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07. 11. 목요일
독투불패 하늘..
제비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제비처럼 생기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기꾼의 첫 번째 조건은? 그렇다. 사기꾼처럼 보이지 않아야 한다. 우리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작은 사기꾼들은 ‘정신차려 들으면 뻔한 거짓말’을 주로 하지만 큰 사기꾼일수록 일반인들보다 몇 수 위를 내다보는 감각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어지간한 전문가들조차도 큰 사기꾼의 말에 속아 넘어가게 되어 있다. 2000년대 초반, S전자가 미국의 A&D(인수 후 개발) 전문가라는 사기꾼에게 300억원을 투자했다가 한 푼도 못 건진 실화는 아는 사람만 아는 특급 비밀이다.
광화문 사무실에서 만난 그
홍 사장을 만난 것은 광화문 인근 빌딩의 16층 사무실이었다. 지금이야 달라졌지만 그때만 해도 그 빌딩은 국내 최고의 사무실 임대료를 자랑할 정도였다.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망에다 널찍한 사무실에 들어서니 한두 명의 직원과 돈으로 발랐다고 할 만큼 비싼 인테리어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30대 후반인 그의 첫인상은 ‘금융전문가’라는 직함에서 연상되는 마르고 날카로운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람 좋게 생겨서 그런지 학구적이라기 보다는 옆집 아저씨(?) 같은 느낌이었다. 얼굴에 약간의 기름기가 번들거리는 것과 몸집이 다소 풍성한 것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 마른 남자를 선호하는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됐다.
어쨌든 짧은 첫인상으로 그를 ‘스캔’한 이후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홍 사장이 국내의 어느 기업에 M&A(인수 및 합병)를 계획하고 있는가를 듣는 것이 목적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특히 증권시장에서는 온갖 다양한 신종 금융기법이 넘쳐나고 있었다. 홍 사장 역시 M&A전문가로 미국에서 이름을 날리다가 막 우리나라로 들어왔다고 했다.
영화 <작전> 中
홍 사장은 원하던 대답은 말하지 않고 영어로 된 서류를 한 뭉치 꺼내서 보여주었다. 국내 증권거래소에 등록된 몇 개 기업에 대해 미국 아멕스시장(나스닥보다 작은 규모의 증권시장) 진출을 추진 중이라고 했다. “조만간 업체 명을 공개할 것이고 내년에는 10개 이상의 기업이 아멕스에 진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그건 이미 기사로도 알고 있었으니 원하던 대답은 아니었다. 홍 사장은 “국내 기업들에 대한 M&A를 추진 중인데 조만간 알게 될 것”이라고만 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바로 ‘어떤 기업’이 목적이었는데 ‘선수’인 그가 내놓을 리가 없었다. 당연히 기업명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고 했다.(국내 기업들의 아멕스 상장은 흐지부지 됐다. 그가 한국에 온 목적은 그게 아니었으니까)
괜찮은 신부감 소개해달라
홍 사장의 또다른 핸디캡은 혀 짧은 발음과 복잡하고 어려운 문장 구사력이었다. 영어 단어는 물론 우리말 역시
신경을 곤두세워야 핵심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혀짧은 발음 자체가 왠지 거짓말을 잘하지 못할 것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아무튼 그와의 대화를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메모하는 데 무척 애를 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멋진 이력, 조만간 국내 재계를 휘어잡을 사업계획, 전망좋은 사무실까지 매력적인 요소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마무리를 하던 중 문득 그에게 물었다.
“결혼 하셨어요?”
“아직 노총각입니다. 좋은 사람 있으면 좀 소개해주세요.”
아주 잠깐이지만 내가 미혼이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물론 곧바로 정신을 차렸
지만 그 생각이 지나간 자리에는 누가 저 사람을 차지할까 복도 많지, 하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괜찮은 기업을 말아먹다
홍 사장의 소식은 그 이후로도 직간접으로 들을 수 있었다. MBC 미니시리즈 <호텔리어>의 실제 주인공이 바로 홍 사장이라고 했다(배용준이 출연, 화제를 모았던 드라마다). 드라마의 주인공이 될 만하다고 단번에 수긍이 갔다. 그 유명한 ‘A양 비디오’의 주인공인 연예인 A와 결혼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홍 사장의 부인이라면 그 정도 급은 돼야지, 하고 말이다.
A와 직접 만난 적은 없는데 어떤 인터뷰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친구와 음식점 사업을 추진하면서 투자자를 찾던 중 만나게 됐다. 사업계획서를 들고 갔는데 그 때부터 인연이
시작됐다. 홍 사장이 먼저 고백을 했지만 그때는 심각하게 만나지 않았다. 몇 달 후에 여러 가지로 힘들었던 나에게 용기를 주면서...”
홍 사장의 실체는 A와 결혼하기 직전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계몽사 M&A가 시작이었다. 계몽사 쪽을 통해 길고 긴 뒷얘기를 들었지만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M&A에서 흔히 쓰이는 수법으로 서류상 회사(콩코드 캐피탈아시아)를 설립해 계몽사를 인수하고 신규사업을 벌인다는 명목으로 회사 자산을 탕진하기 시작했다. A와의 신혼집인 한남동 월세 1천만 원도 회사 자금으로 지급하는 등, 62억 원을 횡령한 혐의로 2003년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계몽사는 이후 상장폐지됐고 영영 시장에서 사라지게 된다).
홍 사장은 계몽사에 이어 바른손 인수에 나섰지만 실패했고 2년 후에는 어드벤티지인베스트먼트홀딩스(AIH)라는
회사를 통해 휴먼컴을 30여 억 원에 인수했다. 수법은 2년 전과 똑같았다. 휴먼컴 명의로 37억 원의 수표와 어음을 발행해 차입금 상환 및 담보용으로 사용하거나 어음을 할인해 개인적 용도로 유용한 혐의로 결국 구속됐다.
이혼 2번에 아이까지
기업들만 홍 사장에게 사기를 당한 것이 아니었다. 부인이었던 A도 사기를 당했다. 홍 사장과 결혼한지 1년 만에 딸을 낳았고 과거의 오점을 지우기 위해 본인의 이름을 고쳤다. 이 과정에서 개명을 하려고 호적등본을 떼어봤다
가 기겁을 했다고 한다. 홍 사장이 이미 2번의 이혼 경력이 있고 아이도 2명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홍 사장이 법정 구속된 지 2년 후인 2006년 협의이혼하기에 이른다.
까맣게 잊어버렸던 홍 사장 얘기를 문득 떠올리게 된 것은 최근의 2가지 일 때문이다. 우선 케이블채널 프로그램에서 ‘이혼 후 잘나가는 돌싱스타’ 2위에 A가 오른 걸 보면서다. A씨 역시 잘 배운 노총각에다가 혀가 짧아 발음이 약간 새는(왠지 거짓말할 것 같지 않은 분위기의) 노총각이 이처럼 큰 사기꾼이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두 번째는 홍 사장보다 더 큰 사기를 친 M&A 전문가를 최근 만난 일이다. 그는 내노라 하는 M&A를 통해 몇 개 기업을 재벌 반열에 올려놓았다. 수많은 M&A 전문가들이 감옥에 들어가는 와중에서도 그는 여전히 짱짱하게 중견기업 CEO로 기업을 경영하고 있다(M&A에서는 편법과 탈법이 종이 한 장 차이다). 진짜 사기꾼은 감옥도 피해간다는 것도 알게 됐다.
아무튼 홍 사장으로부터 내가 직접 당한 피해는 아무 것도 없지만, 홍 사장을 통해 몇 개의 기업이 거덜나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겉만 보고는 사람을 모르는 법이라는 것을 새삼 알게 됐다.
※덧붙임
같은 제목의 글을 지난 번에 올렸다가 댓글로 "이것 밖에 글 못쓰냐, 도대체 글 쓰는 거 어디서 배워 처먹었냐
('배웠냐'도 아니고 배워처먹었냐다)"고 욕 먹었다. 곱게 자란 탓에 욕먹는 것에 익숙하지 못해 곧바로 글을 삭제하고 열흘 이상 딴지일보 근처에 얼씬거리지 않았다. 친구 같았던 닉네임들이 갑자기 무서워졌기 때문이다.
한동안 글 공부한 다음 원래 글을 다시 고쳐서 재도전... 그냥 안오면 되지 왠 재도전? 여기 오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잉여력이 넘쳐서일까. 이번에도 욕설같은 악플 달리면 조용히 삭제하고 글쓰는 공부 하러 갈 계획이다.
독투불패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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