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사용의 대원칙은 사건이 발생한 당시로 돌아가서 당시의 시각으로 그것을 보는 것이다.
지금의 상황과 환경을 머리에서 지우지 않으면 역사는 왜곡된다.
- 지구쟁탈전, 조후 -
몽상가라고 포장했지만, 세간 기준 괴짜들과 인연이 늘어난다. 인구 7만 땅에 1년 남짓 살면서, 특이한 인간 군상과 자주 마주친다. 인지부조화의 일종이라고 지적 받아도 할 수 없다. 아무래도 강화도는 별종들이 사랑하는 땅이 아닐까 의심 중이다.
한 다리 건너 소개 받은 남궁원장님도 기존에 알던 의사와는 달랐다. 강화읍에서 2대째 내과를 운영 중인데, 강화도에는 대를 이어 진료중인 의사들이 꽤 있다. 남궁원장의 집안은 500년 넘게 강화도에 살고 있는 토박이다. 강화의 내력을 묻기에 이보다 적임자는 없었다. 남궁원장님은 아직도 유교질서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는 이 고장에서 좌파임을 당당히 밝혔다. (딴지처럼 경박한 좌파는 아니라고 여러 차례 강조 했다)
강화는 신석기 시대부터 지금까지 가난한 적이 없어.
남궁원장님의 강화부심과 입담은 대단했다. 동국대학교 윤명철 교수의 동아시아 지중해설(EastAsian-mediterranean-sea)소개를 시작으로 고조선부터 현재까지 강화의 융성과 쇠퇴가 대하드라마처럼 펼쳐졌다. 삼면은 바다로 둘러 쌓여있고, 북쪽은 철책으로 막혀있어 대한민국이 섬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망망대해가 세상의 끝인 줄 알았더니, 동아시아 지중해라니. 신선한 충격이었다.
승자의 시각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역사를 해석하려는 선한 의도는 자칫하면 ‘내 나라, 내 마을이 최고’라는 무모한 근자감으로 변절된다. 강화군민 신분을 획득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았다. 아직은 ‘강화 만세’를 외칠 단계는 아니다. 그러니, 이 글에서 '국뽕'의 스멜을 맡았다면, 그건 다 우주의 기운 탓이다.
사설이 길었다. 그대들이 몰랐던 강화의 흥망성쇠 – 먹고 사는 문제를 중심으로 – 썰을 풀어본다. (feat. 남궁원장님)
갑비고차, 강화
구석기 시대부터 강화에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까닭은 고기 반 조개 반인 갯벌 덕이다. 강화 땅은 보리, 감자, 옥수수, 조와 같은 밭작물 재배가 용이했고, 일 년 내내 햇빛이 잘 들었으며, 해산물도 풍족했으니, 사람 살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강화도에서 널린 게 고인돌이다. 덮개돌 길이 3m이상 고인돌이 28기. 일찍부터 지배, 피지배 계층이 있었다는 증거다. 자고로 곳간이 넉넉해지면 집요하고 꼼꼼하게 빼앗기는 것이 백성의 도리 아니겠는가.
황해는 산둥반도, 한반도의 서쪽 해안, 요동을 연결하여 인접 국가들이 공해로 활동했던, 지중해 성격의 바다다. 압록강 너머 고조선의 단군할아버지는 어째서 굳이 머나먼 남쪽 마니산까지 와서 참성단을 쌓았을까 늘 궁금했다. 아마도 강화는 반도의 길목이라는 장점 덕에 기원 전 잘나가던 단군조선과 교류한 ‘얼리아답터’이었던 것 같다.
어찌되었든, 강화가 조연이나마 역사의 무대에 출연한건 백제의 건국과정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이설에는 비류왕자(소서노 아들)가 미추홀에 정착했다고 되어 있다. 미추홀은 흔히 인천 일대로 알려졌는데, 비류 일행이 강화도를 거쳐 미추홀로 흘러 들어갔을 것으로 예측된다. 20세기 전까지 가장 편리하고 빠른 교통수단은 ‘배’였다. 이주 과정에서 비류는 어떤 식으로든 강화도 지배세력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한편, 중국 한나라 시대에 일본열도와 교섭을 위하여 반드시 들려야 하는 곳은 경기만, 그 중에서도 강화도였다. 특히 3세기 중반 시도된 중국의 위나라, 대방군, 백제, 일본의 큐슈를 연결하는 해상네트워크가 형성 되었을 때 강화는 핵심거점이었다. 백제시대에 강화를 ‘두 갈래로 나뉜 물과 곶이 있는 고을’이란 뜻의 ‘갑비고차’라고 불렀는데, 지명에서 강화가 해상교통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또한, 한강을 빼앗기 위해 싸웠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정복군주들도 강화도를 실제 전장으로 이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렇듯, 삼국시대의 강화는 교통과 군사의 요충지였다.
통일 신라 시대에는 강화가 당과 신라를 연결하는 항로의 나들목이 된다. 개설된 코스는 당은포(현재 화성시 남양면)⇒덕적도⇒강화도⇒교동도⇒황해도 연안⇒해주만, 옹진반도⇒장연군 장구진⇒황해횡단⇒등주(신라관, 발해관이 있었던 당의 무역도시, 현재 산동성 봉래시).
물류가 오가면 자본이 축적되기 마련이다. 상업 활동의 중계지로 부를 쌓은 강화의 지배계급은 예성강 일대 백리를 호령하던 새로운 해상세력(=왕건)과 연맹을 맺는다.
변경에서 중앙을 노린다.
당숙종이 황제가 되기 전, 개성에 와서 여자를 취해 왕건의 조부 작제건을 낳았고, 작제건은 자기 부친을 찾기 위해 상선을 타고 당으로 가다가 도중에 서해용왕의 딸을 취하고 다시 돌아왔으며, 개성, 정주, 백주 및 강화 일원 사람들을 동원하여 개성 주변에 영안성을 쌓고 궁궐을 지었다.
- 고려사 -
썬데이 서울 체험수기에 가까운 이 설화로 개성, 정주, 백주, 강화 지역이 왕건의 동맹세력임을 알 수 있다. 고려가 건국 되자마자 강화의 호족들은 떨어질 떡고물을 기다리며 행복한 고민에 빠졌는데, 웬열. 덜컥 ‘혈구군’에서 ‘현’으로 강등 당한다. 왜 때문에, 왕건에게 단단히 찍힌 모양이다. 신공항 부지 선정에 온 나라가 들썩이는 건,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국제무역항의 영광은 벽란도에 돌아가고, 강화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된다.
인생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최씨 무인정권이 들어설 때까지 중앙정계로부터 철저하게 소외 되어 변두리 유배지에 불과 했던 강화가 두둥, 포스 넘치는 등장이다.
1231년 몽고군이 침략하자마자 무역, 교통, 군사 요충지 강화의 위상이 복원된다.
다음해 1232년 강화군으로 승격되고, 그해 7월 7일 임시 서울로 전격 간택되니, 화끈한 한방 아니겠는가.
최씨 정권은 단기간 내 ‘개경 주민 및 시설 강화 이전 프로젝트’를 파이팅 넘치게 추진한다. 강화 천도가 결정 되자마자 군대를 동원하여 궁궐과 117km에 이르는 내성 공사에 착수하여 불과 2년 만에 고려궁 및 관청 건립에 성공하니, 감동적인 미담 아닌가. 본진은 몽고군에게 신나게 털리고 있는데, 병사들은 섬에 모여 삽질이라니. 아무래도 창조적인 군인사용법은 조상대대로 전해오는 미풍양속인가보다.
도읍을 옮기고 2년 후, 강화로 이사 온 개경 사람들은 10만 가구, 약 15만 명이다. 참고로 2016년 현재 강화 인구가 7만 안 된다.
이 연재물 9편의 주인공 이규보는 '신경(新京)에서 집짓기가 나날이 더욱 많아져 마치 누에 천 마리가 다투어 고치를 짓는 것 같네'라며 덩실덩실 춤췄을 만큼 인구밀도가 높았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목조 가옥은 화재에 취약해서, 도성에는 여러 차례 대화제가 발생한다.
임시수도 강화는 고려 귀족들의 트렌드를 선도하는 핫 플레이스로 자리매김 한다. 팔관회, 연등회처럼 상위 0.1프로의 사교활동을 위한 대형 파티도 자주 열렸다. 여기야 말로 파라다이스. 고려의 귀족들은 신도시 강화에서 개경의 호화로움을 완벽하게 재현했다. 옷 망가지고, 몸 더러워지면서 몽고군과 싸울 이유가 없었다. 최씨 무인정권의 항몽 투쟁이 실효를 거두지 못한 것은 당연지사. 강화의 융성은 강화 주민들의 수탈을 전제로 한다. 엎친 데 덮친 격. 기근에 전염병까지 돌아 1259년 정월에는 굶주린 민초들이 서로 잡아먹는 사태까지 발생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려 최고 셀럽, 최우(직업 : 최충헌 아들)는 자신의 저택 정원에 심을 나무를 본토에서 배로 실어와 수십리에 달하는 정원을 꾸몄고, 최항(직업 : 최충헌 손자)의 저택에는 국제 규격의 격구장까지 있을 만큼, 호연지기를 누렸다.
대몽항쟁은 실패하고, 1270년 개경환도가 결정된다. 6월 1일, 삼별초는 강화도 임시정부의 창고를 열어 호적을 몽땅 소각하고 6월 3일 새로운 세상을 찾아 100여척의 대 선단을 이끌고 진도로 떠난다.
이렇게, 39년을 하얗게 불태운 강도(江都)시대는 막을 내린다.
강화 며느리를 얻으면 부자 된다
삼남지방에서 올라온 조운선은 강화해협을 통해 한강으로 진입한다. 밀물이 들어오면 동력 없이 50Km까지 육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강화는 내륙 운송의 거점이 된다. 권력의 덧없음을 지독하게 겪은 탓일까.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으며 왕실 피난처로 반짝 존재감을 드러내긴 했지만, 강화는 숨 가쁘게 변해가는 중앙 정치로부터 한 발 떨어져 실리를 추구한다.
1900년에 에밀이라는 프랑스인이 6년간 조선에 살다가 체류기를 남겼는데, 그 책에 따르면 ‘조선 반가의 모든 집에 화문석이 있다.’고 적혀 있다. 강화도의 가내수공업 규모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또한, 대규모 말 목장에서는 천 마리가 넘는 말이 사육되었고, 임금에게 진상하는 귀한 해산물이 잡혔으며, 인삼과 같은 특용작물까지 재배 했으니, 강화의 살림은 적어도 강도(江都) 시절보다는 넉넉했을 것이다.
개항 과정에서 강화는 크고 작은 전란을 겪는다. 언제나 그랬듯이 강화는 한반도에서 선진문물을 최전선에서 받아들였다. 1905년까지 70개가 넘는 사립학교가 세워졌고, 주민의 10프로가 감리교 세례를 받았으며, 민족기업이 성장한다.
경술국치 이후, 동양척식회사가 벼룩의 간까지 빼먹던 격동의 시기, 강화도는 ‘사우론의 눈’을 피해갔다. 일제 강점기, 강화에 거주한 일본인 비율은 타 지방에 비해 턱없이 낮았는데, 1924년 강화에는 140명의 일본인이 살았을 뿐이다.
강화도의 지주, 상인, 기업가는 대부분 조선인이었다. 그래서 1920년대에 대대적인 소작쟁의가 벌어졌을 때, 강화도에는 소작쟁의가 발생하지 않았다.
강화의 자생적 자본주의 발달에는 방직산업이 한 몫 한다. 일본은 영국의 식민지 정책을 본받아 외국에서 원사를 들여와 조선에서 직조한 후 인조견을 판매했는데, 강화에는 평생 화문석을 짠 준비된 직인들이 대거 포진 되어 있었다. 강화에는 약 6800명의 화문석 조합원이 있었다. 이들의 활약으로 강화의 방직산업은 번성한다. 인조견을 직조한 것도, 팔러 다녔던 것도 여성들이었다. 오죽하면 ‘강화 며느리 얻으면 집이 부자 된다’는 속설이 생겼다. 강화 여성들은 넉살 좋기로 유명했는데, 서슬 퍼런 일제시대에도 강화도 여성들은 큰소리쳤다고 한다. 역시 여성의 독립은 경제 자립부터!
우리나라 최초의 인조견회사 조양방직
조선인 지주들에 의해 세워진 조양방직을 필두로, 방직산업은 해방 이후 한국전쟁으로 잠시 주춤 했지만 다시 가동, 1960년 70년대 경제개발과 무관하게 강화도만의 독자적인 경제 르네상스 시대가 열린다. 전국 방직산업의 15프로를 차지했던 강화도는 전국에서 손꼽히는 부자 동네가 된다. 강화읍 4대문 안에 공장이 9개였고, 규모와 미모 면에서 서울에 뒤지지 않는 기생집도 9개나 생긴다. 전국 각지에서 일자리를 찾아 강화도로 모였다.
1980년대 중반까지 강화의 인구는 13만이 넘었다. 강화읍에는 현금이 넘쳐났고, 웬만한 중산층 가정에서는 자녀들을 서울로 유학 보냈다. 1987년 강화읍 땅값은 서울 중심가 못지않았다. 그랬던 강화의 ‘벨 에포크’는 방직산업의 붕괴와 함께 막을 내린다. 방직산업 기반의 강화읍 경제는 무너지고, 인구도 급격히 감소한다.
90년대 초, ‘마이카 붐’ 따라 ‘포니’와 ‘프레스토’를 탄 가족들은 ‘회 한 사라’ 먹으려고, ‘로얄 살롱’과 ‘스텔라’를 탄 불륜 커플은 ‘떡’치려고 강화를 찾았다. 모텔과 러브호텔이 우후죽순 들어서고, 횟집과 장어집도 300곳 넘게 개업한다. 오죽하면 90년대 강화도 별명은 ‘떡도’였다.
강화도의 경제는 관광산업이 지탱했지만, 2016년 현재, 횟집, 장어집, 모텔, 모두 사양길이다.
그렇다면 강화의 지속가능한 발전은 어려운 걸까?
다음 편을 기대하시라.
지속가능한 강화를 디자인 중인 청춘들을 만나볼 예정이다.
***
여기까지 읽느라 고생 많았다. 역알못들은 첫 단락 보자마자 패쓰 했겠지. 이해한다. 나도 글자 많은 건 싫더라. ‘역사’란 단어만 들어도 골 아픈데, 변방 촌 동네 발자취 따위 관심 있을 리 만무하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고 싶었다.
대한민국에 ‘서울’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험 앞두고 벼락치기로 외운 경주, 부여, 공주, 개경, 한양에만 사람이 살았던 것이 아니다. 다양성은 종의 번영을 위해 꼭 필요하다. 주거 환경도 마찬가지. 헬조선 탈출 방법이 노오오력만 있는 게 아니다. ‘작지만 빛나는 마을’에서 나답게 살아보기, 강화상륙작전은 계속된다.
* 참고문헌
강화사 (강화군 군사편천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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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러킴
편집 : 딴지일보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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