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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뚝심송 추천10 비추천-1
2013. 08. 12. 월요일
정치부장 물뚝심송









햇볕이 쨍쨍 내려쬐는 한 여름이다. 중부지방은 대략 33도, 남부지방은 35도까지 올라가는 무더위란다. 솔직한 심정으로 이 정도 온도면 사람 잡는 날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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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도 잡고, 곰도 잡는다.


게다가 많은 수의 직장인들은 이미 휴가도 다녀왔다. 곧 있을 휴가에 대한 기대감도 사라지고, 오히려 휴가 다녀온 후유증으로 몸까지 피곤한 상태일 것이다. 논농사, 밭농사에 매진하는 농부들도 죽을 맛이다. 다가오는 수확철을 앞두고 해야 할 일은 점점 늘어만 가는데, 무더위는 가시지 않고 있다. 아니, 가시기는 커녕 갈수록 더 기승을 부린다. 요즘 같은 날씨에 한 시간만 밭을 매도 열사병으로 쓰러져 죽기 딱 좋다(실제로 한여름에 열사병으로 사망하는 사고의 희생자 대부분은 밭에서 일하시는 시골 어르신들이다).


그 와중에 흉흉한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전기가 부족하단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전력 부족 사태가 온다, 올 것이라는 경보가 울리고 있다. 아니,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했길래 이런 문제가 터지지?


전기는 도시의 존립기반


우리 사회에 도시가 건설되기 시작한 이래 오늘날처럼 전기가 도시의 존립 자체를 좌지우지 하는 시대는 일찍이 없었을 것이다. 도시에 전력 공급이 끊어지는 상황은 차마 상상하기가 힘들다.


서울 같은 거대 도시에 전력 공급이 중단될 경우 어떤 일이 발생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을 해보자. 어디 어디가 망가질 것인가를 따져보는 것 보다 전기 없이 무엇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것인가를 따져보는 것이 더 빠르다. 아니, 도시에서 전력 공급 없이 정상적으로 가동될 수 있는 것이 있기는 한가?


여러 가지 도시의 기능 중 통신망이 가장 먼저 마비될 것이다. 무선 통신망은 중계기의 작동 정지와 함께 쓰레기가 될 것이고, 재래식 유선 전화망 역시 교환기가 가동을 멈추면서 무용지물이 된다. 유일하게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는 망은 자체 발전기가 가동되는 방송국에서 송출되는 라디오 방송 정도. 사람들은 배터리로 작동하는 라디오로 약간의 소식을 전달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교통도 마비된다. '아니 휘발유, 경유로 움직이는 차들이 왜 멈춘다는 말인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차들이 움직일 수 있는 도로 시설, 신호등이 일거에 마비된 상황을 상상해 보면 교통이 왜 마비되는지 이해가 간다. 물론 차야 움직이겠지. 하지만 그 차들이 달릴 수 있는 도로는 없다. 최소한 불도저라도 나타나서 막혀 있는 차들을 한 쪽으로 밀어 던져버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대부분의 생산시설 역시 마비된다. 전기 없이 가동되는 생산시설이라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유통망 역시 일시에 마비된다. 모든 가게는 영업을 못하게 되고, 저장된 상품들은 썩어가기 시작할 것이다.


모든 종류의 문화시설 역시 가동이 중단된다. 극장, 도서관, 학교, 심지어 공원, 체육시설까지 마비된다. 기본적인 조명도 없이 운영될 수도 없을 뿐더러 비상 발전기 돌려서 운영을 한다 하더라도 교통이 마비된 상황에서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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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공급이 멈추는 순간, 도시는 하나의 거대한 무덤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어찌 어찌 그 생지옥을 벗어나 주거 시설로 돌아온다고 해도 안전하지는 않다. 그 주거 시설은 정상적으로 가동될까? 기본적으로 급수 기능이 마비된다. 파이프 타고 흘러 들어오는 수도가 전기 없다고 안 나오겠냐고? 안 나온다. 현대 도시의 상수도 시설은 과거와 같이 높이차를 이용한 수압으로 공급되는 것이 아니다. 곳곳의 지하에서 전기로 가동되는 가압 펌프 없이는 우리들 가정의 수도꼭지에서 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이다.


특히나 아파트에서는 더 끔찍한 상황이 전개된다. 조명이 꺼지고, 엘리베이터 가동이 중단되고, 수도가 나오지 않으며 심지어 관리소의 방송 안내 설비까지 마비된 아파트를 상상해 보시라. 호러 영화 찍기 딱 좋은 상태로 돌변한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이 영상 30도가 넘는 한여름에 발생했다고 가정해 보자. 대도시에서 발생하는 전력 공급 중단은 단순한 불편함의 차원이 아니다.


수많은 생명이 일시에 사라질 수 있는 끔찍한 대재앙이다. 실제로 요즘 같은 불볕 더위에 대도시에서 두어 시간 정도만 전력이 끊어진다면, 노인과 영,유아를 중심으로 상당한 숫자의 사망자가 발생하게 될 것이다.


전력 수급 불균형의 원인


그렇게나 중요한 전력 공급이 불안정해지는 이유는 뭘까?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이다.


전력이 다른 각종 자원과 구별되는 가장 큰 차이점은 보관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전력은 생산하는 곳에서 박스로 포장되어 소비자에게 공급되고 남은 양은 창고에 보관될 수 있는 그런 생산품이 아니다. 발전소에서 발전된 전기는 거의 동시에 송전망을 통해 사용자들에게 공급되고, 거기서 사용되지 않은 전기는 사라져 버린다.


그러다보니, 전력에 관한 한 공급과 수요를 정확히 맞춘다는 것은 매우 비효율적인 일이다. 즉, 미리 생산해서 보관할 방법이 없다는 점, 언제나 순간적인 최대 소비량에 맞춰 발전 설비를 확보해야 한다는 점, 이것이 전력 공급 계획을 다루는 관점이 되어야 한다.


대도시에 순간적인 전력 부족이 단 한 번이라도 발생하게 된다면, 수십 개 이상의 태풍에 강타 당하는 것과 같은 대재앙이 닥치게 되는 것이고, 사람들이 죽어 나가기 시작할 것이다. 이런 상황을 전력 전문가들은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낭비에 가까운 전력 공급 설비가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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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낭비에 가깝게 전력 공급 설비를 확보해 놓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한 여름 피크 타임이면 기록적으로 치솟는 전기 수요를 충족할 수 있도록 설비를 갖춰 놓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일이 그렇게 속 편하게 돌아가지는 않는다.


그렇게 안전제일주의로 과잉 설비 투자를 해 놓게 되면 당연한 결과로 전기요금이 상승하게 된다. 요금만 상승할까? 평소에는 다 쓰지도 못할 많은 양의 전기를 무의미하게 생산해야 하는 설비를 만드는 일, 그것이 모두 다 세금을 투자해야 되는 일이다. 그 투자액이란 게 상당히 커서, 다른 시급한 일들을 하기에도 모자라는 정부의 재원이 굳이 쓰여야 하는 일인 것이다.


결국 이러한 모든 문제는 '균형과 조화'가 가장 중요한, 애매하고 복잡한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특히나 더 '균형과 조화'가 취약한 사회에 살고 있다.


전력 공급을 둘러싼 논쟁들


이러한 전력의 문제가 단순히 전력 만의 문제로 국한된 것은 아니다. 사회 전반에 걸친 에너지 문제가 함축적으로 담겨 있는 복합적인 문제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하고 논쟁적인 주제가 바로 핵발전이다. 최근 일본에서는 대규모 지진과 해일로 인하여 후쿠시마의 핵 발전소 몇기가 붕괴됐다. 이로 인해 발생한 방사능 오염 문제는 '과연 인류에게 저런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는가'라는 심각한 질문을 던져 줄 정도로 글로벌한 위기 의식을 발생시켰다.


그런 관점에서 일각에서는 향후 우리 사회가 사용할 전력을 생산하는 방법 중에 핵분열 발전은 제외시키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즉, 탈핵 운동이다. 이미 우리 사회에 전력을 공급하는 공급원으로써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원자력 발전소를 일거에 '셧다운'시키자는 주장은 조금은 과한 걸로 보인다. 하지만 순차적으로 신규 핵 발전소의 건립을 중단하고 기존의 핵 발전소들 역시 연한이 차는 대로 폐쇄하고 대체 전력 공급원을 개발하자는 주장에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미 독일은 이런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탈핵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거는 대부분 돈에 기반하고 있다. 원자력 발전소에서 생산되는 전력이 가장 단가가 싸며 탄소 발생량도 가장 적은데, 그 전력 공급원을 배제하게 될 경우 우리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전력 생산 비용이 치솟게 될 것이라는 점을 걱정하는 것이다. 이 또한 일리가 없지는 않다. 프랑스의 경우 이 쪽의 주장이 더 우세하고, 실제로 프랑스의 전력 공급원 중에는 핵 발전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이 핵 발전으로 인해 발생하는 핵 폐기물의 처리를 둘러싼 논쟁도 무척이나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핵 발전소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핵 폐기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 이 문제 역시 아직 인류가 깔끔한 해결책을 찾지 못한 난제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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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지에 건립되는 열병합 발전소의 경우도 사회적인 논쟁을 무척이나 다양하게 촉발시키는 존재이다. 신도시가 건설될 때 마다 이 문제로 진통을 겪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도 이런 문제를 관련자들의 합의에 의해 최선의 방안으로 해결해 본 적이 없다.


이런 문제들은 그나마 사회적으로 좀 알려진 문제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전력 수급 문제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때 마다 떠올리는 것들이 바로 이런 문제들이다. 그러나 더 크고 본질적인 문제들은 아직 사회적으로 논쟁도 되지 않았을 뿐더러 아주 깊숙히 숨어 있다.


실제로 우리 사회의 역량을 시험하고 있는 더 심각하고 위급한 문제들임에도 불구하고 일반 시민들에게는 알려지지도 않은 문제, 그것은 바로 전력 수급 기본 계획을 어떻게 짜야 하는 것인가 하는 본질적인 문제이다.


본질적인 문제


국가 경제의 규모가 커지고 대도시들이 증가하며 산업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전력 수급 계획의 본질은 한가지로 귀결된다. '공급의 확대'인 것이다. 다른 문제는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어떻게 가장 빠른 속도로, 가장 효율적으로 전력 공급량을 확대할 것인가. 다시 말해서 어디에 어떤 종류의 발전소를 어떤 규모로 얼마나 빨리 지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이게 기본이다. 이게 성공하면 증가하는 전력 수요를 따라잡고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할 수 있게 된다. 우리 사회의 전력 수급 계획의 기본 이념은 이렇게 설정되어 있었다. 그간 벌어졌던, 그리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전력에 관한 논쟁의 바닥에는 이러한 정서가 깔려 있다.


물론 우리 사회는 이런 기본적인 인식 하에서도 제대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 하고 있다. 전력 공급의 확대에는 동의하면서도 내가 사는 곳 주변에 발전소를 짓는 것에는 반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렇게 될 경우, 사회적인 합의를 통해 전력 공급량 확대를 결정하고 각 지역별 상황을 고려하여 정치적인 합의를 도출하여 발전소가 들어서게 될 지역에 충분한 사회적인 보상을 지급하는 식으로 '정치적인 합의'를 우선하는 것이 필수적인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정치적인 합의를 이끌어낼 만한 역량이 아직 우리 사회에 부족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러한 역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제 때 공급량 확대를 추진하지 못했다며 정부를 비판한다. 사실상 정부도 좀 억울한 측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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힝...


가장 흔하게 발생하는 예로, 이명박 정권이 사회 간접자본의 확충을 등한시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전력 부족 상황이 발생했다고 비판하는 경우를 들 수 있겠다. 맞는 말이다. 이명박 정부는 전력 공급 시설, 즉 발전소의 추가 건립에 별로 힘을 쏟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장기적인 전력 수급 계획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행을 가속화하지 않은 책임이 있다.


그러나 만약 이명박 정부가 대규모 발전소 증설 계획을 4대강 사업 하듯이 밀어부쳤다면 어떤 반응이 나왔을까? 그 때는 또 그에 따라 이명박 정권이 별로 필요하지도 않은 발전소를 대량으로 지으면서 환경을 파괴하고 뇌물을 받았다고 비판을 했을 것이다.


이명박 욕하지 말라고 쉴드 치는 것이 아니다. 전력 문제의 복합성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이다. 공급을 늘리자니 재원이 낭비되고 환경이 파괴되며 발전소 건설로 인해 손해를 보는 국민들에 대한 보상이 문제가 된다. 그렇다고 공급을 늘리지 못하게 되면 전력 부족 사태가 닥쳐와서 전 국민이 불안에 떨게 된다. 이런 양면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런 복합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진짜 중요한 문제는 전력 공급 확대로만 문제를 풀려 하는 발상 자체인 것이다. 전력 수급 문제를 공급의 논리로만 풀려고 하는 인식 자체는 '경제 성장'이라는 패러다임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거의 반 백 년 동안 달려온 고속 경제 성장의 시대가 우리 사회 전반에 이런 인식을 심어준 것이고, 그 인식은 아직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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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의 인식이 변하기 이전에 이미 상황이 변했다. 우리 사회는, 대한민국은 이제 고속 성장의 시대를 지나왔다. 경제 성장률은 둔화되다 못해 제로에 수렴하고 있고, 이로 인해 온갖 사회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 그 중 가장 큰 문제는 청년 실업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 성장의 패러다임으로는 이 문제를 절대 해결하지 못한다. 고속 경제 성장 시절에 우리는 실업 문제라는 것을 경험해 보지도 못 했다. 항상 회사는 늘어나고 있었고, 신입사원은 부족했다. 그런 시절을 겪은 사람들의 머리로는 도무지 왜 일자리가 안 늘어나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다.


즉, 변화한 현실에 적응하기 위한 패러다임의 변화가 우선되지 않는다면 해결책은 없는 것이다.


전력 문제도 동일한 기조에서 설명할 수 있다. 공급 확대만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그 사고 방식으로는 현재의 전력 부족 사태가 발전소 부족 때문이라는 생각만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왜 발전소를 안 지었냐고 비판을 하게 되고, 막상 발전소를 지으려고 하면 우리 동네에는 짓지 말라는 반발에 부딪히는 악순환을 겪게 된다.


결국 정부는 그저 할 수 있는 일이, 지역 이기주의를 버리고 손해를 감수해달라는 부탁을 하는 것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너 같으면 우리 집 뒷산에 발전소가 들어오는 것을 감수하겠니?


아무리 공급 확대를 원하더라도 발전소 한 기 지을 땅을 찾지 못하게 될 것이며, 국민들의 세금만으로는 발전소 부지를 구입할 돈과 피해 보상 금액도 마련하기 힘들 것이다. 결국 민자를 도입해서 발전을 하게 되어 비싼 돈으로 전기를 사서 요금은 요금대로 상승하고, 상시적인 공급 부족에 시달리게 되며,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파국을 맞게 될 것이라는 아주 무시무시한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이미 미국은 2000년대 초반에 이와 유사한 파국을 맞은 적이 있다.


인식의 전환


현실에 맞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갖기 위해서는 과거의 낡은 패러다임을 버려야 한다. 영광스러웠던 과거는 다 잊어버리고 이제 우리도 본격적인 저성장 시대, 규모의 확대가 아닌 질적인 상승을 꾀하는 시스템을 생각할 때가 된 것이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은 사회 모든 분야에 필요하며, 특히 전력 공급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인 일이다.


공급의 확대를 완전히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다. 공급의 확대를 고민하는 것만큼 수요의 감소를 생각해야 한다. 수요의 감소를 얘기하니까 '거창하게 얘기 꺼내더니 또 겨우 절전 얘기냐'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절전이라는 것은 그저 시스템은 그대로 두고 사용량을 줄여 보자는 얘기일 뿐이다. 이 더운 여름날에 내 돈 주고 전기 사서 에어컨도 못 켜면 그게 사는 건가?


산업의 구조를 재조정할 때가 된 것이다. 초기 설비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싼 맛에 도입한 에너지 과소비형 생산 시스템을 못 쓰게 만들어 줘야 한다. 선진국이 쓰다 버린 생산 설비를 도입해서 싸구려 물건을 찍어다가 헐값에 수출하던 70년대식 정서로는 이 상황을 도저히 해결하지 못한다.


정부의 입장에서는 국가 경제를 지탱하는 생산업체들의 전기요금을 당장 대폭 인상해 버리거나, 에너지 효율성이 높은 비싼 설비를 도입하라고 압력을 넣는 것이 못내 부담스럽긴 할 것이다. 하지만 대폭적인 재정 지원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산업 구조 자체의 에너지 효율을 증가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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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쥐꼬리만큼 있었다. 그걸로 부족하다는 얘기다. 최소한 고열이 필요한 사업장에서 기름을 쓰는 것 보다 더 싸게 전기를 공급해 줘서 사업자들이 헐값에 전기를 쓰도록 하는 것이 더 이익이라는 생각은 하면 안 된다. 그 전기, 결국 정부가 기름 사다가 화력 발전해서 만든 전기거든.


개별 사업장의 효율을 생각할 때가 아니다. 국가적 차원에서 산업 전체의 효율을 생각할 때이다. 복잡하고 어려운 신재생 기술을 개발하라는 상투적인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기술 개발 없이도 지금 당장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이 곳곳에 널려 있다.


워낙 성장 일변도의 정책을 펼쳐 왔고, 워낙 산업 시설에 우호적인 전력 공급 정책을 써온 탓에 우리의 생산 기반은 지금 무척이나 효율이 낮은 상태이다. 효율을 높이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전기요금이 싸게 책정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조금만 신경을 써도 에너지 효율을 5% 정도 올리는 것은 일도 아니다.


단적인 예로, 전력 공급의 상당 부분을 원전에 의존하던 일본이 후쿠시마 사태 이후 거의 모든 원전의 가동을 중단시키고 화력발전으로 전환해서도 버티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 보자. 단시간 내에 거의 모든 산업 분야에서 10% 이상의 전력 수요를 줄여 버렸다. 그래도 일본 안 망하고 잘 버티고 있다. 물론 고통스러운 일이긴 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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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지경에도 버티는 일본은 참 대단한 듯.


공급 확대만 고민할 일이 아니라 수요의 감소를 고민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수요를 감소시키면서 국가 차원의 생산량이 줄어들면 안 되는 거잖아. 즉, 할 수 있는 일은 효율을 증대시켜야 한다는 것뿐이다.


다른 선진국들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이런 일에 매진해왔다. 그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성장이 둔화되어 왔고, 공급 확대의 측면만으로는 자신들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제 우리도 그런 일을 시작해야 한다. 남들이 안 해본 일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다들 해서 효과를 보고 있는 일을 배워서 좀 더 빨리 따라가자는 것이다. 우린 또 남 따라 하는 건 무척 잘 하잖아.


부수적인 피해


더 걱정되는 것은 이런 것이다. 이미 정부 관련 담당자들이 이런 문제를 다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급 확대 정책을 모종의 이유로 고집하고 있다는 가정이다.


공급 확대와 관련된 정책과 효율성을 올리기 위한 정책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공급 확대를 위해서는 그저 설비를 늘리면 된다. 발전소를 더 지으면 된다. 발전소는 워낙 거대한 구조물이라 큰 돈이 든다. 큰 돈이 움직이면 많은 업자들이 달라붙게 되고 떡고물이 많이 떨어진다. 과거 우리의 공무원들은 월급 보다 떡 값을 더 많이 벌던 시절이 있었다.(과연 지금은 안 그럴까?)


그러나 쪼잔하게 설비를 에너지 효율형으로 바꿔라, 전등을 삼파장 전구로 바꿔라, 업무시간을 효율적으로 배분해서 심야 전기를 활용하라, 뭐 이런 정책은 백날 해봐야 떡고물 하나 안 생긴다. 생겨도 떡고물에 붙은 동그라미의 개수가 현저히 줄어든다. 이런 인식의 전환에 따라 정책 기조가 변경될 경우 다수의 관련자들이 챙기던 부당한 이익이 송두리째 사라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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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인식을 바꾸고 정책 기조를 바꿨어야 한다는 점을 다 알면서도(나 같은 사람이 알 정도면 그 대단한 고급 공무원들, 테크노크라트들이 몰랐을 리가 있겠나 싶기도 하다) 변화의 과정에서 자신들에게 닥쳐올 불이익 때문에 변화를 지연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불길한 예감도 든다. 설마 그렇지야 않겠지.


이런 불길한 예감 말고도 변화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고통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산업 구조의 변화라는 것이 말이야 쉽지, 수많은 업체가 도산을 하고, 수많은 업체가 새로 생기는 진통을 겪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해야 하는 것이다. 건드리면 아프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종기를 제거하지 않고 안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도려내야 할 때에는 과감하게 도려내는 것이 맞다.


사회적 역량의 강화


공무원들이 해야 할 일은 그렇다 치자. 그러면 우리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될까? 그럴 리가 있나.


여태껏 그리 해왔기 때문에 공무원들이 변화하지 않은 것이다. 공무원들을 변화시키려면 사회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 사회가 바뀌려면 우리가 먼저 변해야 한다.


아파트 사는 사람들, 단지 옆에 열병합 발전소가 들어온다거나, 쓰레기 소각장이 들어선다고 하면 당장 아파트 값 떨어진다고 난리치게 된다. 그거 당신들이 쓸 전력 생산을 위해 필요한 설비고, 당신들이 만든 쓰레기 태워 없앨 설비인 것이다. 반대를 할 때 하더라도, 생산적인 반대를 해야 되지 않을까?


아파트 값 떨어진다고 베란다에 이불 빨래도 못 널게 하는 부녀회의 위력을 보고 있자면 사회적 역량의 강화라는 얘기를 꺼내는 내 입이 부끄러워진다. 심지어 아파트 값을 지키기 위해 부녀회가 앞장서서 가격 담합까지 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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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게 아파트 한 채 밖에 없는 사람들의 궁지에 몰린 마인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장애인 시설이 들어오는 것조차 눈을 부릅뜨고 반대하는 모습을 보면 욕이 절로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문제를 관련자 모두가 모여 합리적으로 논의하고 생산적인 결론을 도출해 내는 것, 이것이 바로 사회적 역량의 바로미터가 된다. 아직도 어느 일방의 욕구에 의해 대화가 중단되고 결국 공권력이 개입해서 모두가 피해를 보는 방향으로 결정되어 버리는 결과가 너무나 많이 나온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한 숨만 나올 뿐이다.


대화와 타협은 그리 어렵지 않다. 내 이익을 위해 상대가 양보하길 바랄 때, 상대의 이익을 위해 나 또한 최소한의 양보를 해야 한다는 사실 하나만 기억하고 그 기준에 맞춰 행동하게 되면 대부분의 문제점들에 대해 언제나 합리적인 대안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공무원들은 결국 일반인들, 어떤 정책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내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대안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왜냐면 그들의 월급을 우리들이 낸 세금으로 주고 있거든. 그들은 사람들의 의견이 충돌하고 대안이 도출되지 못하는 상황을 즐긴다. 자신들의 입지가 강화되고, 결정권이 강화되니까 말이다.


만약 이해 당사자들이 모두 모여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 낸다면,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사람들은 그 합의를 따를 수밖에 없게 된다.


결국 공무원들이 개판을 치고 있다는 것은 바로 그 공무원들에게 일을 맡기고 있는 일반 유권자들이 제 각각 자기들의 이익 만을 생각하면서 몽땅 서로 다른 소리를 늘어놓고 있다는 증거가 될 뿐이다.


그런 거 하라고 맡겨 놓은 공무원들이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고? 주인이 모르는 일을 머슴들이 어떻게 알아서 잘하겠는가. 제 살 길 찾기 바쁘지.


우리들 스스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를 움직이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서로 타협할 줄 알고 대안을 찾을 줄 알게 된다면, 그렇게 시민 사회의 사회적 역량이 강화된다면 모든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


전력 문제라고 결코 예외는 아니다. 제한 송전이니 블랙 아웃이니 흉흉한 소리가 횡행하는 이 시점에 이런 원론적인 얘기만 늘어놓고 있는 내 자신이 한심하기도 하지만, 언제나 '원론이 명확하게 서 있어야 디테일에서 실수하지 않는다'는 고집으로 오늘도 지당한 말씀으로 무장한 꼰대질 한 판을 남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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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밑으로 다 따라햇








정치부장 물뚝심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