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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7. 19.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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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허무맹랑한' 이야기, 환상문학의 한 꼭지를 들고 돌아왔다.


모름지기 인류의 꼰대들은 새롭게 등장한 장르를 폄하하는 데에 앞장섰다. 새로운 컨텐츠 장르 형식은 새로운 인식 체계를 불러오고, 새로운 인식 체계는 세계를 해석하는 방법에도 영향을 끼치므로, 기존의 방법에 익숙해 있는 꼰대들이 무의식적으로라도 이런 것을 폄하하게 되는 것은 이해가 간다. 최초에는 영화와 TV도 그랬고, 만화와 게임은 아직도 애들 놀이로 격하된다. 이런 측면에서 무협소설 같은 장르는 역사도 깊으니 억울하기도 하겠지만 그보다 더욱 폄하가 억울한 문학 장르가 있다. 판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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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의 역사는 유구하다. 협의의 장르, 그러니까 '판타지 소설'이라고 우리가 지칭하는 장르인 경우에도 에드거 앨런 포우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판타지가 근간으로 삼고 있는 요소인 '환상성'을 토대로 영역을 넓히면 대부분의 아동문학 그러니까 동화도 여기에 속하게 된다. 삼국지, 수호전과 같은 군담소설을 시조로 삼는 무협소설과 비슷하다. 역사가 유구하여 깊이가 있는데 그걸 세상은 제대로 알아주지 않으니 억울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무협소설을 폄하하는 '무협지'라는 단어가 대중화 됐듯, 한국 사회에서의 '판타지 소설' 역시 같은 폄하의 의미가 담겨 있다. 그리고 이 폄하의 프로세스는 거의 동일하다.


무협소설이 무협지로 전락한 주된 요인은 80년대 대본소였다. 회전율이 빠른 영업장에서 소모재로 소비되는 장르가 되다 보니, 작가들은 창작보다 생산을 해야 했고, 포뮬라에 의한 공장형 생산 체제가 들어서, 결과적으로 질이 끝없이 하락해 버렸다. 90년대 신무협의 등장은 이런 질적 저하에 대항하는 움직임이었다.


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이 되어 도서대여점은 결국 과거의 대본소와 같은 공간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10년 전에는 컨텐츠를 공급해주던 무협소설이 시장 몰락 이후 공장 체제로 되돌아가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신무협의 질적 향상을 주도했던 작가들이 공장 체제에 편입되기를 거부하고 인터넷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이 자리를 채운 것이 판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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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통신이라고 불리웠던 BBS의 게시판은 한국의 하위 장르 대부분이 거쳐간 산실이다. 한국 힙합의 창작자와 비평자 1세대의 대부분은 BBS 출신이고, 당시의 한국 무협 작가들도 BBS로 창작 공간을 옮겨간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한국의 판타지는 아예 BBS에서 태어났다. 최초로 판타지 소설을 출간한 김근우와 최초의 스타덤을 탄 이영도 모두 BBS 게시판에서 자신의 소설을 연재했다. 김근우와 이영도로 대표되는 스타 작가들이 종이책 시장으로 진출해 큰 수익을 올리자, 이들의 워너비가 대량 출현했다. BBS의 게시판은 인터넷에 비해 폐쇄적이지만 어쨌든 게시판의 형태는 열린 공간이다.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이 창작을 시작했고, 당연하지만 상당수가 문학의 기본 틀조차 갖지 못한 수준이었다. 로맨스 장르에서 귀여니가 등장한 것을 떠올리면 된다. BBS 창작 게시판들은 소수의 작가와 다수의 귀여니가 서식하는 형태로 정립되어 갔다.


게시판 작품들의 평균이 어느 정도였느냐를 설명해주는 일화가 있다. 귀여니의 [늑대의 유혹]을 출판했던 출판사 황매의 경우, 다른 BBS/인터넷 기반의 귀여니류 소설을 출판해보려고 찾아봤으나 귀여니가 그중에서는 최고 퀄리티여서 결국 포기했다고 한다. 이모티콘을 남발하여 묘사력 부족을 드러내고, 매번 같은 신데렐라 포뮬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등장인물의 성씨가 바뀌는 등 탈고도 하지 않은 수준의 귀여니가, 매우 높은 수준이었던 것이다. 황매 출판사는 귀여니를 통해 회사가 성장했지만 귀여니의 대학 입학 후 작품은 계약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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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자본이 등장한다. 대여점이 대본소화 되면서, 공급해야 할 컨텐츠를 찾고 있던 출판사가 판타지에 눈을 돌린다. 초기에는 좋은 작가의 좋은 작품을 출판해냈으나 90년대 신무협처럼 질 좋은 작품은 수두룩하게 널려있지 않았다. 자연히 저급의 소설을 출간하기 시작했고, 이내 공장화 되었다. 무협 대신 등장한 판타지는 그대로 80년대 무협과 같은 역사를 걸었다. 판에 박은 포뮬라의 출현 - 시장 전체의 질적 저하 - 공장형 생산 체제 도입 - 펄프픽션의 범람으로 이어지는 프로세스는, '역사는 반복 된다'는 격언 그대로다. 더 안 좋았던 건, 이렇게 판타지 생산으로 성장한 출판사가 곧바로 무협 또한 시장으로 다시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역사는 반복 됐다. 90년대 신무협을 이끌며 무협 소설의 질적 향상과 장르 독립을 꾀했던 작가들이 시장에서 탈출하여 별도의 리그를 만들려 했던 것처럼, 판타지 작가들 또한 비슷한 길을 걸었다. 다른 점은 무협의 역사와 달리 판타지는 좋은 작가를 지속적으로 잃어왔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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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의 체중감량?


판타지 장르는 소설만이 아니라 만화, 영화, 게임 등에도 걸쳐져 있다. 판타지 요소에 익숙한 창작 능력자라면 다른 분야로도 건너갈 수 있다. 이상균과 같은 사람이 그 예다. 물론 아예 영영 사라져버린 작가들도 있다. [용의 신전]을 썼던 김예리가 그 예다. 판타지는 무협의 역사를 반복했으나, 질적 측면에선 무협과 달리 완벽하게 박살나버렸다.


소설가 조해일이 좌백의 작품 [혈기린외전] 서문에 쓴 추천사 중에서는 이런 대목이 있다. "새로운 이야기의 힘이 성장하고 있다. 어디서? 내가 확인한 바로는 판타지와 무협에서, 특히 무협에서 그렇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판타지에서는 뛰어난 성취를 보여준 한 사람의 작가밖에 발견하지 못한 대신 무협에서는 이미 높은 성취를 이룬 여러 사람의 작가들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 명밖에 찾지 못했다는 것은 조해일의 오류지만, 좋은 작가들은 사라졌거나 활동이 뜸하고 시장을 지배한 건 귀여니 이하라는 현실은 현재의 한국 판타지의 정확한 상황이다. 바야흐로 한국의 판타지 소설은 불쏘시개 취급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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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여점에 잔뜩 꽂힌 요즘 판타지를 훑다 보면 보이는 환각이다.


결국 한국 판타지가 살아남을 방법은 그 본질을 되살리는 것뿐이다. 판타지의 본질은 결국 '환상성'이다. 환상문학 장르 중에서 판타지는 환상을 가장 극한으로 추구한다.


복거일은 [세계환상소설사전]에서 환상소설의 학술적 기준, 그러니까 서구의 기준을 서술하면서 '높은 환상소설(High Fantasy)'이라는 용어를 쓴다. "높은 환상소설은 이 세상과 관련이 없는 다른 세상을, 이른바 '이차 세계secondary world'를 무대로 삼는다. '이차 세계'는 ... 존 로널드 루얼 톨킨이 1939년에 쓰기 시작한 요어로, 이 세상의 실재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일관된 논리에 따라 존재하는 세상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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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높은 환상소설'을 비평 용어로는 '장르 판타지'라 부른다. '장르 판타지'가 바로 우리가 흔히 접하는 '판타지 소설'이다. 그리고 중요한 개념, '이차 세계'가 나온다. 판타지를, 이영도 표현으로 팬터지를 다른 환상소설 장르와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은 톨킨의 이차 세계 개념이다.


톨킨이 절대반지의 이야기를 진행시킨 시공간은 우리 현실 세계가 아니다. 비록 톨킨은 '이건 내가 발견한 초고대 역사서를 번역한 것'이라는 움베르토 에코 놀이를 했지만, 어쨌든 중간계는 실재하지 않고 실재한 적도 없다. 드라마 [왕좌의 게임]과 그 원작인 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에 등장하는 웨스테로스의 칠왕국도 마찬가지다. 이런 세계는 순수히 작가의 창작에 의존해 만들어진다.


물론 작가가 모든 것을 무에서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톨킨이 요정과 난쟁이, 그러니까 엘프와 드워프를 창조하면서 사용한 요소는 북유럽의 전설과 신화였다. 요정(fairy)의 다른 이름인 엘프를 가져오고 북유럽 신화에서 신들에게 각종 무기와 도구를 만들어주는 드워프의 설정을 가져와, 자신의 엘프와 드워프를 만들었다. 톨킨이 사루만과 간달프를 통해 보여준 마법사 상과 롤링의 해리 포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마법사 상은 유럽 사회의 전설과 민담에 등장하는, 고깔 모자에 망토나 로브를 두른 늙은 현자의 이미지의 변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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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판타지가 자신의 성립 필요 조건인 환상성을 채우는 방식은, 역사 속에 존재하는 오래 된 환상적 요소를 끌어다 부활시키는 방식이다. 특히 근대 장르인 소설에서의 판타지는, 전근대, 특히 고대와 중세에 출현했던 환상 요소를 근대의 방식으로 재활용 및 재창조하는 작업이다. 무협소설이 협객 이야기를 사용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이다. 때문에 서양의 무협은 판타지요 동양의 판타지는 무협이라는 말도 존재한다.


반면 중국의 무협과 달리 유럽의 판타지에는 역사성이 흔적만 남아있다. 웨스테로스의 칠왕국은 중세 유럽 같아 보이고, 분명 중세 유럽에서 상당 부분을 차용해왔겠지만, 어쨌든 중세 유럽의 역사는 아니다. 톨킨은 성경의 플롯을 바탕으로 [반지의 제왕]을 썼지만, 성경의 이야기와 동일하지는 않다. 한국의 유민수는 유럽의 중세사와 르네상스사를 이용해 [불멸의 기사]라는 훌륭한 작품을 남겼지만, 역사의 차용이 판타지가 가질 수 있는 역사성의 극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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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수의 [불멸의 기사]는 자신의 이차 세계 역사 설정에

유럽의 중세/르네상스 역사를 차용해 가져오면서 상당한 성과를 이루었다.

출판본은 이미 절판되었지만, 창원시의 의창도서관에서 e북의 형태로 서비스된다.

창원시 문화도서관사업소에 가입한 후 의창도서관 전자책도서관에서 검색하면 읽을 수 있다.

이 작품 후 유민수의 활동은 사실상 끊겼다.


판타지의 역사성은 또한 유럽 세계의 환상 요소를 주로 활용하는 것으로도 표현된다. 서양의 무협인 판타지는 서양 중세의 이차 세계를 선호하는데, 이건 톨킨의 영향도 있지만 톨킨을 비롯한 초기 판타지 작가들이 사용한 환상 요소가 유럽의 고대/중세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판타지에서 주된 이야기를 끌어가는 행위는 '미지에의 모험'인데, 이건 자연이 아직 공포와 도전의 대상이던 고대/중세 시절의 인식이 소재들을 타고 넘어왔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판타지에 대한 고정관념이 형성 됐다. 서유럽 중세풍의 세계에서 검과 마법이 등장하는 모험소설. 하지만 판타지라는 장르의 본질은 인류 문명에서 퍼올린 환상성일 뿐이며, 그렇기에 더 넓은 확장성이 있다.


우리는 학교에서 소설에 관해 배우면서 개연성이라는 개념을 배운 적 있다. 이야기의 전개가 그럴 듯해야 한다는 개념이다. 개연성은 단순히 논리적인 전개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비논리적인 연결이라 하더라고 그것이 독자에게 설득력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다. 근대 소설은 합리성이라는 철학 명제를 바탕으로 건설되었고, 그래서 판타지 소설 역시 소설이기에 개연성을 놓칠 수 없다. 그렇다면 '별로인 소설은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역명제가 성립한다. 아니나 다를까, 귀여니류의 소설은 개연성을 적극적으로 신나게 말아먹는다.


판타지의 대부인 톨킨은 또한 이런 말을 했다. "판타지는 현실의 극한적 왜곡이다." 톨킨 경의 이 말은 환상성이 결국 현실의 반영이며, 왜곡을 통한 상징으로 기능한다는 의미다. 작가가 싫건 좋건, 판타지의 환상 요소를 만들기 위해 사용한 현실의 대상은, 그 속성을 환상 요소에 넘겨주게 마련이다. 자연히 판타지 소설은 현실에서 온 변용과 상징과 알레고리로 채워진다. 작가들은 이걸 이용해 판타지의 이야기가 결국 현실 세계를 향하게 만든다. 성경의 플롯에서 출발해 당시 2차 대전 상황의 파시즘 발호를 떠오르게 한 [반지의 제왕], 정교하게 만들어진 중세풍 이차 세계의 정치 경쟁을 통해 현실 세계의 정치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는 [얼음과 불의 노래], 단순한 모험물의 이야기에 심어놓은 상징적 인물과 사건을 통해 인간 문명의 비평으로 나아간 [드래곤 라자]는 아주 좋은 예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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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바닥의 짱짱맨은 나님이심.


톨킨이 갈파한 두 가지 요소, 현실 요소를 이용한 이차 세계의 창조 / 환상 요소의 조직을 통한 상징으로서의 기능은 판타지 소설의 특징이며 장점이며 기능이다. 이차 세계와 상징성 덕분에 판타지를 쓰는 작가는 상상력에 있어 다른 장르에 비해 좀 더 넓은 자유도와 권력을 경험한다. 그만큼 작가의 역량은 더욱 중요하다. 작중 세계의 모든 것을 꼼꼼히 설정하고 배치하고 진행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작품 하나에 들여야 하는 노력 때문에, 판타지는 장편의 비율이 월등히 높기도 하다.)


그리고 한국 판타지는 점차 이런 역량을 지닌 작가가 사라짐에 따라, 몰락해가고 있다.


온라인의 열린 공간에서 태동해 성장한 한국 판타지는 이제 거의 재기가 힘들 정도로 시장에 의해 오염되었다. 2세대의 인터넷 정착은 역으로 공장 체제를 불러왔고, 대여점의 대본소화는 공장 체제를 고착화시켰다. 그리고 2세대 작가군은 피어보기도 전에 전멸 한 것이나 다름 없었고, 1세대 작가군 또한 사라지거나 활동이 뜸해지거나 다른 장르로 건너갔다. 이미 공장 체제 바깥의 판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거울과 같은 소수의 웹진과 황금가지와 같이 특화된 출판사만이 장르 판타지를 다룬다. 그나마 이런 곳들도 장르 판타지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다른 환상 소설을 함께 다룬다. 판타지의 작가 풀(pool)이 그만큼 형편없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무협과 대비되는 상황이다.


1세대 작가군 출현 이후 2세대가 거의 전멸하다시피 한 판타지 장르이기 때문에, 결국 읽을 만한 한국 판타지는 1세대에 몰려 있게 된다. 어디 가서 독서력 좀 있다는 사람들은 최근 출간된 판타지를 추천하지 않으려 한다. 좋은 작품은 가뭄에 콩 나는 것보다 적으며 대다수가 펄프픽션이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나의 추천작과 추천작가도, 앞서 살짝 소개한 유민수의 [불멸의 기사] 또한 1세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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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도

추천작 : [폴라리스 랩소디], [눈물을 마시는 새]


원래 추천작가 목록에서 이 사람은 빼뒀다. 추천 이전에, 한국 판타지 소설을 혼자 견인해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PC통신 BBS에서 연재된 판타지 소설이 최초로 출간된 사례는 김근우의 [바람의 마도사]지만, 그 후 출간된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는 장르를 견인하고 이영도를 스타덤에 올려놓았다. 서태지와 동년배인데 자기 영역에서 서태지와 동일한 역할을 했다. 일신의 역량만으로 장르를 띄우고, 자신의 워너비가 된 군단 병력 수준의 아류 작가들을 끌고 다니고.


[드래곤 라자]에서부터 보여주는 그의 일관된 주제는, 인간 문명 내지는 인간 종족 자체에 대한 비평이다. 판타지가 상징의 장르라는 것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어 작중의 모든 요소가 반드시 무언가의 상징이나 알레고리로 작용하도록 조직하고, 조직된 상징이 만드는 맥락은 반드시 현실 세계의 인간을 향한다. 문장력은 수준급이지만 이따금 과도한 번역체가 튀어나오는 것은 문제. 이영도의 기량과 스타일이 완벽에 가까웠던 작품은 [폴라리스 랩소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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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당시부터 이미 인기 폭풍이어서 출판사 황금가지는 단권 편집된 양장본을 한정 발매했다.

나도 당연히 저걸 샀다. 하지만 누군가가 훔쳐갔다.

124번 양장본은 장물이다. 보유하고 있는 분은 연락 바란다. 간을 빼서라도 되사겠다.


'관념의 물화(物化)'라고 불리는 작중 요소의 상징화, 상징이 된 작중 요소를 전자 기계 조립하듯이 정교하게 조직하는 편집증 등 이영도의 특색은 [폴라리스 랩소디]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 작품에 대한 소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 해적을 소재로 한 해양 소설의 요소에, 전쟁이 등장하는 군사 소설의 요소에, 초자연적 상징이 등장하는 괴기 소설의 기법도 쓰였다. 그리고 모든 요소가 밀접한 상호 연관을 짓고 있으니, 요약 자체가 스포일러가 된다. 오늘의 최고 추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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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의 대성공 이후, 이영도는 유럽 위주의 분위기에서 탈피하며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아시아의 환상 요소를 사용한다. 후속작인 [피를 마시는 새]까지 하여 두 편의 장편을 통해 이영도는 톨킨의 업적에 도전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 정도로 '새 연작'에서 창조된 세계, 아라짓 제국의 완성도와 매력은 상당했다. 이 작품에는 지성을 가진 종족이 넷 등장한다. 인간, 도깨비, 레콘, 나가. 이영도는 전혀 다른 생리의 네 종족을 상상하고, 다른 생리와 성향에 의해 형태가 완전히 다른 네 가지 문명 사회를 만들어냈다. 이 각 종족의 재미난 특성을 죽 써내려가다... 지웠다. 너무 길어진다. 놀라운 수준의 상상의 유희를 볼 수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단어에 달아둔 링크를 참조하면 된다.


현재 이영도는 SF 단편 외에는 사실상 집필 활동을 보이지 않고 있으며, 출판사 담당 편집자의 트위터 내용으로 보면 [폴라리스 랩소디] 이후 이어진 자신의 스타일 수준을 뛰어넘기 위해 노력 중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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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균

추천작 : [하얀 로냐프강]


소설가 겸 게임기획자이며, 직접 본 적이 있는 내 의견에 따르면 본지의 물뚝심송 님과 다소 비슷한 외모다. 고등학교와 군대 시절 구상한 이야기를 [하얀 로냐프강]으로 써내고, 이후 추가 작업을 몇 년에 걸쳐 해내 연재본으로는 총 3부, 출간본으로는 총 2부에 해당하는 장편을 완성해냈다. 그리고 그 완성도는 수준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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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에 와서야 최종 완결이 된 [하얀 로냐프강]


[하얀 로냐프강]의 특징은 다양한 장르와의 혼합이다. 마법은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중점은 '강하고 긍지 높은 기사'와 '기사가 지휘하는 군대'와 '기사와 여인들의 사랑'이다. 따라서 로맨스 소설과 군사 소설이라는 특이한 조합이 녹아들어 있는데다가, 근대적 소설인 노블Novel 이전 단계인 중세 소설 로망스Romance에서나 자주 다루던 기사도 문학의 색채가 짙다. 그만큼 낭만적이고 그 낭만성에 주된 목적이 있다. 이영도와 같이 무거운 주제 의식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게 장점으로 작용하는 적절한 수준을 유지해냈다. 때문에 여성들에게 특히 추천한다.


사소한 작가적 유희도 있긴 한데, '칼'을 '하야덴'이라도 바꿔 지칭하는 등 작중 세계만의 유니크한 단어가 있다. 이 점은 좀 넘어서야 한다.


한국 판타지에서 독보적인 낭만성을 이룩한 이상균에게 아쉬운 것은 소설가로서의 활동이 전무했다는 데에 있다. 이상균은 데뷔작 [하얀 로냐프강]의 기나긴 완성 작업이 끝난 후에는 간간이 단편 활동만 하며, 게임 제작에서 더 많은 활동을 했다. 그의 서사 창작 능력이 잘 발휘된 게임 중에는 [마비노기 영웅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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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영

추천작 :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 (재간본 제목 [팔란티어: 게임중독 살인사건])


김민영의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은 아는 사람만 아는, 저주 받은 걸작이다. 일단 이 소설이 출간되던 당시가 대여점의 성격이 대본소로 변화하던 시기인데다, 작품명이 난해하고 내용이 판타지보다는 스릴러에 가까웠던 게 주된 요인이었다. 작가 김민영이 이후 작품활동을 일절 하지 않고 본업인 의료와 컨설팅으로 가버린 것도 큰 이유다. 이후 출판사 황금가지에서 [팔란티어: 게임중독 살인사건]이라는 제목으로 재발간했는데, 이때는 스릴러 소설로 분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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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구하기 힘든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 원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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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구매 가능한 [팔란티어: 게임중독 살인사건] 판본


정확한 의미의 판타지 소설은 아니니 스릴러로 분류한 것이 옳을 수도 있다. 판타지 이차 세계를 작중에 등장하는 가상현실 게임의 내부에 위치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액자소설의 구조를 하고 있으며, 작중 현실 세계에서의 이야기와 게임 세계에서의 이야기가 병치되어 진행된다. 어찌 보면 현재 범람하는 공장 생산형 판타지 소설 중 게임판타지라는 하위 장르의 하나로 볼 수도 있겠지만, 계보상으로는 거기서 벗어나있다. 또한 중점 사건이 살인 사건과 그 수사/해결로 진행되기 때문에 스릴러일 수도 있겠다.


혹은 SF의 계보에 넣을 수도 있다. 원판의 제목에 들어있는 '옥스타칼니스'는 1992년에 저서 [실리콘 미라지]를 통해 가상현실의 기술적 실현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논했던 학자 스티븐 옥스타칼니스의 이름에서 왔다.(실제로 김민영은 직접 옥스타칼니스에게 메일을 보내 이름 사용 허락을 받았다.) 이 작품 자체가 가상현실과 현실이 병치 되면서 생기는 자아의 혼란상을 다룬 소설이기 때문이다.


문체는 화려하지도 특이하지도 않은, 그저 그렇게 평이한 수준이며 묘사력도 적당한 평균선이다. 반면 그 문장으로 엮어내는 사건 전개 능력과 서술 능력은 상당하다. 어렵지 않고 평범한 문장이기 때문에 도리어 깊은 몰입감을 유발한다. 어쩌면 오늘의 추천작 중에서 판타지 장르에 낯선 사람들에게 입문작으로 가장 좋은 작품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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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희

추천작 : [세월의 돌], [태양의 탑]


개인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매우 갈리며, 내 경우에는 싫어하는 쪽인 전민희는, 싫어하더라도 그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전민희의 문장은 이영도보다도 완성도가 높으며, 특히 묘사 능력에 있어서는 판타지 작가 중에서는 최고급에 속한다. 작품의 면면이 소설로서의 구상보다는 공상에 가까워 보일 정도로, 섬세한 묘사를 통해 낭만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능력 또한 이상균에 비해 볼 때 훨씬 우수하다. 반면 그렇기 때문에 분위기와 인물의 캐릭터만 남고 서사가 약해지는 약점이 있다.


전민희는 데뷔작 [세월의 돌]에서 자신의 묘사 능력과 낭만성을 증명했다. 사소한 이름짓기부터 시작하는 그녀의 섬세한 스타일은 작품을 거듭하면서 정제되어 갔고 현재는 빈약한 서사의 약점도 어느 정도 보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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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도 초의 작품이지만, 최근 대대적으로 뜯어 고친 개정판이 발매되었다.


전민희의 출발점인 [세월의 돌]은 연작 기획은 '아룬드 연대기'의 일부인 4부로 기획되었다. 1부에 해당하는 [태양의 탑]은 발매 도중 출판사의 표지 그림 표절 사건을 비롯한 불화가 있어 출간이 중단되었고, 2009년에 들어 Daum에서 연재를 재개했고, 현재 출간중이다. [태양의 탑]의 경우에는 주인공 키릴의 일생을 타로 카드에 대응시킨다. 프롤르그에서 대륙의 대마법사가 곧 탄생할 키릴의 인생을 타로점으로 예지하게 되고, 소설의 각 챕터는 각 카드에 대응되는 식이다. 이런 형식은 전작 [세월의 돌]에서도 플롯 단위를 계절에 대응시키는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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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를 소재에 대응시켜 진행하는 아기자기한 기법 덕분에

판타지와 거리가 먼 사람들은 쉽게 읽을 수 있다.


특히 전민희는 연작 기획을 좋아하며, 게임과 상호 보완하는 소설 작업을 많이 했다. '룬의 아이들 연대기'는 게임 [테일즈위버]의 소설이며, 게임과 상호 보완하는 관계다. 또한 현재는 MMORPG 게임 [아키에이지]의 소설 기획 '아키에이지 연대기'를 쓰고 있다. 게임과의 연계 작업 때문에 인물의 캐릭터를 부각시키는 쪽으로 쓰여져 상대적으로 서사 부분이 약해보이는 문제가 있다.






판타지 소설이(그리고 무협 소설이) 한국에서 흥하고 망하는 과정에는 여러 가지 시사점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작가 - 생산자의 역량 강화만으로는 시장을 선도할 수 없다는 기초부터, 충분히 훈련된 독자가 많을지라도 그들이 상호 연결될 수 있는 창작 공간이나 소비 공간이 없다면 실제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부분까지.


그 와중에 한국 판타지는 이영도라는 수퍼 작가를 얻었고, 전민희나 홍정훈과 같이 자기 영역을 굳힌 작가들도 잃지 않고 있다. (반면 유민수와 김민영을 읽은 것은 뼈아픈 손실이다. 돌아오라, 이 사람들아!) 결국 문화컨텐츠의 판은 작가와 독자가 만드는 것이다. 좋은 작가는 아직 안 죽었다. 좋은 독자들이 계속 읽어주고 비평해주면서, 각자 하나씩 분리된 물방울이 아니고, 모여서 강을 이루게 된다면, 작가와 독자의 호흡에서 작가군과 독자군의 호흡으로 살아날 것이다.


대여점에 가면 당황스럽고 한숨 나오게 하는 펄프픽션/불쏘시개가 넘쳐나지만, 면면히 상상력의 계보는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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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이번 주의 판타지 소설 분석과 추천을 마친다. 다음 회, 환상소설의 다른 장르인 SF를 다룰 예정인 덕질 비기닝 마지막회까지 안녕히.





카인

@Kain_Sul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