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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07. 02. 화요일

너클볼러






 

 

 

본 필자, 어쩌다 보니 스포츠에 꽂혀 슈퍼스타에 가려진 안타까운 고수들의 행방을 찾아 들쑤시고 다니길 어언 150일. 먹고 살기 위한 생업의 최전선에서 아이템 하나 없이 졸라 빡치게 전투에 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려진 혹은 왜곡된 진짜배기 선수들을 들춰내 만천하에 알려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팀 웨이크필드에서 시작해, 이봉걸, 8인의 사이클러, 그리고 알랭 프로스트에 이르기까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지 꼴리는 대로 뒤도 보지 않은 채 똥꼬가 타 들어갈 정도로 졸라게 달려왔다.


그렇다. 기왕 여기까지 온 거,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는 것처럼 본 필자 역시 돌았... 아니, 쉼 없이 달려볼까 한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하야 머리카락 보일까 꼭꼭 숨어있는 군바리를 함 소개해볼까 방구석에 처박혀 절치부심 하던 차, 느닷없이 6월은 '육두의 달'이라고 누가(딴지일보 편집장으로 예상되는) 말하는 것이 아니던가.


어라. 들어보니 그럴싸하다. 그리하여 5회를 맞이하는 선수들 역시 '육두의 달' 6월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것으로 한다. 경고 한다. 직장이믄 창을 얼른 닫고, 전철이나 버스와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 중이면 얼른 주변부터 살피시라. 아흥흥앙... 부끄러워... 아흥흥앙... 그럼 시작하자.

 

 

 

 

 

Martina Hingis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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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태' 만을 보고 누군지 때려 맞췄다면 당신이야말로 진정한 챔피... 아니 테니스 팬. 주인공은 바로 마르티나 힝기스. 스위스를 대표하는 여자 테니스 선수. 두말할 나위 없는 스타 오브 더 스타. 1996년 15세 9개월의 나이로 윔블던 복식에서 우승하면서 테니스 역사상 최연소 메이저대회 우승을 선보인 뒤, 1997년에는 16세 6개월의 나이로 여자 프로테니스(WTA) 세계랭킹 1위에 등극하는 등, 여자 프로 테니스 역사에 '최연소'가 박힌 기록은 대부분 그녀의 것이라고 봐도 무방한 알프스의 슈퍼 테니스 소녀. 소녀.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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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라. 원조 섹쉬 테니스 스타 크리스 에버트, 마리아 예거를 잇는 스위스 섹쉬 테니스 스타의 알흠다운 짤을 말이다. 현역기간 209주 랭킹 1위라는 엄청난 기록을 세우기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끝은 좋지 않았다. 발목 부상 뒤 복귀, 하지만 코카인 양성반응으로 2년간 선수생활 정지를 먹은 뒤 은퇴했다.




Maria Sharapova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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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샤라포바. 러시아 출생의 천재소녀. 천재소녀라고 불린 이유는 테트리스를 개발했기 때문이 아니라, 2004년, 17살이 되던 해, 첫 메이저(윔블던)대회에서 우승했기 때문이다. 18세에 세계랭킹 1위에 올랐고, 2012년에는 프랑스오픈 단식에서 우승해 100년의 여자테니스 역사상 열 번째로 커리어 그랜드슬램(2년 이상의 기간 동안 4개 메이저대회에서 우승) 달성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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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거 다 필요 없다. 필요 없다규. 그녀의 별명이 무엇이더냐. 바로 '러시안뷰티' 아니더냐. 피플지는 허구한 날 아름다운 유명인사 중 한 명으로 그녀를 선택했고, 맥심이라는 잡지는 4년 연속 그녀를 세계에서 가장 섹쉬한 선수로 선정하기도 했다. 화려한 몸매와 외모 덕에 그녀는 늘 최고의 수입을 올리는 여자선수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현역인 그녀에게 도전장을 내민 친구덜이 있었으니...




Caroline Wozniacki (1990~) & Ana Ivanovic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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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계의 패셔니스타로 불리우는 캐롤라인 워즈니아키(좌)와 차세대 대형 미녀스타로 불리우는 안나 이바노비치(우). 캐롤라인 워즈니아키는 한때 세계랭킹 1위 자리를 67주간 했을 만큼 실력과 미모를 겸비한, 경기 출장 시 드레스를 입고 가는 것으로도 유명한 테니스 코트의 새로운 공주님이며, 안나 이바노비치는 그에 비해 실력은 좀 떨어지나 '예쁘니깐 상관없다'는 미녀 스타계의 중전마마로 불리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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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빠지지 않는 화끈한 모습의 그녀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절대지존의 자리는 늘 그녀의 차지였다.




Anna Kournikova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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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쿠르니코바. 러시아 출생. 단식 우승경력(WTA)은 없으며, 복식에서만 우승경험이 있다. 복식으로는 그랜드슬램을 이룬 선수. 연인인 엔리케 이글레시아스(홀리오 이글레시아스의 아들)와의 12년간 열애 끝에 결혼에 골인했다. 그래서 복식을 잘하나 보다. 원조 '러시아 뷰티'라 할 수 있을 것만 같기도 할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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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복을 입은 모습보다 비키니를 입은 모습의 검색이 훨씬 더 쉬운 여자 테니스 스타. 선수로서의 커리어는 주목 받은 적도 없고, 주목 받고자 하지도 않았지만 최고의 섹시 여자 테니스 선수 랭킹 최고 자리에서는 최근까지 한번도 내려온 적 없는 그녀. 바로 안나 쿠르니코바 되시겠다.


그렇다. 설명할 필요도 없다. 위의 아낙들은 모두 테니스 선수덜 되시겠다. 테니스가 어떤 종목인가. 귀족들의 스포츠라 불리울 만큼 고매하신 종목 아니던가. 테니스의 태초엔 귀족들만이 플레이 할 수 있었으며 복장도 드레스나 정장 등 귀족들의 전유물 같은 것이었는데 어찌 이런 아낙들이 코트에 등장할 수 있단 말인가. 말세야 말세. 안 그래.


허나 이쯤에서 끝내면 딴지가 아니지. 기왕 시작한 거 끝까지 함 가보자.




테니스 Tennis


기원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니 그 유래로 치믄 졸라리 졸라 긴 '축구'나 가장 짧은 역사의 구기종목 중 하나인 농구가 누구나 할 수 있는 서민감 쩌는 종목인데 반해 11세기 경부터 시작된 테니스는 유럽의 성직자, 왕후, 귀족들 사이에 성행했던 상당히 고매하신 귀족들을 위한 유희(로얄게임)였다는 것이 정설로 통한다.


11세기경 유럽 귀족들 사이에서 성행한 공 모양으로 생긴 뭉치를 손으로 주고받는 라뽐므(Lapaum)에서 시작되어 16세기경 프랑스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한 라켓모양으로 치고 받는 죄드폼 (Jeu de paume - 탁구 Table Tennis도 여기서 유래했다고들 예상한다)을 거치면서 지금의 테니스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때, 감히 서민들 사이에서 유행한 것에 빡친 루이 10세가 금지령을 때리기도 했던 레알 귀족 스포였던 것이다.


귀족 온리 옥내 스포츠였던 테니스가 지금 우리가 즐기는 형태로 갖춰지게 된 계기는 영국에서 죄드폼을 수입해 '조물딱'거리게 되면서다. 1873년 W.C. 윙필드가 죄드폼을 현재의 론 테니스(Lawn Tennis) 형태로 튜닝하면서 진짜 '원조' 간판을 내걸게 된다. 오리지널 아반떼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완벽하고 경이로운 튜닝. 1876년 영국의 윔블던에 있던 올 잉글랜드 론테니스 앤드 크로켓 클럽(All England Lawn-tennis and Croquet Club)에서 튜닝을 마친 론 테니스를 경기대회로 창시하기 위해 새로이 룰을 만들어 1877년 '전영 선수권대회'를 개최하였다.


이것이 바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원조 중의 원조인 할매, 아니 '윔블던 대회'인 것이다. 이렇게 최고의 역사를 자랑하는 윔블던은 백 년이 지난 지금, 최고의 상금을 자랑하는 대회가 되었다(우승상금은 남녀단식 우승자의 경우 27억 3000만원, 본선 1회전 탈락해도 4000만원을 준다)


이렇게 윔블던 대회를 시작으로 1896년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 1913년 ITF(International Tennis Federation:국제테니스연맹)가 창립되면서 테니스는 본격적인 인기스포츠로 자리잡게 된다.




그랜드 슬램 Grand Slam


브릿지(Contrackt Bridge) 라는 카드게임이 있다. 포커와는 다르게 돈을 걸지 않고도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 유럽인들이 즐겨하며 지금은 전세계 130개국 4천 만 명 정도가 즐기는 인기 게임이다. 얼마나 재미있는지 투자의 황제 워렌 버핏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실력 있는 브리지 플레이어 3명만 있다면 감옥에 가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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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의 실력 있는 브리지 게이머로 추정되는 이들

 

 

 

브리지게임에서 패 13장 전부를 얻는 완벽한 승리는 '그랜드슬램'이라고 한다. 여기서 유래하여 야구에서(1940년대부터 쓰임)는 '만루홈런'으로, 몇몇 프로스포츠대회에서는 주요메이저대회(4개)에 우승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테니스의 4대 메이저대회는 국제테니스연맹 ITF가 관장하는 대회인 호주오픈, 프랑스오픈, 윔블던, US오픈을 일컫는다. 그 중 호주 오픈이 1월, 12월 각각 2번 열리는 통에 1월 대회를 쳐줄지, 12월 대회를 쳐줄지 논쟁이 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2년에 걸쳐 우승해도 그랜드슬램달성으로 간주한다. 2년으로 된다고 하더라도 전혀 쉽지 않아 보이는 그랜드슬램. 역사를 통틀어 세 명 밖에(모린 코닐리, 마거릿 코트) 이루지 못한 여자 테니스 부분의 마지막 그랜드슬램 달성자는 바로 슈테피 그라프(독일)다.




슈테피 그라프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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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e's Grand!!!

 

 

독일은 '진짜' 스포츠 강국이다. 전체 인구 가운데 25%가 8만여 개에 달하는 체육단체 중 어느 한곳에 가입되어 있을 정도로 각종 스포츠가 일상화되어 있다. 전국에는 5만개의 운동장, 3만개의 실내 체육관, 7,700개의 수영장이 있다.


단순히 프로축구리그인 분데스리가만의 인기가 아니라 정식 축구클럽의 회원 수만도 530만명(세계 최고)이나 되고, 체조 클럽에도 무려 430만 명이 소속되어 있다. 작년에 열린 런던올림픽에선 스포츠 강국답게 총 메달 수 44개로 6위에 올랐다. (체육강국이 아닌 메달 강국인 우리나라는 메달 수는 28개지만 금메달 수가 많아 5위에 올랐다. 저변도 없이 일궈낸 성적으로 가히 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독일인들이 축구, 체조만큼이나 사랑하는 종목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테니스다. 그들에겐 보리스 베커와 슈테피 그라프가 있었다.


1999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위원장 등 국제 스포츠 지도자(?) 15명으로 구성된 밀레니엄스포츠스타 선정위원회가 7개 분야(일반, 구기, 축구, 격투기, 모터스포츠, 수영, 겨울스포츠) 최고의 스타를 선정하는 이벤트를 진행 했더랬다. 왕중의 왕은 축구를 대표하는 펠레가 선정되었고, 일반 분야에선 칼 루이스(육상, 미국)와 나디아 코마네치(체조, 루마니아), 격투기 분야에선 무하마드 알리(권투, 미국), 수영에서는 마크 스피츠와 돈 프레이저, 겨울스포츠 분야에선 장 클로드 킬리(스키, 프랑스), 아네모리에 모제르프(스키, 오스트리아) 모터스포츠 분야에선 지난 시간 소개했던 알랭 프로스트(F1, 프랑스), 그리고 구기에선 마이클 조던(농구, 미국)과 슈테피 그라프(테니스, 독일)가 선정되었다.


슈테피 그라프는 그 해(1999) 독일 스포츠기자단 투표에서 3,393점을 받아 스피드 스케이팅 세계 챔피언인 군다니에만 스티르네만(2,698점)을 따돌리고 올해의 여자 선수에 올랐다. 그 해 그녀는 세계랭킹 3위였다. 하지만 최고 중의 최고로 그녀를 추켜세우는 데 그 누구도 주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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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스포츠 스타들...

 

 

당시 여자 테니스는 철의 여왕 나브라틸로바의 치하에 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나브라틸로바의 철권통치에 도전장을 던진 선수는 다름아닌 13세 연하의 슈테피 그라프. 그녀의 도전이라는 꿈은 87년 다른 대회도 아닌 나브라틸로바의 본진과도 다름 없었던 프랑스오픈에서 나브라틸로바를 꺾고 우승하면서 현실이 되었다. 독일 국민들은 열광했다. 1980년대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은 독일 국민에게 슈테피 그라프는 한 줄기 희망이었고, 난세의 영웅이었다. 더욱이 그녀의 활약은 온갖 미사여구가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총 22회의 그랜드슬램 단식 우승(마가렛 코트에 이은 역대 2위) 여자선수로서는 세 번째로 그랜드슬램 달성, 그랜드슬램 대회 각각 4번 이상 우승, 게다가 그 해 열리는 올림픽에서 금메달까지 포함되는 전무후무한 '골든 그랜드 슬램' 달성(유일하게 슈테피 그라프만 보유), 377주 연속 세계랭킹 1위(남녀 통틀어 1위), 8년 연속 연말 랭킹 1위(남녀 통틀어 1위), 뜬금없지만 한때 세계 1위였던 안드레 아가시와 결혼 등등...


이렇게 화끈한 기록 잔치의 주인공인 슈테피 그라프. 그녀가 은퇴할 당시 마르니타 힝기스, 린지 데븐포트 등의 신성들이 등장해 그녀를 위협했지만 그녀의 라이벌로까지는 인식되지 못했다. 전설과 같은 커리어의 소유자 슈테피 그라프. 독일을 넘어 전세계의 지지를 받던 그녀를 위협했던 선수는 단 한 명뿐이었다. 안드레 아가시의 전 부인 브룩 쉴즈가 아닌 모니카 셀레스 였다.




그 여자의 사정


2009년. 독일 언론 <빌트 암 존탁>은 출판 예정인 모니카 셀레스의 자서전 'Getting A Grip'의 한 부분을 인용했다.

 

'사고가 난 이틀 뒤에 슈테피 그라프가 병원에 있는 나를 방문했다. 결승전을 치루기 위해 가야 된다고 하기까지 우리의 대화는 단 몇 분 뿐이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투어경기는 계속 진행되었다'

 

 

모니카 셀레스가 슈테피 그라프에 대한 서운함을 표현한 대목이었다. 병원에 누워 슈테피 그라프의 병문안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그 여자의 사정은 슈테피 그라프의 팬이 모니카 셀레스의 등에 칼을 꽂았기 때문이었다. 여자 선수에게 꽃다발이 아닌 흉기를 들이댄 것이다.




모니카 셀레스 (1973~)


1985년, 16세의 나이에 연말랭킹 6위를 차지하며 '탑 텐'에 진입한 슈테피 그라프는 1987년 프랑스 오픈에서 나브라틸로바를 꺾고 18세의 나이로 첫 메이저대회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자신의 시대가 열렸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그 해 랭킹 1위에 올랐고, 다음해인 1988년 4개의 메이저대회와 서울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차지해 골든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슈페티 그라프의 독주체제는 무려 1991년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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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 없는 186주간 세계랭킹 1위. 끝나지 않을 것만 슈테피 그라프의 독주체제에 제동을 건 선수는 유고슬라이바(현 세르비아) 출신의 슈테피 그라프보다 4살 어린 모니카 셀레스 였다. 그들의 라이벌 매치는 이미 1989년 전영오픈 결승을 시작(그라프가 승리)으로 불타기 시작했다. 모니카 셀레스가 없었다면 여자 테니스는 꽤 오랜 기간 지루한 독주체제를 선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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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유고슬라비아의 헝가리 부모 밑에서 태어난 모니카 셀레스는 어린 시절부터 테니스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테니스 영웅 옐레나 젠시치의 눈에 띄어 본격적인 훈련에 돌입한다. 모니카 셀레스는 남자 선수 못지 않은 힘과, 좀처럼 보기 힘든 양손 포핸드를 사용, 게다가 호탕하기로 둘째라면 서러워 할 정도의 원조 괴성 소녀였다.


1989년 프로로 전향한 그녀가 당시 최고인 슈테피 그라프의 강력한 라이벌이 될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프로로 데뷔한 그 해 전영오픈 결승에 올라 슈테피 그라프와 마주한다. 모니카 셀레스는 슈테피 그라프에게 세트스코어 2-0으로 패했다. 사람들에게 그 패배는 당연한 것이었고, 어린 소녀의 깜짝 등장에 불과했다. 하지만 1년 뒤 사람들의 생각은 거의 대.부.분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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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메이저 우승컵을 받아 든 모니카 셀레스

 

 

1990년 독일오픈 결승전에 오른 모니카 셀레스는 안방마님 슈테피 그라프를 세트스코어 2-0으로 이기고 우승컵을 거머쥐더니 한 달 뒤에 열린 메이저대회인 프랑스오픈에서 역시 슈테피 그라프를 2-0으로 꺾고 '16세 우승'이라는 최연소 기록을 작성하며 슈테피 그라프의 독주를 종식시킬 유일한 대안으로 떠올랐다.


이렇게 모니카 셀레스와 슈테피 그라프는 테니스 역사상 다시 찾아 볼 수 없는 막강한 라이벌 되었다. 상대전적 역시 극강의 라이벌다웠다. 결승에서 붙은 경기만 보더라도 89년엔 슈테피 그라프가 3전 전승, 90년엔 셀레스가 2전 전승, 91년엔 그라프가 2전 전승, 그리고 92년엔 서로 1승씩 가져갔다.


1989년 모니카 셀레스가 코트에 등장 한 후, 이 두 여왕은 서로 잡고 잡히며 발기부전에 시달리는 테니스 팬들의 곳츄를 일으켜 세웠다. 이렇게 치고 받으며 슈테피 그라프가 186주 동안 지켜왔던 '세계랭킹 1위'라는 나와바리를 모니카 셀레스가 접수해 버리고 만다. 사람들은 슬슬 챔피언이 아닌 새롭게 등장한 도전자에게 열광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서서히 모니카 셀레스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 예측하기 시작했다. 모니카 셀레스는 서서히 이륙 중이었고, 슈테피 그라프는 서서히 착륙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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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관객들은 슈테피 그라프가 쉽게 왕권을 이양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챔피언과 도전자와의 빡치는 라이벌 혈투가 적어도 몇 해는 더 가주길 바랬다. 가능했다.


모니카 셀레스의 실력은 물이 오르기 시작했고, 슈테피 그라프의 경험과 관록 역시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절한 바램은 깨지는 것이 제 맛'이라 누가 씨부렸던가. 1993년 팬들의 바램을 산산이 박살내버린 스포츠 역사상 최악의 사건이 발생하고야 만다.




1993년 4월 독일 함부르크


'슈테피 그라프를 다시 세계랭킹 1위로 만들고 싶어 모니카 셀레스의 등에 칼을 꽂았다'


1993년 1월, 시즌의 시작을 알리는 호주 오픈에서 모니카 셀레스는 슈테피 그라프를 결승에서 꺾고 첫 메이저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상궁의 위치에서 중전의 위치로 올라선 것이다. 모니카 셀레스 보다 4살이 많았던 슈테피 그라프의 미래는 비관적이었다. 그건 경제위기를 겪은 독일 국민들이 슈테피 그라프를 통해 얻은 위로의 상실을 의미하기도 했다. 상실에 대한 불안한 기운은 호주오픈 3개월 뒤 상상할 수 없는 최악의 사건을 만들어 내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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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습당한 모니카 셀레스(좌) / 나쁜 넘 군터 파쉬(우)

 

 

1993년 4월. 독일오픈. 독일에서 열린 경기인 만큼 슈테피 그라프는 라이벌인 모니카 셀레스에게 반드시 승리해야만 했다. 하지만 전세계 테니스 팬들이 이목이 집중된 이 경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코트 체인지를 위해 잠시 휴식을 취하던 모니카 셀레스에게 접근한 독일인 군터 파쉬가 흉기로 그녀의 등을 찌른 것이었다.


다행히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경기는 그대로 중단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출신인 모니카 셀레스는 범인이 보스니아 테러범일거라 생각했다. 당시 유고슬라비아는 보스니아와 오랜 내전 중이었고, 모니카 셀레스는 테러에 대한 공포 때문에 비행기를 수시로 갈아탔을 정도였다. 스포츠 역사상 최악의 피습 목격자가 된 슈테피 그라프는 범인이 자신의 팬이 아니길 간절히 바랬다.


하지만 슈테피 그라프의 바램과는 상관없이 군터 파쉬는 슈테피 그라프의 팬임을 시인했다. 군터 파쉬는 물론 독일에까지 비난이 이어졌고, 모니카 셀레스에겐 격려와 위로가 이어졌다. 하지만 '아무일 없던' 것으로 되진 않았다.



모니카 셀레스는 코트를 떠났다. 전문가들은 5-6개월 이내 컴백할 것이라 전망했다. 하지만 그녀는 쉽게 돌아오지 못했다.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코트에서 피습당한 정신적 충격에서 쉽게 헤어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이듬해인 1994년, 미국 국적을 얻긴 했지만 코트엔 돌아오지 못했다. 범인은 정신병자라는 이유로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그녀의 아버지 카롤리 셀레스가 1995년 복귀 직전, 독일의 한 TV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피습범에게 실형이 선고되지 않은 것에 대해 모니카 셀레스가 상당히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고 전했다.


그녀는 그렇게 절정의 기량에 있던 순간, 24개월을 통째로 날렸다. 사건 이후 모니카 셀레스는 다시는 독일에서 열리는 경기에 출전하지 않았다. 라이벌이 사라진 여자테니스 코트의 주인공은 다시 슈테피 그라프의 차지가 되었고, 그렇게 완벽한 전설이 되었다. 더 이상 관객은 코트의 두 여왕이 펼치는 폭풍 라이벌 전을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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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오픈 3연패를 달성한 모니카 셀레스, 지켜보는 슈테피 그라프




복귀, 그리고 은퇴


모니카 셀레스가 코트에 복귀하기까진 정확히 27개월이 걸렸다. 95년 복귀 후 서서히 기량을 올려 96년 호주 오픈에서 우승해 테니스 팬들의 박수를 받았으나 그게 마지막이었다. 더 이상 우승하지 못한 채 2003년 프랑스오픈을 끝으로 코트를 떠났다. 댄싱 위드 더 스타 영국판 시즌 6에 출연하기도 했던 그녀는 2009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된다. 그렇게 그녀는 만개하지 못한 안타까운 전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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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년 호주오픈 우승컵을 받아 든 모니카 셀레스

 

 

못난 팬 하나가 저지른 실수 때문에 전세계 스포츠 팬들은 최고의 스타 한 명과, 그가 펼쳤을 세기의 대결을 통째로 날려 먹었다. 부당해 보이는 것은 피습만 아니었다면 슈테피 그라프와 동등하게 아니, 그 이상으로 기록되었을지 모를 모니카 셀레스는 지금까지도 '한때 강력했던 도전자'라는 이벤트쯤으로만 기억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가 테니스 코트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상상하기 싫다'는 그 이유만으로도 우리가 모니카 셀레스를 '강력한 양손 포핸드를 구사하는, 괴성을 토해내는 최고의 선수'로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하겠다.



허구한 날 이 '모니카'만 떠올리지 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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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클볼러 

트위터 : @Knuckleballer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