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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07. 16. 화요일

허남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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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 레인저>에 대한 관객의 반응이 영 신통치 않다. 개봉(7/4) 첫 주 <감시자들>, <월드워Z>에 밀려 3위로 출발했을 뿐 아니라 <퍼시픽 림>이 개봉한 2주 차에는 5위까지 쑥~ 미끄러졌다.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참조)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의 고어 버빈스키 감독과 조니 뎁 콤비가 다시 손을 잡은 블록버스터 영화인 것을 감안하면 의외의 결과다.

 

조니 뎁의 분장 연기가 새롭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점, 아미 해머의 얼굴에 마스크를 씌워 그 잘생긴 얼굴을 감상하기 쉽지 않다는 점, 배경을 서부로 바꾼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 같다는 점 등이 이 영화에 대한 불만의 요지다. 수긍할 만한 불평 들이지만 그럼에도 <론 레인저>는 지금보다 좀 더 주목을 받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가 품은 메시지는 불공평과 불공정이 난무하는 작금에 시사하는 바가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2013년의 수정주의 서부극

 

<론 레인저>는 오리지널 프랜차이즈가 아니다. 이미 1933년 라디오 방송으로 처음 소개된 이래 TV드라마, 애니메이션, 코믹북, 비디오 게임 등으로 출시되며 미국에서 꾸준한 사랑을 받았고 <론 레인저>(1956) <론 레인저와 잃어버린 황금의 도시>(1958) 2편의 장편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이번에 개봉한 <론 레인저>는 라디오로 소개된 이후 80, 영화로는 55년 만에 새롭게 소개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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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열차 강도>

 

<대열차 강도>(1903)로 서부극(western)이 시작된 이래 이 장르는 수정주의 서부극, 스파게티 웨스턴 등의 시기를 거치면서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이번 고어 버빈스키 버전의 <론 레인저>가 이전의 작품 들과 다르다면 서부극에서 늘 악당의 위치이거나 변방으로 밀려나있던 인디언이 전면에 나선다는 사실이다. 그의 이름은 톤토(조니 뎁). 영화는 마지막까지 톤토의 사연을 숨긴 채 신참내기 지방 검사 존(아미 해머)을 총잡이 '론 레인저'로 변화시키는 과정에 집중한다.

 

이 둘의 목표는 하나. 악명 높은 살인마 부치 캐번디쉬(윌리엄 피츠너)를 잡는 일이다. 존에게 부치는 하나뿐인 형의 목숨을 가져간 원수다. 사실 존 또한 부치에게 목숨을 잃었지만 톤토의 주술(?)로 되살아난 배경을 갖고 있다. 존이 부치에게 살해당할 뻔 했던 건 총을 잘 다루지 못해서다. 지방 검사인 존은 부치를 산 채로 잡아 법으로 그 죄를 물으려 하지만 그게 쉽지가 않다. 법으로 죄를 묻기에 이미 썩은 시스템이기 때문에 존의 시도는 매번 실패로 귀결된다. 그런 존에게 총을 들어 론 레인저로 만드는 인물이 바로 톤토인 것이다.

 

톤토와 존, 이 둘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 사이로 보이지만 고어 버빈스키는 각색 과정에서부터 오히려 부자(父子) 관계로 가져간 것 같다. 극 중 한 장면, ()에 둘이 함께 올라탄 와중에 내리쬐는 햇빛을 가리기 위해 톤토가 우산을 들고 있는 모습이 특정 영화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의 <엘 토포>(1970). 총잡이 '엘 토포'(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가 아들(브론티스 조도로프스키)과 함께 사막을 건너는 모습이 <론 레인저>에서 언급한 장면(우산의 미장센까지!)과 똑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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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토포>

 

<엘 토포> 외에도 <론 레인저>에는 수많은 영화가 오마주되고 패러디된다. 서부를 횡단하는 기차를 무대로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아크로바틱한 액션을 펼치는 톤토에게는 버스터 키튼이 출연한 <제너럴>(1926), 열차로 이송되는 사형수 때문에 마을 전체가 사건에 휘말리는 설정은 게리 쿠퍼가 지방 보안관보로 출연한 <하이 눈>(1952), 재물을 손에 넣기 위해 살벌한 총격전을 펼쳐 서부를 피로 물들이는 배경은 세르지오 레오네의 '무법자' 시리즈나 샘 페킨파의 <와일드 번치>(1969)가 겹쳐지는 것이다.

 

이처럼 <론 레인저>가 인용하거나 참조한 목록은 <황야의 결투>(1946) <셰인>(1953)처럼 미국의 역사와 정의를 옹호하는 서부극과는 거리가 멀다. 이런 작품 들을 일러 '수정주의 서부극'이라고 부르는데 <론 레인저>'인디언' 톤토를 내세운 배경에는 인디언을 학살하고 차지한 땅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놓여 있다. <엘 토포>의 인용이 심상찮아 보이는 건 엘 토포가 아들을 데리고 다니며 서부가 끔찍한 살육의 현장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론 레인저>의 톤토(이름도 엘 토포와 비슷하게 들린다!)와 존의 관계도 이들 못지않은 것이다.

 

수정하고 싶은 이야기

 

다만 톤토가 존에게 알려주는 건 서부가 살육의 땅이라는 사실 외에도 그 살육의 이유가 더 많은 이권을 취득하기 위한 소위 백인이라는 지배 계층의 탐욕이라는 불편한 진실, 그리고 서부의 모든 재물을 타()인종에게 뺏기지 않으려는 백인 사회의 불법 커넥션과 시스템이 얼마나 정교한지도 포함한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법으로 어림도 없다는 이유를 들어 톤토는 법에 대해서만큼은 원리원칙주의자인 존을 설득하려 든다.

 

서부극의 등장은 미국의 개척정신을 옹호하기 위한 알리바이로 받아들여졌다. 황무지와 같은 서부를 일궈 거기에 철도를 깔고 기차로 물자를 운송하며 지금의 미국을 가능케 한 일종의 건국 신화로서 말이다. 그런 미국의 장르가 지금까지 사멸하지 않고 여전한 생명력을 과시하는 건 초창기 서부극의 건국 신화가 실은 거짓 역사를 바탕에 깔고 있는 까닭이다. 이를 하나하나 밝히고 비판하는 과정에서 서부극은 수정주의 서부극, 스파게티 웨스턴과 같은 진화한 형태로 장르의 발전을 거듭해왔다.

 

이는 한편으로 인디언의 소유였던 땅을 무력으로 빼앗은 미국의 폭력 신화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론 레인저>만 하더라도 19세기 후반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극 중에서 묘사되는 백인의 인디언 소유물에 대한 약탈 과정은 오히려 현재의 미국을 겨냥한 인상이 강하다. 스포일러를 무릎 쓰고 밝히자면, 상당한 재력을 지닌 자본가 콜(톰 윌킨스)은 국가 재산인양 인디언 땅에 묻힌 은을 갈취하려 든다. 그럴싸한 명분을 들어 개인의 재산을 늘리기 위함인데 이에 반발하는 이들을 제거하려는 목적으로 부치와 같은 살인마를 적극 활용하는 것이다.

 

사회의 지배 계층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이용해 폭력과 손을 잡은 양상(영화 말미에 이르면 콜과 부치가 실은 형제였음이 밝혀진다!), 여기에서 우리가 엿볼 수 있는 현실은 명확하다. 공적 자산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민간기업으로 돌려 국민의 혈세마저 이윤으로 뽑아먹는 신자본주의의 실체다. 게다가 은광을 채굴하겠다며 중국인을 고용한 극 중 설정에서는 값싼 노동력을 찾아 제3세계 국가를 유린하고 인권 침해도 서슴지 않는 거대 자본의 추악한 욕망까지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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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마저 기업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그럼으로써 법 또한 신자본주의의 정의(?)를 위해 복무하는 마당에 합법적인 방법을 통한 개선은 애당초 어불성설일지도 모른다. 존처럼 법으로 해결하겠다는 원칙주의는 너무 나이브한 생각인 것이다. <론 레인저>의 문제의식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이 영화의 실질적인 주인공이 톤토인 이유는 이 때문이다. 톤토는 어린 시절 은이 묻힌 지역에서 살다가 백인들의 침략을 당해 가족과 이웃을 모두 잃은 끔찍한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다. 부치를 겨냥한, 그리고 콜을 향한 복수에의 일념은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한다.

 

그래서 톤토가 존을 설득하기 위해 하는 말은 다음과 같다. "언젠가 선한 사람이 마스크를 써야할 때가 있지." 원래 톤토가 콜 형제를 처단하기 위해 '무법자'로 눈 여겨봤던 인물은 존의 형인 댄(제임스 배지 데일)이었다. 댄은 보안관으로써 이미 부치를 체포해 감옥으로 보냈던 전력이 있으면서 호송기차에서 부치가 탈주하자 존과 다르게 총을 쏘아 검거하는 방식에도 별 거부감이 없던 인물이었다. 다만 댄이 부치에게 목숨을 잃은 후 무법자의 운명은 그의 동생에게로 넘어가게 되니, 톤토를 따라 서부의 현실을 목격하면서 법을 신봉하던 존이 총잡이 론 레인저로 거듭나기에 이르는 것이다.

 

'레인저스'가 필요해

 

그런데 <론 레인저>는 이제는 꼬부랑 할아버지가 된 톤토가 론 레인저와 함께 콜과 부치를 정의의 이름으로 심판했던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더 정확히는, 1933년 어느 놀이공원의 인디언관에 전시되어 있던 톤토가 그를 관람하러 온 어린 아이에게 론 레인저와의 경험담을 들려주는 것이다. 이상한 건 론 레인저와 함께 콜 형제를 향한 복수를 완성했음에도 불구하고 톤토에게서는 전혀 흥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오히려 그의 표정에서는 외로움과 함께 비애의 표정이 묻어난다.

 

왜 그럴까? 단서는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 이후 삽입된 쿠키 영상에서 얻을 수 있다. 아이에게 이야기를 모두 들려준 톤토는 여행 채비를 갖추고 늙은 몸을 이끌며 다시금 사막을 횡단해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이때 톤토를 비추는 카메라의 구도는 존 포드가 연출한 수정주의 서부극의 걸작 <수색자>(1956)의 마지막 장면을 그대로 따른다. 인디언 코만치 족에게 납치당한 조카를 구한 후 에단(존 웨인)이 마을을 떠나는 광경을 뒤에서 포착한 장면인데 톤토의 경우처럼 카메라가 주목하는 건 예의 그 황량한 기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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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색자>

 

<수색자>의 마지막 장면이 의미하는 바는 백인에 의해 쓰인 미국의 가치에 대한 의문부호다. 에단의 뒷모습을 통해 인디언에 맞서 삶의 터전을 일구고 가족을 보호한 미국 서부 개척의 역사가 백인의 시선에서 일방적으로 서술되고 구술된 것이라는 반성이 포함되어 있다. <론 레인저><수색자>의 수정주의적인 메시지를 따르고는 있지만 변화한 시대에 맞춰 반성보다는 대응책 쪽으로 전략을 '수정'했다는 점이 이채롭다. 늙은 톤토에게서 론 레인저와의 경험담을 듣던 아이가 바로 대응책의 정체다.

 

아이가 톤토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는 건 론 레인저 때문이다. 론 레인저의 팬임을 인증하듯 아이는 목에 론 레인저의 마스크를 두르고 있기도 하다. 이에 톤토가 장시간에 걸쳐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았던 건 이 아이가 미래의 론 레인저가 될 재목임을 눈 여겨 보았기 때문일 터다. '백인' 꼬마 아이가 누구도 찾지 않은 인디언관을 방문한 것부터가, 그리고 톤토의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한 것 자체가 백인에 의해 탈골된 미국 역사의 진실을 대할 자세를 갖추고 있다는 반증인 까닭이다.

 

론 레인저 외의 또 다른 론 레인저가 필요하다는 것, 이 영화에서 론 레인저의 활약상이 과거형인 이유는 여전히 미국에는 불법이 판을 치고 있고 1%의 탐욕이 99%를 나락으로 끌어내리고 있는 탓이다. 론 레인저라는 이름처럼 한 명의 정의의 사도(ranger)로는 이 풍비박산 난 정의를 바로 세우기에 외로운(lone), 힘겨운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 <론 레인저>는 역설적으로 론 레인저가 아니라 '레인저스 Rangers'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는 톤토가 그 힘겨운 노구(老軀)를 이끌고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미국의 전역을 헤매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금 미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론 레인저>는 미국에서 기록적인 참패를 기록했다. 25천만 달러의 제작비를 들이고도 73일 개봉 일부터 712일까지 단 10일 동안 수익이 6,330만 달러에 그치고 말았다. 서부극은 미국의 장르이지만 언제부턴가 미국인들은 정작 외면하는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요 몇 년 동안 <믹의 지름길>(2010),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 <3:10 투 유마>(이상 2007) 등 뛰어난 작품성의 서부극이 등장했음에도 불구, 흥행에서는 별 재미를 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해할 만도 하다. 미국인의 입장에서 추악한 자신 들의 역사를 들춰내는 서부극이 그리 고와 보일리가 없다. 하물며 할리우드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제작사라고 할 만한 디즈니가 <론 레인저> 프로젝트에 대해 제작 전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던 것도 그리 새삼스러운 일만은 아닌 것이다. 다만 이것이 미국만의 경우라고 할 수 있을까. <론 레인저>가 보여주는 신자본주의의 실체는 지금 우리 한국에서도 목격되는 또한 목하 진행 중인 현상이기도 하다. 미국만의 사례가 아니라는 것이다. 국내에서의 <론 레인저>의 흥행 실패가 글 서두에서 언급한 문제 들 때문이라지만 실은 우리 또한 자유롭지 못한 신자본주의의 굴레를 애써 외면하고자 작용한 무의식의 결과는 아닐까. <론 레인저>가 이렇게 극장에서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이 아쉽기만 해 뒤늦게나마 이 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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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웅(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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