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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땜빵]어느 멋진 여행

2013-06-28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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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06. 28. 금요일

카인





 


편집부 주


원래 지난 주 금요일 예정의 기사였으나

매주 스크롤 압박, 쓸데없이 고퀄의 원고를 작성하는

카인을 집구석에서 더욱 잉여롭게 해 주기 위해

나랏님들이 의도적으로 NLL 사건을 터트려 주었습니다.


이것은 절대 작성자의 게으름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라고 적어달라 했습니다.



 





내가 말이야, 아주 가끔 입이 험하고 아주 가끔 변태적이고 아주 자주 한국 교회를 욕하고 아주 자주 술담배에 빠져 살다 보니, 아주 가끔 식사 기도라도 할라 치면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더라. 그래도 나름 신심 있는 기독교인인데 이거 종교를 가진 사람으로서 쪽팔려야 하는 상황 같긴 해. 그래도 뭐 어쩔 수 있나. 사람이 확 바뀌면 죽을 때 된 거라잖아. 내가 신앙하는 신과, 신앙의 증거인 내가 있다면 딱히 다른 건 필요 없을 것 같아. 물론 오늘 종교 얘기 따위를 하려고 키보드를 빗겨찬 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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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빈곤한 삶인지라 일만 하고 놀 땐 컴퓨터를 벗삼다 보니, 바캉스나 휴가라는 게 뭔지도 모르는 인간이 되어버렸어. 내게 있어 피서란 대야에 물 받아 발 담그고 선풍기 바람 쐬면서 호러 게임을 하거나 스릴러 영화를 보는 거니까. 그리고 매, 맥주우... 가르릉가르릉...


그래도 내가 여행 경험 하나 없는 건 아니야. 나름 바캉스라고 부를 수 있(고 싶어 하)는 경험 정도는 있다고. 나 자랑스러워 해도 되는 거지? 나도 바캉스 가봤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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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런 바캉스는 못 가봤다아-! ㅠ_ㅠ



그런데 말이야... 친구들과 동료들 사이에서 내 캐릭터가 하나 있는데, 그건 '불운의 끝판왕' 캐릭터야. 요즘 예능 프로 [1박 2일]에 출연하는 차태현처럼, 내 인생은 놀라운 불운으로 가득차 있어. 때론 사소하게, 때론 중대하게. 처음에 어이없는 불운 상황을 만났을 때는 스트레스 만빵 받고 불평 툴툴 했는데, 반복되니까 달라지더라. 3인칭의 시점에서 내가 맞이한 상황을 보면, 그냥 웃긴 거야. 그래서 이젠 실실 웃어버릴 수 있어. 때문에 난 Ne-Yo의 <All Day Long>이라는 곡에서 "And know that God has a sense of humor, He's laughing at me right now" 라는 가사 부분을 좋아해. 그래서 난 혼자 이런 불운 스킬을, '내 인생의 시트콤'이라고 불러. 한두 번이 아니면 초탈해야지 별 수 있나.


나의 몇 안 되는 바캉스에도 그런 시트콤이 있겠지. 피서철을 맞이해 그 얘기나 해볼까 해. 매우매우 조땐, 아니 좋게 된 사연이라 할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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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마다 선교사가 있지. 완전히 다른 문화권으로 나가 포교하는 사람들. 종단 조직이 선교사 하나 보내려면 여러 가지가 필요할 거야. 그들을 종교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훈련도 시켜야 하고, 자리 잡기 전까지 혹은 자리 잡은 후에도 물적/인적 지원도 해줘야 하고... 이 인적 지원을 해주는 방법은 같이 일할 선교사를 보내주는 것도 있지만, 잠깐 도와줄 인력을 1~2주 정도 임시로 보내는 방법도 있어. 이걸 미션 트립(Mission Trip)이라고 해. 쉬운 말로는 단기 선교라고 부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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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짧은 기간 동안 체류하면서 봉사활동이나 현지 교회 지원활동 등을 수행하는 거야.


가난한 내게는 아주 좋은 해외 여행 기회지. 신앙심 반, 외국 여행 좀 하자는 심보 반으로 나도 20대 초반에는 서너 번 따라가봤어. 이제 벌써 10년 됐군.


오늘의 이야기는 태국으로 간 두 번째 미션 트립 때의 이야기야. 불운을 부르는 남자답게, 방콕에 착륙할 때부터 문제가 발생했지.



1. 입국


초심자의 행운(Beginner’s Luck)이라는 말이 있지. 막 배워서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 전문가 버금가는 솜씨를 발휘할 수 있게 상황이 척척 들어맞아준다는 건데, 주로 도박이나 게임이나 스포츠 등에서 이런 말이 오가곤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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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행운의 정체는 초심자답게 적절하게 긴장하고 두뇌와 신체를 풀 가동시키는 태도가 가져다주는 거겠지. 그러니 긴장이 어느 정도 풀리는 두 번째 시도에서는 엉망진창이 되는 것이고.


그러니 초심자의 행운이 진짜 시사해주는 건, 자신감이 생겨서 자기도 모르게 긴장감 유지를 못하는 상황을 경계하라는 거야. 이런 상황이 내 두 번째 방콕 착륙에 있었던 것 같아.


비행기가 상공에서 지상으로 착륙할 때는 기압이 급격히 변하기 때문에 탑승자들은 물을 마시거나 껌을 씹거나 일부러 하품을 하는 등 신체 내의 기압을 올려야 하지. 안 그러면 갑자기 높아진 외부 기압 때문에 고막 같이 취약한 부위가 안으로 밀리면서 상할 수 있어.


바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어.


내가 기압 조절을 소홀히 한 걸 인정해. 난기류 때문에 착륙 시간이 몇 분 더 늘어났다고. 기체가 하강하다가 잠깐 상승하고 다시 하강하다가 이러쿵저러쿵 하면서 점점 시간이 늘어나는데, 얼마나 연착할지도 확실치 않으니까 집중력이 흐트러졌나 봐. 귀 속 고막이 아파오기 시작했어. 근데 이 때는 이미 늦었지.


무사히 착륙하고, 게이트를 나와, 첫 숙소인 호텔로 가는 내내 고막이 아팠어. 날카로운 송곳이 찌르는 듯한 아픔이었어. 호텔의 응급의에게 얘기했더니, 고막이 살짝 찢어졌다는 거야. 한 0.5mm 정도로. 씨바 고작 그 정도인데도 이렇게 아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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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진통제와 함께 약을 처방 받긴 했는데, 진통제를 먹어도 아프더라. 결국 시설 좋고 야경 좋은 호텔에서의 첫 1박을, 나는 단 한 순간도 잠들지 못하고 침대에서 끙끙대면서 보냈어. 의사가 말하길 24시간이면 대강 아문다고 했는데, 그 24시간 내내 선잠도 들지 못했지. 더 안 좋은 건... 방을 혼자 쓴 것이 아니라는 것. 함께 방을 쓰던 형님은 40대 정도 되셨는데,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하셔서 밤새 내내 1초도 쉬지 않고 끙끙깽깽낑낑거리는 내게 베개 한 번 던지지 않으셨어.


한 마리 강아지가 되어 밤새 신음하면서, 베개로 밧줄을 만들 기세처럼 배배 꼬고, 어떻게 좀 달래보려고 물을 리터 단위로 마시다가, 발코니에 나가서 처연한 눈으로 달을 올려다보다가, 복도로 나와 서성거리다가, 지나가는 당직 직원에게서 “May I Help You?”(수상한 시선과 함께)를 듣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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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려 해도 상한 고막 때문에 더 아프기만 하니 무엇에 집중할 것도 없어서, 난 아침이 빨리 오길 빌고 또 빌었지.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오는 것이니.


간신히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아침이 찾아오고, 난 녹초가 되었지만 고통을 잊기 위해 일정에 약간 과도하게 집중했지. 저녁 때쯤에 통증이 완화되었고 난 다시 내 삶의 페이스를 되찾을 수 있었어.


그리고 이건 불운의 시작이었을 뿐.


2. 땅밟기


시사에 관심이 있었다면, 몇 년 전에 있었던 봉은사 땅밟기 사건을 기억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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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있는 기독교인들을 죄다 쪽팔리게 했던.


우리 일정에도 그게 있었어. 영적 전투를 벌이는 선교사님을 위해 주변에 있는 사탄의 세력에 영적 공격을 가한다나. 우린 이 일정을 방콕에서 멀리 떨어진 한 촌에서 소화하게 됐어.


개인적으로는 이런 무속적인 행위를 버젓이 권하고 수행하는 한국 교회의 신학 수준이 남부끄럽지만, 당시 20대 초반인 내게 무슨 생각이 있었겠어. 존경하는 목사님이 권하면 하는 거지.


땅밟기가 뭔지 정말 모르겠는 사람들을 위해서 설명하자면, 성경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사건을 원형으로 하는 종교 행위야.


이스라엘의 목적지인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난공불락의 성 여리고를 함락하기 위해 이스라엘이 세운 작전은 여리고 측의 조롱을 받기 쉬운 거였는데,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리고 성 주변을 하루에 한 바퀴씩 행진하는 거였지. 그렇게 6일을 하고, 7일 째에는 일곱 바퀴를 돌았는데, 일곱 바퀴째 돌고서 함성을 지르고 나팔을 불자 여리고의 성벽이 무너졌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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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초유의 적을 맞아 신이 지시한 작전이 이전과는 다르게 완벽한 기적이라는 점에서, 신께서 연전연승하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지들 잘나서 그러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가르쳐준 사건이라는 게 지배적인 해석이야. 이걸 그대로 따와서 종교적 라이벌의 랜드마크나 자기에게 허락된 땅(이라고 생각하는 곳)에 가서, 비슷하게 주변을 돌고 기도하고 뭐 그러는 게 땅밟기야. 신을 찬양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신을 찬양하겠다는 건데, 그 의도는 종교적인 측면에서 옳을지는 몰라도 수단은 글쎄올시다. 땅밟기의 효능(?)에 대해서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몇 개 전해내려와. 여의도의 어느 빌딩을 간절히 원했던 모모 집사는 하루에 한 번씩 그 빌딩을 돌았고 일주일 후에는 그 빌딩의 주인이 되었다더라 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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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종교 비판과 신학 분석은 오늘의 메뉴가 아니니 넘어가고.


암튼 우리는 조별로 나뉘어 땅밟기를 나갔어. 난 내 죽마고우 B양과, 그 외 몇 명과 한 조가 되어 인근의 오래된 사찰로 출발했지. 유서 깊은 절이라 규모도 크더라. 그 동네의 지명과 사찰의 명칭은 당연하게도 기억이 안 나.


태국은 불교 국가라, 승려가 되는 것 자체가 사회적으로 신분 상승의 기회야. 사찰에 입적하면 자신의 인적 네트워크를 늘릴 수도 있고 다양한 교육의 기회도 열리지. 태국의 청소년 승려는 그 자체로 예비 엘리트야. 외국어 한두 개 정도는 구사할 수 있는 승려들이 꽤 된다더라구. 그리고 잘 교육 받은 승려는 대학 입학 등에도 큰 어드밴티지를 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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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텔리 승려의 대표 주자, 바지라메디


방금 전엔 내 지성을 평가절하했지만, 우리 조에서 나와 내 친구 B양은 그런대로 인텔리스러운 애들이었어. 이게 문제였지. 역시 인텔리인 젊은 승려들은 멀리서 사찰을 기웃기웃거리는 외국인들을 구경하다가, 우리에게 다가오기 시작했어. 우리의 인텔리 오오라를 감지한 게 분명할 거야. 그럴 거야. 그래야 해. 왠만큼 멍청하지 않으면 땅밟기는 몰래 해야 한다는 걸 모를 리가 없는데, 우리가 멍청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들단 말야. 그러니까 ‘인텔리들의 국경과 문화와 언어와 종교를 뛰어넘은 지적 공감이 일어난 것’으로 이해해줘. 부탁이야.


승려들은 순수한 호기심으로 다가와 먼저 말을 걸어왔어. 그리고 문제는, 말이 통한다는 거였어. 우리 조에 태국어 구사 가능자가 있지는 않았어. 대신 그 승려들 중 한 명이 한국어를, 또 한 명은 영어를 전공처럼 공부하고 있었지.


우리 둘은 다른 조원들과 달리 땅밟기라는 종교적 행위보다는 예비 엘리트라는 승려들과 대화해보고 싶어졌......다고 치자고. 대화가 안 통하면 그냥저냥 바디 랭귀지로 때우고서는 도망가 숨어서 땅밟기를 재개할 수 있었겠지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가 나오자 좋다고 응대했던 나와 B는 결코 멍청한 게 아니란 말이야. 고등 종교에 어울리지 않는 무속적 종교 행위에 대한 비판성이 드러난 거라고 이해해줘. 부탁이야.


게다가 한국어를 전공한다는 승려는 한국어를 꽤 잘하는 편이었어. 물론 지나치게 완전한 문법을 쓰다 보니 좀 어색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그래, 그 어색함이 문제였어. 그 승려는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걸 알자마자 우리 전공부터 물었고, 난 매우 순진하게도 ‘국문학’이라고 대답했어. 그 친구의 얼굴이 환해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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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됐습니다. 한국어 좀 가르쳐주십시오.”


5분 뒤, 난 그 승려에게 높임법과 일상 회화에서의 문법 생략에 대해 강의를 해야 했어. 절 앞의 흙 길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나뭇가지로 흙 위에 글을 써가며... 그리고 외국 유학 경험이 있어 영어에 능통한 B는 영어를 공부한다는 승려에게 알아두면 좋을 관용어구를 가르쳐주고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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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모습이었으면 좋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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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더 가까웠다.


다른 조원들은 뭐하고 있었냐고? 승려들이 한국어와 영어로 말을 걸어오자, 외국인 울렁증이 발병했는지 그냥 귀찮은 상황을 피하고 싶었는지 간단한 인사만 한 후엔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 우릴 도와주지 않았어. 그들에게서 “빨리 끝내고 돌아가자. 배고프다.”라는 텔레파시가 느껴진 것 같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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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도 아니었는데 말이지...


우리의 즉석 흙바닥 사교육을 받은 승려들은, “잘 배웠다. 유익했다. 정말 고맙다.”며 산채 음식을 싸주려고 하더라. 아무리 사찰이 크다지만 촌에 위치해 시주도 많이 못 받을 텐데 그들의 식량을 축내는 짓은 하고 싶지 않긴 했지만 워낙 강권해서 받아가졌어. 결코 아무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야. 정말 아니야.


물론 숙소 교회로 돌아온 우리는 황당해 하는 시선을 한 몸에 받았어. 땅밟기 하라고 보냈더니 사찰의 식량을 빼내온, 이상한 녀석들이었으니까. 노략질해온 걸로 보였을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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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실제 본인 사진. 물총 강도이나 사찰은 털지 않았다.



3. 열대야


일정은 하루하루 착착 지나갔어. 태국의 도시와 촌을 모두 섭렵하면서, 주어진 일도 열심히 하면서, 한눈도 열심히 팔면서.


우리가 처음으로 지원했던 선교사 님은 도시 외곽에 호화로운 집을 지어놓고 거기서 도시 상류층을 대상으로 한 네일 케어, 마사지, 피부관리 등을 서비스하는 사업을 하면서, 그 사업을 통해 포교 활동을 할 계획을 갖고 있었어. 우리는 그 계획이 본격 가동되기 직전에 지원 팀으로 온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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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호화라지만 이런 건 아니었다.


건물은 총 4층이었는데, 4층은 선교사 님 가족들이 생활 공간으로 쓰고, 3층은 전문 시설이 있어서 쓸 수 없고, 욕실과 기타 편의 시설이 딸린 2층을 여자들이 숙소로 쓰고, 남자들은 로비로 쓰일 예정인 1층에서 구석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잤어. 며칠 동안 이런저런 일을 하고 나서, 우린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야 할 때가 됐어.


이동을 위한 차가 오는 시각이 오전 2시였어. 하루 종일 뭔가를 하느라 다들 지쳐서 자고 싶은데, 잠은 차 안에서 자야 하는 상황이었지. 자정 넘겨 감기는 눈을 참아가면서 2시가 되기를 기다렸어.


그런데 태국이나 필리핀 같은 동남아시아의 특징이 뭐야? 더운 거 아냐? 우리가 가끔 열대야라고 부르며 괴로워하는 기후는, 이 지방에서는 일상이잖아. 게다가 난 땀이 굉장히 많은 체질이란 말이야. 아무 것도 안 하고 1층에서 빈둥대며 차 기다리는데도 땀이 벌써 주르륵 나더라고.


어차피 차가 도착해서 타고 가는 동안에도 땀이 날 테지만, 아무래도 찝찝하더라. 시계를 보니 아직 1시도 안 됐어. 샤워를 좀 하고 싶었지. 시간이 조금 남으니까 할 수 있겠다 싶었어.


1층은 로비 용도였으니 다른 시설이 없어서, 2층으로 올라가 여자들 방문을 두드렸어. 욕실이 여자들 숙소로 쓰이는 방에 딸려 있었거든. 내 친구 B에게 부탁했지. 샤워를 좀 하고 싶은데 2층의 욕실을 좀 쓰면 안 되겠느냐. 당연히 안 될 게 어디 있나.


고급 욕조에다가 간이 좌변기까지 딸린, 아담하지만 충실한 유럽식 욕실이었어. 샤워하고, 욕조에 물을 받고, 전신욕을 좀 즐기고... 간만에 나른하고 안온한 시간을 즐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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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유사하나 좀 더 넓었다. 여기는 로마의 ‘호텔 산 마르코'의 화장실.


충분히 목욕을 즐기고 일어나서, 몸을 닦고 욕조의 마개를 잡았지. 당연히 뽑으려는 의도였어. 그리고 의도는 충족되지 않았지. 뽑히지가 않는 거야. 아무리 용을 써도.


낑낑대며 힘을 써도 안 뽑히는 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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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패닉에 빠졌어. 이 비싼 욕실의 기물을 망가뜨린 건가? 어떻게든 이성의 끈을 부여잡고 원인을 추측해보려 애썼지. 

1) 무거운 내 무게 때문에 엄청 꽉 눌려서 안 빠진다. 하지만 이 경우엔 내 근육량이 아무리 개차반이어도 마개가 미동도 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따라서 기각. 

2) 무게 때문은 맞는데, 마개가 눌리는 과정에서 마개와 욕조 사이의 틈이 진공 상태가 됐다. 이게 좀 그럴 듯해 보였어...

어이없어 하지 마. 패닉 상태의 두뇌에서는 이게 그나마 괜찮은 가설이었단 말야. 게다가 머리 속 한구석에서는 세 번째 가설인 ‘이게 다 물의 무게 때문일지도 몰라!’ 라는 생각이 자꾸 떠돌아다니고 있었을 정도란 말야. 어쨌든 이 가설에 의해 마개와 공기를 직접 닿게 해야 할 거 같다는 결론을 떠올렸어. 패닉 상태였으니까 이해해줘. 부탁이야.


그런데 이 욕실은 유럽식이잖아. 그러니까 욕조 바깥에 배수구가 없단 말이야.


그래서, 난 물을 퍼내기 시작했어.


다행히 바가지가 하나 있더라고. 그리고 아까 설명했지. 간이 좌변기도 하나 있었다고. 난 바가지로 물을 퍼서, 좌변기에 붓기 시작했어. 간이식이라 물 내리는 레버나 버튼은 없고 일정 이상 차면 알아서 내려가는 방식이었는데, 내겐 그래서 다행이었지. 욕실 바깥에 있을 여자들에게 변기 물 내리는 소리를 수십 번 들려주지는 않아도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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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인가 바보짓의 소품인가 1


물의 무게 때문이든, 진공 상태 어쩌구이든, 어쨌든간에 물을 거의 다 퍼내긴 했어. 참고로 난 단순한 인간이야. 그때쯤엔 최종 목표인 ‘마개를 뽑는다'는 잊어버리고 ‘욕조에서 물을 없앤다'만 남아있었지. 그래서 물이 줄어들었을 때 마개를 뽑으려 시도해본다는 걸 잊어버렸어. 난 단순한 인간이잖아. 이해해줘. 부탁이야.


그런데 말이야, 수위가 낮아지면 말이야... 바가지로 퍼낼 수 없는 단계가 되잖아? 그리고 내 머리 속에는 오직 한 문장, ‘욕조에서 물을 없앤다'만 남아있었잖아? 그런데 물이 욕조 바닥에서 찰랑거리고 있는데 이건 바가지로 처리가 안 되는 거야. 이중 패닉에 빠져들어가려는데, 두리번거리던 내 눈에 어떤 물건이 들어왔어.


샤워용 스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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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인가 바보짓의 소품인가 2


머리 속에서 번개불이 스쳐지나가며 유레카를 외치고 싶었지만 바깥의 여자들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소망이 간신히 충동을 억눌렀어. 난 스펀지를 집어들고, 욕조 바닥에서 찰랑거리는 물을 노려본 후... 스펀지로 물을 흡수했어.


아주 좋은 아이디어였다고 찬성해주길 바라. 바깥에 알리고 싶지 않고, 물은 없애야겠고, 스펀지는 흡수력이 좋잖아. 난 열심히 스펀지로 욕조 바닥을 닦아내다시피 하면서 물을 흡수했고, 스펀지가 가득 수분을 머금으면 다시 좌변기에 짜냈어. 이걸 반복했지.


꽤 오래 열심히 닦아내어, 기어코! 물을 다 없애는 데 성공했어. 물론 중간에 뇌 속 목적이 욕조 청소로 바뀐 시간이 살짝 있긴 했어. 난 단순하다니까. 어쨌든 물이 없어졌고, 원래 목적이 다시 생각났어. 마개를 뽑는 것. 마개가 공기에 닿았고, 물도 없다. 자, 그럼 뽑자.


안 뽑혀.


젠장. 안 뽑혀. 낑낑 힘을 써도 안 뽑혀.


가설이 틀렸던 건가? 힘이 모자라서일지도 몰라. 낑낑. 안.뽑.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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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공불락의 여리고?


탈진했어.


한밤중에, 목욕 직후에, 바가지 들고 물 퍼내고, 스펀지로 욕조 닦고, 그래도 원하는 바를 성취하지 못하자... 힘이 쭉 빠졌어. 당연히 노동의 대가로 난 땀에 흠뻑 젖어있었고. 게다가 알몸. 하아아...


더 좋지 않은 게 있었어. 욕실에 들어간 내가 한 시간이 넘도록, 게다가 출발시간이 다가오는데, 아무 소식이 없자... 바깥의 여자들이 내 안위를 걱정해주며 욕실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 거야. 특히 내 좋은 친구 B양은 문을 쾅쾅 두드리면서 내 안위, 아니 내 생사를 물었지. 열대 지방에서 온수 목욕을 장시간 하다 졸도한 거로 생각했다나.


B의 재촉은 매서웠고 출발시간도 코앞이었으니 난 어쩔 수 없이 옷을 입고 욕실 문을 열어야 했어. 그리고 의문으로 쳐다보는 자매님들 앞에서 결코 하고 싶지 않았던 고해성사를 해야 했지.


다들 신나게 웃어댔어. 특히나 B는 가장 야비하게 웃어제꼈어. 그래도 마지막 쪽팔림은 면하고 싶어서, 혹은 선교사님에게 혼나고 싶지 않아서, 난 그들에게 딱 하루 만이라도 비밀을 지켜줄 것을 무릎 꿇고 요구했어.


다행히 그녀들이 요구를 받아주었기에 난 2시에 도착한 차를 타고 조용히 그 욕실이 있는 건물을 빠져나와 도망칠 수 있었어.



4. 공중 스핀


이야기에는 기승전병, 아니 기승전결이 있지. 태국 미션 트립 이야기의 전, 즉 절정 부분이라면 앞의 욕실 이야기일 거야. 하지만 절정부는 어디까지나 이야기의 최고점일 뿐, 이야기의 끝이 아니지.


따라서 내 불운과 멍청함도 아직 끝이 아니야. 좀 사소한 것들이 더 남아있어. 욕실로부터 도망친 후, 한두 번 더 지역을 이동하는데 내게 갑자기 색다른 아이디어가 떠올랐어.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에는 지프니라는 자동차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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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와 지프의 중간 형태인데, 주로 필리핀에서 많이 쓰고 태국에서는 아주 가끔 쓰지. 나름 싼 맛이었는지, 그날 우리가 들판과 숲길을 달리기 위해 탄 운송수단이 지프니였어. 지프니의 지붕은 넓은 편으로, 여기에 짐을 얹을 수 있게 되어 있지. 난 이 지붕에 주목했어.


짐이 올라가 있잖아? 그럼 그 사이에 누울 수 있지 않을까? 그러고서 하늘을 보면서 가면, 좀 덜 심심하지 않을까? 짐으로 몸을 고정하고 그 위에 누워 하늘을 본다... 이거 쉽게 떨칠 수 없는 유혹이었어.


그래서, 그렇게 했어.


정말 상쾌한 경험이긴 했어. 바람은 시원하고 눈앞을 스쳐가는 나뭇가지들에 그 위로 펼쳐진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 아름답고 장쾌한 풍경이 눈앞에 계속 펼쳐지는 거야. 가끔 눈 감고 졸 수도 있고. 난 처음 올라간 후로,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내려오지 않았어.


그리고 지프니가 목적지에 도착하여 멈추고, 사람들이 내리고, 주차를 위해 지프니가 다시 움직일 때,

난 관성의 법칙에 의해 뒤로 튕겨나가 화려한 공중 스핀을 선보이고 말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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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떨어졌다면 멋있었겠지만


기사가 내 존재를 잊었던 걸까? 나도 내리려고 했단 말야. 단지 고정을 위해 짐 사이에 끼워놨던 몸을 추스리는 데 시간이 좀 걸렸을 뿐이야. 왜 잠깐을 못 기다리고 급출발을 해서 짐의 방해 따위 떨쳐버리고 산들바람 부는 들판 위로 튀어나가 무술 영화 스턴트를 하게 만든 걸까.


공중에서 핑핑 돌면서 내가 떠올린 것은... 오래 전 어릴 때 잠깐 운동 삼아 다녔던 합기도와 유도 도장에서 처음 배웠던 기술이었어. 낙법. 낙법만 제대로 하면 10층에서 떨어져도 팔만 작살날 뿐 목숨은 건진다느니 어쩌니 하던 소리들. 그 가르침을 떠올린 난, 정신을 집중하여 측방낙법을 시전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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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김병찬 유도교실


굴러떨어진 나를 보고 놀라서 달려온 형제자매님들 앞에서, 난 측방낙법을 제대로 시전하여 털끝도 다치지 않은 나를 보여줄 수 있었지. 물론 혼나지 않은 건 아니야.



5. 출국


...아직 안 끝났어. 불운은 우리를 쉽게 떠나지 않아.


고막이 찢어지며 시작되어, 승려들을 노략질하고, 욕실에서 도망치고, 지프니에서 굴러떨어지면서 전개된 태국 미션 트립도 결국 끝나는 시간이 왔지. 현지에서의 모든 일정을 끝내고 우리 일행은 한국으로의 귀국 비행기를 탔어.


그런데 티켓을 나눠받고 자리를 확인하는데, 모두들 자리가 붙어있었지만 단 한 명만 뒤쪽에 따로 자리가 배치되어있었어. 내 좋은 친구 B양이었지. 그리고, 내 자리는 B양의 남자친구 바로 옆이었어. 그러니 B가 내게 다가와서 눈을 곱게(?) 부라리며 이렇게 말하는 걸 이해할 수 있었지. “네가 내 친구가 맞다면 알아서 조용히 자리를 바꿔라. 나 시집 좀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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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어찌 이해하지 않을 수 있을까. 눈을 곱게 부라리는 고난이도 기술을 알 정도로 터프하고 대책 없는, 필요할 때 죽마고우를 야비하게 비웃을 줄 아는 여자애는, 자기에게 콩깍지 씌인 남자를 쉽게 놓을 수 없지. 나 역시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얘가 쉽게 결혼할 수 없을 거라는 직감을 느끼고 있었어.


그래서 티켓을 바꿨지. 순수한 우정에서 비롯된 거야. B가 내 멱살이나 턱을 잡고 몇 대 칠 것이 두려워 그런 것은 아니야. 절대 아니야.


비행기 좌석 배치는 이랬어. 양측 창가에 두 좌석이 있고 중앙 좌석이 다섯 개. 난 중앙 좌석 중에서 왼편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았고, 내 앞줄은 모두 우리 일행이 점령하고 있었어. 내 왼편에 있는 좌석에는 한 여성 분이 앉았고, 오른편의 세 좌석은 비어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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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중앙 좌석 하나가 더 있는 형태


원래 내 자리였던 자리에 앉아 남자친구와 노닥거리다가 가끔 나를 돌아보며 승리자의 미소를 짓던 B가, 어느 순간 얼굴색이 변했어. 그리고 내게 입모양으로 이렇게 말하는 거야. ‘미안하다.’


대체 뭐가? 의아해서 내가 옆을 보니까, 이제 막 탑승하여 자리를 찾아온 두 사람이 보였어. 내 오른편의 세 좌석에 앉을 사람들이었지.


그러니까, 세 명분 좌석에 둘이 앉는다고.


목에는 번쩍번쩍 금은 목걸이, 상의를 넣어 입은 하의는 골프 바지, 짧은 머리, 어마무지한 덩치, 약간 삐져나와 보이는 문신.


딱 봐도 특정 직업에 종사하시는 분들이었어. 엄청 큰 덩치인 2번과 그보다는 조금 작지만 역시나 큰 1번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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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 형님의 덩치도 매우 큰 편이었지만 정말 큰 사람은 2번이었어. 1번 형님은 어찌어찌 좌석 하나에 몸이 들어가긴 하는데 2번은 결코 그럴 수가 없었어. 그래서 2번이 좌석 두 개를, 정확히는 1.6개 정도를 쓰고 1번이 나머지를 쓰는 거였지. 좌석 세 개를 써야 두 사람은 서로서로 편할 수가 있었어.


난 어버버하다가 자는 척을 시전하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내 바로 옆에 앉은 사람이 좀 수다스러웠어. 먼저 싹싹하게 말을 걸어왔고 이걸 무시하고 자는 척 하면 사시미가 꽂힐 것 같은 공포가 닥쳐왔어. 그래서 적당히 응대하다가... 옆자리에 앉은 여성분과 대화하면서 이 상황을 빠져나가려고 생각하고 왼쪽을 봤더니... 이 분이 갑자기 자는 척을 하는 거야! 분명 눈 뜨고 있는 걸 봤는데 광속으로 눈을 감고 고개를 떨구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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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런 걸 원한 것도 아니었는데!


잠깐 당황하는 순간, 매우 수다스러우신 깍두기 1번 형님은 재차 대화를 걸어왔고, 난 이걸 쌀쌀맞게 거절할만큼 간이 크지 않았어. 게다가 내가 자는 척을 할 시간을 주지 않고 교묘하게 대화를 이어나가는 1번 형님의 말을 능숙하게 끊을 만큼 내 화술이 달변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고.


내 의사와 상관없이 시작된 대화였지만, 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어.


두 사람은 국내 모 조직의 조직원이었어. 이름은 밝히지 않고 그냥 ‘회사'라고 했지만 눈치를 못 챌 수가 있나. 그리고 두 사람은 미얀마 쪽에서 마약 혹은 인신매매와 관련된 프로젝트를 하나 수행하고 귀국하는 중이었어. 역시 모호하게 말을 해놔서 둘 중 어느 거였는지는 확실치 않아. 내게 말을 거는 1번 형님은 구사하는 어휘와 어법을 볼 때 상당히 똑똑한 사람이었고, 그래서인지 ‘회사'에서 중간급은 된다고 하더라. 반면 쫄따구가 분명한 2번은... 비행기 출발할 때부터 코를 후비고 있었어.


1번 형님의 심리가 살짝 엿보였어. 2번과 같이 일을 하고는 있는데 이 멍청한 놈이 맘에 안 드는 거야. 대화 상대도 안 되고. 그래서 옆자리에 있는 안경 쓴 학생과 대화하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한 거지. 그 안경 쓴 학생이 불행히 나였고.


내가 이 불편한 대화에서 놓여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시트콤 <프렌즈> 덕분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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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내에서 <프렌즈>의 에피소드가 방영되자, 1번 형님께옵선 “어, 이거 못 본 건데!”라고 외치시며, 급 흥분하시더니, 자기 자리의 헤드폰을 찾는 거야. 난 이때다 싶어 재빨리 내 헤드폰을 착용하고 힐끔힐끔 1번 형님의 동태를 훔쳐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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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 형님은, 자기 자리의 헤드폰이 잘 작동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옆자리의 헤드폰을 써보다가, 급히 쓴 헤드폰이 머리 크기에 비해 좀 작아서 부서지니까 잠시 자조적인 웃음을 웃다가, 2번에게 네 헤드폰 좀 달라고 말하려는 찰나 2번이 자기 사타구니를 헤드폰 끝부분으로 긁으면서 시원한 표정을 짓는 걸 보고 잠시 굳었다가... 결국 자리를 옮기기로 결정했어. 할렐루야!


1번 형님이 옮긴 자리는 우리(?) 자리에서 오른편 대각선에 있는 창가에 비어있는 자리였어. 1번은 스튜어디스에게 직접 양해를 구하더니 비어있는 자리로 옮기더니 헤드폰을 조심스레 쓰...지는 않고 귀에 대고서는 드라마에 집중하더라. 이 사람, 영어 스피킹과 리스닝이 되는 정도의 사람이었던 거야.


난 1번과의 불편한 대화에서 놓여나 행복했고, 1번 형님은 못 본 에피소드를 보게 되어 행복했지. 졸지에 1번 옆에 앉게 된 노신사분은 급히 자는 척을 시전하셨고, 옆자리의 정든 형님이 떠나가자 외로워진 2번은 진짜로 자기 시작했어.


문제는 말이야. 2번은 혼자서 의자 한 개 반을 차지해야 할 정도로 엄청난 덩치였다는 거야. 그런 인간이 곯아떨어지자 내 자리 오른편은 철의 장막을 둘러친 듯이, 개미새끼여야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막혀버렸지. [프렌즈]의 에피소드를 다 보고 원래 자리로 돌아오려던 1번 형님이 만난 장벽의 정체는, 잠든 2번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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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께옵선 어떻게 한 번 넘어가보려고 이것저것 시도를 해봤어. 하지만 2번은 난공불락의 여리고였어. 그 자를 직접 들어서 옮기거나 깨우지 않는 한은 그 지점을 통과할 수 없었어. 1번 형님은 2번은 건드리기도 싫었나 봐. 푸아푸아 자고 있는 2번을, 1번 형님께서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노려보시고는... 다시 아까의 자리로 돌아가셨어. 난 옆자리의 노신사분이 슬쩍 일어나 신문을 읽으시려다가 다시 급하게 자는 척 모드로 돌아가는 것을 목격했지.


2번이 잠들어버린 덕에 내 이후 비행은 매우 편안해졌어. 그제서야 책을 꺼내 읽는 여유를 회복했고, 내게 사과의 눈빛을 보내려고 애쓰고 있는 B에게 배부른 미소를 보내주며 “밥 거하게 사라, 이냔아"라고 말해줄 수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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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태국 정통 수끼를 전문점에서 비싼 값에 얻어먹었다. 형님들 감사염.


한두 시간이 흐르고 인천 상공에 접근해갈 때쯤, 기압 변화 때문에 다시 체내 압력을 조절하고 있는데 며칠 전 경험이 다시 떠올랐어. 그 고막의 아픔.


새삼스레 주욱, 다시 여행의 순간순간이 떠올랐지. 찢어진 고막. 흙바닥 즉석 과외. 안 빠지는 욕조 마개. 공중 스핀 후의 낙법. 이제는 인텔리한 깍두기 형님.


조용히 뇌까렸어. ‘그래도 살아서 돌아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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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생이나 세계에 대해 완전히 알지 못해. 그러니 무엇이 닥쳐올지 결코 알 수 없지.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 올 가능성만큼이나 어이없을 정도의 불운이 닥쳐오기도 하는 것이 인생이잖아. 그리고 우리 인간은, 과학으로도 철학으로도 종교로도 세계를 완전히 이해하거나 설명하지 못하고 있잖아.


따라서 불운은, 같은 무게의 행운과도, 같은 무게의 일상과도 그리 다를 바가 없어. 모두 완전히 이해하고 예측하고 설명할 수 없는, 그러나 그러고 싶은 세계의 일부일 뿐이야. 웃어넘기면 되는 거야.


그러니, 그대의 바캉스에 그대의 여행에 그대의 인생에 어떤 불운이 닥쳐도 웃을 수 있기를.


난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사람이거든.


그리하여 경험 중 일부를 풀어낸 지금, 난 장기하의 <별일없이 산다>를 듣고 있어. 인생, 뭐 별 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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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건 아닌가?












카인
트위터 : @Kain_Sul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