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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호구 아니었던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봐라.
아니, 도로 들어가세요. 별로 보기 싫으니까.


세상 살다 보면 복 받았구나,

정말 귀티 나네, 싶은 사람이 가끔은 있다.

내가 마음이 덜컥, 하고 불편해질 때는

그 사람들이 동그랗고 천진한 눈을 뜨고 불행이란 것을 믿지 않을 때.

돈 때문에 사람이 어디까지 끝없이 떨어질 수도 있고

한 때 사랑했던 사람이 어디까지 천해질 수 있으며

가장 잔혹한 폭력은 흔히 가족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사실.


누구의 벽장에도 해골이 들어 있다는 사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그 해골에 대해서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그 해골들은 풍화된 후

가끔 재미있는 표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통에 시간이 더해지면, 코미디가 된다.

우리 모두에게 시간의 축복이 있기를. 특별히 당신에게.

그리고 당신의 해골에게도.  

 




들장미 소녀 캔디 이야기를 계속 해보자.


요즘 내 모든 관심사가 말이다 보니, 뭐든 말이 나오나 안 나오나를 생각한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로한 전투 같은 걸 보면 선두에 달려 나가다가 창병들에게 찔리는 말을 보며 오, 너무 끔찍해! 하며 눈을 가리는 수준이 되고 말았다.


캔디도 어찌나 말과 인연이 많은지, 말 돌보는 일을 하다가 안소니, 아리스테아, 아치볼드 세 소년의 부탁으로 아드레이 가의 양녀가 되었다. 캔디스 화이트 아드레이라는 양녀를 맞아들인 기념 자리를 만드는데, 이 가문의 넘버 2인 에를로이 할머니가 (캔디스는 상류 사회의 예절 같은 것도 모를 테니까) 간소하게 여우 사냥 파티를 계획한다. 근데 이게 그녀가 가장 사랑하던 손자 안소니의 죽음을 불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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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레이 가는 스코틀랜드 피가 섞인 가문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아드레이 가 일족 앞에 캔디 역시 스코틀랜드 분위기가 물씬 나는 의상을 차려 입고 세 소년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말을 탄 채 등장한다. 마구간지기 소녀가 이제는 말을 타고 등장하니 출세했다고 볼 수 있지만, 얼마 안 가 안소니가 탄 말이 여우 덫에 걸리는 바람에 머리를 다쳐 즉사한다. 에를로이 할머니는 엄한 캔디에게 “안소니가 죽은 것은 너 때문이다! 너를 양녀로 맞아들여 그 파티만 안 열었어도!”라며, 여우사냥으로 하자고 한 건 본인인 주제에 캔디에게만 연극표, 선물 등 아무것도 주지 않고 내내 나병환자처럼 취급한다.


그러면서도 훗날 이라이자의 오빠 니일이 웬일로 캔디의 진정한 매력을 깨닫고,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시체도 찾지 못하고 전사한 아리스테아의 죽음을 이용해, 입대할 용기도 없는 주제에 ‘캔디와 약혼을 시켜 주지 않으면 전쟁에 나가겠다’고 치사한 협박질을 했을 때는 강제로 식을 올리려고 한다. 야비한 할머니 같으니라고….


(80년대에서 90년대 초에는 <들장미 소녀 캔디>가 워낙 인기가 있다 보니 한국의 유령 작가들이 괴상한 상상력을 쥐어 짜내 팔아먹은 속편이나 외전이 꽤 돌아다녔는데, 그 중에는 이 에를로이 할머니가 무슨 임성한 드라마 뺨치는 활약을 하는 경우가 꽤 많다. 안소니가 알고 보니 말에서 떨어져 죽은 게 아니라 정신이 이상해져 에를로이 할머니가 저택 지하실에 감금시켜 놓았다던가, 자신이 아드레이 대공이라는 것을 밝힌 알버트 씨가 캔디와 결혼하겠다고 하자 아주 대단한 아이디어라도 생각난 듯이 “그래! 빡빡머리가 되면 면사포를 쓰지 못하니 결혼을 못 하겠지!”라며 강제로 캔디의 머리를 바리캉으로 밀어 버린다든지.)


캔디와 말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캔디가 영국의 사립학교에 있을 때 이라이저의 방해 공작으로 상류 사회의 소녀들 중 아무도 캔디와 놀아 주지 않는다. 캔디가 혼자 학교 인근 숲을 거닐 때 껄렁한 친구들과 놀고 있던 니일이 ‘우리 마구간에서 일하던 애’라고 놀리자 이 녀석들이 캔디의 양 팔과 다리를 붙잡고는 이렇게 말한다.


“야, 이거 아주 팔팔한 암말인걸! 히힝 하고 울어 보라고! 자 타보자, 이랴!”


순정만화긴 하지만 정황상 성폭력이 예상되는 상황이다. 이 때 애마 ‘세오드라’를 타기 위해 지나가고 있던 테리우스가 이들을 발견하고는 니일 일당을 무려 말채찍으로 때린다. 안소니의 죽음 때문에 말발굽 소리와 말이 우는 소리에 마음 속 깊이 공포감을 지니고 있는 캔디는 어느 날 테리가 세오드라를 타고 지나가는 소리에,


“안소니, 말을 타면 안 돼요…. 말을 타지 말아요…”


라고 헛소리처럼 중얼거리며 뛰쳐나오다가 그만 기절하고 만다. 평소의 불량한 행실과는 달리 캔디를 양호실로 옮겨 준 테리우스는 질투 반, 호기심 반으로 ‘안소니가 누굴까 생각한다. 이 이름을 처음으로 들은 게 아닌 것이, 영국으로 오는 배 안에서 안소니와 닮은 모습을 한 그를 보고 캔디가 ‘안소니!’라고 불렀기 때문이었다. 착각이라고, 장미를 좋아하던 나의 안소니는 말을 타다 죽었다며 캔디는 슬픈 표정을 지었지만 테리우스는 장미를 좋아하다니 아주 연약한 녀석이었다는 막말을 하여 캔디의 앙심을 산다.


학교의 전통인 오월 축제 때, 무도회장의 음악에 맞춰 근처 숲속에서 캔디와 춤을 추고 있던 테리는 그녀가 안소니를 생각하고 있음을 알아채고 캔디를 마구간으로 끌고 간다. 싫다고 거부하는 캔디를 억지로 말에 태워 질주하며 테리우스는 눈을 질끈 감은 캔디에게 주위 풍경을 보게 한다. 안소니가 죽은 그 날과 같은 신록의 향기, 말발굽 소리, 땀에 젖은 말의 몸, 푸른 하늘. 캔디는 죽은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계절은 또다시 돌아오고 슬퍼도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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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디는 테리우스와 새로운 사랑을 키워가지만, 가엾게도 오래 가지 못한다. 두 사람의 사이를 질투한 이라이저가 모략을 꾸몄기 때문인데, 각자에게 ‘캔디로부터’, ‘테리로부터’라고 쓴 편지에다 ‘중요한 할 말이 있으니 마구간에서 만나요’라는 가짜 편지를 보낸다. 서로에게서 온 것인 줄 알고 나왔다가 성대하게 들킨 두 사람은 남녀 교제 금지 교칙을 어기고 마구간에서 하룻밤을 함께 보낸 셈이 되었다. 캔디는 퇴학, 테리우스는 아버지의 기부금 공세로 근신 처분을 받는다. 또 마구간이야!


‘애마적 관점’에서 다시 읽은 <들장미 소녀 캔디>는 아주 흥미로웠다. 그건 내가 요즘 캔디처럼 큰 말 마구간 청소에 데뷔한 까닭도 있다. 우리 말 학교에는 미니어처 호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제주 토종말과 서러브레드를 교배한 한라마도 1마리 있는데, 이 녀석은 혼자 조금 큰 마방을 쓴다. 이 방을 청소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똥도 오줌도 한 가득이고, 삽으로 오물에 젖은 톱밥을 퍼내고 수레 한두 개로는 안 되어 비우고 다시 왔다 갔다 해야 한다. 이걸 다 하고 나면 날씨가 부쩍 선선해졌는데도 땀이 강이 되어 흐른다.


서른이 넘어서 캔디의 진짜 매력이 뭔지 알 것만 같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듯이, 노동을 알아서 캔디가 그렇게 매력적이었던 건 아니었을까. 말은 생체시계가 아주 정확해서 제때 밥을 주지 않으면 안 된다. 풀에 대단한 영양가가 있을 리 없으니 많이 먹기까지 한다. 시간대에 맞춰서 잔뜩 풀을 베어다 먹여 주는 캔디, 말들이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삽과 갈퀴로 오물을 청소하는 캔디, 말들이 편히 자도록 푹신한 깔짚을 골고루 깔아주는 캔디, 그루밍을 하며 말들의 상태가 어떤지 살펴보는 캔디.


아예 마구간에 침대를 놓고 말과 함께 생활하여 말들의 마음을 잘 알았을 테니 사람 마음 따위를 붙잡는 건 쉬웠을지도 모른다. 말들은 얌전하고 섬세해서 좀처럼 자기표현을 잘 하지 않으니 말의 마음을 알려면 무조건 조용히 살피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수밖에 없다. 말에게 쓰는 이런 기술을 사람에게 썼다고 생각하면 이 만화에 등장하는 모든 남자들이 캔디에게 반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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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장미 소녀 캔디>를 처음 본 지 이십 년이 지나서야 그녀의 진짜 강점을 알게 된 것이다. 캔디라는 여성상이 이렇게 오래 살아남고 있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단순히 박복한 규수가 아니라, 자신의 박복을 노동의 힘으로 바꾼 여성이었다. 나는 얼마나 더 말똥을 치워야 캔디의 발뒤꿈치라도 따라가게 될까.           



P.S:


낙마 사고가 사람들의 인생에 돌이킬 수 없는 갈림길이 되는 경우가 꽤 있는데, 저번에 ‘말려조’님이 남겨주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도 그렇다. 스칼렛과 레트는 둘 다 성질이 뭣하다 보니 결혼생활이 좋을 때는 좋고 나쁠 때는 엄청나게 나쁘다. 게다가 스칼렛이 소녀 적부터 애쉴리 윌크스를 사모하고 있다는 것을 레트가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결혼생활도 나아질 기미가 없다. 심지어 스칼렛은 애쉴리 윌크스가 그의 아내 멜라니가 약한 몸 때문에 혹시라도 임신이라도 될까 싶어 잠자리를 갖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자신도 아이를 갖기 싫다며 레트와 침실을 따로 쓰겠다고 한다. 타라가 불타고 먹을 것이 없는 악몽을 꾸었을 때 레트의 품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돌이켜 보며 스칼렛은 자기 제안을 후회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침실을 함께 쓰자고 말하기엔 자존심이 다락같이 높다.


둘의 결혼을 유일하게 지켜 주는 존재는 스칼렛을 꼭 닮은 딸 ‘보니 블루 버틀러’다. 스칼렛과 레트의 용기를 닮아 대담하고 고집이 센 이 소녀는, 위험한 여성용 곁안장을 망아지에게 올린 채 장애물 넘기를 하다가 그만 목이 부러져 죽고 만다. 술에 취한 레트는 망아지를 쏘아죽이고, 멜라니가 간곡히 설득할 때까지 보니를 자기 방에 둔 채 장례를 치르길 거부한다. 두 사람의 결혼은 딸의 낙마 사고로 완전히 끝나버린 것이다.


어쨌거나 여러 작품에 말로 인한 사건이 이렇게 자주 등장하는 걸 보면 인류가 얼마나 오랫동안 말과 함께 해 왔는지 실감할 수 있다. 요즘 드라마나 영화의 자동차나 오토바이 사고 같은 역할을 말이 담당해 온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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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박복한 년이다




김현진입니다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