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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지도는 우리가 국사 교과서에서 익히 보아오던 고려에 대한 이미지 중 하나다. 여요전쟁 이후 전성기를 구가하던 고려는 금의 침략부터 조금씩 기울지만 때로는 송-요-고려로, 때로는 송-금-고려로 동아시아 삼각관계를 이루며 누가 누가 더 호구인가 기를 쓰고 눈치 게임을 해왔었다. 이때에 고려의 장사꾼 속성은 제법 빛을 발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드라마에서처럼 벽란도에 아라비아 상인들이 매일 매일 돗자리 깔고 장사한 건 또 아니지만.


그런데 기나긴 대몽항쟁 이후 충숙왕, 충렬왕, 충선왕 등 충 시리즈 왕 시절의 교과서적 기술은 대체적으로 두 가지 키워드로 나누어진다. '민생 피폐'와 '정치 막장'이 그것이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서 반박은 고이 접어 두겠다. 이번 글은 이때에도 제법 성행했던 고려의 대외무역에 대한 이야기다. 그중에서도 주로 14세기를 중심으로 훑어보도록 하겠다. 


1259년, 무려 28년간이나 전 국토를 개차반으로 만들었던 여몽전쟁이 막을 내렸다. 얼마나 개차반이면 현재 한반도에는 여몽전쟁 이전의 목조 건축물이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당시 태자 신분이었던 원종은 항복하러 떠나서 운빨인지 아님 사람 보는 눈인지 어쨌건 쿠빌라이 라인에 탑승하게 되고, 칸 자리를 놓고 숨 막히는 파워게임을 벌이던 쿠빌라이는 매우 기뻐하며 원종에게 불개토풍(不改土風)의 약속을 내린다. 즉, 고려가 몽골의 속국이어도 고유한 풍습은 고치지 않아도 된 것이다.


그것까진 괜찮았는데 이후 칸에 오르게 된 쿠빌라이는 고려를 호구 잡고 악독하게 삥을 뜯었다. 정말 악독했다. 당시 몽골은 남송과의 기나긴 40년 전쟁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몽골군이 전쟁 귀신인 건 알겠는데 전쟁도 돈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게다가 상대는 쇼미더머니빨로 버티던 송. 따라서 쿠빌라이는 근거지인 중국 북부는 물론,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빵셔틀들에게 착실하게 뜯어내고 있었다. 1279년, 송나라는 멸망했지만 쿠빌라이는 한술 더 떠서 일본 정벌을 계획하게 되고 고려에게 전쟁 준비 셔틀을 시키면서 고려는 빈사상태에 이르게 된다.


동아시아에서 제법 힘 좀 쓰던 금나라와 송나라에게도 조공하던 고려였지만, 원나라는 달랐다. 이들은 조공하러 가면 꼭 그만큼의 답례품을 하사해서 오히려 이득이기도 했다. 공식 사절단의 타국 방문은 민간 상단들이 동참해서 장사판을 벌일 수 있는 중요한 기회였다. 그런데, 원 제국의 수탈기에는 그런 거 없다. 삥은 졸라게 뜯어가면서 껌값으로 달력이나 주고 비단 한 필 정도 주고. 


특히 삼별초를 때려잡고 일본 정벌을 준비하던 시기의 수탈은 절정을 찍었고, 원종은 왕이고 나발이고 체면을 집어던진 책문을 쿠빌라이에게 올리기도 했다.



또 진정표(陳情表)를 보냈는데, 대략으로 말하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소방(小邦)에는 원래 창고에 비축해둔 것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 연전부터 귀국[上朝]의 군마(軍馬)가 와서 지금까지 주둔하고 있어서, 처음에는 백관(百官)의 녹봉용 미곡을 군량으로 공급하였으나 부족하므로 연달아서 양반과 백성들의 호구마다 거두어들인 것이 4, 5회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가을까지 전국에서 공급해야 할 군마의 군량은 귀국의 석(碩)으로 환산하면 무려 150,000여 석이 넘습니다. 처음에는 고통을 참고 견뎠지만 이제는 도저히 수송하여 공급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실정을 사실대로 진술하면 미봉책으로 꿰어 맞추려 한다는 책망을 들을까 두렵지만, 우선 참고 머뭇거리다가는 일이 급박한 상황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더욱 불쌍히 여겨서 이 어리석은 남은 백성들로 하여금 남은 목숨이나마 근근이 이을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원종(元宗) 12년 8월



물론 이런 진정서는 수도 없이 보내나, 필자가 소개팅녀와 카톡할 때처럼 보내는 족족 읽씹을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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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원나라는 이것이다 하는 마인드로 정신을 집중해서 본격적으로 침탈을 하기 위해 <응방>과 <둔전>을 설치하기에 이른다. 응방은 당초 매 사냥을 위해서 설치된 기구였으나, 점차 성격이 변질되어 해당 지역사회의 재화를 모조리 뜯어내는, '전천후 수탈기관'으로 바뀌었다. 무엇보다 13세기 은(銀)의 부상은 동아시아의 새로운 경제적 추세였고, 신흥 원제국은 은 중심의 경제정책을 폈다. 따라서 이 응방은 고려의 은까지도 관심을 갖고, 직접 채굴을 시도한다. 심지어 원의 사신이 와서 고려의 은을 직접 채굴해가는 상황도 있었다. 


응방은 고려에만 있던 게 아니었다. 중국에도 강남 지역을 제외하면 인구수 대비 고려와 비슷한 비율로 응방이 설치되었다. 이때 고려에 설치된 것이 약 200여 개. 처음에는 매로, 그 다음엔 비단과 특산품과 인력, 이후 원 제국의 은 보유고가 고갈 위기에 직면하자 금 은 동 지하자원까지 쓸어가는 응방은 지역사회는 물론 고려의 국가재정까지 위협할 정도로 성장했다.


여기에 미곡침탈의 기지인 둔전이 설치된다. 이미 여몽전쟁기부터 각 도에 비축해놓았던 미곡은 몽골군에게 싸그리 털린 상태였지만, 아예 눌러앉아 털어먹기 위해 설치한 것이 둔전이다. 삼별초를 진압하기 위한 몽골군이 진군하면서, 한반도 서해와 내륙, 남부지방까지 둔전이 설치되었다. 얘네들이 그냥 자급자족하면 상황이 좀 낫겠지만, 문제는 첫 수확까지 약 1년간 해당 지역민이 이들의 먹일 밥과 각종 물품들을 갖다 바쳐야 했고, 본격적으로 수확이 시작되었음에도 여전히 수탈은 지속되었다. 이 이중고를 견디지 못하여 또 진정서를 올린다.

 


......그런데 또 다시 중서성은 문서를 보내 우리나라에게 봉주둔전군(鳳州屯田軍)에게 매달 부족한 군량 2,047석과 소 사료 1,001석 7두를 부담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종전군(種田軍)에게는 농우(農牛)와 농기구, 종자와 첫 해 가을까지의 식량을 지급하였으며, 또한 지원 9년(1272)의 부족한 식량까지도 이미 넉넉히 지급하였습니다. 또 작년에는 농사가 전혀 수재나 병충해를 입지 않았는데도 그것을 구실로 내세워 중서성의 지시를 받아 우리나라가 공급하게끔 만드니, 그 지시를 감히 어길 수는 없지만 이처럼 없는 말을 꾸며 보고함으로써 해마다 공급하게 하고 공급 기한도 정하지 않는다면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이는 정말로 민망한 일이니 바라건대 이 부담들을 모두 면제하여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베풀어주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원종(元宗) 15년 2월



물론 또 씹혔다.

 

고려가 이 시기 원에게 갖다 바친 물품들을 간단하게 열거해보면, 각종 비단의 수탈이 너무 심해서 고려 내 모시 생산이 지나치게 성장해 기존의 농경체계를 교란할 지경에 이르렀었고 수달 가죽, 호랑이 가죽, 표범 가죽, 금, 은, 동, 인삼, 종이, 그리고 가장 빈도가 높았던 매, 아예 제주도를 꿀꺽하고 작심하고 키워 가져간 말 등. 그냥 한반도의 특산품은 모조리 긁어갔다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전쟁 준비한답시고 수탈해간 쌀, 토지, 인력까지 합하면 북한의 '고난의 행군' 시기는 뺨치고도 나을 듯 싶다. 결국 고려는 대외무역을 하고 싶어도 팔 게 없고, 사고 싶어도 살 돈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한마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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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했어요.

 

고려의 대외무역이 쇠퇴하게 된 원인으로는 이렇게 고려 내부의 문제도 있었지만, 사실 더 큰 문제는 국제시장의 변화였다. 유례없는 통일제국을 건설한 원은 사이즈가 거대한 국제 무역을 주도해 나갔다. 육로로는 실크로드를 이용해 서아시아 지역으로 나아갔고, 해로로는 인도대륙과 교역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위구르 지역으로 대표되는 서역 장사꾼들이 대거 중국으로 들어오면서, 기존 송-요 or 금-고려-일본으로 맺어졌던 동아시아 시장이 해체되고 동서대륙의 거대시장이 형성되었다.


중국과 서역 간의 교역에서 가장 중요한 거래품은 은과 특수품목이었다. 서아시아의 여러 진귀한 물품을 원하는 중국과 중국의 은을 원하는 서아시아의 이해관계가 합치되면서 한반도는 전혀 매력적인 시장이 될 수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 고려의 대외무역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강남의 상인들이 서역의 무역에 집중하면서 한반도는 소외되기 시작한다. 결국 12세기 중엽부터 13세기 후반까지 고려는 수탈과 고립의 상황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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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야말로 시궁창이었던 고려의 상황은 13세기 말엽부터 서서히 변화한다. 하나의 기사를 보자.



충렬왕(忠烈王)〉 22년(1296) 5월 중찬(中贊) 홍자번(洪子藩)이 편민(便民)의 일을 조목별로 올리기를......소는 밭을 갈고 말은 짐을 실어 민생의 긴요한 것입니다. 근래에 장사꾼들이 소는 강역 밖으로 보내고 주현에서는 말을 내어 국신에 보태고 있으니 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장사꾼이 씨가 마를 것처럼 상황이 안 좋았던 고려가 13세기 후반이 되자 소와 말을 너무 많이 팔아먹어서 문제가 되는 상황에 이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3세기 말, 쿠빌라이 칸의 죽음을 전후로 해서 원의 경제 상황은 매우 좋아졌다. 기나긴 남송과의 전쟁도 끝나고, 신흥 제국으로써 여기저기 망치질해야 할 것도 거진 마무리가 되고, 신경 써서 벌려놓은 동서대륙의 무역도 호황을 맞고. 무엇보다 원제국이 15년여에 걸쳐 전개한 강남지역의 재원 편제작업이 13세기 말 어느 정도 마무리된 것이 매우 큰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이런 저런 이유로 꽤 살만해진 원은 고려에 대한 수탈을 현저하게 줄였다. 1280년대 말, 응방과 둔전은 당초 설립 취지를 잃고 해체되거나 매우 약화되었고 이로써 은과 미곡의 수탈이 줄었다. 뿐만 아니라 직물, 가죽, 광물, 종이, 말, 매, 인삼 등 10~20녀 전까지 전 국토에서 짜내어 보내던 많은 물자들의 수탈 역시 줄어들었다.


원의 경제적 상황뿐 아니라 원과 고려의 정치적 관계변화 또한 중요한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원종 때까지만 해도 고려는 원에게 있어 '우리한테 개기다 쳐발린 놈들'이었지만, 충렬왕이 원 황제의 부마로 들어가며 '한 집안 식구'가 된 것이다. 이 점은 원 황제 무종이 충렬왕 사후 충렬왕의 시호를 내릴 때 잘 드러난다.



짐이 보건대 지금 천하에 백성과 사직(社稷)이 있고 왕노릇하는 것은 삼한뿐이다. 조상 때부터 신하가 된 것이 거의 100년이 되었으며, 아버지가 일구어놓은 것을 아들이 다시 성취하니, 나와는 장인과 사위라 할 수 있으며, 훈척으로 일가가 된 것이니 마땅히 부귀를 누려야 할 것이다. 예는 사대(事大)하는 것보다 우선인 것은 없으니 추숭(追崇)하는 전례(典禮)를 늦출 수 있겠는가?


...... 왕거(王昛, 충렬왕)는 효를 옮겨 〈우리에 대한〉 충성으로 〈백성에게는〉 위세를 바꾸어 은혜를 베풀었다. 예악(禮樂)과 형정(刑政)을 닦음으로써 전장(典章)과 문물(文物)이 모두 빛났으며, 조심스런 마음을 가지고 큰 계책으로 나라를 다스릴 정책을 결정하였다. 처음에 세자가 되었을 때에 이미 황제의 따님에게 장가들고 곧이어 왕위를 계승하였으니, 〈이것은〉 계승왕[嗣王]으로 하여금 공후의 자손으로 다시 시작하게 한다[公孫之復始]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때때로 방물을 바치던 것을 혁파하여 주고 매년 종친에게 주는 것과 똑같은 하사품을 내려주었다. 

충선왕(忠宣王) 2년 7월



고려 국왕이 원 황제의 부마가 되기 시작하면서 왕호는 이후 충 시리즈로 가게 되었지만, 원 황실과 고려 왕실의 밀월관계는 자존심은 졸라 상하지만 어쨌건 수탈은 줄어드는 요인이 되었으니, 아이러니라 하겠다.


뿐만 아니라 사료에서도 언급되었듯, 전에는 밴댕이 소갈딱지만큼 내려주던 조공에 대한 하사품이 매우 늘어났다. 원 제국이 대륙의 풍모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1308년 무렵 충선왕을 심양왕으로 봉할 때 황금 500냥, 은 5000냥을 비롯 온갖 금은보화를 한 트럭으로 보내주기도 했으니, 당시의 시대 양상이 얼마나 드라마틱하게 변하고 있었는지 체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종합해보면, 13세기 말 부터 원의 경제상황이 나아지면서 고려에 대한 수탈이 줄어드는 것을 넘어 하사품도 꽤 넉넉하게 들려주었고 여몽전쟁 28년과 삼별초, 일본원정까지 기나긴 전란의 피해가 복구되면서 고려의 경제환경이 급속도로 좋아졌고 할 수 있다. 즉, 13세기 중반만 해도 '팔 것도 없고 살 돈도 없다'에서 잉여가 축적되며 '팔 것도 있고 살 돈도 있지롱'으로 바뀌었다. 여기에, 카다안의 난이 발생하면서 고려와 요동으로 원 황제가 보내는 구휼미가 단절되었던 해상루트를 복원했다. 


그런데 여전히 중요한 문제가 남아있었으니, 세계시장의 변화에서 한반도가 이탈하면서 강남 상인들이 한반도를 더 이상 찾지 않게 된 문제가 남아있었다. 아무리 팔 것도 있고 살 돈이 있어도 사주고 팔아줄 상인이 없다면 고려의 대외무역은 원나라에 가는 사신을 따라서 가는 상단행렬에 만족해야 했다. 이것으로는 고려의 대외무역을 논하기에 민망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강남 상인들과는 다른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상인들이 고려를 방문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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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중반, 서역인이나 회회인(回回人)으로 대표되는 중앙아시아의 무슬림 상인들이 원 황실과 정부를 등에 업고 동서교역의 핵심적인 집단으로 성장하는데, 이때 오르탁교역이 성행하기 시작한다. 오르탁교역이란, 무슬림 상인들이 몽골 귀족들로부터 은 빛 기타 귀중품을 투자받아, 그 투자금으로 서아시아에서 진귀한 보화 등을 구입한 후 귀족들에게 환납하던 형태의 무역을 말한다. 귀찮으니까 그냥 동서무역의 브로커라 하겠다. 이들에게 너무 많은 권한이 주어진 만큼, 고리대금업을 비롯한 각종 폐단이 나오게 되면서 1260년대부터 원제국 정부가 브로커들을 갈구기 시작했다. 문제는 아무리 갈궈도 이미 거대한 물결이 되어버린 시장을 뚜드려 고칠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결국 원제국 정부는 아예 그들을 궁궐로 끌여들여 일을 시키면서 시장의 흐름에 편승하는 융통성을 보이기도 한다.


어쨌건 이들이 주도한 동서무역으로 인해 강남 상인들이 한반도를 더 이상 찾지 않게 되었지만, 이젠 이들이 직접 한반도에 오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고려의 경제 상황이 점차 호전되던 13세기 말엽부터 그런 모습들이 보인다. 1279년 10월, 일본 정벌 때문에 졸라게 수탈당하던 때를 시작으로 14세기까지. 특히 고려가요 <쌍화점>에는 "雙花店쌍화점에 雙花쌍화 사라 가고신댄/回回회회아비 내 손모글 주여이다."라는 가사가 있다. 쌍화는 위구르식 만두를, 쌍화점은 위구르식 만두가게를 파는 것으로 보고 회회아비 역시 회회인이라 볼 수 있다. 즉 고려 내에 회회인들이 눌러앉아 사는 곳도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그 외에 수많은 색목인들이 14세기 전반 고려 국왕들(충ㅁ왕 시리즈)의 측근 역할을 했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회회인들이 고려로 온 이유는 무엇일까? 회회인들은 대체로 오르탁 교역에 종사했지만 고려는 딱히 이들에게 금싸라기 땅이 아니었다. 일단 한반도는 은이 많지도 않고, 동아시아적인 특산품이 중국에 비해 월등하지도 않았다. 고려 인삼은 서아시아에 명성을 날리는 상품이 아니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이름빨 좀 날렸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한번 간 본 셈 치고 고려로 왔다고 보기에는 위험도도 위험도일 뿐 더러 당시 원제국에 퍼진 고려에 대한 정보량을 생각해보면 그럴 필요성도 없다고 생각된다. 그럼 대체 왜 왔을까?


사실은 필자도 잘 모른다. 사료가 너무 적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좀 소설을 써보자면, 오르탁 교역에서 필요한 물품을 고려에서 추가로 확보하거나, 여타 다른 상황으로 인해 잠시 고려를 경유해야 했거나, 당시 유라시아를 관통해 성행했던 인신매매 활동을 위해서 정도로 써 볼 수 있겠다. 그것도 아니면 그냥 원피스를 찾아 나선 모험가였는지도.


이유가 어쨌건 회회인들의 방문은 동서교역에서 소외되어 있던 한반도에게 한 줄기 희망의 빛을 선사한다. 그리고 이 회회상인이 가진 잠재력에 주목하고 처음으로 드라이브를 건 인물이 세조 쿠빌라이의 부마, 충렬왕이다.

 

충렬왕은 1236년에 태어나 1271년 원나라에 건너갔고 그곳에서 제국대장공주와 혼인, 1274년에 고려로 돌아와 왕위를 받았다. 꽤 늦은 나이에 원나라로 건너갔음에도 불구하고 원나라의 풍습을 받아들이는 데 꽤 적극적이었다. 귀국할 때 그가 몽골식으로 변발하고 몽골식 옷을 입고 있어서 거리에서 기절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다. 이랬던 그가 원나라에 체류 중일 때 황실 인사들이 앞다투어 참여하던 오르탁 교역과 회회인들에 대한 정보를 모를 리가 없다고 본다. 아니, 와이프가 장사꾼인데 모를 수가 없다.


귀국 후 돈 벌이를 찾아 고심하던 충렬왕은 한 가지 번뜩이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앞서 말했던 <응방>의 존재를 떠올리게 된 것이다. 당초 고려의 물자를 쪽쪽 빨아 비축하고 원에 보내는 것이 목적이었던 응방은 점차 약화되어갔고 아직 국내에 잔류한 물량을 보유하고 있는 곳도 있었다.


사실 충렬왕은 초기에 응방을 혁파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특히 1277년엔 응방 감축 조치를 내리기도 한다.



왕이 응방소속 민호를 감축하라고 지시하다.

병신(그 병신이 아니다) 왕이 명령을 내리기를,
“응방(鷹坊)에 속한 백성 205호(戶) 중에서 102호를 없애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당시에 모든 백성들이 가렴주구에 시달려서 다투어 응방으로 들어가버린 것이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는데, 205호라 한 것은 거짓이고 102호를 없앤다는 것도 9마리 소에서 털 한 가닥을 뽑는 것[九牛去一毛]과 같을 뿐이었다. 응방에서는 오히려 은(銀)·모시[紵布]·가죽·베를 그 사람들로부터 거둬들여 사사로이 나누어 가졌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매[鷹]를 먹이는 것이 고기가 아니고 은과 베가 매의 배에 가득하다.”라고 하였다.

충렬왕(忠烈王) 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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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매


이렇게 응방에 대한 견제구를 날리던 충렬왕은 나아가 응방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시도도 보인다. 몇몇 사례에서는 응방 활동을 은근히 지원하는 일도 했으니, 무엇보다 자신의 최측근 윤수라는 인물을 심어두어서 관리했다.


윤수는 충렬왕이 원에 체류하던 시절부터 딸랑이로 시작해 귀국 후에는 고려 내 응방들의 관리를 맡았다. 충렬왕은 이런 윤수를 곁에 둠으로써 전국 응방의 동태를 상세하게 파악했을 것이다.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재산까지도. 나아가 아예 응방의 관리들과 격구를 하거나 사냥을 하는 등 같이 놀기에 이른다. 



이렇게 한편으론 견제하고 한편으론 후원하는 사이 응방의 힘은 점점 커져갔고, 폐단이 점점 심해지는 가운데 하나의 사건이 발생한다. 1280년 3월 옹진지역 백성들이 원제국의 사신을 대접하며 "응방 때문에 몬살겠서유"하며 징징거렸고 이에 사신은 재상들을 질책하였다. 쿠사리를 먹은 재상들은 왕에게 "전하가 키운 응방 때문에 우리 욕먹었다구요!"하며 묘한 내리갈굼을 시전한다. 그런데 충렬왕은 매우 분노한다.

 

3월 임인 초하루 대장군(大將軍) 인후(印侯)와 장군(將軍) 고천백(高天伯)이 탑납(塔納, 타나)과 함께 원(元)에서 돌아왔다. 탑납이 절령참(岊嶺站)에 도착하자 옹진(甕津) 등 여러 현(縣)에서 점심을 대접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탑납에게 말하기를, “우리 고을 사람들은 모두 응방(應坊)에 예속되어 있어서 얼마 남지 않은 빈민들이 무엇으로써 국가의 경비를 감당하겠습니까? 주기(朱記)를 나라에 반환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낫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탑납이 와서 재상(宰相)들을 꾸짖기를, “동방의 백성들도 어찌 천자(天子)의 적자(赤子)가 아니요? 백성들의 고통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구휼하지 않으니 우리 조정(朝廷)에서 사신을 보내 물으면 무슨 말로 대답하겠소?”라고 하였다. 재상들이 왕에게 아뢰어 응방의 폐단을 없애야 한다고 요청하였더니, 왕이 노하여 회회(回回) 사람이면서 황제의 신임을 받는 자를 요청하여, 그가 와서 여러 도(道)의 응방을 관리하게 하고, 재상들을 억눌러서 감히 다시는 말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다. 조인규(趙仁規)가 힘써 간언하고 공주 역시 불가하다고 말하자 그제야 중지하였다.

충렬왕(忠烈王) 6년 3월



충렬왕은 아예 '황제의 신임을 받는 회회인'을 불러서 응방을 관리하게 하려는 의도를 나타내는데, 이 1280년은 세조 쿠빌라이가 천부사를 설치해 황실의 금은 출납업무를 관장케 함으로써 오르탁 교역을 정부의 관리로 적극 포섭하던 시점이기도 했다(천부사는 11월에 세워져 시기적으로 충렬왕의 '회회인 초빙 소동'보다 늦긴 늦다). 충렬왕은 세조를 벤치마킹하려 한 것이다. 굳이 세조가 아니더라도, 당시 원 제국에는 회회인 재상들이 여럿 있었고 충렬왕은 이들과 접촉한 적도 있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또 한 명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 있으니, 바로 제국대장공주다. 쿠빌라이의 딸인 그녀는 그는 원성전(元成殿)과 응선부(膺善府)를 중심으로 잣과 인삼, 은, 모시를 원의 강남에 수출하였으며 경기도 광주의 흙을 가져와 강화에서 직접 도자기를 굽도록 하여 질 좋은 도자기를 수출하기도 하는 등 사사로운 경제활동을 통해 많은 재산을 모았다. 자신만의 판매루트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아예 자신의 상단을 대려왔다고 볼 수도 있겠다. 비록 당대에는 가장 잘 나가는 집안의 딸이었지만, 그래도 타국은 타국이고 타국에서 지내는 고충을 원 나라의 황실 인사들이 그러했듯 장사에 몰두하며 지웠던 것 같다. 이렇게 장사꾼 와이프가 버젓이 옆에서 국정에 테클을 거는데, 충렬왕도 장사에 욕심내는 것이 어찌 보면 자연스런 일 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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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을 나온 쿠빌라이와 신하들. 주변에 얼굴빛이 검은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회회인이라 추정된다

 

충렬왕이 당초 시도했던 회회인을 통한 무역이 좌절되자, 그간 전통적인 교역 파트너였던 중국 항구들과의 관계를 복원하려는 노력으로 선회하게 된다. 13세기 중반부터 고려의 사신이 원에 들락날락할 때마다 고려 관료사회의 대원 교역이 꽤 적지 않았던 흔적이 보이는데, "여러 고려 사신이 대동하는 인원은 오면 모두 오고, 가면 모두 갈 것이며, 중간에 남아 매매하는 것을 금지한다. 마을 교역하여 국경을 나선느 것도 금지한다"는 법령까지 나올 정도로 꽤 규모가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절단의 규모도 점점 커져 1284년에는 수행원이 1,200명이나 되었다. 1296년에는 왕과 공주가 함께 원에 가는데 종신이 143인, 겸종이 590인, 말이 990필에 이르렀다. 이렇게 떼거지로 몰려가서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장사지 뭐.


그러나 이 같은 형태는 민간 차원에서는 불가능한, 이례적인 무역 형태였으므로 고려의 상단들이 이를 믿고 사업을 벌이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었다. 진정한 민간 교역이라 함은 고려 상단의 선박이 출항해 원 항구지역에 도착, 관세를 지불하고 중국 내지로 진입한 후 교역을 벌이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지 못하게 된 것이 상당한데, 고려 정부의 대빵 충렬왕이 다시 그것을 복원하려는 시도를 처음으로 하게 된다.

 

원의 복건행성 평장정사 및 강절행성 우승 등을 역임한 사요라는 인물의 신도비문에는 이러한 항목이 있다.



고려 왕이 주시랑을 보내 바다로 와 상행위를 하니, 유사(有司)가 천주와 광주의 세율에 의거해 10의 3을 취하고자 함에, 공이(사유가) 말하기를 "왕이 복속하여 신하가 되었으며, 또 내부한 지가 오래 되었으니 어찌 가히 하대하여 해외의 신속하지 않은 나라와 동일하게 대하리오. 오로지 영과 같이 30의 1만 세로 거둘것이다" 라고 하였다.



사요가 강절행성으로 부임한 것이 1295년이라는 점에서, 그 이후의 어느 시점에서 벌어진 일로 보인다. 이때의 고려 왕은 충렬왕이었으므로, 충렬왕이 정부의 재화를 투입한 교역에 나섰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왜 이전에 이런 시도를 못 했냐면, 원의 항구들은 1차 관세에 더해 온갖 불법적인 관세를 부여하고 있었다. 높은 관세로 인해 발생한 무역장벽은 고려 같은 해외의 상단들이 발붙이기에 악조건으로 다가왔다. 원제국은 1290년대에 접어들어 관세 제도를 뜯어고쳐, 송나라 때 보다도 낮은 2차 관세를 만드는 조치를 단행했다. 이 같은 원의 상황과 맞물려 충렬왕의 시도도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정보를 빠르게 캐치한 것도 어찌 보면 충렬왕이 원의 정세에 빠삭했던 것이 한몫하지 않았나 싶다.

 

1280년대 초 회회인들을 활용해 동서 세계 간 교역을 넘보던 충렬왕의 대외교역 정책은, 이렇듯 12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매우 중요한 계기를 만들게 되었다. 고려 대빵인 충렬왕의 시도 이후 민간 상단들의 대원 교역도 점차 원활해지니, 14세기 전반과 중반에 포텐이 터지게된다. 그리고 그러한 추세를 만드는데 역시 정부와 국왕이 기여한 부분이 있다. 2부에서는 그것에 관해 다뤄보고자 한다.

 

 


*참고 및 출처


<고려와 원제국의 교역의 역사>, 이강한 저

<13~14세기 고려-원 교역의 전개와 성격>, 이강한 (서울대학교)

忠烈王代 初의 麗元關係와 政局運營, 권영미(연세대학교)

고려시대 대외무역에 관한 연구, 강글온(창원대학교)




 빵꾼


편집: 딴지일보 coc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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