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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07. 18. 목요일

군사부장 펜더 





 

 





일안 이족 삼담 사력(一眼 二足 三膽 四力)



처음부터 징조가 이상했다. 장마철의 습기를 한껏 배어 문 꿉꿉한 날씨, 숨만 쉬어도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리는 검도관 안에 하나 둘 관원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한 명, 두 명, 세 명... 급기야 열 세 명이 넘어갔다. 일주일에 3번 나오면 많이 나온다는 평가를 받는 곳에서 성인 관원의 반 이상이 모인 것이다. 징조가 이상했다. 한 바퀴 검이 돌고, 이 불안한(?) 징조는 현실로 구현 됐다. 대련 중에 미친관장과 서 사범이 맞닥뜨린 것이다. 검도관 안을 가득 채운 습기와 열기를 다 날려버릴 기세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팽팽한 신경전이 손에 잡힐 듯 검도관 안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어느새 하나 둘 검을 거두고, 벽으로 붙었다.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다들 물러선 것이다.

 

여기는 우리가 낄 자리가 아냐.”


이런 대결은 봐줘야 해.”


여기서 얼쩡거리는 건 실례야. 자리를 비켜줘야 해.”

 

이런 생각들이 뭉치고 뭉쳐 관원들을 밀어냈다. 모세의 기적이라고 해야 할까? 어느새 대련장에는 미친관장과 서사범만이 남아 있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검도관 안을 휘감고 있었다. 관장도 4단이었고, 서사범도 4단이었다. 검력은 비슷비슷하겠지만, 관장은 관장이다. 운동량부터가 달랐다. 서사범이 아마추어라면, 관장은 프로다. 일주일이면 6일을 검을 잡는 게 관장이다(일요일은 모르겠다). 서사범은 일주일에 3일 나오면 많이 나오는 것이다(다들 생업이 있지 않은가?) 이날 컨디션도 문제다. 관장은 하루 종일 관원들과 수련을 했기에 이날의 날씨에 적응이 돼 있어 보였다. 서 사범은 이미 몇 번의 연격과 공격훈련, 대련으로 체력이 빠진 상태였다(우리가 느끼기엔 말이다. 하긴 미친관장도 하루종일 검을 들었으니까 비슷한 상태일 것이다).

 

대련.jpg


대련장 한 가운데 마주서서 얼마간 서로를 노려보던 두 명. 들리는 건 돌아가는 선풍기 팬 소리와 에어컨의 바람소리뿐이었다(내가 에어컨 뒤에 딱 자리하고 있어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고요 그 자체. 슬금슬금 앞으로 밀고 들어가는 서 사범! 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관장은 묵묵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서 사범이 산처럼 보였는데, 이제는 언덕처럼 느껴졌다. 언덕이라는 단어가 뇌에서 채 사라지기 전에 서 사범의 검이 움직였다. 정확히 머리를 노린 것이다. 관장은 이를 상격으로 막고, 바로 퇴격으로 들어갔다. 불꽃이 튀었다. 공격, 상격, 퇴격 그 퇴격을 다시 퇴격으로 맞받는 서 사범도 대단했다. 태풍의 눈과 같았던 고요, 뒤이은 태풍, 다시 고요... 수면 아래로 침잠한 악어와 같은 눈빛. 호면 사이로 보이는 서 사범의 눈빛은 악어와 같았다. 눈만 번뜩이며, 그 이빨을 감춘 악어였다. 늪으로 한 발짝만 들어오면, 물고 늘어지겠다는 결의였다. 그러나 미친관장은 늪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검을 비비고, 툭툭 건드려 봐도 미친관장은 요지부동이었다. 인내력의 한계인가? 체력의 한계인가? 아니면, 우리가 내뿜는 열기와 습하고 눅눅한 장마철의 공기 때문일까? 서 사범의 검이 다시 움직였다. 검을 비비다 말고, 바로 손목머리! 손목은 흘리고, 머리는 피했다! 관장은 능숙하게 서 사범을 돌려세우더니 퇴격 머리가 날아갔다.

 

"끼야야야!"

 

두 번의 괴성, 아니 단말마였다! 두 사내가 내뿜는 투기(鬪技)는 정직했고, 정직했던 만큼 승패는 명징했다. 미친관장의 승리였다. 그 다음은 일방적이었다. 한 번 꺾인 서 사범은 승기를 되찾을 수 없었다.

 

관장과의 대결 후 검을 거둔 서 사범. 서 사범이 물러서더니 호면을 벗었다. 처음이었다. 연습 중에 호면을 벗다니... 서 사범의 어깨가 들썩였다. 뒤이어 물을 찾았다. 나와 마주한 서 사범은 쑥스러운 듯, 씁쓸한 미소를 내비쳤다.

 


1. 관전평... 그리고 체력

 

...관원들의 관전평은 서 사범의 패배보다, 미친관장의 체력에 방점이 찍혀있었다.

 

관장님도 보약 드시겠지?”


보약 안 먹으면, 저런 체력 유지하기 힘들겠죠.”


운동하는 사람이라면, 보약 당연히 먹어야죠.”


, 형님들... 제가 저번에 들었는데, 관장님은 문어 드신데요.”


문어?”


문어 숙횐가? 여름에 그거 한 마리 먹으면, 체력 보충된다는데요?”


“...나도 한 마리 먹어볼까?”

 

이제 체력을 말하고, 보약을 논할 나이가 된 검도관 검우들... 그들의 욕심은 체력이었다. 일상생활에서의 체력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사람들이다(나조차도 산을 탈 때 확실히 느꼈다. 체력이 붙었다). 문제는 검을 잡았을 때의 체력이다. 미친관장의 검력이, 체력이, 기술이 부러웠다. 그 중 가장 부러웠던 건 체력이었다. 40년 이상 살아온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결론이 있다면,

 

체력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다. 기술? 집중력? 기본이 되는 건 체력이다.”

 

라는 평범하지만 절대적인 진리에 도달하게 된다. 효인이가 결론을 내렸다.

 

빠른머리 1천 개씩 치면, 체력 붙는데요? 저 아침에 출근하면 5백 개씩 쳐요.”


형님도 수련 끝나면 저랑 같이 치죠? 저도 4, 5백 개 정도는 치고 끝내는데?”

 

...몰랐다. 효인이도 승진이도 몰래(?) 체력훈련을 하고 있었다. 나도 수련 전에 100개에서 200개 정도는 치고 시작하는데, 이것들은 에너자이저였다(그날 250개 치고 나니 체력이 다 빠졌다. 수련 전에 치는 거랑, 수련 후에 치는 건 차원이 달랐다).

 

20대 체력의 승진이가 진지하게 말한다.

 

, 하루 1천개 치면 살 빠져요. 우리 같이 쳐요.”


“...미친놈

 

미친놈.jpg


미친관장이 관원들도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효인이는 이미 하루 1천 개 가까이 치고 있고, 승진이는 수련 끝나고 컨디션에 따라 4, 5백씩 친다. 안 치는 날은? 남아서 따로 대련을 할 때 뿐이다. 고명관이 점점 북산고로 변하는 느낌이었다.

 


2. 일안 이족 삼담 사력(一眼 二足 三膽 四力)

 

서 사범의 '맞춤지도'가 시작됐다(수련 전에 한 마디씩 툭툭 던진다). 서 사범뿐만 아니었다. 박선배도, 나선배도, 지나가면서 한 마디씩 툭툭 던지기 시작했다. 그 한 마디 속에 스며든 의미는,

 

이제 1년 넘게 검잡았는데, 틀은 잡아야 하지 않겠냐?”

 

라는 질책의 의미가 포함돼 있었다. 문법적으로는 무난했지만, 어감에서 느껴지는 토씨들이 날 괴롭혔다. 그 토씨들이 모여서 나온 답은 '발'이었다.

 

너무 급해요.”


몸이 나가고, 팔이 나가야 해요. 팔 먼저 나가니까 몸 균형이 흐트러지는 거예요.”


발꿈치 너무 들었어요! 그러다가 아킬레스 건 나가요!”

 

발이다. 검도는 팔로 하는 운동이라고 생각하는데, 검력 1년차의 내가 귀동냥으로 내린 검도의 결론은 '발'이었다(검력 1년차의 자의적인 판단이다! 오해 없으시길...). 수련할 때의 내 발은 굼떴고, 대련할 때의 내 발은 조급했다. 아니, 어디로 갈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뒤로 빼거나, 주춤거리거나 옆으로 도망가기 일쑤였다. 가끔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검을 비비거나 툭툭 건드려 보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몸을 날렸을 때 돌아오는 건 여지없는 둔탁한 충격음. 뒤이은 머리의 울림 혹은 손목의 시큰거림이었다.


대련2.jpg

 

호구를 처음 받아들 때 미친 관장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관장은 호구를 쓰면서부터 진짜 검도인생이 시작된다고 생각했는지, 호구 착용법을 가르쳐 주면서 약간멋진 말을 해줬다. 생각해 보니 약간이 아니라 멋진 말이었고, 이 말은 내가 강연을 나갈 때 자주 써먹곤 한다. 이 말을 들은 걸로 한 달 수강료는 건진 거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닌가? 두 달 수강료인가?)

 

성주씨 검도를 말할 때 이런 말이 있어요. 일안 이족 삼담 사력(一眼 二足 三膽 四力) 이라고 하는데, 처음엔 눈으로 보는 거죠. 상대방을 잘 살펴봐야 해요. 상대가 어떤 버릇이 있는지, 어떤 움직임을 보이는지 확인을 해야 해요. 그 다음이 다리! 눈으로 봤으니, 이제 부지런히 움직여서 허점을 파고 들어야죠. 그 다음이 담! 결심을 했으면, 온 몸의 용기를 다 끌어내 부딪히는 겁니다. 마지막이 힘입니다. 온 몸의 힘을 다 모아 승부를 보는 겁니다. 그게 검도고 인생입니다.


“......”

 

갑끈을 메주는 관장의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어미새가 자식을 둥지 밖으로 내보내기 전 깃털을 골라주는 손길이 그러할까? 1년 넘게 미친관장을 만나면서 가장 부드러운 얼굴을 마주한 순간이었다(호면을 쓰고 바라봐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호구를 처음 받아든 날. 난 좀 체 잠에 들 수가 없었다. 호구를 받아든 설렘? 아니면, 본격적으로 시작 된 내 검도인생에 대한 두려움? 아니었다. 미친관장이 말한 “...그게 검도고 인생입니다.”란 말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38년의 내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난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고, 마주한 적이 있었던가?”

난 내 일을 성취하기 위해 부지런히 발을 놀린 적이 있었던가?”

난 용기를 내, 내 인생에 승부수를 던진 적이 있었던가?”

내 안의 모든 힘을 쥐어짜내 싸워본 적이 있었던가?”


포효.JPG 

모든 힘을 쥐어짜낸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장면


나는 이때까지 세상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게 두려워 회피했고, 내 성취를 위해 부지런히 발을 놀린 기억도 거의 없었다. 최선을 다하겠다고 상대방에게 혹은 내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지만, 내가 온 몸을 내 던진 기억도 거의 없었다. 당연히 내 모든 힘을 쥐어짜내 싸워 본 적도 없었다. 그걸 서른 여덟에 알게 됐다.

 

인생 다 그런 거 아냐?”


내게 아닌 건 탐하지도 말고, 부러워하지도 말고, 갖으려고 애쓰지 마라. 그러다 다친다.”


내일 모레 마흔이다. 이제 더 벌려고 하지 말고, 가지고 있는 거 잃지 않도록 조심조심 아껴 쓰고, 몸 사릴 나이야.”

 

선배들의 말 위로 미친관장의 말이 오버랩 됐다. 서른 중반에 내가 그때까지 일궈 온 모든 성취가 날아갔다. 얼마간의 방황(꽤 길었다)이 있었고, 그 기간 동안(아니, 지금도) 난 현실을 외면하려 애썼다. 두 눈 부릅뜨고 세상을 노려봐야 하는데, 세상과의 눈싸움이 두려웠다. ? 눈도 제대로 못 맞추는데, 발을 움직일 틈이 있을까? ()과 력()은 생각도 못했다.

 

그 사이 난 매일매일 작은 인생과 겨루기 시작했다.

 

상대의 죽도를 보고, 기합을 지르고, 부지런히 발을 움직였다. 첫 대련의 두려움. 몸받음의 충격, 호면을 울리는 둔탁한 충격에 익숙해지면서, 상대의 죽도에 떨어지던 시선이 호면으로 모아졌다(모으려고 노력한다!). 상대의 눈을 보려고 애쓰기 시작했다. 찰나의 머뭇거림이 둔탁한 충격음으로 이어지는 걸 반복하면서, 몸으로 깨달은 한 가지가 있었다.

 

똑바로 바라보는 것만으로 날아오는 칼의 반은 볼 수 있다.”

 

비담.jpg


건방진 소리지만... 그 동안 날아오는 위협에 급급해 눈앞의 죽도에만 시선이 고정돼 있었다(지금도 몰리면, 시선이 죽도로 떨어진다). 그러나 본질은 눈앞의 위협(죽도)이 아니라, 죽도를 쥐고 있는 사람이었다. 눈앞만 보니 시야가 흐려진 것이다. 본질은 죽도 너머에 있는 상대였다. 그 상대가 쥐고 있는 게 죽도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됐다.

 

서른아홉. 일안(一眼)의 의미를 어슴푸레 알게 됐다(내가 생각한 게 맞는 건지 확신할 순 없다. 검력 1년차의 개칼이니 말이다).

 

...이제 발을 뗄 차례이다.

 

검도도 내 인생도 발을 움직일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군사부장 펜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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