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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원의 심각한 수탈로 인해 무역이 박살 나 있었다. 13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원과 고려의 관계가 변화하면서 육로를 경유한 민간상인들의 활동이 재기되었고, 14세기 전반에는 더 많은 고려 상단이 교역에 앞다투어 뛰어들었다. 이를 보여주는 훌륭한 사료가 <노걸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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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몽골어 교본 노걸대(조선시대)


<노걸대>는 교역을 위해 원제국을 방문하던 상인들의 언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려 정부가 직접 찍어낸 회화용 교습서였다. 요즘식으로 하면 '쉽게 배우는 몽골말(상인 편)'쯤 되겠다. 왜 '상인' 편인고 하니, 이 책의 구성이 매우 흥미롭기 때문이다. <노걸대>는 고려 상인이 고려를 떠나 원 대도에 도착, 무역을 벌이는 과정을 고대로 따라 하고 있다. 학창시절 우리가 영어 교과서에서 본 '외국 여행에 나간 철수의 대화' 편을 상상해보면 좋다. 


<노걸대>를 구성하는 시나리오는 판본에 따라 좀 다르지만 기본구조는 이런 식이다. 주인공은 1월에 모시 130필, 인삼 100근, 말 10여 필을 갖고 고려를 출발한다. 도보로 요동지역을 거쳐 북경에 도착, 물건을 팔고 돈을 마련한다. 5월경 여러 지역에서 견직물 및 각종 잡화를 구매한 후, 직고에서 그것을 배편으로 본국으로 운반해 10월에 고려에 도착하는 식이다. 장장 10개월을 투자해야 하는 긴 시간 동안 육로를 통해 중국으로, 해로를 통해 고려로 귀환하는 스토리는 당시 시대상을 그대로 옮겨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려 상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물품은 역시 고려 인삼이었다. 충숙왕 때의 문인 근재 안축의 저서 <근재집>에는 '뱃상인과 마차상인들이 앞다투어 인삼을 매입해 중국에 높은 가격으로 팔았으며 이에 따라 관가도 이익을 탐했다'는 기록이 있다. 인삼은 이렇듯 고려 후기까지 한반도를 대표하는 특산품이자, 경쟁력을 갖춘 몇 안 되는 상품이기도 했다.


고려 모시의 경우도 원제국의 수요가 높았는데, 처음엔 모시에 대한 수탈을 위해 시작한 것이 수출로 이어지자 돈 좀 있는 사람들이 죄다 견직업, 저직업으로 뛰어들었고, 결국 생산구조가 왜곡되고 농가의 마직업이 밀려버리는 상황까지 낳게 된다. 대기업이 뛰어들면 골목상권은 늘 나가리인 법이다.

 

한편 고려 상인들이 수입한 물자 또한 <노걸대>에 상세히 소개되어있다. 다양한 종류의 직조품을 비롯해 갓끈, 바늘, 약재, 화장품, 화장 용기, 빗., 장신구, 각종 칼, 생활 용구, 놀이기구, 장식 용구, 도량형기, 서적 등이 수입되었다. 책에서 중국 상인이 '고려에서는 좋은 물건은 안 팔리고 조악한 물건이 빨리 팔린다'라고 하는데, 이처럼 고려 상인들이 구입해 간 것이 사치품보다는 일상 생활용품이 주가 되었던 것 같다. 어떤 연구에서는 고려 상인이 인삼 등을 가지고 중국에 내다 판 이익보다, 중국의 물건을 수입해 고려에 돌아와 판 이익이 훨씬 좋았다는 이야기도 하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50퍼센트에 이르는 이득도 거둘 수 있었다니, 그야말로 10개월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중국행이었다.

 

그런데 고려 상인들은 갑자기 이렇게 활발한 차이나 드림을 꿀 수 있었던 걸까? 1편에서 보았듯 충렬왕이 항구지역의 교역에 직접 시도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이렇게 교역이 활발해진 것은 충렬왕뿐 아니라 아들 충선왕, 손자 충숙왕, 증손 충혜왕 시기까지 적극적인 대외교역 정책을 펼쳤던 것이 큰 이유가 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각 왕들마다 또 색깔이 다 달라서 제법 재밌는 부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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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선왕


충선왕은 고려 후기의 국왕 중에서도 무척 유명하다.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이며 고려국왕과 심양왕이라는 두 개의 지위를 동시에 가졌고, 죽을 때도 대도에서 죽은 사실상 몽골인이나 다름없지만, 재위 기간도 짧고 고려에 대한 애착이 없어 중국에서 통치했음에도 고려 후기 시스템의 거의 모든 것을 손본 인물이다. 가히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라 할 만하다. 그는 고려의 정치, 경제, 군사, 지방, 국가의례까지 포괄하는 제도를 싹 뜯어고쳤다. 동서교역이 융성한 원나라에 체류 중인 그가 고려의 대외무역 제도에 관심 갖지 않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다.


1308년, 충선왕은 고려 정부 내의 여러 부서 중 각종 '직물' 생산에 개입되 있던 정부부처들을 돌연 통폐합한다.


 

도염서(都染署). 〈옷감의〉 염색을 담당하였다. 문종(文宗) 때에 〈관제를〉 정하였는데, 영(令) 1인은 관품이 정8품, 승(丞) 2인은 정9품이었다. 충렬왕(忠烈王) 34년(1308)에 충선왕(忠宣王)이 잡직서(雜織署)와 병합하여 직염국(織染局)으로 하면서 선공사(繕工司)에 소속시켰다. 사(使) 2인을 두었는데 그 중 하나는 겸관(兼官)으로 〈관품은〉 종5품이었으며, 부사(副使) 1인은 종6품, 직장(直長) 1인은 종7품으로 하였다. 뒤에 충선왕이 옷감을 짜고 염색하는 등의 일이 제대로 행해지지 않는다고 하여 내알자감(內謁者監)·내시백(內侍伯)·내알자(內謁者)·장원정직(長源亭直) 각각 2인씩으로 하여금 그 일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충선왕〉 2년(1309)에 〈직염국을〉 분리하여 도염서로 하였으며, 다시 영을 두고 정8품으로 하고, 승은 정9품으로 하였다. 이속(吏屬)은 문종 때에 사(史) 4인, 기관(記官) 2인을 두었다. 

고려사 도염서 편

 


원래 도염서였던 직염국은 또 다른 방직부서였던 잡직서를 병합해 만든 부서였다. 통폐합에 그친 것이 아니라 기존 관원의 품계가 정8품이었는데 신생부서에 종5품의 품계를 수여했다. 직염국 리즈시절이 열린 것이다. 게다가 '직염업무에 누락되거나 미비한 점이 많다고' 지적하면서 내시들과 정3품 관료들이 몸담은 내알사를 참여시켰다. 이들은 국왕의 최측근 기구였으니, 이것은 충렬왕이 응방을 쓱싹하려는 것과 비슷하게 국가의 직물 산업을 국왕이 직접 관리하기 위한 조치였다.


고려가 생산한 직물들 중 중국에서도 경쟁력이 있는 제품은 모시였다. 충선왕의 지적에서 볼 수 있듯 염색모시는 특히 귀한 사치품이었는데, 아마도 충선왕은 이 모시와 염색모시 사업을 거국적으로다가 벌이려 한 듯싶다. 그는 1298년 6월, 동인도지역의 동서교역 중심지인 바이마르국 왕자의 예방을 받은 적도 있다. 


 

마팔국왕자 보카리가 예물을 바치다
마팔국(馬八國)의 왕자(王子) 패합리(孛哈里, 보카리)가 사신을 보내와서 은실로 만든 모자, 금을 수놓은 수박(手箔)과 침향(沈香) 5근 13냥, 토포(土布) 2필을 바쳤다. 이보다 먼저, 왕이 채인규(蔡仁揆)의 딸을 승상 상가(桑哥, 셍게)에게 시집보냈었다. 상가가 주살되자 황제가 채씨(蔡氏)를 패합리에게 하사하였다. 패합리는 그 나라의 국왕과 틈이 생겨서 원(元)으로 달아나 천주(泉州)에 살고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채씨 연고로 사신을 파견하여 통교하게 한 것이다

고려사, 충선왕 원년

 


이렇듯 해외 사정에 빠삭한 동시에 고려와 원 왕족 계보에서도 나름 한자리 하는 인물이니, 그가 택한 염색모시 사업은 잘만 하면 이전에 없었던 금싸라기가 될 수도 있는 아이템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시도는 1309년, 1년만에 도염서로 도루묵되면서 좌절된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고려에 없던 충선왕과 불안했던 정치 현실, 국유화를 반대하는 개인 사업자 또는 대기업들 간의 갈등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튼 사업은 좌절되었고, 충선왕의 재위 기간도 그리 길지 않아서 염색 모시 사업은 국가적으로 성장하진 못하게 된다.

 


충숙왕 


충선왕의 아들 충숙왕도 꽤 재밌는 인물이다. 부왕 충선왕이 '팔아먹을 물건'에 집중했다면, 충숙왕은 '팔아먹을 사람'에 주목했다. 전례없이 조정에 요직에 상인들을 등용하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왕이 예성강에서 천민들에게 관직을 주다
갑인 왕이 미행(微行)으로 예성강(禮成江)에 행차하였다가 상인(商人)의 아들인 이노개(李奴介)를 밀직부사(密直副使)로, 내수(內竪)의 사위인 김취기(金就起)를 군부판서 응양군상호군(軍簿判事 鷹揚軍上護軍)으로 임명하였다.

1328년 8월, 충숙왕 15년

 


사료가 너무 건조해서 국왕의 최측근인 밀직부사라는 직책을 이노개라는 상인의 아들이자 천민이 받은 이유를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충숙왕이 갑자기 미쳤는지 어쨌는지 몰라도 이노개의 의견은 어떤 형태로든 국정에 반영되었을 것이다.


또한 1325년 충숙왕이 억류에서 풀려나 귀국길에 오르는데 큰 기여를 한 인물이 손기라는 장사꾼이었던 것도 주목할 만하다. 충숙왕 재위 후반기는 이렇듯 상인 출신들이 하나둘 요직을 차지해 측근에서 보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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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왕은 재위 전반기만 하더라도 국내의 상업활동 자체에 대단히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부왕 충선왕과 모든 면에서 갈등을 빚던 그는, 충선왕의 증세 정책에 대해서도 깠고, 충선왕의 대외 무역 정책도 깠다. 재위 전반기에 충숙왕은 찰리변위도감(拶理辨違都監)이란 개혁기구를 앞세워 토지와 백성의 소유권을 다시 세워주는, 이른바 '소유권 정립'과 '분배 정의' 실현에도 나섰다. 물론 이것도 부왕 충선왕과의 갈등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런데 이 같은 정책으로 징수할 수 있는 세금이 매우 적었고, 국고는 고갈되기 시작했다. 결국 충숙왕은 충선왕과의 갈등이 마무리되고 난 재위 후반기에 이르러서 그간의 여러 정책기조들을 바꾸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가 충숙왕의 상인 등용 시기와 맞물린다. 충숙왕은 상인들을 이용하여 증세 이외의 방식으로 국가 재정을 보완하는 정책을 펼치려 했던 듯하다. 이들을 어떻게 써먹었는지는 구체적인 사료가 없어 파악이 불가능하지만, 충숙왕이 원에 머무를 때 있었던 에피소드를 통해 대강이나마 추측할 수 있다.


충숙왕은 1321년 원에 입조한 후 5년간 억류되어 있을 때, 상인 양재와 왕삼석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훗날 1332년 충숙왕이 잠시 퇴위했다가 다시 복위하게 되자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특히 양재가 당시 재무관료 채홍철과 합세해 실세 노릇을 독톡히 한 것으로 보인다.



양재가 충숙왕의 총애를 믿고 권력을 휘두르다 
양재(梁載)의 처음 이름은 양장(梁將)이며, 연남(燕南) 사람이다. 왕삼석(王三錫)에게 붙어 그 연줄로 권력을 행사하니 조정 내외에서 그를 미워하였다. 왕삼석이 죽자 양재는 연경(燕京)으로 돌아갔다. 충숙왕(忠肅王)이 원에 가자 양재가 또한 장백상(蔣伯祥)과 함께 음흉한 모략을 꾸미다가 여의치 않자, 드디어 아첨으로 왕을 섬겨 측근으로 총애를 받고 우문군(佑文君)에 봉해졌다. 〈양재는〉 낭장(郞將) 조신경(曹莘卿)과 함께 전주(銓注)를 담당하면서 환관들과 결탁하여 은밀하게 정치권력을 가지고 농간을 부리니, 청탁하는 자들이 문을 메웠으며 뇌물이 공공연하게 오고갔다. 많은 사대부(士大夫)들이 〈청탁이나 뇌물을 통해〉 그 집 문에서 나왔으니, 신경(莘卿)은 좌대언(左代言)이 되었으며, 최노성(崔老星)은 회의군(懷義君), 신시용(申時用)은 대광 원윤(大匡 元尹), 윤현(尹賢)은 지평(持平)이 되었다. 돈을 지불하고 관직을 얻은 자는 거의 100여 인에 이르렀는데, 왕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양재는 또한 자기와 친한 이윤(李閏)을 채홍철(蔡洪哲)·안규(安珪)에게 부탁해 과거에 급제시키자, 당시 상인이나 잡류(雜類)들이 앞다투어 양재에게 의탁했다. 양재의 장인인 옥천우(玉天祐)가 재상(宰相) 이설(李偰)·김원식(金元軾)과 노비(奴婢)를 가지고 다투었는데, 총랑(摠郞) 윤혁첨(尹奕瞻)이 주저하면서 오랫동안 판결하지 않자 양재가 윤혁첨의 〈직위를〉 박탈하고 윤현으로 대신하니, 윤현이 즉시 판결하여 옥천우에게 〈노비를〉 주었다. 첨의사(僉議司)에서 회합하여 고신(告身)에 서명하려 하였는데, 채하중(蔡河中)이 양재가 임용한 한인(漢人)의 고신을 보고 마침내 〈그 중〉 3~4매를 찢어버렸다.

 

고려사 열전 왕삼석 편



비판적인 논조로 작성된 사료를 볼 때, 이들의 행동이 고려에게 과연 이득이었나는 좀 더 따져봐야 할 소지가 있다. 어찌 되었건 이들의 주도 아래 고려 및 중국인 상인들이 고려 조정에 채용되었고, 나아가 회회인 등 서역 상인들도 끌어들이려 했다. 1335년 4월 양재가 주도한 인사에서 색목인 최노성이라는 인물을 회의군으로 책봉한 바 있다. 최노성이란 인물이 무슬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색목인으로써의 배경과 그가 가졌던 막대한 재력으로 볼 때 그는 동서교역에 참여하는 거상 중 한 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듯 인적 자원을 이용함으로써 고려의 대외무역은 제법 활기를 띄었다. 역시나 사료가 부족해 정확한 실상은 알 수 없지만, 얼마 전 발견된 로마의 교황 요한 22세가 쓴 편지의 수신인도 1333년의 충숙왕 시절이었다. 1333년은 상인들이 대거 조정에 등장하던 시기와 일치하니, 당시의 시대 분위기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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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이 충숙왕에게 보내려했던 편지

 

충혜왕


마지막으로 살펴볼 충혜왕의 시도는 이전의 시도들과는 달리 뚜렷한 결과를 내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물론 한국사 최악의 막장 군주로 유명한 왕이긴 하지만, 최근엔 몇몇 사례에서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점도 있다. 경제적인 면에서만 보자면, 그는 가혹한 재정정책과 무모한 대외무역을 시도했다. 그의 재정정책은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함이었다는 것에 대한 이견도 있다. 대충 사욕 반, 공익 반의 반반 정도로 쳐주자.


그렇지만 그의 무역정책이 무모했다는 점은 이견의 여지가 없다. 삼현 지역에 만들어놓은 신궁을 방직시설로 활용하면서, 업무를 충혜왕 성에 차지 못하게 한 두 여인을 몸소 때려죽이는 만행을 저질렀으니 무모하다 못해 개념이 없다 하겠다. 

 

삼현신궁은 대규모 방직시설로 설계된 공간이었다. 다음의 사료를 보자.

 


은천옹주(銀川翁主) 임씨(林氏)는 상인(商人) 임신(林信)의 딸로 단양대군(丹陽大君)의 계집종이었다. 사기(沙器)를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다가 왕이 보고 총애하였다. 〈충혜왕 후〉 3년(1342), 왕이 장차 화비(和妃)를 맞이하려고 하였다. 임씨가 이를 시샘하니 이에 책봉하여 은천옹주로 삼아 그 마음을 달래자 사람들이 사기옹주(沙器翁主)라 불렀다. 왕이 삼현(三峴)에 신궁(新宮)을 세웠는데 그 제도가 왕이 사는 곳과 같지 않았다. 고옥(庫屋) 100칸에 곡식과 비단을 채워두고 낭무(廊廡)에는 비단 짜는 여자[綵女]를 두었다. 어떤 두 여자가 뽑혀 들어가게 되자 눈물을 흘리며 우니, 왕이 성내어 쇠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또 방아와 맷돌을 많이 두었는데, 모두 옹주의 뜻이었다. 왕이 열을 돋우는 약[熱藥]을 좋아하여 여러 비빈(妃嬪)들이 모두 능히 임금[御]을 감당하지 못하였으나, 오직 옹주만이 총애를 얻었다. 석기(釋器)를 낳자 복연(福宴)을 열고는 저자의 상인들이 파는 비단을 빼앗아 폐백(幣帛)으로 삼았다. 왕이 원으로 잡혀가게 될 때 고용보(高龍普) 등이 왕의 내탕고(內帑庫)에 봉인(封印)을 붙이자 옹주가 울며 말하기를, “왕께서 다만 예복(禮服)만 입고 두터운 가죽 겉옷을 입지 않으셨는데, 지금 추위가 심하니 바라건대 왕에게 겉옷을 바치게 하여 주시오.”라고 하니, 고용보가 허락하였다. 고용보는 또 옹주 등 궁인(宮人) 126인을 쫓아내 버렸다.


고려사 열전 은천옹주

 


비단 짜는 여자들을 두고 방아와 맷돌을 두었다는 점, 이를 청한 은천옹주가 상인의 딸이라는 점 등으로 볼 때 삼현신궁은 그야말로 방직공장이나 다름없었다. 할아버지 충선왕이 아이템을 선정하고, 아버지 충숙왕이 아이템을 팔아먹을 사람들을 골랐다면, 충혜왕은 이제 공장을 세워 본격적으로 찍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왕들이 줄줄이 주목한 것을 보면 당시 고려의 모시가 정말 핫하긴 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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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관음도, 고려 비단 위에 채색한 작품이다

 

그리고 이 생산물들은 실제로 팔리는데 사용되었다. 충혜왕 후반기의 여러 기사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남궁신(南宮信)을 파견하여 베 20,000필 및 금, 은, 초(鈔)를 가지고 가서 유주(幽州)·연주(燕州)에서 매매하게 하였다.

342년 3월



왕이 의성창(義成倉)과 덕천고(德泉庫), 보흥고(寶興庫)의 베 48,000필을 내어 저자에 점포[鋪]를 열게 하였다.

1342년 3월



최안의(崔安義)를 시켜 낙타(駱駝) 3마리를 사오게 한 다음 비단덮개[錦幪]와 주옥(珠玉)으로 장식하고 거기에다가 보초(寶鈔)를 실었다.

1343년 9월


 

이렇듯 그가 직접 매질하며 생산했던 비단들의 일부를 아예 '회회인들에게 주어 그 이윤을 취했다'는 기록도 있다. 증조부 충렬왕이 '황제의 신임을 받는 회회인'을 초빙하려 했던 것을 성공시킨 것이다. 또한 증조부 충렬왕이 성공하지 못했던 응방의 사유화까지 완벽히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충렬왕의 교역시도는 불발로 끝났지만, 충혜왕은 그 이윤까지 취함으로써 나름대로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여러 사료로 볼 때 충혜왕이 거래하던 양은 몇만 필 규모였으니, 그 이윤도 막대했을 것이다.

 

충혜왕의 비지니스가 성공했던 것은 당시 원나라 시장에서 고려의 비단이 통하기도 했지만, 충혜왕의 개인적인 인맥도 있었다. 그는 어릴때부터 위구르 소년들과 함께 자랐고, 위구르 여인을 사랑하기도 했으며, 당대의 권신이자 엄청난 재력가인 엘 테무르가 충혜왕의 정치적 후원자이기도 했다. 엘 테무르는 서역과의 교역에 깊은 관심과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여기에, 일칸국의 마지막 칸인 아부 사이드와 충혜왕의 접촉도 주목할 만하다. 일칸국의 아부 사이드는 원나라와의 무역에 관심이 많은 인물이었고, 실제로 재위 내내 성과를 이룬 왕이었다. 그런 그가 충혜왕 즉위 초기(1331년) '토산품'을 보낸 것으로 확인된다. 


당시 일칸국과 원나라의 교역은 태정제의 승하로 인해 잠시 쇠퇴하던 시기였고, 일칸국은 새로운 시장을 모색하려는 시도로써 충혜왕과 접촉한 것이 아닌가 한다. 실제로 충혜왕이 '낙타를 사와서 비단으로 치장했다'는 사료가 흥미롭다. 충혜왕의 욕심은 원나라와의 수만필 비단 교역으론 충족할 수 없었던 게 아닐까. 그러나 충혜왕 역시 폭정의 결과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고, 공민왕이 즉위하며 원과 고려의 관계가 변화하면서 고려의 대외무역은 다시 쇠퇴 일로로 접어든다.


13세기 말, 회회인들의 도래에 대응하여 동서 세계가 교역에 뛰어들고자 했던 충렬왕의 시도는 나가리되었지만 이후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은 서역교역에 대해 더 빠삭한 정보, 더 훌륭한 상품, 더 많이 찍어내는 방법, 더 잘 파는 상인들을 이용하여 제각기 세계 교역망에 직접 접촉할 수 있었다. 중국 한인들의 방문이 거의 끊어진 상황에서, 세계 무역을 주도하고 있던 회회인들을 통해 한반도를 새로운 시장으로 만들고자 하는 노력들도 확인된다. <노걸대>는 그러한 노력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그야말로 암흑기로 대표되는 충 시리즈 왕들 시기. 폐위와 복위가 반복되고 온갖 막장짓을 저질러서 누가 누구인지 헷갈리는 시호들이 반복되는 이 시기에 재위했던 고려 국왕들조차도 변화하는 세계 시장을 꿰뚫어보고 그에 발맞춰 국가적인 정책을 만들어 내었다. 지금의 한국은 과연 그 같은 통찰력과 결단력이 있는지, 곁다리를 살짝 붙이며 글을 맺어본다.


 

*참고 및 출처


<고려와 원제국의 교역의 역사>, 이강한 저

<13~14세기 고려-원 교역의 전개와 성격>, 이강한 (서울대학교)

忠烈王代 初의 麗元關係와 政局運營, 권영미(연세대학교)

고려시대 대외무역에 관한 연구, 강글온(창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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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 대외무역 리즈시절 탐사기 1 : 회회인을 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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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coc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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