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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나가는 여자 (남자) 만나지 마라.”는 포스팅이 어제 오늘 유난히 눈에 띈다. 하기사 ‘성령으로 잉태하사 유부녀에게 목사의 씨를 심으시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필두로 교회 내에서 별의 별 꼬라지를 다 시전하고 있으니 ‘개독교’에 대한 불신과 증오가 만연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날나리 기독교인으로서 나는 이 찬송가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 작사자는 19세기에 활약한 미국의 문필가이자 언론인이며 외교관 제임스 로웰이다. 1840년대 중반 미국은 힘을 주체 못하는 10대 불량배처럼 팽창주의 일로를 걷고 있었다. 그 힘자랑의 희생양이 된 것이 이웃 멕시코였다. 1846년 마침내 미국은 멕시코를 공격했고 멕시코 영토의 절반이 넘는 땅덩이를 차지했다. 텍사스, 캘리포니아, 유타, 네바다, 콜로라도, 애리조나 등등이 미국으로 귀속되면서 미국은 오늘날의 영토를 거의 완성하고 대서양과 태평양을 모두 접하는 대국이 된다.

그러나 이 팽창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제임스 로웰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노예제도에 대한 열렬한 반대자였던 그는 미국의 팽창 야욕이 불러온 멕시코 전쟁에도 반기를 들었다. 그는 “현재의 위기”라는 제목의 장시(長詩)를 발표하며 전쟁 반대를 외쳤는데 이 시를 정리하여 노래로 만든 것이 찬송가 <어느 민족 누구게나>다.


https://youtu.be/GDDydUnL3cQ


1.

어느 민족 누구게나 결단할 때 있나니

참과 거짓 싸울 때에 어느 편에 설 건가

주가 주신 새 목표가 우리 앞에 보이니

빛과 어둠 사이에서 선택하며 살리라


2.

고상하고 아름답다 진리편에 서는 일

진리 위해 억압받고 명예 이익 잃어도

비겁한 자 물러서나 용감한 자 굳세게

낙심한자 돌아오는 그날까지 서리라


3.

순교자의 빛을 따라 주의 뒤를 좇아서

십자가를 등에 지고 앞만 향해 가리라

새 시대는 새 사명을 우리에게 주나니

진리 따라 사는 자는 전진하리 언제나


4.

악이 비록 성하여도 진리 더욱 강하다

진리 따라 살아갈 때 어려움도 당하리

우리 가는 그 앞길에 어둔 장막 덮쳐도

하나님이 함께 계셔 항상 지켜주시리 아멘



기독교인임을 자처하지만 여기서 ‘주’를 꼭 신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역사라고 생각해도 좋고 미래라고 생각해도 좋다. 삶이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지만, 때로 우리는 참과 거짓, 빛과 어둠 사이의 ‘결단’을 요구받는다. 특히 요즘은 분명히 그런 것 같다.

유치원 아이도 코웃음을 칠 일이 대한민국의 치자(治者)와 그 내밀한 비선(秘線) 사이에서 벌어졌다. 인적쇄신을 한다지만 가장 쇄신돼야 할 사람을 놓아 두고 하는 인적 쇄신이 무엇이 의미가 있겠으며 숱한 사람들의 사표를 받은들 사표를 받는 사람이 가장 먼저 사표를 내야 할 사람이라는 아이러니를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이것이야말로 ‘현재의 위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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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오욕으로 얼룩진’ 우리 현대사를 얘기하며 사악하고 탐욕스럽고 이기적이었던 지배층을 규탄하는 경우가 많으나 사실 그 역사의 책임은 그 나쁜 놈들 뿐 아니라 그 나쁜 놈들을 제대로 상대하지 못했던 백성들, 인민들에게도 어김없이 돌아간다.

탐관오리와 세도 가문들이 다 파먹어 버린 봉건 제도를 혁파하지 못하고, 만만한 아전은 때려 죽여도 (왕이 보냈기에) 사또는, 병마절도사는 감히 죽이지 못했던 19세기의 농민들, 폭정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하겠다고 나서면서도 “우리 임금은 현명하시니”를 입에 달고 살았던 갑오농민군들, 만민공동회에 열렬히 참가했으나 국왕이 배후조종한 관제 깡패들에게 박살이 난 뒤엔 어영부영 물러나 술이나 먹었던 민중들 그 모두는 오늘을 쌓아가고 있었다.

말이 안되는 상황에서 말하기를 포기하고,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데도 내 일이 아니라 먼산만 바라보고 있는 이들은 결국 어둠을 택하는 일이고 거짓의 편이 되며, 결국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과 나라를 악에 빠뜨리게 된다. 그것을 절대로 원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결국 ‘물러서는 비겁한 자’가 되는 것이고 ‘낙심한 자’로 역사의 낙인을 이마에 받아 자신의 후손들에게 그만한 짐을 지울 수 밖에 없다.

아무리 고쳐 생각하고 재우쳐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도 나는 저 사람이 대통령으로 자리에 앉아 있는 자체를 용납할 수 없다. 저이의 무슨 말을 어떻게 믿고 무슨 정신으로 따르며 그 손에 들어 있는 막중한 이름과 권력을 유지시킨단 말인가.

이런 지경을 만들고도 저 사람이 끌어내려지지 않는다면, 앞으로 우리는, 우리 후손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든 폭군이든, 암군이든 하다못해 악마이든 탐욕꾼이든 그 어깨 위에 올라앉은 가위같은 통치자를 몰아내지 못하는 역사 속에 살게 될 것이다. 저런 자가 대통령으로 앉아 있는 나라는 저보다 못한 자도 용인할 것이고, 저보다 더한 자도 수긍하게 된다. 그런 나라가 나라일 것인가.

저 사람을 몰아내지 못하면, 스스로 내려올 형편을 만들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후손들은 역사를 배우며 이 세대를 욕할 것이다. “어떻게 수천만이 그렇게 일률로 한심할 수가 있었던 거지? 그때 그 인간들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 모양이다. 나무로 깎은 목각 등신들 같으니라고.” 나는 그 말을 듣고 싶지 않다.

젊은이들 안 나온다고 한탄할 것 없다. 나올 사람들은 나와 주고 있다. 당장 주말 아르바이트 제치면 담주 생활비가 막막한 청춘들 잔뜩 만들어놓은 기성세대가 무슨 낯으로 젊은이들 기백을 탓하고 용맹을 허물하랴. 나이 든 사람들만이라도 더 나오자.


1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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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모든 인맥과 소속 단체에 함께 할 것을 호소하자. 창피하지 않은가. 우병우가 가고 BBK 덮은 놈이 왔다. 이 일을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참담하지 않은가. 도대체 사람을 뭐로 보는지 욕지기가 치솟지 않는가. 에라 세상이 원래 그런 거라고 등산 가지 말고, 놀러 가지 말고, 그날만큼은 집중하자.

11월 12일 청와대를 포위하자. 50만이 모이면 경찰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 100만이 모이면 청와대를 포위할 수 있다. 저 최순실의 피노키오로 하여금 잠 못 들게 하자. 기어코 내려오게 하자. 명예 따위는 바라지도 않는다. 우리에게도 체면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그리고 오기라는 게 있지 않은가. 저런 이가 대통령이라고 대통령 관저에 좌정하고 있다. 이게 도무지 가당키나 한 얘기인가.

어느 민족 누구게나 결단할 때 있나니

참과 거짓 싸울 때에 어느 편에 설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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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

편집 : 딴지일보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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