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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끝난 뒤 다시 일본과의 관계를 회복할 때 앞장선 것은 침략전쟁의 선봉 대마도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령이라고는 하지만 가장 절박한 건 대마도인들 자신이었다. 최소한 범릉적(犯陵賊. 중종과 성종의 릉을 파헤친 자들)을 잡아오라는 조선 조정의 요구에 범릉적 두 명을 대령한 것도 대마도였고, 국서를 위조까지 해가며 조선을 설득한 것도 대마도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이 원하면 화친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굳이 우리가 청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지만 대마도로서는 결코 그럴 처지가 못 됐고 임란 전에도 하던 버릇대로 국서를 조작했다.


대마도는 반은 조선에 반은 일본에 걸쳐 살아가던 방식 그대로 수 백 년을 더 살았다. 대조선 무역을 도맡아 한 것은 물론 쇼군이 즉위하거나 기타 경사가 있을 때 파견됐던 조선 통신사를 접대하고 본토까지 수송하는 임무도 대마도의 몫이었다. 통신사 행렬에 접근하려던 영국인들을 차단한 것도 대마도였고, 울릉도 문제가 불거졌을 때 울릉도가 일본 땅이라고 우기며 조선 조정을 난감하게 했던 것도 그들이었으며, 일본에 메이지 유신이 일어났음을 조선에 알린 것도 대마도였다.


막부가 몰락하고 폐번치현, 즉 전국 각지의 번을 폐하고 새로운 지방 행정 제도가 도입되면서 600년을 이어온 소오씨의 대마도 지배도 끝났다. 그러나 그 질긴 인연은 쉽사리 끝나지 않았고 대한제국 황제의 핏줄 공주 덕혜옹주와 이어진다.


양자로 들어갔다가 대마도의 번주(형식적이지만)가 됐던 소오 다케유키가 덕혜옹주와 결혼한 것이다. 황제의 딸을 어찌 변방의 섬 주인에게 시집보낼 수 있느냐 하는 분기(憤氣)도 이해는 가지만 소오 다케유키는 우리에게 알려진 것처럼 질이 나쁜 인간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동경제대를 나오고 시화에 두루 능했던 교양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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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가미자카 공원에는 그의 시비가 서 있는데 그 시를 읽으면 마지막 대마도 번주(그 뒤를 누가 이었는지는 모르나)로서의 긍지와 애틋함이 드러난다.


“섬도 야위었지만 친구도 야위었다. 물고기 조각하며 바다를 훑으나 그래도 나에게는 꿈이 있다. 이리 말하면 친구는 웃겠으나 깊은 밤 콤파스를 잡고 대마도를 축으로 크게 돌린다.”


몰락한 대마번주, 우리 식으로 말하면 대마도주는 역시 멸망한 나라의 황녀를 아내로 맞는다. 애정이 있어 결혼한 것이라기보다는 억지로 짝 지워진 것이었고, 이방자 여사와 영친왕처럼 해로라도 하면 좋았을 테지만 둘은 그렇지 못했다.


소오 다케유키가 덕혜옹주를 구타했다거나 강간하여 딸을 낳았다거나 하는 것은 억측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행복하지 못했던, 행복할 수 없었던 부부였다. 어린 나이에 일본에 끌려와 겪어야 했던 스트레스 등으로 덕혜옹주는 정신적으로 온전하지 못했다. 소오 다케유키가 그녀와의 25년은 “내 인생의 공백기”라고 표현할 만큼 삭막한 나날이었다. 유일한 딸 마사에는 자살을 예고하는 유서만 남기고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으니 안타까움은 극에 달한다.


전쟁이 끝나고 다케우치는 귀족으로서의 모든 특권을 잃고 경제적으로도 궁지에 몰리면서 아내와의 이혼을 결정한다. 지치기도 지쳤을 것이다. 이방자 여사, 영친왕도 동의했다고 한다. 다케유키는 재혼하여 새 살림을 꾸렸지만 덕혜는 정신병원에 들어가고, 1962년 50년 만에 귀국하여 여생을 보낸다. 돌아왔을 때 순종비 윤씨에게는 큰절을 올렸지만 항렬 상 아랫사람들에게는 거리낌 없이 절을 받았다고 하는데, 정신은 온전치 못했지만 돌아온 공주로서의 자각만은 놓지 않았던 것일까.


후일 다케유키는 한국을 방문하여 덕혜옹주를 만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하지만 거절당한다. 어떻든 25년 동안 부부로 살았던 연이니 죽기 전에 한 번 보고 싶다는 소회였겠지만, 피폐할 대로 피폐한 옹주를 돌보는 입장에서는 그의 청이 염치없고 무람하게 보였을 수도 있겠다. 이방자 여사 역시 단호했다고 한다. 하릴없이 일본으로 돌아간 다케유키는 덕혜옹주보다도 먼저 세상을 뜨는데 그가 남긴 글들 가운데에는 덕혜에게 전하는 짤막한 글도 있다고 한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그와 덕혜 사이가 어땠는지,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둘만이 알 것이지만 다케유키가 남긴 시를 보면 그의 마음의 시름과 아픔을 짐작할 수 있다. 조금 길지만 약간을 빼고 그대로 인용해 본다.


미쳤다 해도 성스러운 신의 딸이므로
그 안쓰러움은 말로 형언할 수 없다.
혼을 잃어버린 사람의 병구완으로
잠시 잠깐에 불과한 내 삶도 이제 끝나가려 한다.


젊은 날에 대한 추억은 무엇을 떠올릴 것이 있어 떠올릴까.
날 밝는 것도 아까운 밤 굳게 먹은 맘이 흔들릴 것인가.


꽃이 아름답게 핀 창가에 등을 대고
썼다가 찢어버린 당신에게 보낸 편지 조각인가.


머리카락에서 나는 향기로 생각할 정도로 은은하게 퍼지는 향기.


두릅나무의 새순이 벌어지는 아침.
옷이 스치는 소리의 희미함과 닮아있다.
떡갈나무 잎에 들이치는 소낙비와 함께 저물었다.


사람이란 젊었거나 늙었거나
애처러운 것은 짝사랑이겠지.
지금 감히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아직 늙기 전의 탄식이라고 해두자.


이 세상에 신분이 높건 낮건
그리움에 애타는 사람의 열정은 같을 거야.
그래도 대부분은 식어버리겠지.
새벽 별이 마침내 옅어지듯이.


빛 바랠 줄 모르는 검은 눈동자.
언제나 조용히 응시하고 있는 것은 환상 속의 그림자.


현실 속의 자신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네.
물어도 대답 없는 사람이여.


(중략)


네 눈동자가 깜빡거릴 때의 아름다움은
칠월 칠석날 밤에 빛나는 별 같았다.


동그랗고 달콤한 연꽃씨를
눈물과 함께 먹는 것은 재미가 없다.
연꽃 씨의 주머니가 터지는 것처럼
내 마음은 가루가 되어 부서지고 말았다.


근심이 있더라도 마음을 찢기는 일 없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깨달음을 얻은 성인이겠지.


나의 탄식은 마음을 갈기갈기 찢고 말았다.
내 몸도 또 언젠가는 죽어가겠지.


아아, 신이여, 그리움의 처음과 끝을
그 손으로 주무르실 터인 바.


수많은 여자 가운데서
이 한사람을 안쓰럽게 여겨주실 수 없는지요.


내 아내는 말하지 않는 아내.
먹지도 않고 배설도 안 하는 아내.
밥도 짓지 않고 빨래도 안 하지만.
거역할 줄 모르는 마음이 착한 아내.


이 세상에 여자가 있을 만큼 있지만
그대가 아니면 사람도 없는 것처럼.
남편도 아이도 있을텐데
현실에서도 꿈속에서도 나는 계속 찾아 헤맨다.


(중략)


남모르는 죄를 진 사람이
정해진 대로 길을 가는 것처럼.
언젠가 너를 만나고 싶다고
정처 없이 나는 방황하고 있다.


봄이 아직 일러 옅은 햇볕이
없어지지 않고 있는 동안만 겨우 따뜻한 때.
깊은 밤 도회지의 큰 길에 서면
서리가 찢어지듯 외친다. 아내여, 들리지 않니.


대마시청이 있는 이즈하라의 옛 가네이시성 성터에는 덕혜옹주와 다케유키의 결혼 기념비가 외롭게 서 있다. 덕혜가 대마도에 온 것은 단 하루였다. 소오 다케유키의 조상들을 모신 절에 와서 시댁 어른들에 인사를 드리러 온 것이었다. 조선에 목매고 살아가던 그 조상들은 어떤 심경으로 36대 쓰시마 번주 소오 다케유키의 아내를 맞이했을지. 낡은 석비는 마치 희미해져 버린 대마도와 한반도의 질긴 끈의 흔적이라도 되듯 바랜 얼굴로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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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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