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07. 31. 수요일
칼든꼬마
지난 기사 |
우리 집에는 늘 짐승이 있었다. 주로 개가 있었지만, 내가 국민핵교 4학년 때는 어머님이 영천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동물농장을 운영하기도 하셨다. 농장이라고 하기에도 뭣할 정도의 작은 규모였지만, 어머니께서는 나름 원대한 계획을 갖고 시작하신 일이었다. 도사견 두 마리에 셰퍼트 한 마리와, 한때는 투견장에서 챔피언까지 했다던 종자용 수컷 도사견이 있었고 토끼가 대략 20여 마리에 염소가 대여섯 마리 정도였던 것 같다.
농장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작은 규모였지만, 어머니의 열정은 대단하셨다. 개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을 때 마리당 수십 만 원을 주고 산 도사견 새끼들은 어머니께서 그 사업을 접을 즈음해서 기십 만에 처분을 하셨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다... 결국 농장일은 망하신 거다. 그러나 기울어져 가는 농장의 운영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우리에 갇힌 짐승들을 돌보는 것에 절대 소홀함이 없었다. 1년쯤 지나자 집 식구들이 하나, 둘 입을 대기 시작했다.
“엄마, 이제 저것들 처분하지 그래?”
“그래, 그래야지...”
그렇게 대답하시면서 긴 한숨을 잊지 않으셨다.
나는 방학만 되면 어머니가 계시는 영천으로 가서 방학기간을 그곳에서 지냈다. 내가 이제껏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했던 기억들은 그곳에 모두 남아있다. 맑은 강에는 물고기들이 넘쳐났고, 과일서리를 좀 했다고 눈총을 주는 이웃도 없었으며, 산에는 꿩이며 산토끼가 지천에 널려서 올무를 쳐 놓거나 사이나(청산가리)를 열매에 심어 놓으면 산짐승을 맛 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큰 자연에 녹아들어 산다는 것은 무척이나 행복한 일인 것 같다. 그 곳의 아이들은 이런 자연의 혜택을 잘 활용하였고, 그 아이들 덕분에 나 또한 자연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란 걸 배우고 체험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도사견 한 마리와 셰퍼트가 며칠 간격으로 새끼를 낳았다. 먼저 새끼를 낳은 도사견이 제 새끼를 돌보지 않아 새끼들이 굶어 죽게 생기자, 어머니께서 그 새끼들을 방 안에서 키우시다가 셰퍼트의 새끼들에게 입양을 시키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그 방법은 이러하다. 셰퍼트의 오줌을 받아서 헝겊에 묻히고는 도사견의 새끼들에게 묻히는 것이다. 그리고는 제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고 있던 셰퍼트에게 데려가서 어머니께서 손수 조심스레 젖을 물리시었다. 조심스럽게... 그러면 셰퍼트는 도사견 새끼의 냄새를 몇 번 킁킁거리며 맡아 보더니 새끼들을 핥아 주었다. 셰퍼트가 도사견의 새끼를 받아들이고 나서야 어머니는 새끼에게 손을 떼었다.
“엄마, 그냥 우리가 키우면 되지, 뭐 하러 굳이 위험하게 그러는데?”
어린 나이에도 나는 그것이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 마냥 위험한 시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 젖을 다른 새끼에게 양보한다는 것이 짐승들에게는 생존의 본능과도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니가 엄마 품에 안겨 자라야 되는 것처럼, 짐승에게도 엄마 품이 필요한 거야.”
“근데, 새빠뜨는 저게 지 새끼가 아닌 줄 모르나?”
“다 안다.”
“안다꼬? 카믄 뭐 할라꼬 오줌을 묻히는데?”
“덜 기분 나쁘라고. 냄새라도 지 냄새가 나믄 쪼매라도 덜 기분 나쁘니까. 남의 새끼를 품는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니까.”
우리에 가둬서 키우는 짐승들에 대한 어머니의 남다른 애정을 또 한 번 느낄 수 있는 계기가 있었다.
키우던 개 중에 씨받이용 수컷 도사견이 있었다. 과거에 투견장에서 챔피언도 했다던 그 녀석은 네 발로 디딘 채로 서 있으면 국민핵교 4학년이던 내 키와도 맞먹을 만큼 컸고, 온몸은 단단한 근육이 겉으로 드러날 정도로 윤곽이 뚜렷했고, 녀석의 얼굴과 온몸에는 투견장에서 얻은 훈장과도 같은 상처들이 군데군데 새겨져 있었다.
필자의 사진은 아니지만...
그런 그 녀석이 가끔은 철망으로 된 우리를 부수고 마을 나들이를 할 때가 있었다. 어느 날, 내가 냇가에서 잡은 물고기를 빨간 마늘자루에 한가득 담아서 반도를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집 밖으로 나와 있던 그 개를 발견했다.
“야, 쫑! 너, 또 왜 나왔어?!”
녀석의 이름은 ‘쫑’이었다. 나의 고함소리에 녀석은 나를 제 막내 동생 쳐다보듯이 지긋이 바라보았다. 녀석은 나를 항상 그렇게 쳐다보았다. 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귀여운 막내 동생을 보듯이 늘 그렇게 보았다. 녀석은 나를 잘 따른 것이 아니라, 나를 귀여워했던 것이다. 녀석은 내가 다가갈 때까지 그 곳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날이었다면, 내가 녀석에게 다가가서 그 녀석의 엉덩이를 발로 ‘뻥’ 차고 나면 녀석이 앞장서서 함께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게 평소의 일과였다.
그런데 그날은 다른 일이 겹쳐버리고 말았다.
우리 앞집에 살던 조그만 삽사리 한 마리가 제 집 대문 안에서 쫑이를 향해 짖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인지한 쫑이 느닷없이 그 집으로 뛰어 들어갔고, 그 집의 삽사리는 냅다 줄행랑을 치더니 마루 밑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쫑이는 덩치가 너무 큰 탓에 나도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그 마루 밑을 들어갈 수가 없어서 앞발로 마루 밑을 휘젓기만 했다.
잠시 동안 그러던 쫑이가 이내 포기를 하고 고개를 돌리던 순간에 하필 그 집 대문 옆에 매어둔 똥개 한 마리를 발견한 것이다.
삽사리에게 분을 풀지 못한 쫑이는 그 똥개에게 달려가더니 그 녀석의 목을 냅다 물고는 허공으로 들어 올려 흔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그 똥개는 축 늘어져 버렸고, 그런 똥개를 물고 쫑이는 가뿐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야, 니 그거 놔~”
나는 똥개를 물고 있는 쫑이의 개 목걸이를 쥐고 마구 흔들어 댔지만, 쫑이는 덩치에 걸맞게 꿈쩍도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다. 투견의 본능이 일깨워진 녀석을 내가 직접 제지하려다가 오히려 쫑이에게 공격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실을 그 당시의 나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나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내가 울고 불며 녀석에게 매달려 있을 동안 마을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들었지만, 어머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소식을 들으신 어머님이 오셨고, 어머니의 명령이 있고 나서야 쫑이는 그 똥개를 놓아 주었다. 땅바닥에 널부러진 그 똥개는 목이 부러져 즉사하였고, 똥오줌을 싼 채로 죽었다. 나는 그 똥개를 보고는 너무나 속이 상해서 쫑이를 마구 때렸다. 물론 늘 그랬듯이 쫑이는 꿈쩍도 않고 나의 손, 발짓을 묵묵히 받아 들였다.
내가 쫑이에게 울면서 손찌검을 한 것은... 이 일을 계기로 쫑이의 신변에 위협이 생길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쫑이를 위험한 개로 여겨 어머니에게 처분해 달라고 요구할 것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그 날, 집으로 돌아온 쫑이는 빨래 방망이로 어머니에게 오지게 혼이 났고,
출처 - 네이버 웹툰 <마음의 소리>
어머니는 마을 회의에 불려 가셔서 고개를 조아리셔야만 했다. 다행히 어머니의 부탁으로 쫑이가 처분 되지는 않았지만, 쫑이의 우리는 매우 단단하게 고쳐졌다.
그 날 저녁에 나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엄마, 왜 쫑이를 처분 안 하게 그렇게 애를 썼어?”
우리 집의 개들은 번식을 목적으로 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식용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산 목숨을 데려 왔으면, 책임을 져야지.”
지금에 와서 생각해 봐도, 그 때 그 당시 어머니의 행동은 잘 납득이 가질 않는다. 어머니는 왜 다 기울어져 가는 농장을 붙들고 있었는지... 농장을 꾸리고 1년이 지났을 즈음에는 이미 본전도 못 건질 만큼 타산이 나오질 않았지만, 어머니는 개들에게 소홀하시기는 커녕 때마다 놓치지 않으시고 예방접종을 맞추셨다.
어머니는 아주 어릴 적에 아비를 여읜 나를 무릎에 뉘이시고는 곧잘 이런 말을 하셨었다.
“사람을 사랑 하거라.”
그 당시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 줄 몰랐다. 과부로 사는 것이 부담스러워 가까운 이웃에게도 책잡히는 걸 싫어하셔서 늘 조심하셨던 분이었다. 그렇게 가까운 이웃조차도 경계하셨던 어머니가 내게 "사람을 사랑 하거라." 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던 게 지금도 잘 납득이 가질 않는다.
그런 어머니와 내가 또치 일로 대판 싸운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왔는데 또치가 없는 것이다.
새똥을 아무데나 싸서 도저히 집 안에서 키울 수가 없게 되자, 식구들과의 협상에 의해 또치를 봉봉 밑에서 키우던 오골계, 토종닭들이랑 같이 키우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과 함께 살아서 야성을 잃은 또치는 다른 닭들에게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 속이 상한 나는 다시 또치를 집 안으로 들이겠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또치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었다.
술에 취한 채로 비틀거리며 동네 어귀를 기웃거리고 나직이 또치를 부르며 돌아다니다가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 방에 앉아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도대체 이놈이 어디로 간 거지?’
한참을 그러고서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출출해져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집을 수리하기 전이라서 그 때는 부엌이 따로 있었다. 가스렌지 위에 솥이 하나 있다. 국이라도 있으면 밥에 말아 먹을 요량으로 뚜껑을 열었더니... 서너 개의 닭 모가지와... 예닐곱 개의 닭발이... 있다.
뒤통수가 번쩍이더니, 뒷목줄의 근육이 심하게 당겨져 오는 것을 느낀다. 이 중에 분명히 또치가 있을 거라 짐작했다. 근데...
‘이 중에 어느 놈이 또치지?...’
솥 안에 든 닭모가지와 닭발을 아무리 헤집어도 어느 놈이 또치인지 도저히 알 도리가 없다. 그래서... 솥을 통째로 들고 집 대문 앞 공터로 나갔다. 구덩이를 파고 불을 일으키고는 장작을 태웠다. 장작이 활활 타오를 때에 솥에 든 것들을 불 위에 붓고 태웠다.
고기 굽는 냄새가 난다. 그 냄새에 군침이 도는 것이 아니라,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 예전 영천에서 키우던 개들이 생각난다. 겨울에 얼음 위에서 썰매를 끌어주던 셰퍼트... 든든한 형처럼 내 옆에서 나를 치켜 세워주었던 쫑이... 그 녀석들은 모두 누군가의 목구녕으로 침과 함께 삼켜졌을 것이다.
사람은 고기를 먹고 산다. 고기가 사람에게 요긴한 먹이인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 개들과 또치는 나에게 고기가 아니었다. 나의 친구들이었다. 나와 함께 소중한 추억을 나눴던 친구들인 것이다. 불길이 사그라들 즈음에 눈물을 훔치고 흙으로 덮었다.
세상 모든 일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는 걸 나도 안다. 하지만, 상처는 받고 싶지 않았다. 친구를 잃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더군다나 이렇게 처참하게 먹이로 전락해 버린 친구의 주검은 나의 가슴을 찢어 놓는 것 같다.
그 다음 날 아침.
늦은 시간까지 또치의 주검을 태우느라 늦잠을 자고 있는데... 어머니가 나를 깨우신다.
“야이 야~ 은아!”
“와요?”
“니, 부엌에 있던 솥, 못 봤나?”
“그거 내가 화장했으요.”
“뭐?... 뭐이가 어째?”
“어무이, 거기에 또치도 있었지요?”
그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일그러지셨다.
“또치고 지랄 나발이고... 그거를 홀랑 다 태웠다고?!”
“어무이는 내가 또치를 우째 생각하는지 아시면서 우째 그럴 수가 있습니꺼?”
“야 이눔아, 닭이 닭이지. 우짜기는 뭐가 우째! 너거 외삼촌, 몸이 허할까봐 이 어미가 닭 세 마리 잡았다. 그라고 남은 모가지하고 닭발로 어미가 몸보신 좀 할라꼬 했더니 그거를 홀랑 태워?!”
어머니는 식사 때마다 나와 곧잘 실랑이를 벌이곤 하셨다. 식탁에 생선이 올라오면, 어머니는 내장과 머리만 드신다. 혹여나 내가 젓가락이 한 번이라도 더 가는 반찬에는 절대로 손을 대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식사 때마다 나와 싸우신다.
어머니 밥 위에 내가 반찬을 집어 얹히기라도 하면...
“야 이눔아, 엄마 식성을 니가 조종하는 거냐? 엄마는 내장이 더 맛있어서 그런 건데, 니가 뭘 알고 지금 그카는 기가?”
그러면서 다시 반찬을 제자리에 돌려놓으신다.
“아이구 할마시요! 맛난 거 싫어하는 사람이 어뎃능교? 다 늙어가 고생 그마이 했으면 됐지! 인자는 맛난 거 고마 아끼고 팍팍 좀 무소! 요새 어데 못 먹어가 사는 사람이 어뎃다꼬 그렇게까지 카능교. 내가 밥알이 목구녕에 걸리가 못 먹겠으요.”
그런 어머니가 외삼촌에게 주고 남은 닭모가지와 닭발로 몸 보양을 하시려고 했다며 노발대발 하시니 내가 말문이 막힌다. 더 이상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날 경주에 있던 여친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하였더니 그녀가 대성통곡을 하고는 한걸음에 대구로 왔다.
“야, 권 재은! 니 어째 그럴 수가 있노! 엉?”
“......”
그녀가 또치를 얼마나 애지중지 아꼈는지를 알기에 뭐라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 어무이하고 얘기 좀 해봐야겠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고는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붙들고 매달렸다.
“놔바라! 이거!”
그녀의 기세로 봐서는 정말 어머니에게 오지게 따지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한 손으로는 그녀의 팔을 붙들고 한 손으로는 머리통을 쥐어짰다.
“아... cb... 돌겠네. 야! 니, 내하고 낮술 한 잔 하러 가자.”
그녀를 데리고 동네 인근에 있는 짜장면 집으로 가서 대낮부터 술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에게 끊임없이 질책을 하였고, 나는 이를 묵묵히 받아들여야만 했다.
나는 시간이 흐르면서 어머니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봉봉 밑에서 적응을 못해 다른 닭들에게 집중 공격을 당해서 또치가 고통 받고 있는 것이 어머니는 못내 안타까우셨던 것이다. 그런 것이 아니었다면 어머니는 또치를 처치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내가 또치를 많이 아낀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은 끝까지 또치를 책임 질 수 없었던 그녀와 나의 오판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끝까지 책임지지도 못 할 거면서 소유욕만 앞섰던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녀에게 차분히 이런 나의 생각을 전했다. 다행히 그녀도 나의 생각을 받아들이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낮술에 취한 우리는 여관으로 갔다. 벌거벗은 그녀를 껴안고 격렬히 달구었다. 그런다고 그녀가 또치를 잊지는 못하겠지만, 뜨거운 오르가즘을 안겨주어서 잠시라도 그녀가 또치의 죽음으로 인해 생긴 아픔을 감싸주고 싶었다.
그녀가 나의 뒷목을 끌어당기며 더욱 강렬하고 깊숙하게 자신을 몰아줄 것을 요구했다. 그날의 섹스는 매우 거칠게 진행됐다. 그녀의 신음 소리가 커질수록 잠시라도 또치를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을 움켜쥐고는 허리를 구부린 채로 있는 힘껏 빨아주었다. 뭐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아서...
격렬함이 지나고 그녀의 배 위에 지쳐 쓰러진 내가 가쁜 숨을 고르고 있을 때,
“배고프다.”
그녀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꺼냈다.
“뭐 하나 시켜 먹으까?”
나는 그때까지도 그녀에게 미안한 감정이 남아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교촌치킨 하나 시켜봐라. 골드로.”
“......”
나는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닫혔다.
“간장 반, 양념 반으로. 알았나?”
그래... 배고프다잖아... 배고프면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리고 잠시 뒤에 그녀가 닭다리를 뜯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참... 뭐... 쫌 그렇다...
“아까는 또치 죽었다고 그 지랄 발광을 하더니. 닭이 목에 넘어가나?”
“야들은 또치가 아니잖아.”
나는 그런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칼든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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