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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바쁘게 돌아간다. 독일에 짱박혀있던 최순실이 들어왔고, 관련자들이 검찰 조사를 받는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의혹과 주장이 제기되고, 다양한 이름이 ‘진짜 실세’로 거론된다. 문제의 태블릿이 누구의 것인지, 최순실의 딸은 어디에 있는지, 증거들이 인멸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끝없는 질문이 꼬리를 문다.


반면, 이 모든 난리판의 핵심 사실은 이미 밝혀졌다. 박근혜 대통령은 어린 시절에 최태민이라는 사기꾼에게 제대로 넘어갔고, 그 이후 평생동안 최태민의 가족 일당이 하자는 건 다 했다는 사실. 그 과정에서 실정법이나 사회적 규범, 상식적 도덕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는 사실. 이 사실들은 이미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이 사실들을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태블릿 PC가 누구거든, 최순실이 아니라 최순득이 실세든, 달라지는 건 없다. 정유라가 누구의 딸이며 나이가 몇 살인지는 그저 호사가들의 재밋거리일 뿐, 이 사건이 지니는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본질은 뭘까. 저 자명한 사실을 바탕으로 증명됨과 동시에 우리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그 문제 말이다. 워낙 상상을 초월하는 사태이다 보니 여러 가지 해석이 난무하고 있지만, 그 해석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대략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한국사회의 기득권층에게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방지할 능력이, 애초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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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현 정부 및 여당 고위인사들을 보자. 최순실에 대한 이들의 반응은 크게 둘로 나뉜다. ‘몰랐다(조인근 등)’와 ‘알았다(김무성 등)’. 하기사 세상만사 모르거나 알거나 둘 중 하나이기 마련이지만, 이 경우는 몰랐든 알았든 문제가 되는 외통수 상황이다. 알았어야 하는 사실들이고, 알았다면 문제제기를 했어야하는 사실들이기 때문에.


하지만 그들은, 실제로 몰랐거나, 혹은 알면서 가만히 있었다. 왜 그랬을까? 사실, 우리 모두는 답을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은 각자의 권력과 이익을 유지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 말이다. 집권 여당의 주요 인사가 전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자료를 아무렇지 않게 빼돌려 대중들 앞에서 읽어 재끼고, 한 사기꾼이 스스로 한 회사를 설립했다는 자백에 '주어가 없다’는 궤변을 서슴지 않는 등등, 일일이 말하려면 한도 끝도 없는 사례들을 통해,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그들에게 일말의 상식이나 양심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꾸준히 확인해왔다.


즉, 이런 정치인들이 권력을 쥐고 있는 한, 그들에게 불리한 진실은 영영 밝혀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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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렇게 가려지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존재하는 언론을 보자. 최태민 일가와 박근혜라는 정치인의 연결고리에 대한 의혹은 수십 년간 지속적으로 제기돼왔다. 그 모든 의혹들은 대부분 앞서 말한 정치세력에 의해 부정되면서 사그라들었다. 그러던 중 조선일보 및 TV조선, 한겨레 등의 언론사가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을 파고드는 가운데 JTBC가 문제의 태블릿PC를 확보하면서 지금의 상황에 이르게 된다.


한편, 조선일보와 TV조선의 보도에 사용되는 내용들 중 일부가 JTBC의 태블릿PC 보도 이전 시점에 이미 확보돼있었다는 점에서 또다른 의혹을 낳기도 했다. 이미 들고 있던 자료가 왜 이제야 나오냐는 것. 이에 대해 해당사는 지속적으로 ‘타이밍을 봐야 했다’는 식의 대답을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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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자협회, 이진동 TV조선 사회부장 인터뷰(링크)


언론 보도에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이유다. 위 링크의 인터뷰에서 TV조선 측이 얘기하듯 의혹만으로는 보도할 수 없고, 증언만으로는 증거가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보도가 나가는 시점에 대중들이 오해할 수 있는 사회적 맥락도 있을 수 있고, 그에 따라 같은 보도 내용이더라도 그 효과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다른 곳도 아닌 조선일보의 이 말에 대해 한껏 가소로움을 느낀다. 그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사실이 아닌 의혹만을 제시함으로써 전현직 대통령이나 고위공무원들을 궁지에 몰아넣어 왔다. 또, 출처를 밝히지도 않은 증언만으로도 마치 사실인 양 보도한 후 특정 정치 세력에게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기도 했다. 즉, TV조선이 밝힌 저 이유들은 ‘이번 건에 한해’ 적용된 기준이다. 그들은 다른 건이라면 다른 기준을 적용시킨다. 결국, 저 이유는 진짜 이유가 아니다. 진짜 이유는 그저 ‘지금 보도하는 것이 제일 유리하기 때문’이다.


즉, 이런 언론사가 여론을 형성하는 한, 그들에게 불리한 진실은 영영 알려지지 않는다. 

 

언론사도 결국 사기업이니 자사의 이익을 추구한다고 치더라도, 어떤 사실이 법의 테두리를 넘어선다면 이는 반드시 징벌되어야 할 터. 이번엔 바로 그러한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검찰을 보자. 의혹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최순실은 지난 일요일 오전 귀국했고, 월요일 오후 3시 검찰에 출석했다. 여러 연론에서 보도됐다시피, 여러 사건에서 검찰은 수사대상인의 입국 현장에서 소환하곤 했다. 하지만 최순실은 변호사를 통해 ‘몸을 추스릴 시간을 달라’는 말 한마디를 남긴 채 미리 대기중이었던 차를 타고 공항을 떠났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건 이뿐만이 아니다. 미르재단 등에 대한 검찰의 압수수색 당시 누가 봐도 텅 비어있는 상자를 층층이 쌓아 올려 들고 나오는 연극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 사태의 핵심인물들 모두가 조사를 받고 나가면 자유로이 어디든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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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의 이런 비상식적 행동들에 대해, 우리 모두는 사실 별로 놀라지 않는다. 니들이 그렇지, 라는 반응이다. 그 이유는, 마찬가지로 너무도 오랜 시간 동안 한결같은 검찰의 기본 태도를 지켜봐 왔기 때문이다. 그 태도는 이렇게 요약된다. “절대 주인을 물지 않지만, 주인이 물라고 하면 절대 놓지 않는다.” 한국 검찰에게 ‘정의’라는 것은 허울일 뿐, ‘주인’이 누구인지가 행동을 결정한다는 사실, 우리 모두는 의심치 않는다.


즉, 검찰이 이런 집단인 한, 그 검찰의 주인에게 불리한 진실은 영영 심판받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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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 가지 사실은 수십 년간 변하지 않았고, 이 셋의 관계 역시 변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사건은 사실상 끝난 셈이다. 우리는 그저, '이번엔 뭔가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으로, 사건이 벌어지는 과정을 순간적으로 즐길 뿐이다. 최순실은 인정한 만큼의 혐의만을 받은 채, 앞으로의 인생에 지장이 없는 수준의 처벌을 받을 게다. 외부 유출된 문건들은, 현행법상 대통령 기록물이라 볼 수 없다 판단될 것이고, 그나마 형식적으로 두어 명의 청와대 관계자가 총대를 메게 될 게다. 검찰은 수사 과정에서 일목요연한 내용을 언론에 전달할 것이고, 그 내용들은 하나같이 힘 빠지고 허탈한 내용들로만 가득할게다. 핵심 인물들의 혐의들 대부분은 증거가 불충분하거나, 현행법상 강한 처벌이 불가할 것이다. 그렇게, 몇몇이 실형을 선고받고 나서, 우리는 다음 대선이 끝난 2018년 즈음에, 그 몇몇이 감옥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음을 확인하고 분노할 테고, 그리고 몇 개월 후에는 소리소문없이 그 몇몇이 사면이라는 이름으로 풀려날게다.


이 사건은 어떤 면에서 친일파의 재산은닉, 군사정권의 폭압과 독재, 대기업들의 정경유착, BBK 주가조작, 사대강 대 사기극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알아야 할 사실을 대부분 알고 있고 이들에 대한 증거는 충분하다. 그 사실은 상식적으로, 도덕적으로, 사회규범적으로, 법적으로 용납될 수 없음이 자명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현재까지 대놓고 용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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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 어떤 사건들에 비하더라도 이번 사건이 더 충격적이고 절망적인 것은 사실이다. 저 많은 것들을 감내하고서라도 끝내 지키고 싶었던, 그래도 이 나라는 아주 최소한의 것만은 지켜지고 있으리라 여겨왔던 그 믿음이 철저하게 부정됐기 때문에. 하지만, 생각해보자. 대통령이 어떤 아줌마에게 휘둘린 정도가 아니라, 어떤 대통령이 제대로 사이비종교에 미쳐서 밤마다 인육을 먹었다 한들, 어떤 대통령이 알고 보니 한국인이 아니라 외국인이었고 그 나라에 모든 국부와 군사기밀이 유출되어왔다 한들, 지금의 한국은 아무렇지 않게 그 일들이 벌어질 수 있고, 그 진실들은 영영 밝혀지거나 알려지거나 심판받지 않은 채 지나갈 수 있는, 그런 나라인 것으로 밝혀졌다. 정치인들은 그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지 않을 것이고, 언론은 보도하지 않을 것이며, 검찰은 주인을 물지 않을 것이므로. 정치세력 - 언론 - 검찰의 이 지랄맞은 연결고리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부조리를 가능하게 만들며, 우리는 그 결과를 바라보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영영 이대로 살 수밖에 없는 것인가. 이 견고하고도 지랄맞은 연결고리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 터져나올 수 있는 이런 기상천외한 부조리들을 항상 염두에 둔 채 하루하루를 조심스레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인가. 그나마의 희망을 찾을 수 있는 건, 지난 우리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가, 영원할 것만 같았던 부조리를 타개했던 경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직까지 추징금을 다 내지 않기는 했지만, 우리는 분명 전두환과 노태우가 법정에서 손을 맞잡고 처량하게 서 있는 꼬라지를 보았고, 한때 모진 수모를 당했던 민주화 운동가들이 국가유공자로 대접받는 변화를 바라본 바 있다. 쓰러지지 않을 것 같던 봉건왕조들은 대부분 사라졌고, 영원할 것 같던 일부 종교의 권력도 대부분 약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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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계란으로 바위가 깨질 수 있는 건, 점차 많은 사람들이 그 바위를 더이상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겠다. 꼴 보기는 싫지만 어찌할 도리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더 이상은 두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의 차이가, 더 많은 사람들을 이루게 되면서 변화의 기틀이 마련되는 셈이다. 결국 유일한 희망은, 이 글을 함께 하는 우리처럼, 저 연결고리가 너무도 지랄맞아서 도저히 더이상은 못 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많아지는 것이 되겠다. 원론적인 얘기지만, 실제로 이 수밖에 없음은 자명하다. 갑자기 새누리당과 조선일보와 검찰이 정신을 차릴리는 만무하므로.


그러므로, 이 기상천외한 부조리가 정당한 결과로 끝맺어지려면, 아마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몇 년이 될지, 몇십 년이 될지는 모를 일이다. 어쨌건 오랜 시간이 지나, 이따위 세상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 온 나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기 전까지, 우리는 몇 달 묵은 똥을 싸재껴버리는 쾌감을 느낄 수 없을게다. 하물며 우리가, 세상이 이따위니 나도 손해만 볼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어느 정도의 부조리를 스스로 받아들여 버린다면, 심지어 우리 자식에게 ‘먹고 살려면 더러운 꼴도 좀 참고 그래야 되는 거야’라고 가르친다면, 우리의 쾌변에 대한 뜨거운 염원은 앞으로 수백 년이 걸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끔씩 삶의 무게에 짓눌려 약간의 편법, 조금의 인맥, 알량한 연줄을 바탕으로 아주 미약한 부정을 눈감아 줌으로써 달달한 떡고물 한 줌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 닥쳐온다면, 


2016년 초겨울, 이 모든 사단을 낸 지랄맞은 새끼들의 면면을 떠올리며, 


내가 시발 죽기 전에 이 새끼들 족치는 꼴은 보고 죽어야겠다는 일념으로,


그 유혹을 이겨낼 수 있기를,


내 자신에게 기대해본다.




춘심애비

트위터: @miiruu


편집: 딴지일보 coco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