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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석 변호사의 이 음주 트윗은 각 커뮤니티에서 꽤 뜨거운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전직 국회의원에 고수입 변호사, 필자 같은 비루한 서민에게는 저 높은 곳에 계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신분제의 드높은 벽에 부딪혀 좌절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잠시나마 “인간은 다 똑같구나.” 하는 초라한 만족감이 들기도 했다.


현재 대한민국에 신분제가 완전히 타파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가 문명사에 있긴 했을까? 배움이 짧아 그런 사례를 들지 못하겠다. 소련? 쿠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현대의 신분제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더 거대해지고, 촘촘해지고, 세밀해지고 있다. 사회초년생들이 각종 시험, 스펙 쌓기 활동 등을 하면서 신분상승의 꿈을 꿀 때, 소크라테스의 창작으로 오해 받는 “네 자신을 알라”는 말이 본래 뜻과는 달리 “네 주제를 알라”처럼 들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강 변호사의 맨 마지막 트윗은 참으로 명언이라 할 만 하다.


“씨발 세상 조가타...”


엉엉.



약 1500년 전 신라를 강고하게 지배한 건 골품제였다. (백제와 고구려에 비해 기록이 상세한 까닭에 삼국이 모두 신분제를 운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대차게 까이는) 골품제가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현대의 신분제와 어떻게 비교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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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천년 왕국의 부활>)


삼국 중에서 제일 좃밥이었던 신라. 경주 일대에 고만고만한 마을을 중심으로 국가의 모습을 갖춰가던 신라는 점점 영역을 넓히면서 지배체제 개편을 필요로 했다.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17관등을 두다 [32년 (음)]


9년 봄에 육부(六部)의 이름을 고치고 성(姓)을 하사했다. 양산부(楊山部)는 양부(梁部)가 되었으니 성은 이(李)였다. 고허부(高墟部)는 사량부(沙梁部가 되었으니 성은 최(崔)였다. 대수부(大樹部)는 점량부(漸梁部)가 되었으니 성은 손(孫)이었다. 간진부(干珍部)는 본피부(本彼部)가 되었으니 성은 정(鄭)이었다. 가리부(加利部)는 한기부(漢祇部)가 되었으니 성은 배(裴)였다. 명활부(明活部)는 습비부(習比部)가 되었으니 성은 설(薛)이었다.


아울러 관(官)을 설치하니 모두 17등이었다. 첫째는 이벌찬(伊伐湌), 둘째는 이척찬(伊尺湌), 셋째는 잡찬(迊湌), 넷째는 파진찬(波珍湌), 다섯째는 대아찬(大阿湌), 여섯째는 아찬(阿湌), 일곱째는 일길찬(一吉湌), 여덟째는 사찬(沙湌), 아홉째는 급벌찬(級伐湌), 열째는 대나마(大奈麻), 열한째는 나마(奈麻), 열두째는 대사(大舍), 열셋째는 소사(小舍), 열네째는 길사(吉士), 열다섯째는 대오(大烏), 열여섯째는 소오(小烏), 열일곱째는 조위(造位)였다.


왕이 육부를 모두 정하고 이를 둘로 갈라 왕녀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기 부내(部內)의 여자를 거느리고 무리를 나누게 했다. 가을 7월 16일부터 매일 일찍 큰 부(部)의 뜰에 모여 마포(麻布)를 짜고 밤 10시에 파했다. 8월 15일에 이르러 그 공의 많고 적음을 가려진 편에서는 술과 음식을 내어 이긴 편에 사례했다. 이에 노래하고 춤추며 온갖 놀이를 즐겼으니 이를 가배(嘉俳)라 불렀다. 이때 진 편의 한 여자가 일어나 춤추고 읊조려 “회소(會蘇) 회소”라 하니 그 소리가 애처롭고도 우아했다. 후세 사람들이 그 소리로 노래를 만들어 ‘회소곡(會蘇曲)’이라 이름했다.


<삼국사기>, 유리(儒理) 이사금(尼師今)


‘유리 이사금’ 때라고 적혀 있지만 정말로 이렇게 빨랐는지에 대해선 합의되지 않았다. <삼국사기>의 초기기록, 특히 신라 편은 뻥튀기가 좀 심해야지. 여담이지만 지금은 사료로써 귀중한 자료라고 해도 국가 공식 사료에는 별로 중요치 않아 보이는 파티타임의 양상을 세세히 적어 놓고 있다. 그만큼 이 때에 파티가 굉장히 중요한 행사였으면서 부담이 됐던 행사였단 걸 의미한다. 쉽게 말해 조옷밥이었단 얘기.


사료가 이렇게 세세한 내용 이유는 또 있다. 광란의 밤을 보낸 이 몇몇 가문이 초기 신라를 이루는 여섯 씨족, 즉, 6촌이었기 때문이다. 신라의 다이아몬드 수저 6촌. 이것이 골품제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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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6촌의 위치


이 6촌 운영체제가 나름대로 잘 돌아갔는지 신라는 야금야금 영역을 넓혀갔으며, 연맹왕국에서 귀족국가로 바뀌어갔다. 팽창한 국가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과정에서 병합된 각지의 여러 국가의 대빵들을 경주에 이주시키고 중앙으로 편입시키는 작업은 필수적이었다. 그와 함께 이들의 힘이 중앙을 압도하지 못하도록 해체시키는 작업도 해야 했다.


경주의 똘마니들이 뭉쳐 만든 6촌만으로는 이들을 포함할 수 없어 신라는 6부로 개편하여 조직을 정비한다. 동시에 각 지방 족장세력과 혈연, 혈족적 유대를 강화함으로써 6촌보다 더 호구였던 신라 초기 왕권을 조금이나마 지켜주는 작업을 진행한다. 이 6부의 개편 작업은 대체로 5세기 후반, 즉 눌지마립간(訥祗痲立干)의 뒤를 이어 즉위한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과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때 이루어졌다. 469년 자비마립간 때 경주의 방리(坊里. 주로 시골에서 여러 집이 모여 사는 곳) 이름을 정한 것이라든지, 487년 소지마립간 때 사방에 우역(郵驛. 역. 중앙의 공문을 지방에 전달, 마필 공급, 사신 왕래 등을 맡음)을 설치한 것, 또한 490년 경주에 시장을 열어 사방의 물자를 유통하게 한 것 등은 개편작업의 결과로 보인다.


그럼에도 6부체제로는 효과적으로 국가를 관리할 수 없어, 법흥왕 때 골품제를 도입한다.


율령을 반포하고, 공복과 위계를 정하다 [520년 01월(음)]


7년 봄 정월에 율령(律令)을 반포하고, 처음으로 모든 관리의 공복(公服)과 붉은 색, 자주색으로 위계(位階)를 정하였다.


<삼국사기>, 법흥왕


법흥왕의 선왕인 지증왕은 신라 역사상 마지막으로 마립간의 칭호를 쓴 왕이었다. 이사금, 마립간 등 신라 초기 토착세력의 독자적인 지배자의 칭호를 버리고 왕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이 시기의 신라는 지역 연맹체제의 관습을 슬슬 떼는 마지막 작업을 하고 있었다. 법흥왕의 율령반포는 기존 소국들이 아옹다옹하던 시기와 안녕을 고하는 사건이었다.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율령을 반포할 때 골품제도 법제화한 것으로 보고 있다.


골품제는 성골(聖骨)과 진골(眞骨)이라는 두개의 골과 6두품으로부터 1두품에 이르는 6개의 두품을 포함해 모두 8개의 계급으로 이루어져있다. 이름이 재밌지 않은가? ‘성스러운 뼈(성골)’와 ‘진짜 뼈(진골)’라니. ‘뼈대 있는 집안’ 운운하는 표현의 역사가 꽤 오래된 것 같다. 금수저, 은수저 보다 훨씬 노골적인 표현을 가감 없이 쓸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신분제를 구축해야만 했던 왕실의 입장이 언뜻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 성골에게 영 좋지 않은 문제가 발생한다. 성스러운 뼈를 유지하기 위해서 근친혼을 지속해 점차 수가 줄어들었다. 여성에게 왕위를 계승하는 미봉책까지 쓰지만 이것도 잠시, 진덕여왕을 끝으로 성골은 소멸되어 버렸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쇠락이 생각나지 않는가? 사실 뭐 성골이 삽질해서 사라졌다기 보단 진골의 몇 세기에 걸친 압박이 있었다는 게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태종무열왕을 시작으로 신라가 망할 때까지 모든 왕은 진골출신이었다. 진정한 다이아몬드 수저계급으로 진화한 것이다. 재밌게도 신라의 대부분은 김씨 왕조가 지배했으니, 부칸의 김씨 왕조는 신라 김씨 왕조를 잘 공부해뒀으면 좋겠다. 백두혈통이니 어쩌니 하는 것도 뼈 드립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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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 있게 봐야 할 부분은 진골 아래 6개의 신분계급이다. 이 중 6두품·5두품·4두품은 관료가 될 수 있는 상위계급이었고, 3두품·2두품·1두품은 그것이 불가능한 하위계급으로, 흔히 말하는 서민이다. 최치원이 6두품인 탓에 6두품에 대한 대우가 매우 좋지 않았던 것처럼 여겨지는데, 사실 6두품도 졸라 쎈 특권계급이었다. 졸라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강 변호사도 지금으로 따지면 대략 6두품이 아닐까?


6두품에 속한 사람들은 본래 신라국을 구성한 여러 씨족장의 후예와 신라에 정복된 작은 나라들의 지배층 후손들이었다. 골품제의 원형이 6촌에서 출발한 계급이다. 다만 이들은 관직제 규정상 주요 관청의 장관이나 주요 군부대의 지휘관이 될 수 없었다. 아무리 올라가봐야 차관, 부관이니,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진골 시다바리였다. 필자가 6두품이라도 열 받긴 하겠다.


한편 5두품이나 4두품은 7급, 9급 공무원 정도 밖에 될 수 없었으니, 신분에 따라 관직을 제한하는 전통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진다. 평민에 속하는 1, 2, 3두품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경계가 모호해져 평민으로 퉁쳐진다. 상위계급은 엄격히 지켜졌으나 하위계급은 모호해지며 경제적으로 하향평준화 되어간다. 중산층이 점차 무너지는 것이다.


평민이라 하더라도 한번 골품제도에 편입된 사람들은 경주에 사는 사람으로 제한되어 있었던 만큼, 지방의 촌락민과는 구별되었다. 같은 평민이라도 서울 사람과 지방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계급 속에 포함되었다. 평민이 이럴진대 귀족은 당연히 더 심했겠지. 신라 말 전국에서 호족들이 들고 일어난 원인 중 하나가 경주 중심의 신라 핵심세력이 지방을 대하는 태도였음은 잘 아시리라 믿는다. 이렇게 서울과 지방의 차별을 둔 것은 역설적으로 신라 왕실과 귀족이 삼국을 통일한 후 지방 세력을 얼마나 경계하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반증이 되겠다.


상기했듯 골품제의 문제점은 ‘어떤 부모를 만나냐에 따라 나의 출세 길이 정해지는 것’에 있었다. 본래 관등제도와 골품제도는 이원적인 성격으로 출발했지만,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로 정비되는 과정에서 “왕 밑으로 다 집합!”하며 일원화되었다. 모든 장관과 군 지휘관은 오직 진골만이 맡을 수 있었으며, 6두품의 한계는 차관급, 그 밑으로는 안습이었다.


이것만으로도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 특이한 점은 진골은 아래 표처럼 상위계급은 상한선을 제외하고 하위관직까지 차지할 수 있었다. 예컨대 진골출신이자 6두품과 같이 일하던 6급 공무원을 2급 공무원으로 승진시키는 경우다.


소부리주를 두고 아찬 진왕을 도독으로 삼다 [671년 07월26일(음)]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고 아찬(阿湌) 진왕(眞王)을 도독(都督)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문무왕



위는 부여주를 설치하고 6위관등 아찬 진왕이란 양반을 지방장관인 도독으로 삼았단 이야기다. 도독은 9위관등인 급찬에서 2위관등인 이찬까지의 사람들 중에서 주로 임명되었고, 지방장관이니 만큼 진골만 할 수 있었다. 이 얘기인 즉슨, 같이 일하던 6두품 사람들은 자신이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될 수 없는 도독의 자리를, 밑에서 배우던 새파란 진골 놈이 받아가는 꼴을 봐야만 했던 것이다. 속이 뒤집어 지는 게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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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얘기는 하기 싫지만, 똑같은 이등병이라도 사단장 아들이 섞여있을 때 어떤 대우를 받는지 우리는 잘 안다. 사법연수원도 수저에 따라 갈 길이 다 정해진다고 주워들은 적이 있다. 일일드라마에서도 고집 부려서 평사원으로 입사한 회장 아들놈은 연애만 하고 돌아다니는 거 같은데 알아서들 기고 알아서 승진되지 않나.


이러한 사회현실은 아래 계급에게 사회적 박탈감을 주었을 것이다. 비단 6두품과 진골 뿐 아니라 각 두품들 간에서 이런 일이 빈번했을 것이고, 서울사람과 지방사람, 꽤 중요한 지방과 산골촌놈, 옆집 김씨와 박씨 사이에서도 존재했을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제현께서도 피부로 느끼고 계시지 않나.


또한 골품제는 혼인을 제약하기도 했다. 원칙적으로 같은 신분 안에서만 혼인이 허가되었다. 처음부터 수가 적었던 성골계급이 근친혼을 반복하면서 소멸해간 이유다. 진덕여왕이 혼인하지 않은 이유가 성골신분의 남성이 씨가 말라서가 아닌가 하는 추측엔 일리가 있다.


이것 뿐 아니라, 같은 진골임에도 경주토박이는 병합된 군소국가의 후예와 결혼을 꺼리기도 했다.


김서현과 만명부인이 야합하다


일찍이 서현이 길에서 입종(立宗) 갈문왕(葛文王)의 아들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을 보고 마음속으로 기뻐하면서 눈짓으로 그녀를 유인하여 중매를 기다리지도 않고 정을 통하였다. 서현이 만노군(萬弩郡) 태수(太守)가 되어 장차 함께 떠나려 하자, 숙흘종이 비로소 딸이 서현과 야합한 것을 알고서 이를 미워하여 별제(別第)에 가두고 사람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느닷없이 벼락이 옥문(屋門)을 쳤고 지키던 자가 놀라 우왕좌왕하자 만명은 뚫린 구멍을 따라 빠져나와 마침내 서현과 함께 만노군에 다다랐다.


<삼국사기>, 김유신(金庾信) 상


김유신의 아버지인 김서현의 가계는 금관가야에서 항복한 세력이었다.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김무력이 관산성 전투에서 무쌍을 펼치면서 신라의 신흥가문으로 대두되었지만, 패망한 왕국의 세력이었던 만큼 경주 토박이들에게 은근한 배척을 받았다. 그런데 김서현은 어느 날 진흥왕의 동생 숙흘종의 딸 만명부인을 보고 첫 눈에 반해 눈짓으로 그녀를 유혹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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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에 성공하는 듯 했으나, 만명부인의 아버지인 숙흘종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사료에도 벼락을 쳤다느니 되어 있으니 그만큼 결혼이 험난했다는 거 아닐까 싶다.


태종무열왕 역시 김유신의 누이동생을 부인으로 맞았으나 신라왕족의 혼인관례를 어겼다는 이유로 왕실과 경주토박이 귀족들에게 왕따를 당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저 쉑기가 우리 물을 흐리네?” 진지왕의 손자이며, 진평왕의 외손이었던 태종무열왕이 성골이 아닌 진골 대우를 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분석도 있다.



신라의 골품제와 현대사회의 신분제는 어떻게 닮아있을까? 제일 먼저 그들이 혼인으로 얽혔다는 점을 꼽고 싶다. 필자가 즐겨 보는 <썰전>에서 대한민국의 이너서클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다룬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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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비단 현재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동서고금 어디에서나 발견되는 현상이다. 너무도 쉽다. 혼맥 만큼 가문과 가문을 엮을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 없으니까. 


이렇게 형성된 신라의 이너서클은 신라가 성장하는 데에는 효과적이었지만, 통일국가의 기능을 하는 데에는 효과적이지 못하고 오히려 한계를 만들었다. 상위계급의 벽을 공고히 하며, 엄격한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이는 통제가 불가능한 먼 지역에서부터 반란의 불꽃이 피어오르는 계기가 된다.


넘을 수 없는 사차원 현실의 벽에 부딪혀 인재가 외국으로 유출되기도 했다. 물론 현재 해외로 인재가 유출되는 이유는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자신의 능력에 대한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함에 좌절하여 떠나는 것도 중요한 원인 중 하나다. 진골 밑에서 사실 신라의 가장 중요한 실무직에 종사하며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6두품들은 최치원이 그랬던 것처럼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한 많은 이들은 그대로 당나라에 남았다. 기껏 해외로 유학 보내서 제대로 쓰지도 못한 것이다.


더하여 골품제가 이미 썩을 때로 썩은 떡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을 하지 못한 채 유지되자, 사회적 경제적인 역동성이 사라졌다. ‘개천에서 용 난 자’가 더 이상 없어진 것이다. 김유신처럼 전쟁에서 공을 세워서 인생역전 스토리를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위로부터의 착취가 지속되자 중간계급은 점차 허물어졌고, 하위계급은 하향평준화하여 신분이 섞여버렸다. 이것이 비단 신라 말기의 현상일 것인가?
 

얼마 전 이런 통계가 나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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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의 오류를 지적하는 반론 역시 많이 제기되었지만, 이 통계가 단순한 선동자료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인도보다 나은지 안 나은지는 차치하더라도, 강용석 변호사가 말했듯 개천에서 용 나는 것이 이제 가능하기는 한 것인지 진심으로 묻고 싶다. 아직 불가능하진 않겠지. 로또도 있는데. 그런데 그것이 우리 피부에 닿는가? 희망이란 형태로 남는가? 열심히 일하면 우리는 일한만큼 받을 수 있는 것인가?


여전히 풋내기인 필자는 인생선배들에게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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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및 출처


<신라 골품제의 성립과 운영>, 전미희
<신라 골품제 연구의 동향>, 이종욱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빵꾼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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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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