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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홍보팀, 그리고 국세청 조사 4국





“대한민국 기자가 대한민국 현실의 바로미터다.”


대한민국은 몸이 먼저 자라고, 정신이 뒤따라 채워지는 나라다. 몸은 성인인데 정신은 아직 유아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사춘기? 사춘기까지만 와도 다행이다. 대한민국은 일단 껍데기를 만드는 것에 급급하고 있다.


언론도 마찬가지인데, 신문방송학과가 기자 희망자들을 선발해 예비 언론인들에게 엄격하게 저널리즘의 본분과 기자 윤리를 가르치고, 교육을 받은 이들이 각 언론사에서 현장 실습을 하고, 언론사의 성향에 맞게(성향에 맞춰서 입사하겠지만) 기자 생활을 하면 그만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대한민국은 ‘언론’이 먼저 만들어지고, 저널리즘이란 학문이 뒤에 들어왔다. 그리고 언론 자체가 ‘관보(官報)’ 성격으로 만들어져 있기에 기자정신이니, 기자윤리라는 말 자체가 애초에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한성순보로 시작된 짧은 얼마가 지나가고 일제 강점기,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활약하고, 일제 강점기 시절 ‘언론자유’란 건 아예 없었던 시절이고, 그 뒤의 군사정부 시절도 마찬가지 아닌가? 언론자유를 논할 때쯤 되니 자본의 역습이 시작되고…)


‘제4부’

‘권력을 견제하는 자유로운 언론’


등은 한국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현업에 종사하는 언론인들 중에서 신문방송학이나 저널리즘을 전공한 기자가 몇이나 될까? 한국 ‘기자시장’에서 신문방송학이나 언론관계 전공자는 의외로 ‘적다’. 성적에 맞춰 대학을 간 영향도 있지만, 언론사에서도 신문방송 쪽 전공보다는 바로 써먹을 수 있는 다른 전공자들을 더 좋아한다(하다못해 기획기사나 칼럼 등을 쓰게 만들 수 있지 않은가?).


기자들이 연예인 사생활 쫓으며,


“국민들의 알권리”


운운하는 걸 방송에서 볼 때마다 코웃음을 쳤다. ‘알권리(the right to know)’를 보장한 게 헌법 몇 조인지, 알권리가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알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알권리이지만 연예인의 사생활을 침해할 때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다니. 기본적인 언론윤리에 대한 교육이 전무한 상태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경쟁논리’만이 우선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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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권리?


기자들 사정이 딱한 것도 사실이다. 당장 취업을 위해, 살아가기 위해, ‘기자’란 직업을 선택했는데, 들어가 보니 살기 위해 광고를 따야 하고, 살기 위해 자기의 뜻과 반하는 기사를 써야 하지 않는가? 하루가 다르게 매체 환경은 바뀌고 있고, 광고시장은 축소되고 있는 마당에 이들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난망한 상황이다.



...통화를 하다 보니 벌써 퇴근 시간이 다 됐다. 입사 후 두 달 동안 밥 먹듯이 야근을 해야 했지만, 오늘은 퇴근 시간보다 일찍 나가봐야 한다. 대행사들을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아, 당분간 술독에 절여지겠구나.’


대충 그런 생각으로 슈트를 챙기는데,


“티, 팀장님! 기, 기사 떴는데요?”


주니어 한 명이 얼굴이 사색이 돼 소리쳤다. 뒤이어 내 핸드폰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링크한 주소를 따라가 보니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던 인터넷 신문이다. 대행사 전화를 받으며 스크롤을 내렸다.


“OOO팀장님, 그게…”


“아, 지금 보고 있구요. 여기 어디에요? 안면 있는 곳이에요?”


“예, 예전에 다른 업체에 유가기사 몇 개 줬던 곳입니다.”


“우리랑은요?”


“광고 준 건 없습니다.”


머리를 굴렸다. 이걸 왜 올린 걸까? 그 전에 이 기사에는 ‘팩트’라 불리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압수수색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아직 그 어떤 혐의점도 나온 게 없다. 소위 말하는 ‘악의적 기사’라 봐야 할까? 기자의 추측과 바람이 가득 묻어나와 있는 사설이라고 봐야 할까?


가설은 3개다.


첫째, 아무 생각 없이 기자가 자기 마음대로 썼다.


이건 아니다. 이 정도 기사를 기자 혼자 마음대로 쓸 수 없다. 추측성 기사를, 그것도 산업 유통 분야에서 ‘의도’ 없이 기사를 쓰는 경우는 없다. 앞으로 업체랑 어떤 관계가 형성될 지도 모르는데 그런 모험을 할 이유는 없다.


둘째, 투서를 날린 쪽에서 기자에게 소스를 건넸다?


이 역시도 아니다. 그런 거라면 매체파워가 있는 기자를 만났을 것이다.


셋째, 거래를 위한 접촉이다.


매체파워를 보자면, 보잘 것 없다. 다만 산업유통의 성격상 이런 기사는 아무리 사소해도 제거해 두는 게 좋다. 저쪽은 지금 거래를 트기 위해 ‘강력한 한방’을 날린 것이다. 기사를 쓴 기자 본인도 이게 소설에 가까운 악의적 보도란 걸 알고 있을 것이다. ‘진짜 보도’를 하는 기자들은 이런 식으로 기사를 쓰지 않는다. 관계자에게 연락해 최소한의 반론권을 보장해 주든가, 코멘트를 따는 게 기본 상식이다. 아닌 경우에는 단신으로 짧게 팩트만 나가야 한다.


혹시 몰라서 핏덩어리들에게 이쪽 기자나 언론사에게 연락 받은 것 있냐고 물어봤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다. 아무런 접촉 없이 기사를 올린 것이다.


대행사 과장에게 상황을 물었다.


“접촉하고 있습니까?”


“예, 연락은 했습니다만…”


“기사 안 내리겠대요?”


“예.”


“강경한가요?”


“예.”


“밥 먹자는 소리네.”


너무도 자연스럽게 ‘밥 먹자는 소리네’란 말이 튀어나왔다. 수화기 건너편의 대행사 과장도 동의의 침묵이 이어졌다. 정말 이 회사가 대행사 복은 있는 것 같다.


“기자랑 안면 있다고 했죠?”


“예, XX통상 일 때문에 몇 번 봤습니다.”


“뭐 좋아해요?”


“소 좋아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소 먹죠. 날짜 잡아주세요. 되도록 빨리.”


“기사는 어쩌죠?”


“거래 트기 전에 기사 내린 적 있어요?”


“(웃음) 아뇨.”


천천히 기사를 다시 훑어 봤다. A4 2/3장 분량의 기사. 원고지 10매 정도? 팩트는 2개. 압수수색과 법무팀이 말한 노동분쟁에 관한 2건. 나머지는 온전히 기자의 상상력이었다. 그것도 네거티브를 총동원한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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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독(Underdog. 사람들이 약자라고 믿는 주체를 응원하게 되는 현상)’효과란 거, 이럴 때 보면 짜증이 난다. 약자는 선이고 정의란 생각. 그러나 약자가 언제나 선이고 정의인 적은 없다. 홍보 쪽 일을 시작하면서 만나본 수많은 ‘이익’들과 그 ‘이익의 충돌’을 보면서 느낀 한 가지가 있다.


“정의는 없다.”


강자가 무조건 악(惡)인 적도, 약자가 무조건 선(善)인 적도 없었다. 그저 자기 이익을 위해 자신을 포장했다. 다만 한국의 강자들은 한국인들의 기본 정서인 ‘배 아픈 걸 못 참는 정서’를 잘 알고 있기에(그걸 모르는 ‘졸부’들은 몰락의 길이 예약됐지만) 어느 정도 선에서의 ‘타협’을 하며 자신의 위치를 지킨다.


“부자 몸조심”


이란 말은 진리다. 괜히 얽혔다가는 더 많은 걸 잃는다. 이럴 경우에 취해야 할 한 가지 행동은 만나서 밥 먹고 웃어주며 몸을 숙이면 된다. 싸우면 우리가 이긴다. 지금 당장 11층에 있는 법무팀에 연락해 소송을 들어가면 된다. 하다못해 언론중재 위원회에 신고를 해도 된다. 이 언론사(?)의 규모는 그들의 웹진(?) 디자인만 봐도 알 수 있다. 법무팀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하고, 잘해봐야 데스크와 사장, 경리 포함해서 7~8명 규모일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걸 해서 얻은 승리가 뭐란 말인가? 싸움이란 건 잃을 게 더 많은 이들이 먼저 피하는 것이다. 저들은 잃을 게 없고 여긴 잃을 게 너무 많다. 그걸 알고 덤벼드는 게 이런 애들이다.


“연락 넣어주고, 다른 기사들 모니터링 해주세요. 더 빠져나가는 건 없겠죠?”


“매거진부터 방송까지 모두 모니터링 하고 있습니다.”


“사소한 건 넘어가죠. 매체파워 있는 쪽만 봐주세요. 인터넷 쪽에서 더 터져 나오면 안 되는데.”


“죄송합니다. 그래도 이 이상은 안 나올 거 같습니다.”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시간이 이 정도 흘렀고 내일 금요일이니까, 주말 끼고 한숨 돌리면 또 잠잠해 지겠죠.”


“예”


탁상달력의 날짜를 하나씩 가늠해 봤다. 주말이 꼈다는 건 천운이다. 시기상으로 봤을 때 이슈가 숙성될 시간이 없다. 하긴, 나라 전체로 보면 이번 건은 발톱에 낀 때만도 못한 이야기다. 이슈로 이슈를 덮는 대한민국이 아닌가?


“약속은 월요일로 하죠? 잠잠해진 다음에 그쪽 이야기 한 번 들어보죠.”


“예, 월요일로 잡겠습니다.”


통화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핏덩어리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다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누군가는 내 목소리 억양을 듣고는 마음 한 구석에 안도의 한숨을 몰아쉰 눈빛이고, 누군가는 돌다리도 다시 두들겨 보자는 느낌으로 내게 ‘확신의 선언’을 듣고 싶어 하고, 또 누군가는 태생적인 ‘불안장애’ 때문인지 이미 회사가 다 망한 듯한 표정이다. 이 표정을 보다보면 이것들이 밉지는 않다. 자기 밥그릇 때문이겠지만 그게 뭐 어떤가? 밥그릇 걱정을 하는 게 뭐 그리 나쁜가?


“나라 망했어? 다들 표정이 왜 그래?”


“그게, 나쁜 기사가…”


“장난해? 이게 나쁜 기사면 삼성 같은 덴 망해도 벌써 망했어.”


“…”


천천히 마케팅팀 핏덩어리들을 훑어봤다. 미우나 고우나 이것들을 키워서 한 사람 몫을 할 때까지 끌고 가야 한다. 싹수가 영 없는 것도 아니고, 지난 두 달 간 지켜 본 바로는 마음가짐이 영 형편없는 것도 아니다. 일머리가 없는 것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오지만, 그건 맞춰 나가면 되는 것이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니 말이다.


“나 선약 있거든? 회사 안 망하게 하려고 기자 만나러 가야 해.”


“아, 예”


엉거주춤 자리에 앉으려는 폼, 시선을 거두려는 모습들이 보인다.


“오늘 남은 업무 뭐 있어? 김과장?”


“바이럴 마케팅 프로모션 준비…”


“됐고 그거 다음 주 화요일까지 들고 와. 또!”


“어, 언론사 상황 주시하고…”


“됐고, 스마트폰 뒀다 뭐해? 그리고 오늘내일 더 나올 기사도 없을 거야. 또?”


“하반기 홍보비 집행 건 품의서…”


“다음 주 수요일까지 가져와. 또?”


잠잠하다.


“김과장!”


“예!”


지갑에서 법인카드를 꺼냈다. 팀장의 상징이자 리더십의 근원이며, 팀장 권위의 절대지표인 절대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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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전부 퇴근시켜, 회식이라고 하긴 그렇고, 오늘 고생했으니 다들 저녁이나 하고 가. 가고 싶은 애들은 가고, 술 마시고 싶은 팀은 모여서 마셔.”


“티, 팀장님은요?”


“기자랑 일찍 끝나면 중간에 합류하겠는데, 신경 쓰지 마. (한숨) 힘들고 어려울 땐 맛있는 거 먹고, 달달한 거 먹고 다시 힘내는 거야. 오늘 같은 일 이쪽 바닥에서 일상다반사거든? 이딴 일로 주눅 들지 마. 기사 한 두 개 나간다고 회사 안 망하고, 기사 못 막았다고 우리가 잘못 한 거 아냐. 불가항력이란 말이 왜 나왔겠어? 할 만큼 했고, 선방했어. 나머지는 다음 주에 해결하면 돼. 이 소란도 며칠 지나면 잠잠해져. 그러니 다들 어깨 쫙 펴고, 오늘 가볍게 한 잔들 해.”


“제가 수행을…”


눈치 빠른 김과장이 수행을 말한다. 나름 귀여운 구석이 있다.


“됐어. 대행사 쪽에서 나와. 그리고 그쪽 기자랑 안면 있어. 내 걱정 말고 너희들 멘탈이나 챙겨. 이런 일 당했다는 거 자체가 우리 회사가 잘나간다는 증거야. 빌빌 싸고 있으면 투서질 당하지도 않아. 고생했다.”


자리에서 나서자 팀원들이 엉거주춤 인사하며 길을 터준다. “고생하셨습니다.”, “수고하세요. 팀장님.” 등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린다. 목소리 억양만 들어봐도 한결 부드러워진 느낌이다. 그러나 이럴 때 절대 등을 돌려선 안 된다. 한 번 가오를 잡았으면 끝까지 가오를 잡아야 한다. 그게 내 철칙이다. 문 밖에서 팀원들의 화기애애한 목소리가 들렸다.



수습(收拾)


주말이 지났다. 우리 회사 소식은 이제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주말을 낀 사흘 동안 기자들은 다른 먹잇감을 찾아 모니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사흘 동안 난 복집도 갔다 왔고, 민어회도 먹었고, 아구찜도 먹었으며, 스크린 야구도 했다. 그리고 오늘 마지막으로 소를 먹으러 간다.


“박과장님, 오랜만입니다.”


“O팀장님,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뭐가 죄송해요? 같이 밥 한 끼 하는 건데.”


대행사 과장과 대리를 만나 소를 먹으러 갔다. 기자는 뭐가 그리 급한지 먼저 자리를 하고 있었다. 보통 이런 경우에 기자가 늦게 들어오는 게 상례인데, 어지간히 급하긴 급했나 보다. 기사를 쓴 기자와 연배가 있어 보이는 데스크가 보인다. 딱 봐도 알만하다.


“어이구, 저희가 일찍 오려고 했는데 길이 막혀서…. 죄송합니다. 첫 만남부터 지각을 해서.”


(개뿔, 약속시간 10분 전이다.)


“아닙니다. 저희가 O팀장님 일찍 뵙고 싶어 서둘다 보니 먼저 오게 됐네요.”


“팍 삭은 제 얼굴이 뭐 볼게 있겠습니까? 그래도 예뻐해 주시면 감사하죠.”


의례적인 인사와 명함교환, 그리고 화기애애한 술자리(!!). 두어 순배 술잔이 돌고나서, 데스크가 한마디 툭 던진다.


“제가 이 친구를 말렸는데, 막무가내에요. 혈기가 머리끝까지 뻗쳐서.”


(지랄하네, 지가 쪼아놓고는. 아니, 지가 쓰고 꼬붕 이름으로 나간 거 아냐? 아, 기사 쓸 짬밥은 아니고, 초 잡아 줬겠네)


“제가 잠깐 외부 미팅 있을 때 바로 올려버렸네요. 제가 와서 보고는 이 친구한테 싫은 소리 좀 했습니다. 아니, 저쪽 사정은 들어봤나? 우리 박과장님도 계시는데, 이 친구가 박과장님한테 전화 한 번 슥 하고 기사 올린 거예요.”


(아하, 반론권은 그렇게 퉁 치시겠다? 그럼 그 ‘소설’은 신춘문예에 내야지 왜 너희들 홈페이지에 올린거야? 하지만 이럴 땐 아무 말하지 않고 우선 들어줘야지)


“최기자가 아직 어려서 투박한 면이 있습니다. 그래도 세상을 보는 눈 하나는 똑바릅니다.”


(씨바, 세상 보는 눈이 그렇게 똑바른데 기사를 그렇게 써? 어디 소말리아 같은 데서 살다 왔어? 그 이전에 지금 나 협박하는 거야? 세상 보는 눈이 똑바르면 뭐? 우리가 잘못했다는 거야? 지금 기사 하나 가지고 어디까지 뽑아먹을 심산이야?)


“제가 좀 거칠게 썼습니다. 마음 상하셨다면 기분 푸십시오. 제 술 한 잔 받으십시오.”


최기자란 놈이 술병을 들고 슥 내민다.


(이거 제대로 교육받았는데? 잘못이 뭔지는 아냐? 지금 네 기사는 스페이스 오페라야! 논픽션 장르가 아니라 픽션이라고 픽션! 지금 너네들 트루 디텍티브 흉내 내? 굿 캅 배드 캅?)


웃으며 최기자의 술을 받자, 데스크가 덩달아 술잔을 건네고 연배와 고향, 출신학교를 두루뭉술하게 치고 나온다. 어쨌든 엮어보겠다는 것이다. 명백하게 갑을관계를 따지자면 내가 갑이다. 그러나 표면상으론 저들이 갑이다. 그건 그들도 잘 알고 있다.


그들의 간절한 눈빛. 그 눈빛이 원하는 말을 이쯤에서 꺼내야 한다. 모두의 관계를 위해서.


“앞으로도 좋은 만남 이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박과장님 덕분에 이런 인연도 얻네요. 박과장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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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을 돌렸다. 너희들은 내 선이 아니라 대행사 선에서 처리할 대상이다. 박과장이 앞으로 전담할 것이다. ‘좋은 만남 이어간다’란 말의 다른 말은 광고다. 눈치 빠른 저들이라면 이해할 것이다.


“그럼요. 아, O팀장님은 공 좀 치십니까?”


“어휴, 요즘은 바빠서 스크린 갈 시간도 없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회사 옮긴지 두 달이 채 안 돼서 업무파악하기도 바쁩니다.”


“그렇군요. 언제 바쁜 거 지나가면 공이나 한 번 치러 나가시죠?”


“예, 그러시죠.”


(씨바, 너희들 때문에 바쁜 거 안 보이냐? 공? 개뿔. 너희들 부킹비까지 내가 내야 하냐? 중앙 일간지급 아니면 공 치러 가는 거 아니란 거 너 모르냐? 알고 말한 거면 제정신 아닌 거고, 모르고 말한 거면 양아치다)


반주를 겸한 점심은 화기애애하게 끝이 났다. 이렇게 또 한 건이 낙찰됐다. 기사를 올리고 내리고 할 사이도 없이 이슈는 묻혔다. 지금에 와서 기사를 내린다 한들 대세에 지장은 없다(그 기사를 몇 명이나 봤을까?). 저쪽은 마치 커다란 약점을 쥐고 있는 듯이 말하지만, 지금 그건 아무 힘이 없다는 건 그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만약 권력기관을 끼고 있는 몇 개의 언론사가 떠든다면 그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권력기관을 끼지 않고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이런 언론의 경우에는 그쪽에서 죽을 각오를 하고 덤벼야 한다. 그럼 길이 보인다. ‘삼인성호(三人成虎)’란 말이 있지 않은가? 작정하고 떠들면 거짓도 진실이 된다. 이들이 연작으로 계속 떠들면 귀찮아진다. 이럴 땐 그냥 좋게좋게 넘어가야 한다.


그들이 원하는 대답까지는 아니지만, 넌지시 언질을 남겼다. 눈치 빠른 박과장도 고개를 끄덕인다. 하반기 홍보비 중에서 얼마간을 떼 유가기사를 사든, 광고를 사든 하면 될 것이다(파워블로그보다 못한 수준의 업체에 광고를 한다는 게 속이 쓰리지만). 이 경우 중요한 건 절대 우리 회사가 전면에 나서면 안 된다. 모든 건 대행사 수준에서 정리하면 된다. 그쪽도 내 언질을 듣고는 적잖이 표정이 누그러졌다.


신났겠지. 조만간 박과장은 저들과 쇼부 친 적당한 가격의 유가기사나 광고 품의서를 날리겠지? 아니, 그 전에 가이드라인을 요구할 것이다. 업계관례에 따른 적정가. 이럴 때 보면 먼저 가격을 들고 나오는 언론사들이 더 편하다.



문득 4년 전에 몸담았던 회사에서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우리 본부장님 만나보시죠?”


기사 몇 개를 터트린 다음, (톨킨을 능가하는 판타지 작가였던) 기자가 내게 건넨 말이었다. 자기는 기사로 조지고, 거래는 본부장이라 불리는 사람과 하라는 것이다. 효율 좋은 시스템이었다. 당사자와 얼굴 붉힐 일도 없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을 이유도 없었다.


권력기관을 옆에 끼고 기사를 쓰던 그 언론사는 알렉사 순위를 뒤에서 역순으로 찾는 게 더 빠를 정도로 매체파워나 영향력이 없는 업체였지만, 우리가 한 수 접어줘야 했다. 만만찮은 빽이 있었다.


이사를 수행해 찾아간 그 자리에서 그쪽이 대뜸 요구했던 게,


“3천”


이었다. 그리고는,


“10부작 기획기사입니다. 지금 겨우 3편 나갔습니다.”


...씨바.


해외업체에 내수, 대체품은 잔뜩, 거기에 산업유통이라는 온갖 약점은 다 안고 있는 업체였기에 언제나 몸을 사렸다. 기부란 기부는 다 했고, 홍보 업무의 절반은 사회공헌으로 떡칠을 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뜯어먹겠다는 존재들은 넘쳐났다.


그때 우리 쪽 이사의 발 빠른 대처를 보면서 난 그 사람을 내 직장생활의 롤모델로 삼았다.


“O과장 이쪽 업체랑 연관업체, 유관업체 전부 리스트업 해 와. 대행사 모두 교체하고, 법무팀 미팅 잡고.”


이사는 언론사 본부장을 만난 다음 대행사의 반을 날려버렸다.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 능력 부족이 그 이유였다(전임 이사가 똥을 싸놓고 도망간 상황이라 한 번 정리를 하긴 해야 했을 거다). 그 다음 이 언론사와 비슷한 성격의 언론사 5군데를 전부 리스트업 하고 각각의 성향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동안 우리 쪽 홍보매체를 점검했다.


법무팀 미팅에서 난 충격을 먹었다. 이사는 그 본부장과의 만남을 모두 녹취했던 것이다. 돈 3천만 원 주면 끝날 일이었는데, 이사는 독한 마음을 먹었다. 녹취파일에 법적 효력은 없었지만 전후 사정만으로 충분히 소송감이었다.


사장은 외국인이라 이런 상황 자체를 아예 이해하지 못했다. 홍보팀이란 존재는 회사를 홍보하면 될 문제고, 정부차원의 문제가 있다면 로비스트가 해결하면 되는 것이고(한국은 법적으로 로비스트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엄청 신기해했다), 법적인 문제가 있다면 회사 법무팀이 로펌을 고용해 해결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기자를 관리해야 한다.”


란 말의 의미자체를 아예 몰랐다. 당시 이사가 ‘대관업무팀’을 작게나마 하나 만들고, 그동안 대(對)언론사 업무를 맡았던 홍보대행사 체제를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외국계 기업은 알고 있으면서도 대언론사 업무는 홍보대행사에게 전담시키는 게 기본이었다. 분명 말하지만 이건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것이다. 괜히 본사까지 엮이면 더 많은 요구가 달려들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사는 끝까지 일정부분의 업무는 본사가 맡아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이 문제는 본사까지 상정되었고, 이 다국적 기업의 최고 경영자들은 한국이란 작은 나라의 ‘독특한 언론환경’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방침을 가지고 토론까지 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결론은,


“변화는 없다.”


였다. 단기적인 관점에서는 분명 언론사 관리를 하는 게 편하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득보다 실이 더 많다는 것이다. 대신 이사의 주장처럼 몇몇 언론에 대한 대행사 차원의 언론관리는 인정한다는 절충안이 나왔다.


놀랍지 않은가? 이 작은 나라의 ‘언론환경’ 때문에 다국적 기업에서 언론관리 지침을 고민했다니 말이다. 결국 이사는 최초에 3천을 말한 업체와 다른 유관 언론사들을 묶어서 6개월짜리 유가기사를 ‘묶음단위’로 샀다. 그리고 대행사 한군데를 뚫어서 그쪽 직원 2명을 우리 회사에 파견 오게 만들어서 언론관리를 맡겼다.


아울러 법무팀에 2명의 신규인원을 충원해 대관업무를 전담시켰다. 지금도 사장이 이사의 보고 자리에서 했던 마지막 말을 잊지 못하겠다.


“what the fuck”


한국에 부임한 지 반년이 채 될까 말까했던 이 양놈사장은 한국 기자를 블랙컨슈머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 사장에게 한국 시장의 특수성을 납득시키고, 결제를 받아낸 이사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당시 이사는 녹취록을 만들고 파일을 USB에 넣은 뒤 2개의 부본을 만들어서 하나는 회사 캐비닛에, 하나는 자기 책상에 넣어뒀다. 그리고 유가기사를 묶음단위로 사기 위해 갔던 자리에서,


“6개월간 유가기사를 통한 광고효과를 검토해 보고 그에 상응할 만한 홍보효과가 없다면 재계약은 어려울 겁니다.”


라고 못을 박았다. 본부장의 썩은 표정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뭐라고 대거리를 한 거 같은데 이사는 옆에 있는 대행사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광고효과에 대한 보고서 준비하세요. 매달, 기사 한 건마다.”


본부장은 붉으락푸르락하며 이사에게 지금 싸우자는 거냐며, “이래 보여도 한국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읽는 매체다. 절대적인 양은 부족할지 모르지만, 대한민국 의사결정권자들이 보는 언론”이라며, 지금 우리랑 척지자는 소리냐는 등의 날선 단어들을 토해냈다.


“광고효과가 없는 매체에 광고를 싣지 않는다는 게 뭐가 잘못이죠?”


할 말이 없었다. 이사는 끝까지 녹취록의 존재를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날선 눈빛의 뒤에는 뭐가 있다는 걸 본부장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 자리는 파했다. 이후 그쪽 업체에서 식사라도 한 번 하자며 몇 번 연락이 왔지만, 내 선에서 모두 커트했다. 6개월의 광고 집행 후 우리는 그쪽과 그 유관업체들과의 광고계약을 끊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사의 행동은 잘못된 행동일 수도 있다. 설사 녹취록이 공개됐다고 하더라도 피 보는 건 그쪽이 아니라 우리다. 그걸 터트리는 순간 대한민국의 모든 언론은 우리의 적이 될 것이고, 회사는 대한민국에서 발붙이고 장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녹취록은 이사가 스스로 흔들리지 않도록 박아놓은 앵커일 뿐이었다.


만약 같은 상황이라면 나 역시 터트리지 못했을 것이다. 업체와 이렇게 험악한 관계를 만들 필요가 없었던 상황에서 이사는 왜 그랬을까? 개인적인 미학이었을까? 이사는 욕지기가 치민다고 말했었다. 광고를 요구하거나 다른 편의를 요구하는 선까지는 자기가 그어놓은 마지노선이라 할 수 있겠지만, 보자마자 앉은 자리에서 액수를 말하고 협박하는 그 자체가 역겨웠다고 한다. 내가 퇴사하는 날 회사 옆 이자카야에서 이사는 그때의 모멸감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그 모멸감의 근원은 양놈사장의 “what the fuck”이었다. 황당한 상황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사장의 표정을 보며, 한국놈으로서 쪽팔리고 부끄러웠다는 것이다. 그냥 웃으며 계약하고 6개월 뒤에 바이바이 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사장의 표정이 계속 오버랩 됐다는 것이다.


예전처럼 자회사를 만들어 비자금을 조성하고, 본사가 아니라 자회사가 뇌물을 건네는 방식을 취하는 외국계 법인이 아직까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눈에 띄는 애들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언론사라고 자처하며 ‘삥’을 뜯겠다며 덤벼드는 기자들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그 이사 덕분에 내 언론관은 완전히 고착됐다.


“기자들은 돈 뜯어먹는 놈.”


피해의식의 발로인지 모른다. 내 경험의 소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가 겪은 너댓 개의 회사에서 기자들의 존재는 늘 그랬다. 초년병 시절 중앙 일간지 막내 기자에게 야유회 물품 지원 요구사항을 건네받고, 업체 쪽에 연락해 기자들이 마실 술과 안주를 공수해 줬던 것부터 시작해, 직급이 올라가 광고 집행을 직접 하게 된 지금, 유가기사와 광고로 그들을 어르고 달래게 된 지금까지 기자들은 내게 늘 ‘뭔가’를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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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다.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면, 그들도 내게 해주는 게 있다. 상품을 런칭 할 때 대대적인 홍보 기사가 나가고, 기획상품이 나갈 때 취재 기사 몇 개가 맞물려서 나온다. 그들 매체에 광고가 나가면 괜찮은 홍보기사도 묶음 상품으로 나온다. 이쪽에 문제가 발생하면, 이들은 우리가 숨 고를 시간을 주거나 애써 모르는 척 한다.


그러고 보니 그리 나쁜 관계가 아니다. 그냥 투정일 뿐이다. 그들도 우리를 이용하고, 우리도 그들을 이용한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관계라고 해야 할까? 아니,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라는 게 맞을 것이다. 깜박이 없이 훅 들어오며, ‘거래를 트고’ 싶어 하는 몇몇 군소 언론사들이 있어 문제지 나머지와의 관계는 꽤 괜찮다. 세련되게 사태를 대처하고, 어른의 대화를 나누며 각자 얻어갈 걸 얻어간다.


예전 양놈사장 말처럼 우리나라 언론이 “what the fuck”한 상황이란 건 맞지만, 그 안에 있다면 이게 다 관례이고, 전통일 수 있다.


뭐가 옳은지 가치 판단을 해서 뭐하는가? 내 입에 밥숟가락 들어가는 게 정의인데. 한 건 마무리 졌으니 이제 김영란 법 시행되기 전에 기자들 모아서 거하게 밥이라도 먹여야겠다.




빨간두건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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