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장안의 풍경.jpg


2012년 10월 20일 토요일


대흥선사


시안박물원에서 나오자 바오즈(包子 만두피를 부풀린 왕만두)집이 있었다. 길가에 사람들이 줄을 서서 만두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집이 맛집일 가능성이 높으니까 나도 덩달아 줄을 섰다. 줄을 서고 관찰해 보니 평범한 동네 만두집인데 찜통에 든 만두가 익기까지 시간을 못 맞춰서 주문이 밀린 것 같기도 했다. 바오즈 두 개를 사고 도우장(豆浆 달콤하지 않은 두유)도 하나 샀다. 아침을 걸러서 허기진 속에 따뜻한 음식이 들어갔다. 


만두집 언니 주문 밀려서 초조함.


가당하지 않은 두유.
중국에선 아침으로 흔하게 먹는다.

길가에 나와서 줄넘기하는 중국의 직장인들.
유니폼 입고 체육대회라도 준비하는 걸까?

대흥선사로 가는 서쪽 길이라는 표지.
무사히 왔다!!!

다음 목적지는 대흥선사(大兴善寺, 다싱산쓰), 당나라 때 중국 밀교의 중심지였던 절이다. 1킬로미터쯤 큰 길을 따라 걷다 흥선사길을 만나 좌회전해서 500미터 정도 더 걸었다. 이쯤해서 절 입구가 나와야 하는 곳에 공사판이 보여서 또 헤매는가 싶었는데 제대로 찾아왔다. 대흥선사 입구를 보수공사 중인 모양, 공사현장으로 들어가니 절 입구가 나왔다.

정문을 보수하고 있는 모양이다.

지금의 정문, 일주문 같은 구조물이 따로 있지는 않았다.

대흥선사는 265년부터 289년에 걸쳐 준공된 오래된 절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다른 이름이었다 6세기에 들어 현재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 8세기에 인도 출신의 승려 금강지와 불공화상이 중국에 와서 밀교를 전파한 절이라고 한다.

오래된 절이지만 유적으로만 남게 된 곳이 아니었다. 지금도 회색이나 황색의 중국식 법복을 입은 (도복과 비슷하게 생긴 옷이었다) 승려들이 여기저기 보였고, 참배객도 많이 방문해 절을 하고 향을 피우는 살아있는 절이었다.











대흥선사의 승려, 참배객, 관광객들

중국식의 대형 향은 이렇게 불을 붙인다.

향로도 대형,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온다.

황제와 신에게만 허락된 찬란한 황색 지붕 아래 독특한 밀불교의 상징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밀교는 대중적인 교리를 가지고 있지 않기에 대흥선사는 이름만큼 크게 흥하지 못했고, 당조의 몰락과 함께 그 영화를 잃었다고 한다. 지금의 건축물은 대부분 현대에 들어 복원된 것, 명문을 몇 개 보니 일본 불교계에서 복원 자금을 많이 댄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일본에도 대흥선사란 이름을 가진 절이 있었는데...

불보살님들 계시는 천계의 디테일을 보라.



비얌 같이 날름날름 하시는 인왕과 금강역사 두 분.

절에 들어서니 대승불교라면 인왕문과 천왕문에 해당하는 건물이 나왔다. 인왕문에는 인왕 또는 금강역사 두 분이 계셨다. 대승불교와 밀불교의 도상이 많이 달라서 확실히 어떤 분들인진 모르겠지만 금강저(밀교법구(密敎法貝)의 하나로, 파수(把手, 손잡이)의 양쪽 끝에 날카로운 고(鈷)를 달아서 저(杵, 절굿공이)의 모양을 한 것)는 아니더라도 치렁치렁 쇠사슬을 무기로 쓰는 분이라면 비슷한 역할을 하시겠지 싶다. 이곳의 역사님은 혀를 쭉 내밀고 날름날름하면서 어이, 잡귀, 너 이리와봐~ 하겠지.

사천왕 중 두 분께 절하는 모자



밀불교 풍의 지옥도.
키치적인 팝아트 or 포르노 스타일이다.

천왕문에는 사천왕을 모셨는데, 그 안으로 무시무시한 지옥이 묘사되어 있었다. 묶고 찌르고 자르고 썰고 삶고 굽고 기타 등등. 종교에서 지옥을 내세우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이렇게 공포 마케팅에 앞장서는 사람들은 필시 SMer 기질이 있는 것 같다. 신앙심을 가지고 신에게 의지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괴롭히지 말고, 합의 하에 묶고 때리는 짓을 하면 좋겠다. 삶이 괴로워 종교를 찾아온 사람들한테 죽음 이후의 괴로움을 경고하는 건 너무하지 않나.


대흥선사 사찰로 들어가는 길.

위풍당당한 대웅보전 건물.

내부의 천장에는 중앙아시아 풍 모줄임 천장 디자인이 응용되었다.





밀불교의 오방오불.

오방오불(五方五佛)이란 현판이 붙은 대웅보전(大雄宝殿) 건물 안을 보니 정말로 부처님이 다섯 분 똻! 보통 대승불교에선 대웅전, 대웅보전에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는데 밀불교에서는 좀 다른 모양이다. 부처님을 다섯 분이나 모시는 것도 밀불교의 특징인듯.

다섯 부처님 중 가운데 계시는 분은 양 손 잡은 모양(수인)을 보니 비로자나 부처님이다. 중방화장세계를 관장하는 비로자나불 양쪽에 계시는 네 명의 부처님은 동방 아촉불(阿閦佛), 남방 보생불(寶生佛), 서방 극락정토를 관장하는 아미타불(阿彌陀佛), 북방 불공여래(不空如來). 이 다섯 부처님의 다섯 가지 힘이 하나로 뭉치면 합체, 크로스~ 만민해탈도 꿈이 아니겠지.


대웅보전 건물 뒤에 모셔진 불단.

뒤로 돌아가니 관음보살님이 계신다. 불심 깊은 신자들은 건물 뒤편의 관음보살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불공을 드렸다. 한 건물의 양면을 활용한다니 공간효율적이기도 하고, 뭔가 대상의 이 편과 저 편에 대한 가르침을 주려는 것 같기도 했다.


관우님 아니신가요...?

그런데 저기 관우님도 계신다. 믿고 싶은 대상이 있으면 다 기도하라는 통합적 종교인가 했다. 하지만 옆 건물에도 관우가 있는 걸로 봐서 관우가 아니라 사천왕 비슷한 분인 듯. 밀교에서는 창칼 무기 든 분들을 참 좋아하는 것 같다. 전각 안에는 팔 여러개 달린 보살님이 계시는데 이분도 무기를 많이 들고 계신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오래된 건물이 있었다. 원형에 가까워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안쪽의 불상들은 유리상자 안에 모셔져 있다. 한쪽에는 갓 태어난 석가모니 부처님이 하늘을 가리키는 조각상이 있는데 중국 애들 입는 앞치마 같은 가리개로 중요 부위를 가려놨다. 천상천하유아독존 외치는 대목인데 앞치마 가리개라니 귀엽다. 






가장 안 쪽 건물에는 아주 작은 불상이 하나 있었다. 두 손을 손바닥이 보이도록 포갠 뒤 엄지손가락 끝이 만나게 하는 손 모양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했을 때는 선정인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석가모니만의 독점 수인은 아니고, 또 이 절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별로 인기가 없는 것도 같다. 비로자나 부처님이거나 아미타 부처님일 가능성도 높고. 여튼, 마지막 불상을 보았을 때의 느낌은 좀 허무했다.





절에 거북이 방생(유기)하는 풍습은 비슷한 모양이다.

돌돌 돌려서 손으로 읽는 불경,
마니차가 건물 뒷편을 따라 설치되어 있었다.

포장된 부처

대흥선사는 왕오천축국전을 쓴 혜초스님이 머물렀던 절이기도 한데 그분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아주 훌륭한 스님이었다고 해도 그저 한 세상 살다 떠난 사람이니 굳이 절에 자취를 남길 이유는 없겠지.

대신 아주 사소하지만 아름다운 자취를 발견했다. 불상 앞 향 올리는 제단에는 무릎을 꿇을 수 있는 받침이 있다. 중국의 관습으로는 신발을 벗지 않고 무릎만 꿇어 절한다. 그곳에 누군가 손으로 곱게 접어 만든 종이 방석이 있었다.




옛날에 시골에서 언니들이 소일거리 삼아 종이 방석 만드는 걸 본 적이 있다. 색색의 전단지나 비닐 포장지 같은 걸 모아서 조각조각 접어 겹쳐 엮으면 제법 폭신하게 바닥의 냉기를 막아주는 방석이 된다. 여기 있는 것도 기성품이 아니라 손으로 만든 것, 절하는 사람들 무릎 배기지 말라고 누가 만들어놓은 모양이다. 이런 방식으로 절에 흔적을 남기는 건 멋지다.


누구나 까보면 속에 부처 하나쯤 있는 거 아니겠어요.jpg

사찰 주변은 아직도 공사 중인 곳이 많았다. 보수공사 수준이 아니라 개축이나 증축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새로 건물을 짓고 나면 새 불상을 모실 계획인지, 한켠에 나무상자에 포장되어 있는 불상이 있었다. 멀리서 보았을 땐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얼기설기한 나무 상자 속에 불상의 형태가 보였다. 겉의 포장을 벗겨내면 불상이 짜잔 나타나겠지.

이런저런 포장 벗겨낼 방법을 찾아내는 과정이 수행일 것이다. 한 꺼풀 한 꺼풀 조심스럽게 벗겨내다 보면 언젠가는 가장 안쪽에 있는 진실된 것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반대로 어리석은 욕심을 부려서 포장을 자꾸 더하다 보면 더 찾아내기 어렵게 될 것이다.

대흥선사 문 앞에는 점 봐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수염 성성한 할아버지가 내 얼굴을 보니 뭔가 있다고 한다. 그냥 가면 안 된단다. 조금만 기다리라며 팔을 붙잡고 놓아 주질 않는다. 

"난 한국인이야."


"보통화-중국 표준말-로 얘기하자."


"필요 없어."


"행복이 가까이에 있는데 그걸 붙잡아야지..."

할아버지를 뿌리치고 돌아섰다. 사찰 주변의 떠돌이 점쟁이를 신뢰하지 않기도 하고 중국어로 그런 이야기를 해봤자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난 충분히 행복하다구요. 적어도 어떤 조건이 충족되면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는 거짓말에 속을 정도로 결여된 존재가 아니라고요.

내면에 텅 빈 구멍 같은 것이 있다고 설정하면 공허를 채우기 위해 무슨 노력이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불행하다고 느꼈던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도넛도 아니고 스폰지도 아니었다. 전혀 비어 있지 않았다. 바스락대는 껍질을 벗어버리면 가장 단단한 것이 이미 안쪽에 들어차 있을 것이다. 상자 안에 들어 있던 포장된 부처님, 얼굴도 보지 못했지만, 그분이 무언가를 일깨워주신 것 같았다. 덕분에 나는 단단해졌고 종이 방석 같이 쓸모 있는 것을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섬서성미술관 량위엔의 나무그림 전시.


나무그림과 화가 량위엔


조금 걷다가 번화가 발견. 길가며 육교 위에 노점이 줄지어 선 대형 쇼핑몰을 지나 카페거리 비슷하게 조성된 길을 걷다가 이 방향이 맞는지 확인하려 길을 물었다. 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애가 말하길 일단 걸어서 가기엔 멀고 지금 가도 못 들어간단다. 길을 물었을 뿐인데 역사박물관은 오전에 일찍 가서 표를 사야한다는 정보를 얻었다. 헐~ 그렇구나... 원래 오늘 목적지가 여기였는데 시안박물관과 대흥선사에 꽂혀서...

문득 아침에 발견했던 섬서성미술관이 생각났다. 다시 삼십 분 쯤 꾸역꾸역 걸어서 미술관으로 돌아갔다. 량위엔이란 대가의 수묵화, 나무그림이 멋지다. 축축한 풍경화도 좋았지만, 특히 나무의 초상화도 감동적이었다.
















회랑을 서성대다가 화가의 이름을 정확하게 알아가야 할 것 같아서 풍채 좋은 아저씨를 붙잡고 어떻게 읽는지 물어 보았다. 아저씨는 량위엔이라 알려주더니 이 화가가 자기 형이란다. 에? 내가 안 믿는 표정이자 진짜라며 동행한 젊은 남자를 부른다.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는 영어를 할 줄 알아서 다시 묻자 량위엔이 자기 아저씨란다. 그림이 정말 좋다고 막 신나서 떠들었는데 그 친구는 그림에 관심이 없는데 가족이기 때문에 따라온 모양인지 다른 데로 가버렸다. 다시 아까의 아저씨에게 나무그림 감동적이라고 이야기하자 아저씨가 전화를 했다. 량위엔 선생이 제자들과 함께 나타났다. 헐~ 다시 한 번 작품에 경의를 표했더니 글씨를 써주시겠다고 한다. 볼펜으로 노트에 쓱쓱 적은 글씨, 뭔지 모르겠지만 멋있어. 꺄아 신난다. (글씨도 올려서 자랑질을 더 하고 싶은데 이 노트는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네...)


미술관에서 나와 먹은 음식, 영펑치샨미엔. 매콤하고 새콤한 국물이 맛있었다.




대안탑 탑돌이

따옌타(대안탑)까지 버스로 이동. 내린 곳이 북문이라 남문까지 한참 걸었다. 대안탑 인근은 대규모 행락지가 조성되어 있다. 대안탑을 둘러싸고 복원된 자은사가 있고 외곽에 공원이 있고 그 주변을 상가가 둘러싸고 있는 식이다. 탑까지 가는 길도 꽤 멀다.

대안탑 가는 길 공사 중.


저 멀리 대안탑.


저 멀리 대안탑.


입구로 들어가면 대안탑.


저 앞에 대안탑.


종탑 북탑 지나서...


저 앞에 대안탑.


스님이 지키고 계시는...


대웅전을 그냥 지나칠 순 없지.


석가모니 부처님께 세이 헬로!


갓 태어난 석가모니 부처님을 신기한 듯 바라보는 인도 아줌마들이 신기했다.


대안탑은 본래 자은사에 딸린 탑이었는데 사찰 건물은 모두 유실되고 전탑인 대안탑만 남아있는 걸 다시 복원했다고. 탑까지 가는 길은 현대에 복원한 자은사가 있다. 입장료는 50위엔. 안으로 들어가니 작은 종루와 고루가 있었다. 긔엽긔엽. 사실 작은 크기는 아닌데 대륙 사이즈를 기준으로는 미니어처 같은 느낌이다. 또 석가모니 부처님을 만나고, 건물 뒤편의 아기 석가모니를 만나고, 자꾸 보니 반갑다.


드디어 대안탑.


대안탑 앞에 도착! 30위엔 추가요금을 내고 들어가면 탑을 오를 수 있다. 오를까말까 망설이다 걍 들어가봄. 꽤 가파른 계단을 빙빙 돌며 등탑, 땀이 삐죽 나왔다.


대안탑 올라가는 문.


가파른 계단을 빙글빙글 올라간다.


안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라고 하는 흰 구체 세 개가 들어있는 사리함이 있었다. 대안탑은 진신사리를 모신 대형 탑인데, 그 안에서 탁본을 떠서 팔고 관광기념품도 팔고 있는 걸 보면 미묘한 위화감이 든다.


부처님 진신사리 모신 사리함.


가까이 가볼까...


더 가까이...


요것이 부처님 몸에서 나온 사리라고 함.


부처님 발자국 탁본 떠드림.


부처님 발도 관광기념품이 됨.


볼거리를 주기 위해 여기저기서 가져온 불교미술품들.


탑 안의 목조불상.


인간들이 뭘 하든 상관 안 하심.


탑에 올라가서 주위를 둘러보니 장안이 얼마나 계획된 도시였는지 한 눈에 보인다. 날이 흐렸지만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본 장안의 풍경은 정말 멋졌다.


동쪽


북쪽


서쪽


남쪽


탑에서 내려와 보니 탑돌이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주 큰 건물이지만 탑은 탑이니까, 탑 주위를 걸으며 일생평안을 기원한다고. 나는 잘 모르고 다른 사람과 반대 방향으로 돌아버렸다. 뭔가 되돌려야 할 것 같아서 제 방향으로 두 바퀴를 돌았다.


















탑 뒤로 건물이 더 있었다. 최근에 지은 건물로 말끔하게 조성한 관광지, 번듯한 건물 안에 호화로운 목각부조와 동판부조, 탱화 등이 장식되어 있고, 불교서적과 불상도 전시 중, 또한 현장법사상을 모신 사당도 있었다. 그러나 안에서 향을 태우는 사람은 없었고 심지어 향로도 없었다. 사찰이라기 보단 대안탑에 딸린 기념관 정도인 모양이다. 자은도서관이란 현판이 붙은 건물도 있었다. 일반에게 도서관을 개방하는지는 모르겠다.

대안탑 안에서 멍 때리고 있다가 6시 폐장시간 다 되어 쫒기듯 밖으로 나왔다. 대안탑 북부(시 중심지 쪽)의 분수대는 너비가 4차선 도로 정도, 길이는 500미터 정도 되는 규모였는데 음악과 조명이 어우러져 보기 좋았다. 산책나온 사람들 모두 분수 주변에 모여 들었다.









도미토리 친구들

돌아오는 길, 토요일 저녁의 교통체증은 끔찍했다. 완전히 지쳐버렸다.

도미토리에 돌아와 씻고 드러누워 있는데 난징에서 온 처자들이 석류와 홍시를 사왔다고 먹어보란다. 석류는 붉은 만큼 새콤한가보다. 시안의 특산품인 홍시는 크기가 아주 작았는데 조그만 게 엄청 달콤했다. 베이징 아가씨는 대추를 먹어보라며 꺼내 놓았고 나도 건포도를 꺼냈다. 둘러앉아 이것 저것 주워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알알이 붉은 석류.


귤 만한 크기의 홍시.
사진에 찍힌 아가씨가 난징에서 온 대학생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내일이 서른 살이 되는 생일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이십대 아가씨들이 앞다투어 늙어보이지 않는다는 위로를 해주었다. 아니... 서른 살이 늙은 나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그러다 야오닝성 아가씨가 갑자기 자왈, 하며 말한다. 푸무자이, 부위엔요우 요우비요우팡. 주변 아이들이 모두 숙연해졌다. 무슨 소린지 다시 물어보자 한자로 써주었다. 父母在 不远遊 遊必有方 - 부모재 불원유 유필유방, 명심보감에 나오는 말이다. 부모가 (살아) 계시면 멀리 여행하지 말고, 나가 놀 때는 어디 있는지 꼭 알리라고 했다는 말씀.

여행자들이 모여있는 도미토리에서 이런 말씀을 꺼내다니... '너도 여행 중이잖아?' 했더니 자기는 부모님이 돌아가셨단다. 아... 이 분위기 수습 안 된다. 애들이 갑자기 전화기 꺼내서 부모님을 향해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나도 카카오톡으로 메시지를 넣었다.





이동현
트위터 : @Leetree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