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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08. 30. 금요일

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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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사는 우리의 삶은 과연 어떤 것일까. 현재 미 항공우주국은 우주의 반물질을 이용해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워프하는 우주선을 실제로 연구 중인 것으로 밝혀졌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수돗물처럼 콸콸 써야 하는 그 반물질이라는 게 1g62조원이라는 게 문제지만. 하긴 이런 대단한 일은 우리에겐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예컨대 너네 반물질 우주선 개발에 성공할래, 아니면 김태희나 원빈이랑 사귀는 데 성공할래?

 

하지만 스마트폰만 하더라도, 불과 얼마 전까지도 상상조차 할 수 없던 물건이다. 며칠 전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을 능숙하게 다루며 동영상을 감상하던 노년의 신사를 보았다. 그 분은 아마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전화기라는 물건의 신비에 감탄했을 것이다. 필름카메라를 사기 위해 월급을 아꼈을 수도 있다. 흑백TV로 전설의 고향을 보지 않았을까. 그 분의 나이를 고려하면, 한 때 소를 몰고 논밭을 갈았을 수도 있다. 농군의 아들이었다면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스마트폰을 가지고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할까? 철수군은 스마트폰으로 영희양과 카톡을 하고 영상통화를 하고 약속을 잡고 영화를 예약하고 데이트를 하며 맛집을 검색해 저녁을 즐기고 와이파이가 잘 터지는 바에서 술을 한 잔 한 다음에 모텔에 가서 소기의 목적을 이루었다. 그리고는 영희양에게서 백만 년 전 아버지들의 아버지가 했던 뻘소리를 똑같이 반복할 것이다. “나 커?” 영희양은 정치적인 타협안을 내놓을 것이다. “.” 그러면 철수군은 자신이 정말 크다고 믿고 안도할 것이다. 영희가 아닌 누구에겐가 내가 너무 커서 아프지 않았냐고 위로했다가 비웃음을 사기 전까지는.

 

이하의 삼류소설 역시 도무지 21세기의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을 만큼 조악한 구성과 상상력을 담고 있다. 매카시즘과 집단사고, 봉건주의 등 이미 20세기에 정리되었어야 할 잔재를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주제 역시 구시대적 한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굳이 구시대적 작품을 발표하는 이유는 소설의 주인공들과 배경이 구시대적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인물과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어야 한다는 본령에 충실했을 뿐이라는 필자의 핑계를 독자여러분들께서 너그러이 알아주십사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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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기가 간첩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얼마나 좋겠는가? 간첩이 잡혔으니 말이다. 마사 스튜어트가 탈세 혐의로 걸렸을 때, 그녀가 세운 회사의 주가는 오히려 올라갔다. 부정을 저지르는 경영자라는, 회사에 적대적인 요인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회장님 잡혀가실 때마다 휠체어 쇼케이스 구경하는 우리와는 사뭇 다른 그 기준을 적용한다면, 이제 국정원 덕분에 인지하지도 못했던 목엣가시를 빼게 생겼다.

 

그럼 국정원은 이제 의무를 다했으니 책임을 지면 된다. 소방관이 불을 껐다고 상해치사죄를 면할 수 없듯 이석기 관광버스 태우고 부정선거 책임자들도 같은 버스에 올라타면 된다. 그런데 그건 재미가 없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일이 좀 재밌게 됐다. 이석기가 난 그런 놈 아니라고 하니까.

 

내란사건, 혹은 내란주장사건은 데쓰매치다. 국정원의 주장이 맞으면 이석기는 사형감이다. 사실이 아니라 소설이면 국정원은 책임자 줄구속 해체 재건 수순 크리를 타야 마땅한 상황. 둘 중 하나는 죽는다.

 

어차피 국정원은 부정선거를 저지른 반국가집단이다. 이석기는 간첩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그가 주사파라는 사실은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국민에게 민폐임은 매한가지. 누가 죽어도 손해 볼 거 없으니 팝콘과 콜라, 3D안경을 준비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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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국정원의 주장이 소설이라 가정하면? 국정원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지 않았을까? 그 구멍이, 급하게 파놓다 보니 턱없이 좁을 수는 있겠다. 하지만 구멍을 파 놓을 생각 자체가 없었겠냐 말이다.

 

아니 구멍의 실체는 구멍이 아닐 수도 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국정원은 이미 불법 선거개입으로 신용을 잃은 상태. 신용을 잃어 마땅한 이가 신용을 유지하려면 카드를 돌려막아야 한다. 그러면 이석기는 국정원이 돌려막으려고 꺼낸 카드가 된다. 그래서 국정원이 죽거나 이석기가 죽는 시나리오가 아니라, 현실이 으레 그렇듯 그 중간 어딘가에 안착할 거라는 얘기.

 

다시 말하지만 이석기는 공인된 주사파다. 이미 명명백백 드러난 일심회 사건 등에서 알 수 있듯 이석기는 북한과 접촉해왔을 가능성이 크다. 최소한 북 정권과 관계가 없지는 않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석기에게서는 강신무가 아니라 세습무의 냄새가 난다. (, 이제부터는 소설의 특성을 살려 가능성이 크다느니, 가정해 보자느니 하는 말은 생략하자.) 이석기의 주체이즘은 주사파가 수뇌부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던 운동권의 옛 생태에서 물려받은 습관적 환상에 가깝다. 이석기에게 주체이즘은 종교지만, 박제되고 단절된 민족종교다. 일요일마다 교회에 나가는 것과 동학을 신봉하는 건 의미가 영 다르다. 허나 주체이즘이 종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어떻게 믿던 병신 같다는 점은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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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국정원이라면 바로 그 점을 노렸을 거다. 증권가 찌라시의 혼합비마냥 30%의 진실을 근거로 70%의 소설을 입혔을 것이다. 그래서 이석기는 할 말이 있으면서도 없을 것이요 없으면서도 있을 것이며 자기 딴에는 졸라 억울할 거다. 이석기의 주체이즘은 동심과 팬심, 순혈 주사파라는 자부심이 뒤섞인 형태다. 물론 현실적인 필요가 전혀 없지는 않다. 주사파 그룹 내에서 과의 거리는 곧 권력과 반비례하니까. 주사파에게 그는 신()과 소통하는 사제와 같다.

 

하지만 이게 지금처럼 적극적이고 현실적인 내란 음모로 확대되면 이석기 입장에선 당했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 언제나 중간 어딘가에 결론이 안착하는 게 현실이지만, 사람들은 확실한 대답만 믿는 것도 현실이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지, “제가 북과 연락하는 건 사실인데요, 근데요...” 이게 통할 거 같은가. 위기의 국정원이 이 지점을 지나치기는 어려웠을 걸. 국정원은 우파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는 훨씬 바보지만, 반대편의 기대 보다는 영리하다.

 

국정원은 일단 다음 정권까지는 생존하기를 바란다. 지금은 백년장수를 설계할 만한 상황이 아니다. 그럴 깜냥도 못 된다. 하지만 당장 산소 호흡기를 끌어올 재주는 있고, 그게 이 사건이다. 국정원은 자신들이 제시하는 증거의 일부만 증명되거나, 확대해석을 암시할 수 있으면 된다. 어차피 빨갱이 사냥하는 데 목표물의 온 몸이 빨갈 필요는 없다. 빨간 부분만 지목할 수 있으면 된다.

 

만약 이석기의 내란음모계획이 사실이고 조선로동당이 계획을 보고받았다손 치더라도 소설의 전개는 마찬가지다. 말이 계획이지 본질은 찬송가에 가까우니까. 주사파는 우리 사회의 모순이 축소 집약된 집단에 불과하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끔찍이 구태의연한 관료조직이다. 어떤 주사파가 내란을 획책한다면 그 목적은 내란이 아니라 자신이 내란을 획책할 만큼 순수하고 열정적인 혁명 동지임을 상부에 어필하기 위해서다. ‘내가 대통령이 된다면리포트 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선생님도 자기 반 학생들이 대통령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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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내가 대통령이 된다면' 리포트

 

사건의 요체는 데쓰매치가 아니라 물귀신 작전이다. 국정원은 자신들의 생존에 이석기를 끌어들였기 때문에 이석기 역시 죽지는 않는다. 전치 48주의 중상을 입겠지만 숨은 붙어 있다. 간신히 연명에 성공한 이석기는 국정원의 부당한 탄압을 자신의 존재근거로 삼을 것이다.

 

눈곱만큼 비슷한 이유로 유럽 전기작가들은 사르트르가 감옥에 가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음을 포착한다. 사르트르는 빛나는 지성에 비해 의외로 유치한 면도 있어서, 권력에 탄압받는 양심이라는 훈장이 달고 싶었던 거다. 사르트르는 최선을 다해 개겼으나 보수주의자 드골은 그의 바람을 한 마디로 묵살했다. “놔둬라. 그 역시 프랑스다.”

 

하지만 이석기는 사르트르만한 지성이 없고, 원세훈 이하 국정원은 드골과 같은 품위가 없다. 일단 그들보다 아이큐가 처절하게 낮다. 사르트르가 바랐던 훈장은 이석기에겐 초가삼간 태우고 남은 북한산 옥수수죽 그릇이 될 것이다.

 

역도 역시 참이기에 국정원도 산다. 또한 이석기 같은 이의 존재를 자신의 존재근거로 삼을 것이다. 국정원과 주사파는 적대적 공생관계로 역진화한다. 그래서 결론은? 국민만 봉이다.

 

본 소설은 국정원이 시간을 오래 끌면 끌수록 사실성을 획득해간다고 볼 수 있다. 3년간 추적조사 해왔단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조준하다가 당길 때는 확실히 잡을 수 있다고 판단될 때다. FBI가 탈세범 잡을 때가 그렇다. FBI가 절대 실패하지 않는 이유는, 문제제기를 하는 순간 이미 모든 증거가 확보되어 있기 때문이다. 헌데 3년 간 공을 들였다고 주장하는 국정원의 경우 간첩의 내란음모를 공개해 실패할 리도 없고, 실패할 거면 지금 공개할 리도 없다. 그런데도 사건 종결이 빠르지도 깨끗하지도 않다면 이는 돌려막기임이 분명하다는 것이 본 소설의 주장, 아니 서사인 것이다.

 

보시다시피 소설의 세계관은 요 근래 금연을 강행중인 필자의 기분과 더불어 매우 암울하다. 물론 국민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야, 국정원의 주장이 사실로 증명되는 편이 해피엔딩이다. 반국가사범들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된 모든 권력을 추탈 당해야 한다. 부정선거 주동자들과 간첩이 사이좋게 감방에서 콩밥정모하면 된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양측은 감방에서 상생하는 대신 적대적으로 공생한다. 덧붙여 3년간의 추적조사는 3년은커녕 작년 경기동부연합 사태에서 얻은 힌트를 윤색한 가짜 답안이라는 게 소설의 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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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콜라와 팝콘을 즐겨도 될 것 같다. 적당히 병림픽이기도 하고. 내란음모가 사실이건 소설이건 둘 중 한 쪽은 냅다 병신이다. 뭐 한 정에 90만원을 들여 장난감 총을 개조해? 그 짓을 하느니 레저용 석궁을 사겠다. 플라스틱 빨대와 수지침만 있으면 부시맨이 코끼리 잡을 때 쓰는 것과 똑같은 성능의 독침을 대량생산할 수 있다. 화공약품으로 독 합성하는 데 아마 드럼통 하나에 육천 원쯤 들 거다. 하지만 여기가 사바나가 아닌 이상 왠지 빨대보다는 총기가 더 위험해 보인다. 그 편이 소설을 쓰나 찬송가를 쓰나 더 폼도 날 것이고.

 

하지만 싸움이 후반부로 가면 콜라가 깡소주로 바뀌어있으리라 조심스레 예측해 본다. 소정의 진정성을 가지고 집필에 임한 필자는 소설의 반 정도는 현실화되리라 믿는다. 물론 필자의 개인적 우려일 뿐이다. 행간에서 걷어내지 못한 몽상이 독자여러분의 심기를 불편케 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필자의 졸필 탓이다.

 

다만 독자여러분께 드리는 소박한 바람이 있다면, 필자의 외모만큼은 소설처럼 삼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주는 것이다. 소설은 비록 허구일지언정 그 뜻은 진실되어야 함과 같은 맥락이리라. 진실은 타협할 수 없는 가치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일부 독자여러분의 편견과 타협하지 않으려 한다. 악마에게 미모를 팔아 창작력을 사느니 미남 삼류소설가로 남기 위해 노력 정진할 것을 약속드린다.

 


 




 

계사년 여름, 비 개인 아침 사저에서

전자담배를 피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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