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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가을맞이 총력기획 딴지일보 노동문제 컨텐츠 공모전]


당선작입니다




“시급이 얼마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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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사장의 장황한 수다에 지친 내가 먼저 본론을 꺼냈다. 돈 얘기만 빨리 하고 이 시답잖은 면접을 접고 싶었다. 30분 쯤 면접용 미소를 짓고 있었더니 뇌에 쥐가 날 것만 같아서.


지난해 초였다. 나의 가난이 막 정점을 찍었을 무렵, 통장 잔고가 마이너스인데 새 직장은 안 구해졌다. 입에 풀칠은 해야 사니까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했다. 해서 테이블이 달랑 하나인 손바닥만 한 카페(사장에 따르면, 커피는 구색 맞추기이고 주력 판매 상품은 사행성 복권과 전자 담배라고 했다)에 알바를 구하러 간 참이었다.


“그건 내가 봐서 정하지. 처음엔 5천 원 아래로 시작하고 일을 잘하면 매달 조금씩 올려줘요. 내가 커피 만드는 기술이고 뭐고 다 가르쳐주거든. 지금 일하는 저 친구도 1년이 넘었는데, 지금은 6천 원 훨씬 넘게 주고 있지. 그래, 얼마를 받고 싶어요?


짧은 침묵. 내가 “최저시급이요. 5,580원(2015년 기준)”이라고 답하자 40대 후반쯤 돼 보이는 사장은 세상에 뭐 이런 일이 다 있냐는 표정으로 물었다.


“최저시급을 첫 달부터?”


라고. 순간 두 귀를 의심했지만 그는 그걸 말이라고 내뱉은 게 분명했다. 말할 것도 없이 첫 달부터지, 받고 싶은 게 아니고 '받아야'만 하는 거라고! 최저시급이란 대한민국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아무리 적어도 이 금액만큼은 받아야만 한다고 법으로 정한 생존의 마지노선이잖아!


기름진 면상에다 속 시원하게 퍼부었어야 하는 건데. 깊은 ‘빡침’으로 격앙된 마음과는 달리 나는 “아아 그게”하며 애매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최저시급을 정해만 두고 지켜지든 말든 나 몰라라 하는 이 사회의 시스템을 뜯어고치지 않는 이상 이런 양아치는 절대 교화되지 않는다.


그는 한결 같이 뻔뻔했다. 최저시급을 ‘무려’ 첫 달부터 줄 수는 없지만 알바를 할 마음이 있다면 당장 내일 아침부터 나오라고 했다. 사장의 말이 뻥이 아니라면 시급 4천원 대로 시작해 1년이 지난 지금은 시급 6천원 대를 받는다는, 나로선 부러워해야 할지 안타까워해야 할 지 모르겠는 앳된 얼굴의 알바생이 “안녕히 가세요.”라고 인사했다.


어우, 계속 쭉 앞으로도 영원히 안녕. 저런 사장 놈들은 고소를 해야 한다, 언론에 널리 알려야 한다, 사기를 못 치게 혀를 분질러야 한다, 잠깐 정의로운 생각을 했지만 미약한 내 힘으로 어쩔 수 있는 건 없었다.  



# 30대 싱글 여자가 알바생인 경우


최저시급을 창조적으로 해석하는 악덕 고용주와의 면접을 포함해 서너 번쯤 동네 카페의 면접을 보았다. 며칠간 알바몬과 알바천국을 뒤져 야매 이력서를 보내고 전화를 돌린 결과였다. 하지만 알바 지망생으로서 내겐 큰 하자가 있었다. 서른다섯이라는 나이. ‘알바용 야매 이력서’를 만들었던 것도 그래서였다. 물론 안 통했다. 경력이 단절된 전업주부도 아닌 30대 중반의 싱글 여자가 알바를 하겠다고 하니까 대놓고 “나이가 많다”며 퇴짜를 놓았다. 밀어주고 끌어줄 만한 인맥도 없는데 왜 나는 호기롭게 회사를 때려치우고 이 고생일까, 처음으로 후회를 했다.


사무직에서 물류직으로 구조조정을 당할 뻔 하다 그나마 운 좋게 다른 사무 부서로 이동했었다. 동료들은 대체로 아무 일도 없는 듯이 굴었다. 그제야 사회 속에서 나는 한 명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사번, 언제든 대체 가능한 부속품이란 걸 깨달았다. 회사에서 얼굴 모를 남들이 구조조정 될 때에는 나도 관심 한번 가진 적 없었다. 나라고 누굴 욕할 자격 없다.


결국 카페 말고 다른 알바 자리를 잡았다. 주중엔 동네의 한 대학 후문 쪽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빵모자를 쓰고 커피를 내렸고, 주말엔 ‘편순이’로 일했다. 하루에도 알바생을 몇 명씩 돌려야 하는 대기업의 프랜차이즈 지점들에서는 20대부터 40대까지 가리지 않고 알바생을 쓴다. 잘 웃고 빠릿빠릿한 게 미덕인 알바생의 세계에서 ‘초시크’ 콘셉트의 나는 역시나 열등생이었지만, 나름대로의 질서와 재미가 있어서 영 죽을 맛은 아니었다.


그렇게 한 10개월 정도 나이든 알바생으로 지냈다. 같이 일했던 알바생들은 대부분 대학생과 취준생들이었다. 취준생만 열댓 명쯤? 대부분은 7급과 9급 공무원이었고 공기업 준비생도 있었다. 이렇게 수많은 청년들이 공무원 시험에 매진하고 있다니.


내가 일했던 프랜차이즈 빵집의 주인 내외는 30년이 넘게 그 장소에서 빵을 팔고 있다고 했다. 결혼하자마자 작은 개인 빵집을 냈고, 아들딸 모두 대학생과 취준생이 된 지금까지 매일 빵을 팔며 동네의 사랑방이자 터줏대감 구실을 해온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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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밖에 내어놓은 테이블 세 개엔, 날씨만 괜찮으면 언제든 동네의 오랜 자영업자들이자 부부의 친구들이 모여 이야기꽃을 피웠다. 서울 한복판에서 여전히 마을 공동체를 잃지 않고 사는 모습이 내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부부의 빵집이 대기업의 프랜차이즈 간판을 내건 건, 골목상권을 망가뜨리며 전국구 빵집 브랜드로 성장한 대기업의 확장 전략을 이겨낼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빵집 일은 예상보다 훨씬 ‘빡셌다’. 전에는 사람들이 그렇게 빵을 자주 먹는지 몰랐다. 나는 오후 12시부터 6시까지, 주중에 3일만 일했다. 손님들을 대응하는 것 말고도 갓 나온 빵들을 비닐로 포장하고, 본사에서 파견한 제빵사가 빵을 구울 때 썼던 철판을 닦고, 여름에는 진열된 빵 아래에 놓인 얼음 상태를 확인해 단단한 얼음으로 갈고, 유통기한을 확인하는 등 시간 별로 할 일이 많았다. 알바생 입장에선 그렇게 바쁜데도 가게는 흑자가 아니라고 했다. 우연히 본, 같은 구에 있는 프랜차이즈 빵집들의 최근 분기 실적 비교 그래프 프린트물에서도 그 지점의 매출 실적이 낮은 편이어서 내가 다 한숨이 날 정도였다.


법적으로는 알바생이라도 일주일에 15시간 이상 일하면 주휴수당을 받을 수 있고, 1년 넘게 일하면 퇴직금을 받을 수 있다는 걸 그즈음 알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알바생에겐 꿈같은 소리다. 알바생들에게 늘 밝은 얼굴로 대해주던 인성 좋은 주인 내외였지만 주휴수당이나 퇴직금을 챙겨주진 않았다. 일부러 주지 않는 게 아니라 그럴 만한 여력이 없는 거라고 이해했다. 고용주와 노동자 모두 열심히 일해도 먹고 살기가 빡빡한 서민이니까.



# 대개 프리랜서라고 말하는 경우


빵집 알바로는 한 달 생활비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주말엔 모 대학병원 장례식장에 있는 편의점에서 하루 8시간씩 알바를 했다. 중년 여성인 편의점 매니저에 따르면 늘 우울한 분위기인 장례식장의 특성상 나이가 좀 있는 알바생을 선호한다고 했다. 궁하면 통한다고, 내가 딱 그런 곳을 찾아 간 거였다.


그 편의점은 장례식장의 빈소별로 필요한 물품을 대는 곳이기도 해서 하루에 수백에서 많게는 천만 원 넘는 수익을 내는 본사의 직영점이었다. 그러니 일주일에 16시간을 일하는 나도 주휴수당을 받았고, 나도 모르는 새 4대보험에 가입되어 있었다. 절대로 웃거나 굳이 친절할 필요도 없었다. 한 타임에 일하는 알바생들은 나까지 네 명이었고, 대부분은 20대 남자 취준생들이었다. 다른 타임엔 40대 남녀 알바생도 있다고 했다. 나는 실업자라고 말하기 뭐해서 대학원 준비생으로 위장했다.


비싼 장례식장이라 그런지 다른 장례식장과는 비교도 안 되게 화려했다. 백화점처럼 정중앙에는 화려한 샹들리에가 반짝거렸고 늘 깨끗하고 정돈되어 있었다.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의 가족 장례도 빈번해서 조문객들을 구경하는 잔재미가 있었다. 하루에 빈소 임대료만 8백만 원인가 한다는 특실이 비고 일반 빈소에만 손님이 입실을 한 날에는 조문객이 많지 않아서 편의점 일도 무척 한가했다. 게다가 매니저는 주말에 오전에만 일해서 내가 일하는 시간엔 얼굴을 볼 일이 거의 없었다. 조건만 따지면 참 괜찮은 알바였다.


편의점 카운터에 무료하게 서 있다 보면 여러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직장인, 청소부 아저씨, 상조회사 직원들, 상조 도우미 이모들, 규정 때문에 꼭 계단으로만 근조화환을 날라야 하는 배달원들, 양복을 빼 입은 보안업체 직원들, 장례 상담실 직원 등. 가끔 궁금했다. 주말만 나오는 나도 가끔은 영향 받아버리고 마는데, 그들은 이곳의 공기를 어떻게 견디는지. 매일 같이 있으면 좀 무뎌지려나?


나는 편의점 알바를 하면서 주 1회 외고를 썼다(한때 잡지 기자였다). 한가한 틈을 타 알바생 누군가는 공무원 수험서를 보고, 누군가는 핸드폰 게임에 열중할 때면, 카운터 컴퓨터에 워드를 켜놓고 발랄한 투로 주로 만화나 드라마 얘기를 적었다. 그 외고가 원룸 월세 55만 원을 해결해 주었다.


빵집과 편의점에서 눈물 빼며 번 돈을 생활비로 썼지만, 돈이 턱없이 부족했다. 나는 내 원룸을 먹여 살리고 있었다. 직장인 시절의 ‘가오’를 아직 버리지 못했던 거다. 월세가 저렴한 방을 구하거나 부모님 댁으로 다시 쭈그리고 들어가는 옵션은 생각하기도 싫었으니까.


그러다 이 조건 좋은 편의점의 맹점을 발견했다. 그럼 그렇지, 본사에선 알바생들에게 퇴직금을 주지 않기 위해 꼼수를 쓰고 있었다. 일한 지 1년이 지나면 알바생은 알아서 그만 두거나, 그만두기 싫으면 다른 돈 벌이를 하지 않는 가족이나 친구의 이름으로 새로 입사한 것처럼 서류를 내야 했다. 시골의 부모님이 딱 등록금만 대줄 수 있어서 생활비를 스스로 벌어 쓰는 한 대학생은 딱 1년을 채우곤 무력하게 알바를 그만뒀다.


태어나 처음으로 우리 아버지가 부러웠다. 30년을 말단 공무원으로 일하다 퇴직해 공무원연금을 ‘따박따박’ 받는, 자영업자가 된 우리 아버지. 구멍가게 사장님이 된 아버지의 인생을 지루하고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했던 거 다 취소하기로 했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적어도 내일을 설계하고 집도 장만할 수 있는 삶을 살았다. 근본도 없이 현재와 미래가 너덜거리는, 확실한 건 불확실함 밖에 없는 나보다야 훨씬 좋은 꿈을 꾸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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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습 임금체불 고용주를 욕하는 경우


알바생 생활 10개월 차, 나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는 줄 알았)다. 새로운 외고처를 뚫은 것이다. 기업 사외보를 만드는 대행사로부터 종종 일감을 받았다. 유령작가로 참 헐값을 받으며 글을 썼다. 더 이상 월세가 비싼 원룸을 먹여 살릴 능력이 없던 난 부모님 댁으로 낙향했다(그래봐야 서울 서쪽에서 동쪽으로). 60대 부모님 등골을 빼 먹으며 그들의 주머니 속에서 사는 30대 캥거루족, 그게 지금의 나다.


결론부터 말하면 새로운 외고처 사장은 몇 달 안 가 임금체불 본색을 드러냈다. 얄밉게도 꼬박꼬박 연락은 받지만 임금 지불은 피일차일 미루며 두 달 넘게 끌었고, 곧 후안무치한 본색을 드러냈다.


한 달 반을 투자해 인터뷰를 수십 건 하고 또 고친 설탕 범벅 같은 글들을 써 보냈건만 마지막 잔금 300만 원을 받기까진 석 달이 걸렸다. 수십 통의 메일과 같잖은 예의를 차리는 척 서로를 조롱하는 ‘카톡’이 오갔다.‘임금체불 및 기업과 디자인 업체, 그리고 나 같은 유령 작가 사이에서 돈을 떼어 먹는 너네의 양아치 짓을 기업, 업계 사람들에게 다 폭로하겠어, 라는 속 뜻을 담아 메일을 보내고 나서야 잔금을 받을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돈은 받았으나 나는 곧 깨닫는다. 그건 해피엔딩이 아니라 불행의 서막이었다는 걸.


그 전에도 6개월이 지난 지금도, 그 회사는 여전히 구직사이트에 (입금체불 당할) 프리랜서 기자, 작가를 모집하는 뻔뻔한 공고를 올린다. 그 때마다 나는 깊은 빡침과 마주한다. 이런 상습 임금체불 고용주들에게 프리랜서 글쟁이들은, 관례상(?) 계약서 한 장 쓰지 않고 돈을 떼먹히거나 떼먹힐 뻔해야 하는가. 왜 우리나라 법은 피해자보다 가해자에게 관대한 것인지 모르겠다.


사실 이전에도 임금체불에 관해 호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대자본과 결탁하지 않은 잡지사에 다니면 흔하게 벌어진다. 망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도 다니고 있었을 내 첫 직장이자 20대 후반을 불살랐던 잡지사는 오랫동안 망해가며 별의별 회사와 합병을 했다. 수 개 월 간 돈을 제대로 못 받으면서도 바보처럼 열심히 회사를 다니다 밀린 돈이 1천 만 원이 넘어섰을 때 퇴사했다. 그러고도 그 잡지사는 1년 가까이 더 버텼다. 돈을 안 줘도 꾸역꾸역 사람들은 모여드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취재비 150만 원을 빼곤 다 받아내긴 했다. 강남 노동청에 몇 번을 드나들고, 직원들의 집단 행동에 사인을 하고, 이걸 하고 저걸 하고 젠장, 1년 쯤 지나자 끝이 나긴 하더라.


그리고 나는 또 그런 짓을 반복했다. 최근 4개월 간 프리랜서로 다른 잡지사에서 일했고 마지막 달 월급을 한 달 넘게 받지 못하고 있다. 알고 보니 그만 둔 기자들, 그만 둔 포토그래퍼, 그만 둔 디자이너, 인쇄소 모두 몇 달치 급여가 밀려 있다고 했다. 이번엔 심지어 좋은 사람인 척 하는 양의 탈을 쓴 사장이다. 정말 지치고 지긋지긋하다. 여기까지가 2년 전, 내가 다녔던 중에 가장 번듯했던 회사를 5년 만에 그만 두고 겪었던 일이다.


“차라리 취직을 하지 그래?”라고 묻지는 말아요, 베이비. 저도 나름 열심히 해 봤는데 잘 안 됐거든요. 2차 면접에서 똑 떨어지기도 하고요. 야근 많고, 주말에도 일할 때 많은데 수당은 따로 없고, 기타 복지도 없다는 면접관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래도 멱살은 안 잡았어요. 저도 프리랜서가 되고 싶어서 된 건 아니거든요. 전에 프리랜서 작가들이랑 인터뷰할 때마다 물어 봤는데 “웬만하면 그만 두지 말아요”, “글만 써선 절대 못 먹고 살아요” 다들 그랬거든요. 그런데 제가 왜 월급 밀릴 일 없는 회사를 그만 두었냐 하면, 그건 또 구조조정이랄지, 꼭두각시 같은 노조랄지 이 얘기 저 얘기 해야 되고 그러면 거의 단편 소설 분량이 나올 것 같아서 이만 줄입니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다시 아까 언급했던 영화의 대사를 빌려오자면, 그 모든 것들을 뭉뚱그린 게 지금의 나니까요. 난 죽어도 양아치는 하기 싫으니까 내 인생을 책임지기 위해 이렇게 끙끙댑니다. 그냥 그렇다고요.  





땡땡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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