 정작 싸움이 일어나는 곳엔 대화가 없다. 대화가 아니니깐 싸움이겠거니 하지만 대화가 절실한 곳에서도 싸움만 일어나더라. 남자와 여자, 아저씨와 젊은이, 저쪽 사람과 이쪽 사람. 하다못해 이쪽 사람 중에도 나뉘어 싸운다. 대화의 형식을 빌린 싸움의 광경을 목도하다 보면 또 싸우니 끼지 말고 피하자는 마음이 절로 생긴다. 이미 그것은 대화라 보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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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가 싸운다. 사랑 다툼이 아닌 성으로 갈려 싸움을 한다. 여성 혐오로 대표되는 싸움이다. 물론 성별과 관계없이 진영의 틈바구니에 끼어 싸움에 가세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을 나무라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바탕으로 여성 혐오에 관해 투쟁하는 것에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나도 여성 혐오에는 반대하기에 부정한 일에 대한 투쟁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성격이 다른 무언가이다. 내가 가끔 보는 사건에 보태어 혐오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또 다른 사건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 때문에 이 부분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허수아비 때리기


어떠한 사건이 발생하고 그것을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날 선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가상의 사건을 보태어 자극적으로 곡해하고 자신의 생각이 옳음을 증명하려는 시도들이 보인다. 물론 그게 사실일 수 있겠지만, 허수아비 때리기 방식의 상상도 존재하리라 본다. 혐오에 맞서기 위해 또 다른 혐오를 상상하여 낳는 방식, 그리고 혐오에 맞선다는 자의식으로 무장해 타인에 대한 무차별적 혐오를 표출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어 보이지 않는다. 하나의 사건으로 시작하여 덧붙여진 살들이 본래의 문제를 희석하며 사건 자체를 비만으로 만들어 버린다.


혐오의 문제 이외에도 대부분의 문제가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개인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주장과 문제를 보았을 때 하나는 옳게 보이고 하나는 그릇되어 보일 것이다. 차별이라고 하는 거대한 문제도 그렇고 이전 세대와 지금 세대의 세대 간 싸움도 그렇게 보일 것이다. 나는 이 모든 문제의 근본에는 대화의 부재가 있다 생각한다.



대화의 방법을 모른다.


아버지와 나는 오랜 교감을 통해 대화를 체화했다. 아주 오랜 시간 끝없는 대화를 통해 나의 불편함을 이해했으며 나의 옹졸함을 아버지가 이해했다. 가족이라도 대화와 소통은 어렵게 지속하였으며 매우 어려운 과정을 거쳤다. 개인이 타인과 교감을 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아버지와 나는 가족이라는 연대감은 있지만, 아버지는 내가 아니기에 나의 타인이다. 아버지와 자식 간의 대화도 이렇게 어렵다 보니 가족 이외의 타인과의 대화와 교감은 더 어려운 일이라 볼 수 있다. 하다못해 집단으로 구성된 곳과 대치되는 집단은 더 심하리라 본다. 그래서인지 대치된 두 집단에서의 대화는 대화가 아니게 되었고 논리와 말꼬리 잡기로 무장 된 전투 집단의 느낌만이 강하게 남게 되었다.


어려운 대화를 전쟁으로 치환하면 생각하기 쉬워진다. 이기기 위해 총칼을 빼 들고 섬멸하는 것이 단순한 전쟁의 논리라면 대화의 형식을 빌린 전쟁터에서도 이 같은 쉽고 단순한 논리가 쉽게 통용된다. 타인에 대한 이해의 부족과 이해하려는 마음이 절개된 상태에서 대화가 소통이 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화의 방법이 오로지 전투에만 국한되어 있다. 상대에 대한 이해의 마음가짐은 전투에서 마음 약한 병사 취급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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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목적은 단 하나다. 상대방을 섬멸하는 것


남녀에 관해서도, 꼰대로 치부되는 세대와 젊은 세대 사이에서도 서로가 이해하려는 마음이 없이 전투가 된 대화가 총알과 같이 진영에서 진영으로 쏘아질 뿐이다. 정부의 소통 부족에서도 찾아볼 수 있듯이 대화는 그 자체가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대화는 꼭 필요한 것이다. 각자 세대가 품고 있는 배경과 경험이 다르기에 더욱 필요하다. 윗세대는 아래 세대에 대해 모르며 또한 윗세대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았던 시대를 모른다. 단절된 대화가 단절된 세대를 만들고 또 다른 단절을 야기한다. 대화가 필요하다.


팔순이 넘은 할머니가 환갑이 다 되어가는 아들을 보면서 차 조심하라 이른다. 따듯한 마음과 자식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요즘은 이 같은 말도 꼰대질이라는 사람도 있다. 하나의 단어가 생기면 모든 문제, 꼰대질이라 볼 수 없는 문제도 포함 시키려 애쓴다. 그리고 언제든 자기 생각을 정당화하기 위해 할머니의 정치 성향이라든가 작은 잘못이라든가 티끌만 한 먼지를 찾으려는 전투적인 자세를 취한다. 사람과 사람 간의 대화와 이해에 쏟아야 할 정성이 다른 방향으로 튀는 것이다. 자신은 논리적인 대화라 이야기하겠지만 내가 보기엔 대화의 방법을 모르는 사람으로 보인다.



이해와 이해하려는 마음에서 출발하는 대화 자세


논리적 대화가 모든 대화의 우위에 있지 않은 것처럼 이해하려는 대화도 모든 대화의 우위에 있다 말하기 어렵다. 말이 통하지 않은 개인과의 대화나 자신을 조롱하려는 의도를 가지거나 욕설을 하는 경우 등 이해의 대화법이 통용되지 않는 경우도 자주 있다. 그래서 모든 대화에서 상대를 이해하라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최소한 이해하려는 대화 자세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내 이야기를 또 곡해해서 ‘나를 해하려 하는 사람을 이해하고 대화하라는 것이냐!’ 식으로 아니꼽게 볼 수도 있다. 그리고 본인이 속한 진영에 공격적인 진영에 대해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대화하라는 것이냐며 적개심을 가질 수도 있다. 일방적으로 당신에게 이렇게 대화하라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대립하는 두 집단 모두에게 이야기하는 것이지 한쪽에 대고 네가 이해해라 타이르는 것은 아니다. 대화에 부재에 따르는 우리 모두의 손해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살기 갑갑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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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메이즈러너>


갑갑한 세상에서 내 안위도 장담 못 하는데 타인을 이해하는 마음을 가지기는 어렵다. 몹시 어려운 자세다. 하지만 손 놓고 단절만을 낳는다면 갑갑한 세상에서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갇히게 된다. 상대 진영으로 표를 주는 어르신들을 분석하려 하고 무식하다 하고 적으로 간주한다면 싸움만이 판치게 되어 영원히 바뀌지 않을 세상에 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누구의 지지자라고 하면서 비판하는 목소리에 전투적인 자세로 일관한다면 당신과 싸운 상대는 영원히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에 등을 돌릴지도 모른다. 살기 갑갑하여 바꾸고 싶다면 대화를 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논리로 무장 된 대화 말고 또한 자신의 수준으로 이끌고 싶다는 그릇된 계몽 정신 말고 상대를 이해하려는 마음으로부터 출발하는 대화의 방법이 총과 칼 옆에 놓여 있다는 것을 상기시켰으면 좋겠다.


타인과 타 집단, 내가 아닌 모든 ‘타’에 대해 모르는 빈 공간을 사람은 편견을 채워 넣는다. 편견을 지우는 방법은 대화에 있으며 대화 이외에는 방법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해를 바탕으로 허수아비를 세우지 말고 대화에 임하는 것은 꼭 필요한 자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나와 아버지의 대화는 계속될 것이며 서로를 끝임없이 이해하는 바탕이 될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노크 없음을 이해하고 아버지는 나의 속 좁은 옹졸함을 이해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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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딴지일보 coc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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