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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을 멈추라

자유, 평등, 박애가 다 무슨 소용인가

9월 4일 파리에서 있었던 중국인들의 시위 장면

출처 : <르몽드>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글을 써 내는 것은 당연히 어려운 작업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 프랑스어는 특히나 지랄맞다. 한 문단 안에 같은 단어가 반복되는 것을 지극히 싫어하는 프랑스어 작법의 독특한 성격 때문이다. 한 문단이 아니라 하더라도 같은 단어가 비교적 짧은 거리 안에서 반복되면 이미 그 글은 ‘좋은 글’로서의 가치를 잃는다. 그러한 탓에 프랑스어에는 무수히 많은 동의어가 존재한다. 인터넷에서 동의어 사전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이트를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문제는, 동의어라는 것은 지칭하는 대상은 같을 지라도 각기 다른 뉘앙스, 즉 함의(connotation)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아시아인’을 지칭하는 프랑스어 Asiatique의 동의어를 찾아 본다. 유명 언론사 <롭스(L’Obs)>가 제공하는 동의어 사전 서비스를 이용하자, 중국인을 지칭하는 chinois(e)와 아시아인을 낮추어 부를 때 사용하는 asiate가 나온다. 아시아인 = 중국인. 이 결과가 믿을 수 없다면 여기를 클릭해 보시라. 어이가 없어서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CNRS)가 운영하는 사이트에도 가서 검색해 본다. 결과, 똑같다.


이것으로 아마도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시아가 중국이냐부터 해서 프랑스 사회의 무지까지. 여기에서는 후자에 조금 더 포커스를 맞추어 보자. 유럽에만 해도 수많은 나라들이 있고, 그보다 더 많은 지역들이 고유의 문화와 정체성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다. 2016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중 그 누구도 함부로 유럽국가 중 하나가 유럽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없다. 전 지구의 6.8%에 해당하는 유럽 대륙만 봐도 그러할진대 세계의 6개 대륙 중 가장 큰 아시아(지구 면적의29.5%) 대륙을 중국으로 퉁치는 것은 완전한 무지의 소치다. 게다가 프랑스에서는 적잖은 이들이 미국인을 '아메리칸 Américain'으로 부르는 것은 아메리카 대륙에 사는 이들에 대한 일종의 차별이라며 '미합중국인 Etats-unien'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상태이기도.


정말이지 어이가 없다. 프랑스 사회는 (대부분의 경우) 아시아에 대해 관심도 없고, 따라서 아시아에 관한 한 (역시 대부분의 경우) 무식하다. 사실, 누구든 어떤 사회든 모든 것에 대해 다 알 수도 없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런데 정말 프랑스 사회는 아시아인에 대해 무지해도 되는 것일까? 프랑스 통계청(INSEE)의 발표에 따르면 2007년 프랑스 거주자 중 베트남과 중국인은 각각 12위와 13위에 위치하고 있다(출처). 또한 2013년 프랑스 이민자 중 아시아계는 56만 명, 전체 이민자의 14%에 달하며, 프랑스 전체 인구 대비 0.85%에 해당한다. 얼마 안 된다고? 보통 프랑스에 많다고 알려진 북아프리카 3국(튀니지, 모로코, 알제리)의 2013년 프랑스 이민자는 약 108만 명. 프랑스 전체 인구 대비 1.63%에 해당한다(출처). 물론 이 수치가 모든 것을 말해 주지는 않는다. 프랑스 이민의 역사는 꽤나 길며, 그 중에서 아시아인의 비중은 그리 높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랑스 인구 중 점차 아시아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누군가는 프랑스 사회의 타 문화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는 사실 그 대상을 그리 가리지도 않으며, 그런 탓에 이민정책의 실패로 프랑스가 유럽 국가 중 ISIS에 합류하는 자국인이 가장 많은, 그런 지경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인정한다. 하지만 프랑스 사회에 사는 그 누구도 흑인에게 함부로 '깜둥이'라 하지 않을 것이며, 무슬림에게 '테러리스트'라 하지 않을 것이다. 모르는 흑인한테 깜둥이라고 했다간 성한 몸으로 집에 걸어가지 못할 것이고, 무슬림에게 '테러리스트'라고 했다간 뉴스에 나온다. 지역 뉴스가 아니라 온 세계 뉴스에. 이건 실험해 볼 필요도 없다. 이미 지난 8월 파리 북쪽의 생 드니 시의 한 식당에서 식당 주인이 "무슬림은 테러리스트"라며 "나는 테러리스트에게 서빙할 생각이 없다"고 히잡 쓴 두 무슬림 여성을 내쫓은 바 있다. 한국의 언론에서도 이 기사를 다루며 프랑스의 요지경을 보여준 바 있다. 요지는, 이러한 이민자 커뮤니티에 행해지는 차별적 행위는 분명 존재하지만 모두들 그것이 잘못임을 알고 있다는 것.


하지만, 프랑스 사회는 아시아인에게 냉담하리만큼 무관심하다. 몇 년 전부터 언론들이 가뭄에 콩 나듯, 잊힐만 하면 한 번씩 특집처럼 프랑스 사회의 아시아 인종 차별적 행태에 대해 다루기도 했으나, 별 호응 없이 지나갔다. 게다가 그런 기사에서도 '아시아인'의 동의어로 '중국인'이 어김없이 쓰여지곤 했다는 건 덤. 여전히 거리의 양아치, 혹은 양아치 흉내 내는 사람들은 아시아인으로 보이는 이들을 향해 "노란 상판때기 Gueule de citron", "찢어진 눈 Les yeux bridés", "개 먹는 놈들 Les mangeurs de chien", "칭챙총" 따위를 지껄였으며, 그에 대해 항의하는 이들에게는 그저 장난인데 뭘 유머 감각도 없이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냐며 오히려 적반하장 격의 말들을 내뱉곤 했다.


사실 프랑스에서 인종차별주의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한국에 비하면 엄청난 수위를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 면에서도 인종차별을 유발하는 언행은 처벌받는다. 하지만 프랑스 사회는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1984년, 인종차별에 맞서기 위하여 만들어진 단체, SOS Racisme에서조차 무슬림이나 유대인 및 여성에 대한 차별에는 불같이 일어나는 반면,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차별에 대해서는 별 움직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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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아시아 출신으로 컴플렉스 벗어 던지기

출처 : 허핑턴 포스트 프랑스

 

 

2016년 여름, 거의 처음으로 프랑스 사회가 아시아에 대한 인종차별주의에 대해 심각하게 인식하기 시작한다. 8월 9일 파리 북동쪽의 방리유 오베르빌리에(Aubervilliers). 49세의 중국인 샤오링 장 씨가 3명의 프랑스 청소년에 의해 강도와 폭행을 당한다. 중상을 입은 장 씨는 그로부터 5일 후 사망하고 만다. 사건 발생 얼마 후 범인들은 체포되었지만 혐오범죄와 관련된 조항은 이들의 처벌에 적용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비록 프랑스 사법부에서는 이 사건을 인종혐오와 관련짓지 않았지만, 프랑스 내 아시아 커뮤니티, 특히 중국인 커뮤니티는 다른 시각을 유지한다. 실제로 프랑스-중국 친선 협회에 따르면 오베르빌리에에서 아시아 인에 대한 폭행 및 강도는 상당히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고. <르 파리지앵>에 따르면 2016년 1월부터 오베르빌리에 시에서 벌어진 총 666건의 강도 폭행 건 중 16%가 중국인을 비롯한 아시아인을 대상으로 하였다. 오베르빌리에 시에는 약 4천 명의 중국인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는 시민의 5%에 해당하는 수치다. 오베르빌리에 시장은 해당 지역에서 아시아인이 범죄의 '쉬운' 대상으로 손꼽히고 있으며, 심각한 인종차별주의의 타겟이 되고 있다고 발표한 바 있다.


프랑스 내 아시아 커뮤니티는 이제 더 이상 침묵하지 않는다. 지난 8월 샤오링 장 씨의 사망 이래 이들은 거리에 나와 아시아인에 대한 편견과 폭력을 규탄하며 프랑스의 자유, 평등, 박애, 그리고 안전을 외친다. 가장 최근의 집회는 9월 4일 일요일, 파리의 공화국 광장에서 있었다. 경찰 추산 1만 5천 5백 명, 주최 측 추산 5만 명. 대략 중간 치로 2만 5천 명에서 3만 명 정도로 치더라도, 이제껏 비교적 '조용하게' 입 닫고 지내오던 아시아인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놀라운 숫자라 하겠다. 이들은 아시아인에 대한 편견과 싸우는 것 역시 일련의 집회의 주요한 목적 중 하나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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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애 YES, 폭력 NO !

9월 4일 파리에서 있었던 중국인들의 시위 장면

출처 : <르몽드>

 

파리의 거리는 (물론 동네마다 다르지만) 아시아인에게 그리 안전하지 않다. '현금을 많이 가지고 다니는', '당해도 별 저항하거나 소리치지 않는' 따위의 고정관념이 덧입혀져 있는 아시아인은 '쉬운' 대상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한국인이나 일본인은 중국인과 다르다고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외쳐봐야 소용 없다. 우리가 누가 영국인인지 프랑스인인지 독일인인지 이탈리아인인지 쉽게 구별하지 못하는 만큼, 이들 역시 누가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 중국인인지 혹은 기타 아시아 국가 사람인지 알 수도 없고 관심도 없다. 그냥 다들 얼굴 노랗고 눈 찢어진 사람들일 뿐이다.


아시아 커뮤니티들의 파리 행진이 지속되고는 있지만 프랑스의 이런 참담한 현실이 하루 아침에 바뀔 것이라 예상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 역시 파리의 길을 걷다가 언제 누군가에게 "야이 중국년아, 니네 나라나 가 버려!"라는 막말을 듣게 될 지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먼 곳에서 한국인들에게 프랑스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별 거 없다. 우리 한국 사회의 인종차별은 어떠한가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것 뿐. 외국에서 한국인들이 그저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차별의 대상이 되고 있음에 분개한다면, 한국에서 외국인, 특히 우리보다 조금 더 짙은 피부 색을 지닌 이들에 대한 차별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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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이 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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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