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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06. 19. 수요일

편집장 너부리

 

 

 

 


 


편집부 주


본 기사는 


[더딴지] 5호에 실렸던 내용 전문을 

2013. 03. 30일 기사 내용에 덧붙였습니다.



 




1. 취지


본 기사는 각종 매체에서 이루어졌던 광고 아닌 척 책 소개하기식의 서적 광고도 아니고 필자의 개성과 취향에 따라 그 평가가 천차만별인 니맘대로 서적 리뷰도 아니다.


 

제목에서 이미 눈치 챌 수 있듯 본 기사는 한 해 평균 독서량이 짐승만도 못한 독자라 할지라도 각종 서적에 대해 누구 앞에서건 아무 거리낌 없이 읽은 척을 할 수 있게 함으로써 원만한 대인관계를 형성시키는 데 그 총체적 목적이 있는 공리주의적 텍스트라 할 수 있으며, 일종의 인문학적 데자뷰 현상을 도모하는 학구적 심령기사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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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업에 지친 나머지 읽고 싶어도 책 읽을 기력과 의욕을 상실한 독자들에게, 설령 의욕이 있다 하더라도 직장 내 오랜 눈칫밥 습관으로 한 곳에 1분 이상 눈동자를 모으기 힘든 독자들에게, 그리고 어디 가서 모르는 책 얘기만 나오면 자아 한 곳에 치명상을 입는 가녀린 영혼을 소유한 독자들에게 조그마한 위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 들어가며


한 때 미국발 세계적 경제위기의 총체적 원흉으로 각인된 대명사가 리먼브라더스였던 것처럼, 최근 유럽발 경제난의 주범으로 찍힐 1순위 청약대상자가 바로 그리스라 하겠다.

 

 

이에 각종 모임에서 혹시라도 그리스 얘기가 나올 경우 왠지 그 나라는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에게 진 것 말고는 잘 한 게 아무것도 없는 나라라는 식의 글로벌한 왕따가 횡행할 가능성이 높은 요즘이라 할 것이다.

 

 

바로 이때 마치 분하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리스는 카잔차키스를 낳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대한 나라다!” 정도의 절규를 해준다면 당신은 어쩌면 주변 사람들에게 시장의 세계화 대신 지혜의 세계화를 역설하는 진보적 인재임과 동시에 평소 그렇게 안 보였는데 남 몰래 고전명작을 탐독하는 지성인으로까지 오해 받는 일석이조의 행운을 거머쥘 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개중에는 프렌치키스는 들어봤어도 카잔차키스는 금시초문이라며 그게 대체 얼마나 진한 거길래 그것 때문에 그리스가 위대하냐는 건지 반문하는 이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반드시 있다. 마치 이런 사람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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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고마운 일이라 할 것이다. 읽은 척 행위자의 입장에서는 무지가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목도하는 유일한 순간이 바로 이런 경우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런 기적적 무지와 조우했을 때, 너무 반가운 나머지 기회를 놓칠 세라 필요 이상의 면박을 주며 지나치게 성급한 읽은 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당 서적을 실제로 읽은 독자라면 카잔차키스의 대표작들은 대체로, 특히 <그리스인 조르바>는 프렌치키스 만큼이나 진하다고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찰의 측면에서든 성적인 측면에서든.

 

 

 

 



3. 읽은 척 매뉴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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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용요약


당 서적은 줄거리에 대한 암기보다는 등장인물에 대한 이해가 읽은 척의 팔 할을 차지한다. 사건 사고의 뼈대 자체는 마치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처럼 매우 심플하기 때문이다. 벌어진 사건만을 중심으로 초간단 내용 요약을 하자면 다음과 같다.

 

 

크레타 섬에서 광산사업을 시작한 ‘나’는 결국 망한다.

 

 

여기에 살을 붙이면 다음과 같이 늘일 수도 있겠다.

 

 

자기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사지로 떠나는 친구와의 동행을 거부한 나에게 친구는 ‘넌 생각만 많고 실천은 없는 책벌레’라는 말을 듣고 삐진 나는 크레타에서의 광산사업이라면 왠지 관념상 뭔가 실천적일 거 같고, 붕 떠있기는커녕 땅으로 막 파고 들어가는 모양새라 야심 차게 시작을 해보지만 탄광의 버팀목으로 쓸 산 위의 목재를 나르고자 고안한 케이블이 애니팡 30콤보 터지듯 무너지면서 결국 망한다. 하지만 광산채굴공사의 총 책임자였던 조르바를 통해 나는 캐려던 갈탄 대신 인간 실존에 대한 무엇, 즉 결국엔 형이상학적인 뭔가를 캘 수 있었기 때문에 기뻤다. 자위 아니다 뭐.

 

 

결국, 주인공이 갈탄 대신 캔 형이상학적인 뭔가가 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아는 척이 당 서적의 읽은 척 핵심 포인트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 읽은 척 세부 스킬에서 구체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2) 주요 등장인물


: 돈 많고, 머리에 든 거 많고, 온정도 많지만 나이는 적은 20세기의 엄친아. 실전 경험 대신 책을 통해 궁극의 도를 깨우치려던 중 노가다 십장 조르바를 만나 책 따위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다는 둥,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여자라는 둥의 평생 듣도보도 못한 쿠사리를 먹으며 몹시 당황하는 척 하지만 내심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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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희랍인 조르바 中, 오른쪽이 ‘나(앨런 베이츠)’, 왼쪽이 ‘조르바(안소니 퀸)’>

 

 

 

조르바 : 돈 없고, 머리에 든 거 없고, 온정도 없는데 나이는 많은 20세기의 잉여. 책이라곤 <신밧드의 모험>을 읽은 게 전부이지만, 중요한 건 소설 속 신밧드만큼이나 초특급 스펙타클 러브로망 어드벤쳐를 수 없이 경험하고, 그 경험을 통해 자신만의 가치관을 확립했다는 거.

 

 

스타브리다키 : ‘나’의 친구. 러시아 혁명으로 처형 위기에 처한 그리스인 15만명을 본국으로 송환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떠나는 작중 초반의 등장인물. 전체 줄거리 상으로는 존재감이 미미하지만 ‘나’도 그렇고 ‘조르바’도 그렇고 스타브리다키 역시 작가 카잔차키스의 실제 주변 인물임과 동시에 작가 자신의 분신임을 아는 척 하는 것은 당 서적에 대한 읽은 척에 있어서 만큼은 결코 미미한 스킬이 아니라 하겠다. 카잔차키스가 36세의 나이에 그리스의 공공복지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실제 송환임무를 수행한 바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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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카잔차키스>

 

 

 

과부1 (오르탕스 부인) : 화류계에서 조르바 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삶을 떠돌다 이제는 이국 땅 크레타의 촌구석에 정착한 파리지엥이자 마지막 남친을 조르바로 두는 행운 혹은 불행의 여인. 크레타 혁명 당시 항구로 몰려든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4대열강의 함대 제독들을 차례대로, 혹은 한꺼번에 그야말로 맨몸으로 상대했던 4:1 전설의 소유자다. 당시 크레타 사람들을 포격하려던 4대열강 제독들의 다른 포를 부여잡음으로써 포격을 중단시킨 게 몇 번인데 이 배은망덕한 크레타 썅놈들은 그 은혜를 괄시로 갚는다며 분노의 술주정을 부리곤 한다.

 

 

과부2 (과수댁) : 작품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남성의 흠모와 경멸을 동시에 받던 젊은 육체파 과부. 가질 수 없는 너이기 때문에, 동네 남성들의 이러한 증오의 발정을 보다 못한 조르바가 저 여인을 홀로 잠들게 하는 건 모든 남자들의 수치며 죄악이라고 ‘나’에게 좀 어떻게 해보라 닥달하던 대상이기도 하다. 한참을 미적거리다 결국 부활절 직전에 ‘나’와 섬씽이 생기지만 이후 결과는 비극적이다.


 


 

3)읽은 척 세부스킬


-읽은 척의 정(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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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은 척 할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이면서도 일반적인 방식은 다음과 같은 멘트를 치는 것이다.

 

 


‘나도 조르바같은 친구(혹은 멘토)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도 그럴 것이 조르바는 동서고금의 고전을 통틀어 소위 ‘자유인’하면 떠오르는, 혹은 떠오르는 척 해야만 할 가장 대표적 캐릭터로 손꼽히곤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구대표급 자유인 하나쯤을 친구로 두고 싶은 바람을 강조하는 것은 읽은 척의 가장 큰 기술. 그러니까 당 서적을 읽었든 읽지 않았든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인류보편의 정서에 호소함으로써 상대방으로 하여금 ‘설마 저 사람이 읽어 보지도 않고 저런 소리를 하는 건 아니겠지.’ 하며 읽은 척에 대한 의심이 스스로 부끄러워지게 만드는 그야말로 읽은 척의 완전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르바가 왜 자유인으로 상징되는지, 가장 대표적 에피소드 중 하나쯤은 학습을 해야 하는 수고가 필요하다 할 것이다.

 

 

“돌고래요!” 그가 기쁜 듯이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제야 그의 왼손 집게 손가락이 반 이상 잘려나간 걸 알았다. 나는 그쪽으로 갔지만 속이 역겨웠다.

 

“손가락은 어떻게 된 겁니까. 조르바.” 내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오.”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돌고래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내가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기계 만지다 잘렸어요?” 그의 기분을 모른 체하며 내가 물었다.

 

“뭘 안다고 기계 어쩌고 하시오? 내 손으로 잘랐소.”

 

“당신 손으로, 왜요?”

 

“당신은 모를 거외다, 두목.” 그가 어깨를 들었다 놓으며 말했다.

 

“안 해본 짓이 없다고 했지요? 한때 도자기를 만들었지요. 그 놀음에 미쳤더랬어요. 흙덩이를 가지고 만들고 싶은 건 아무거나 만든다는 게 어떤 건지 아시오? 프르르! 녹로를 돌리면 진흙 덩이가 동그랗게 되는 겁니다. 흡사 당신의 이런 말을 알아들은 듯이 말입니다. <항아리를 만들어야지, 접시를 만들어야지. 아니 램프를 만들까, 귀신도 모를 물건을 만들까…>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건 모름지기 이런 게 아닐까요, 자유 말이오.”

 

그는 바다를 잊은 지 오래였다. 그는 더 이상 레몬을 깨물고 있지 않았다. 눈빛이 다시 빛나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요?” 내가 물었다. “손가락이 어떻게 되었느냐니까?”

 

“참, 그게 녹로 돌리는 데 자꾸 거치덕거리더란 말입니다. 이게 끼어들어 글쎄 내가 만들려던 걸 뭉개어 놓지 뭡니까. 그래서 어느 날 손도끼를 들어…”

 

“아프지 않던가요?”

 

“그게 무슨 말이오. 나는 쓰러진 나무 그루터기는 아니오. 나도 사람입니다. 물론 아팠지요. 하지만 이게 자꾸 거치적거리며 신경을 돋우었어요. 그래서 잘라버렸지요.”

 

 

<그리스인 조르바(이윤기/열린책들)> p.28~29

 

 


필자 개인적으로는 도자기를 빚는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스스로 자기 손가락을 도끼로 찍어내는 조금은 병신 같은 박력이 조르바가 자유인임을 설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뭔가는 아니라 생각한다. 오히려 그 이후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 조르바가 어떤 종류의 자유인인지가 짐작 가능하다.

 

 

“그건 좀 심한데요, 조르바.” 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성인전집(聖人全集)의 금욕주의자 이야기가 생각나는군요. 여자를 보고 육욕의 갈등이 견디기 어렵자 이 양반은 도끼를 들어…”

 

“참 병신 같은 친구도 다 있네.” 조르바는 나의 다음 말을 짐작했는지 소리를 버럭 질렀다. “… 그걸 자르다니! 그런 병신은 지옥에나 가야지. 그것참, 순진하고도 깜깜한 친굴세. 그건 장애물이 아니에요!”

 

“하지만, 아주 큰 장애물이 될 수도 있겠지요.” 나는 우겼다.

 

“뭐 하는 데 말인가요?”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데”

 

조르바가 곁눈질로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다 이렇게 말했다.

 

“… 이 답답한 양반아. 그건 천국으로 들어가는 열쇠라는 걸 왜 모르셔?”

 

그는 고개를 들어 내세의 삶, 천국, 여자, 성직자 따위의 생각이 복잡하게 오고 가는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려는 듯이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는 내 심중을 별로 헤아리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서 그랬는지 그 커다란 잿빛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병신은 천국에 못 들어가요.”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스인 조르바(이윤기/열린책들)> p.29~30

 

 

 

 

그렇다. 자신의 아랫도리가 천국에 들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아닌 오히려 천국의 열쇠라 인식하고 있는 만큼 그가 천국에 가기 위해 이곳 저곳 열쇠를 들이대며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지, 혹은 천국에 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여성들에게 자유의 소중함을 부르짖었을 지가 쉬 짐작되는 대목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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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성인전집씩이나 되는 책에 소개될 정도로 딴에는 종교적 고결함을 위해 스스로 거세한 성직자를 ‘병신’이란 한 마디로 정의해버리는 저 가공할 박력, 어쩌면 무일푼인 자기 자신의 간접적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고용주를 한심하다는 듯 무시할 수 있는 안하무인적 대범함이다. 물론 박력과 대범함 자체가 본질인 것은 결코 아니다. 앞서 등장인물 소개에서 언급한 바 있듯, 신밧드만큼이나 많은 경험과 그 경험을 기반으로 한 사색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모순이 없다는 확신이 든다면, 그때는 다른 어떤 종교적, 정치적 권위 따위에도 휘둘리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조르바표 자유인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고로 이 지점에서 조르바 만큼의 경험과 사색을 통한 내실 없이 조르바스러운 박력과 대범함의 외피(조르바의 질퍽한 언변과 허리하학적 껄떡임)만을 흉내 내며 스스로를 자유인으로 오해 받으려는 이가 있다면 그건 그저 또 하나의 병신 탄생일 뿐이라 경멸하는 읽은 척도 가능하다 할 것이다.

 

 

이왕 귀찮은 거 참고 인용을 시작한 김에 한 토막을 더 소개하는 바이다.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두목! 혼자 사는 여자에게 불평할 겨를을 안 주었다는 잡놈 같은 신(神)이 누구라지요? 그 양반 이야기는 좀 들어서 아는데요, 그 양반도 수염을 염색하고 심장에다 문신을 새기고 팔뚝에는 세이렌과 화살을 그려 가지고 다녔다나 봐요. 변장도 곧잘 했는데, 들리는 말로는 체면 때문에 황소가 되고 백조가 되고 양이 되고 당나귀도 되었다는 군요. 화냥것들이 원하는 대로 말입니다. 이름이 무엇이었죠?”

 

“제우스 신 이야길 하시나 보군. 어쩌다 제우스 생각을 다 하게 되었지요?”

 

“하느님, 제우스의 영혼을 긍휼히 여기소서! 얼마나 고생이 막심했을까. 아주 애를 먹었을 겁니다. 두목, 그 양반으로 말하자면 위대한 순교자였어요. 당신은 책에 쓰인 것이면 뭐든 꿀꺽꿀꺽 삼킵니다만, 책 쓰는 사람들이 어떤 것들인지 한번 생각해 봐요! 퉤퉤! 기껏해야 학교 선생들이지. 그런 것들이 여자니, 여자 꽁무니를 쫓는 남자 일을 뭐 알겠어요? 개코도 모르지!”

 

“그럼 조르바, 당신이 책을 써보지 그래요? 세상의 신비를 우리에게 설명해 주면 그도 좋은 일 아닌가요?” 내가 비꼬았다.

 

“못 할 것도 없지요. 하지만 못 했어요. 이유는 간단해요. 나는 당신의 소위 그 <신비>를 살아 버리느라고 쓸 시간을 못 냈지요. 때로는 전쟁, 때로는 계집, 때로는 술, 때로는 산투르를 살아 버렸어요. 그러니 내게 펜대 운전할 시간이 어디 있었겠어요? 그러니 이런 일들이 펜대 운전사들에게 떨어진 거지요. 인생의 신비를 사는 사람들에겐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는 사람들은 살 줄을 몰라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처음 이야기로 되돌아갑시다. 제우스 이야기가 왜 나왔어요?”

 

“아, 그 양반… 그 양반의 고민을 알아주는 건 나밖에 없습니다. 그 양반 물론 여자 좋아했지요. 그러나 당신네 펜대잡이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라요. 다르고말고. 그 양반은 여자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킨 겁니다. 언젠가 시골 구석을 다니다 이 양반은 욕망과 회한으로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노처녀, 혹은 아리따운 유부녀를 보았습니다(꼭 아리따운 여자일 필요는 없습니다. 괴물이라도 상관없습니다). 그러고는 그 여자 방으로 들어갑니다.

 

그저 적당하게 애무만 바라는 여자는 상대도 하지 않았어요. 턱도 없지. 녹초가 될 판인데도 최선을 다해 주지요. 당신도 무슨 말인지 알 겁니다. 이 암양들을 어떻게 일일이 다 만족시켜요? 오, 제우스, 저 가엾은 숫양, 귀찮은 내색 한 번 하는 법이 없었어요. 좋아서 그 짓 한 것도 아닐 겁니다. 암양을 네댓 마리 해치우고 난 숫양 본 적 있어요? 침을 질질 흘리고 눈깔에는 안개와 눈곱투성입니다. 기침까지 콜록콜록 해대는 꼴을 보면 그거 어디 서 있을 성싶지도 않습니다. 그래요, 저 불쌍한 제우스도 그런 고역을 적잖게 치렀을 겝니다.

 

그러곤 새벽이면 이렇게 중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왔을 겁니다. <오, 하느님. 언제면 좀 편히 쉴 수 있을까요? 죽을 지경입니다.> 이러고는 질질 흐르는 침을 닦았을 겁니다.

 

그때 문득 또 한숨 소리가 들립니다. 저 아래 지구 위에서 한 여자가 반라에 가까운 잠옷 바람으로 발코니로 나와 풍차라도 돌릴 듯이 한숨을 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제우스는 또 불쌍한 생각이 듭니다. 그는 끙 하고 신음을 토해냅니다. <이런 니기미, 또 내려가야 하게 생겼구나! 신세타령하는 여자가 또 있으니 마땅히 내려가 달래 주어야 할 일!>

 

이런 짓도 오래 하다 보니 여자들이 제우스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빨아 버리고 맙니다. 꼼짝도 할 수 없게 된 그는 먹은 것을 토하더니 지체가 마비되어 죽어 버립니다. 그의 뒤를 이어 그리스도가 이 땅에 내려옵니다. 그는 이 제우스의 꼴이 말이 아닌 걸 보고는 가로되. <여자를 조심할지니.>”

 

 

<그리스인 조르바(이윤기/열린책들)> p.314~316

 

 

 

 

아아. 제우스를 무슨 어렸을 적 동네 노는 형 얘기하듯 하는 저 파괴적 스케일. 거기에 노는 형의 남 모를 애환마저 짐작해내는 저 풍부한 감수성. 뿐인가. 제우스의 후임으로 그리스도를 임명하는 과감함과 함께 그래서 그리스도가 금욕을 주장했던 거라는 거의 완전무결한 논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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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바가 동네 노는 형 얘기하듯 한 ‘제우스’>

 

 


아니, 대체 누가 이런 조르바 같은 친구를 두고 싶다는 말로 읽은 척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공교롭게도 당 서적에 대한 읽은 척의 가장 큰 함정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다.

 

 

 

 

 

-읽은 척의 반(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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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바에 대한 찬양일색의 읽은 척은 자칫 큰 재앙을 불러올 수 있음이다. 왜냐하면 조르바에게는 자유인스러워 보이는 현재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그렇지 않은 그의 과거도 있었기 때문이다.

 

 

두목이 ‘전쟁’에 관해 묻자 조르바가 처음에는 대답을 회피하다 결국 입을 여는 대목이다.

 

 

“두목, 당신 앞에 있는 사람으로 말하면…, 한때는 제 대가리 털로, 터키 놈들이 이슬람 사원으로 쓰고 있던 성 소피아 성당 장식을 엮어 목에 부적처럼 차고 다녔습니다요. 그래요, 두목,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 나는 당시만 해도 칠흑같이 검던 내 머리카락을 뽑아 이 발가락으로 부적을 엮었소. 파블로스 멜라스와 함께 마케도니아 산맥을 떠돌아다닌 적도 있소. 당시에는 아주 체격이 건장해서 키로 말하면 이 오두막보다 크고 킬트 차림에 빨간 페스모, 은빛 부적, 액막이, 이슬람교도들이 쓰는 칼, 탄대와 권총까지 떡 차고 다녔소. 내가 걸어갈 때면 철꺼덕철꺼덕, 흡사 연대가 마을을 지나가는 것 같았단 말입니다.”

 

 

(중략)

 

 

“…. 터무니없는 수작이지!” 그가 화를 버럭 내었다. “… 구역질이 다 나는군. 사람이라는 게 언제쯤 제대로 사람 구실을 하게 될까요? 우리는 바지를 입고 셔츠를 걸치고 칼라를 세우고 모자를 씁니다만 그래 봐야 노새 새끼, 여우 새끼, 이리 새끼, 돼지 새끼를 못 면해요. 하느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고? 누가, 우리가? 나 같으면 인간의 그 멍청한 쌍통에다 침을 탁 뱉겠소!”

 

쓰라린 추억이 가슴으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는 갈수록 절망적으로 몸을 떨었다. 알 수 없는 말이 덜덜 떨고 있는 이빨 사이에서 새어 나왔다.

 

그는 일어나서 물통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마음이 다소 가라앉는지 한동안 조용했다.

 

“… 당신이 어디를 만지든 나는 소리를 지를 겁니다. 내 몸은 상처와 흉터와 옹이투성입니다. 계집에 대한 수작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내가 나 자신을 제법 진짜 사내라고 생각했을 때는 계집에게 눈 한 번 돌리지 않았어요. 잠깐 만져보고는, 수탉처럼 오다 가다 말입니다, 그러고는 갈 길을 갔습니다. 나는 자신을 타일렀지요. <더러운 족제비들, 저것들은 내 힘을 쭉 빨아 버리고 말 것이야. 퉤! 계집은 지옥에나 가라고!>

 

그러고는 다시 총을 들고 떠났습니다…”

 

 

(중략)

 

 

그는 한동안 그대로 앉아 있다 다시 말을 시작했다. 가슴에 차고 넘치는 격정을 달리 어쩔 수 없었던 것이었다.

 

“…내게는, 저건 터키 놈, 저건 불가리아 놈, 이건 그리스 놈,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두목, 나는 당신이 들으면 머리카락이 쭈뼛할 짓도 조국을 위해서랍시고 태연하게 했습니다. 나는 사람의 멱도 따고 마을에 불도 지르고 강도 짓도 하고 강간도 하고 일가족을 몰살하기도 했습니다. 왜요? 불가리아 놈, 아니면 터키 놈이기 때문이지요. 나는 때로 자신을 이렇게 질책했습니다. <염병할 놈, 지옥에나 떨어져, 이 돼지 같은 놈! 싹 꺼져 버려. 이 병신아!> 요새 와서는 이 사람은 좋은 사람, 저 사람은 나쁜 놈, 이런 식입니다. 그리스인이든, 불가리아인이든 터키인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이냐, 나쁜 놈이냐? 요새 내게 문제가 되는 건 이것뿐입니다. 나이를 더 먹으면(마지막으로 입에 들어갈 빵 덩어리에다 놓고 맹세합니다만) 이것도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놈이든 나는 그것들이 불쌍해요. 모두가 한가집니다. 태연해야지 하고 생각해도 사람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요. 오, 여기 또 하나 불쌍한 것이 있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자 역시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두려워한다. 이자 속에도 하느님과 악마가 있고, 때가 되면 뻗어 땅 밑에 널빤지처럼 꼿꼿하게 눕고, 구더기 밥이 된다. 불쌍한 것! 우리는 모두 한 형제간이지. 모두가 구더기 밥이니까.”

 

 

(중략)

 

 

<그리스인 조르바(이윤기/열린책들)> p.322~327에서 발췌

 

 

 

 

다시 말해, 작품 중에서 현재 6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풍부한 유머감각과 넘치는 박력, 뛰어난 통찰과 빼어난 정력을 자랑하던 조르바가, 젊은 시절에는 애국심이라는 이름의 관념적 뭔가를 위해서 살인과 강간도 태연히 자행했던 개새끼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불가리아인들로부터 쫓겨 죽을 고비에 처한 조르바가 같은 불가리아 과부의 도움(과부가 자신의 침대에 숨겨줌)으로 목숨도 구하고 심지어는 뜨거운 사랑도 나누지만 그 다음날에는 마을에 불을 질러 그 과부를 포함해 전 주민을 몰살시켰다고 하는 악마적 과거를 고백하는 대목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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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터키 전쟁>

 

 


(여기서 대한민국과 일본과의 관계 이상으로 상호 증오심을 당연하게 여겼던 그리스와 터키, 그리스와 불가리아와의 관계에 대한 역사적 맥락을 아는 척 하는 것도 읽은 척 고급 스킬이 될 수 있다 할 것이다. 그 역사적 맥락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과감히 생략한다. 검색만 해도 다 나오는 거니까.)

 

 

고로 당 서적을 읽은 척함에 있어 마치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것처럼 언제 어디서든 ‘내게도 조르바 같은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어!’라는 냅다 불호령만으로 안일하게 자축의 샴페인을 터뜨릴 경우 오히려 그 병으로 뒤통수를 쌔려맞는 것과도 같은 역공을 당할 가능성도 농후하다는 얘기 되겠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으로 말이다.

 

 

 

 

진짜로 읽은 자 : 너네 혹시 <그리스인 조르바> 읽어봤니?

 

읽은 척 시전자 : 아아.. 나도 살면서 조르바같은 친구를 한 번이라도 만날 수 있을까?

 

읽은 척 동조자 : 맞아 맞아. 나도 조르바같은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어.

 

진짜로 읽은 자 : 너네는 살인범, 강간범과 그렇게 친구하고 싶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상황이라 하겠다. 내가 읽은 책에는 그렇게 번역되지 않았다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제 와서 조르바 그렇게 안 봤는데 아주 나쁜 놈이었네라며 되려 성을 낼 수도 없지 않은가.

 

 

특히 자신이 진보좌파 진영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경우 조르바와 친구 먹기 읽은 척에 더욱 주의를 요한다. 두목이 평소 ‘갈탄광이 성공하면 모든 것을 서로 나누어 갖고 형제들처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는 일종의 공동사회를 만들고 싶다’는 좌파적 이상을 얘기했을 때 조르바는 이렇게 대답하기 때문이다.

 

 

“두목, 이렇게 말한다고 너무 섭섭하게 생각지만 마쇼. 당신 대가리는 아무리 봐도 아직 여문 것 같지 않소. 올해 몇이시오?”

 

“서른다섯이오.”

 

“그럼 앞으로도 여물긴 텄군.”

 

그러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이 일격에 얼떨떨했다.

 

“조르바, 당신은 사람을 너무 믿지 않는 것 같은데요?” 내가 반격했다.

 

“두목, 화내지 마쇼.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소. 내가 사람을 믿는다면, 하느님도 믿고 악마도 믿을 거요. 그거가 그거나 마찬가지니까. 두목, 그렇게 되면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되고 나는 혼란에 빠지고 말아요.”

 

 

(중략)

 

 

“두목, 인간이란 짐승이에요.” 단장으로 자갈을 후려치며 그가 말을 이었다. “… 짐승이라도 엄청난 짐승이에요. 그런데도 두목은 이걸 알지 못해요. 당신에겐 이 인간이라는 것, 세상사라는 것이 너무 어려웠던 모양인데… 내게 물어봐요! 짐승이라고 대답할 게요. 이 짐승을 사납게 대하면, 당신을 존경하고 두려워해요. 친절하게 대하면 눈이라도 뽑아갈 거요. 두목, 거리를 둬요! 놈들 간덩이를 키우지 말아요. 우리는 평등하다, 우리에겐 똑 같은 권리가 있다, 이 따위 소리는 하면 안 돼요. 그러면 당신에게 달려들어 당신 권리까지 빼앗고 당신 빵을 훔치고 굶어 죽게 할 거요. 두목, 좋은 걸 다 걸고 충고하건데, 거리를 둬요!”

 

“하지만, 조르바, 당신은 아무것도 안 믿는다고 하지 않았어요?” 나도 대들었다.

 

“안 믿지요. 아무것도 안 믿어요. 몇 번이나 얘기해야 알아듣겠소? 나는 아무도,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오직 조르바만 믿지. 조르바가 딴 것들보다 나아서가 아니오. 나을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요. 조르바 역시 딴 놈들과 마찬가지로 짐승이오! 그러나 내가 조르바를 믿는 건, 내가 아는 것 중에서 아직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조르바뿐이기 때문이오. 나머지는 모조리 허깨비들이오. 나는 이 눈으로 보고 이 귀로 듣고 이 내장으로 삭여 내어요. 나머지야 몽땅 허깨비지. 내가 죽으면 만사가 죽는 거요. 조르바가 죽으면 세계 전부가 나락으로 떨어질 게요.”

 

“저런 이기주의!” 내가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어쩔 수 없어요, 두목, 사실이 그러니까. 내가 콩을 먹으면 콩을 말해요. 내가 조르바니까 조르바같이 말하는 거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르바의 말이 채찍이 되어 날아들었다. 강인했기 때문에 그토록 인간을 경멸하면서도 동시에 그들과 함께 살고 일하려는 그를 나는 존경했다. 나라면 그런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려면 금욕주의자가 되었거나 그들을 가짜 깃털로 꾸며 놓을 수밖에 없었을 것 같았다.

 

 

<그리스인 조르바(이윤기/열린책들)> p.81~82에서 발췌

 

 

 

 

-읽은 척의 합(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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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조르바는 자유인의 완성형이 아니다. 오히려 일견 숭고해 보이는 신념(애국심, 혹은 애국심의 탈을 쓴 증오심) 때문에 살인과 강간을 서슴지 않았던(서슴지 않을수록 신념에 대한 간증이 더욱 숭고해지는) 지독한 ‘관념의 노예’였고, 그랬던 과거를 대못처럼 가슴에 박아둔 채 살아가는 누구보다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라 말할 수도 있다.



다만 그런 자신을 자각했기 때문에, 즉 자기가 노예였다는 걸 인식함으로써 그 노예가 너무 혐오스럽다는 가치기준을 갖게 되고, 이후에는 노예적인 모든 걸 거부하려는 (어찌 보면 혐오스러우니까 하지 않고, 보지 않으려는 당연한) 의지의 발현이 마치 자유를 향한 거대한 투쟁처럼 미화되곤 하는 것일뿐.



이는 물론 다른 대부분의 인간이 당연한 의지의 발현은 언감생심, 자신이 각종 신념의 노예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조차도 하지 못하거나 혹은 할 수 있어도 외면하는 것이 당연한 것 같은 의지의 발현만이 난무하는 현실과 비교되기 때문일 테지만 말이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에게 공과 과는 함께 존재한다. 조르바 역시 그런 대부분의 사람 중 하나이지만 공과 과의 낙차폭이 워낙 커서 특별해 보이는 사람일 뿐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이 얘기는 곧 조르바 같은 친구를 애써 찾을 필요도 없이 모든 사람이 이미 다 조르바라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조르바의 과거를 살고 있느냐, 조르바의 현재를 살고 있느냐의 차이일 뿐. 그리고 설령 누군가 현재 조르바의 과거를 살고 있다 해도 조르바가 그랬듯 다시 누군가의 미래는 조르바의 현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반대도 가능하다.



결국 조르바의 현재라는 정(正)과 과거라는 반(反)을 관통하는 뭔가는 ‘변화 가능성’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바로 이 지점에서 앞서 제기된 읽은 척 역공에 대한 되치기의 기회를 도모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진짜로 읽은 자 : 너네 혹시 <그리스인 조르바> 읽어봤니?


읽은 척 시전자 : 아아.. 나도 살면서 조르바같은 친구를 한 번이라도 만날 수 있을까?


읽은 척 동조자 : 맞아 맞아. 나도 조르바같은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어.


진짜로 읽은 자 : 너네는 살인범, 강간범과 그렇게 친구하고 싶어?


읽은 척 시전자 : 물론. 사람은 변할 수 있는 거니까 말이야. 마치 조르바가 그랬던 것처럼. 내가 사람의 변화 기회 자체를 말살하는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이유도 바로 내 친구 조르바 때문이지.



이러한 주제를 도출할 수 있기 때문에 카잔차키스는 실존주의 문학의 계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라는 설레발로 변죽을 울리는 읽은 척도 가능할 수 있겠다. 실존주의 문학에 대한 개론적 읽은 척은 니체의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니체의 매뉴얼은 해킹으로 소실됨-편집자 주), 까뮈의 <이방인>(링크),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링크)에 대한 지난 읽은 척 매뉴얼을 참고하기 바란다.



읽은 척의 합이 이루어져야 할 포인트가 하나 더 있다. 조르바가 자유인으로 규정될 수 있었던 데에는 조르바의 과거와 현재가 합해지는 과정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남다른 삶을 살아낸 ‘조르바’ 외에 ‘나’라는 남다른 해설가가 존재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나는 이따금 친구들에게 이 위대한 인간의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교육받은 사람들의 이성보다 더 깊고 더 자신만만한 그의 긍지에 찬 태도를 존경했다. 우리들이라면 고통스럽게 몇 년을 걸려 얻을 것을 그는 단숨에 그 정신의 높이에 닿을 수 있었다. 우리는 <조르바는 위대한 인간>이라고 말했다. 이 높이에서 더 뛰어나갔더라면 <조르바는 미쳤다>고 했으리라.


<그리스인 조르바(이윤기/열린책들)> p.437



즉, 관념 만땅의 ‘나’와 경험 만땅의 조르바, 모범생인 ‘나’와 일진인 조르바, 젊은 ‘나’와 늙은 조르바, 돈 많은 나와 돈 없는 조르바, 여자 앞에 쑥맥인 ‘나’와 열쇠쟁이 조르바 등 상반된 극단끼리여서 결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인물들이 오히려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 위대한 조르바와 더불어 깨달은 ‘나’를 탄생시켰다는 것 역시 정반합 읽은 척의 좋은 소재라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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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희랍인 조르바 中>



이는 어쩌면 우리가 습관적으로 상반된 것처럼 인식하는 대립항들이 사실은 대립된 무엇이 아니라 마치 땅 위로 솟은 나무의 기둥과 땅 밑으로 뻗은 나무의 뿌리처럼 서로 비례해 서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서로 갉아 먹을 것 같은 결핍과 욕망이 사실은 서로 비례해서 커지는 관계인 것처럼 말이다.



이상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데, 본 읽은 척 매뉴얼은 누군가에게 잘 알지 못하는 책 얘기로 불의의 일격을 당했을 때 자신의 자아를 방어하기 위한 호신용 매뉴얼일 뿐이다. 결코 자신보다 더 책을 읽지 않는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기 위한 나쁜 수단으로 악용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딴지일보' 하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전설의 바로 그 코너.

본지 편집장이 직접 전수해 주는 교양의 끝판왕.


이름도 찬란한 


'읽은 척 매뉴얼'


바쁜 현대인들의 메말라 가는 소울이 안타까워

그 전문을 공개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자신이 건성 피부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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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장 너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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