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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07. 30. 화요일

산하

 

 

 





 

중국의 <마지막 황제> 부의처럼 우리나라 마지막 황족들의 거취도 매우 드라마틱하다. 일단 한국의 마지막 황제라면 순종일 것이다. 이왕으로 격하되긴 했지만 어쨌건 이씨 임금 가운데에서 황제를 칭한 두 번째 사람이었다. 마지막 황태자라면 고종의 일곱 번째 아들 영친왕이다. 후사가 없는 순종의 후계자로 지목돼 1907년 황태자로 책봉되지만 3년만에 왕세자로 떨어지고 일본 귀족의 딸과 정략 결혼을 하고 한일병합의 선전원으로 전락했던 비운의 황태자가 그다. 그 아들이 이구라는 사람이다. 마지막 황태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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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일본에서 태어났고 일본에서 자랐다. 전쟁 이후 새로이 일본국 헌법이 제정되면서 일본 황실의 일족으로서 왕족 대접을 받았던 영친왕의 가족은 그 직위를 박탈당한다. 일개 평민일 뿐이었다. 그리고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을 통해 그 국적 또한 일본에서 한국으로 바뀐다. (그 이전까지 그는 일본 국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한국인이 됐으니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이미 한국에는 또 하나의 왕족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바로 전주 이씨 양녕대군파 이승만. 양녕대군이 내몰리지 않았다면 영친왕의 자리가 자기 자리였다고 생각한 것인지 이승만은 영친왕 가족의 귀국을 절대 반대했다.



이구는 미군 사령부의 배려로 미국으로 갈 수 있었다. “나를 넘어 세계로 가라.” 아버지의 한많은 충고를 뒤로 하고 그는 MIT 공대에 들어갔다. 공부도 잘했다. 후일 서울대에서 건축학 강의도 할 정도였으니 그냥 미국에서 눌러 살았다면 남부럽지 않은 사업가로 살았을 것이다. 건축회사에서 만난 8살 연상의 우크라이나계 미국 여인과 함께. 이승만 정권 때 귀국을 시도하다가 왕자라는 호칭을 붙이지 말라는 둥 조건을 달자 아예 포기해 버렸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살던 그에게 뜻밖의 전화가 온다. 한국의 실권자 김종필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냉대받던 이씨 황족을 국내로 불러들이고 그를 통해 정치적 이득을 얻으려 했던 것이다. 한국에는 거의 와 본 적이 없던 왕세손과 그 부인은 카퍼레이드까지 벌이며 국내로 들어왔다. 이구는 이후 바빴다. 유능한 건축가로 살았던 그는 한국에서는 별안간 마지막 왕세손으로서 별 볼 일은 없으나 어쨌건 역사의 그림자로 남아 있던 황실의 대표 노릇을 했다. 불쌍한 건 그 부인 줄리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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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계 여인으로서 인내심이 강했던 그녀는 전혀 상상하지도 않은 나라 한국에 들어와 한복을 입고, 시어머니 이방자 여사를 모시면서 살았고 봉사활동으로 일상을 메웠다. 그러나 “그녀가 외국인이 아니었다면” 이라는 이방자 여사의 한탄처럼, 그녀는 종친들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벽안의 외국인인데다가 아이도 낳지 못했던 것이다. 망해 버린 왕가의 후사가 뭐가 중요하다고 어떤 이들은 이구에게 여자를 소개시켜 준다 어쩐다 부산을 떨었고 점차 부부 사이는 멀어진다.



한국 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친척들과 함께 한 사업이 부도가 났고 이구는 일본으로 건너가 버린다. 1982년 한국에 머물던 줄리아에게는 이혼장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참으로 기구한 마지막 황태손비였던 줄리아는 한때 자신을 열렬히 사랑했던 여덟살 연하의 남편을 마음에서 놓지 않았고 한국을 떠나지도 않았다. 플라자 호텔에서 켈트 공예점을 운영하면서 고아들을 돕는 활동을 계속했다. 오히려 마지막 황태손비로서 품위를 지킨 것은 아내 쪽이었다. 이구는 사기 혐의로 피소되기도 하고 정체 모를 무당같은 여자와 동거하면서 세월을 엮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일본인도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니다.”라고 한탄하면서.



그래도 옛 왕가의 마지막 후손이었다. 이회창, 이인제 등 전주이씨 정치인들이 ‘이구 선생 영구 귀국 추진위원회’를 만들었고 2003년도에는 “이제 때가 되었다.”고 영구 귀국했다. 종묘에서 선왕들에게 고유제를 지내며 “다시는 조국을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전주 이씨 일부 종친은 그 ‘후사’를 볼 심산으로 예순 중반이지만 애는 낳을 수 있을 것 같다고 기대하기도 했다고 한다. 무슨 종마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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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고 그가 태어났던 자리, 즉 영친왕의 저택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호텔방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살아서 실속은 없으면서 분주하게 뭇 사람들의 장식품으로 이용됐던 그는 모처럼 황태손의 예우에 맞는 장례로 모셔졌다. 문화재청장이 주관하고 국무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의장대의 장엄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1천명의 인파가 몰려 그 마지막 길을 배웅했으니. 영화의 한 장면 같게도 그 모습을 몰래 쳐다보는 늙은 백인 노파가 있었다. 줄리아였다. 그녀의 생애를 영화화해 보겠다는 이들의 초청으로 한국에 들어와 있던 기간에 하필이면 이구가 죽었고, 장례식에 정식으로 초대받지 못한 줄리아는 먼발치에서 사랑했던 남편, 왕족으로 태어나 불행했던 남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 보았던 것이다.



한국인도 일본인도 미국인도 아니었던 마지막 황태손은 아마도 그 우렁찬 장례식보다도 푸른 눈 가득 슬픔과 회한과 사랑을 담아 자신의 영구를 지켜보던 옛 아내가 더 반가왔을지도 모르겠다. 2005년 7월 16일 마지막 황태손 이구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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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여기서 끝난 것 같지만 지금도 ‘황실’은 남아 있고 이구가 죽으면서 지명한 한 사람이 ‘황사손’으로 ‘계시다.’ 근데 이구의 백부, 즉 영친왕의 형이었던 의친왕의 후손들이 그걸 인정하지 않아서 정통성(?)이 덜하다는 소문이다. 가냘프고 볼품없을망정 역사의 그림자는 그렇게 길다.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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