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황실에서 주장하는(그리고 일본 국민들이 믿는) 일본 황실의 역사는 2,600년이 넘는다.
“진무덴노(神武天皇) 이래로 2,600년간 이어진 일본 황실의 가계는 일본의 상징이며, 모든 것이다.”
진무덴노가 역사상으로 존재했던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지만(신화의 영역이기에), 한 가지 확실한 건 명목상이지만, 일본 황실과 덴노는 신과 인간의 영역 그 사이 어디쯤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 황실이 살아남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고대 일본의 정치체제를 확립했던 쇼토쿠 태자(聖徳太子)는 역성혁명과 암살이 횡행하던 일본 정치체제 속에서 일본 황실을 지키고 싶었다. 결국 그는 일본 황실을 지키기 위해 덴노를 정치적으로 중립화 시키게 된다. 그리고 덴무 덴노(天武天皇)때가 되면, 그 동안 사용했던 대왕이란 호칭 대신 덴노(天皇)란 이름을 사용하게 됐고, 덴노는 왕이 아닌 아라히토가미(現人神 :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신)의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 이는 일본 정치체제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데, 크게 두 가지 정도로 설명할 수 있겠다.
첫째, 신하들의 모반을 방지
덴노가 신의 영역에 들어가는 순간. 신하들과의 충돌, 권력투쟁은 명목상 사라지게 된다. 신과 대등한 존재가 된 덴노이기에 신하들은 덴노와 싸울 순 없게 된다. 신과 인간이 싸울 수 있을까?
둘째, 일본 황실의 가계 유지
신의 영역에 들어선 덴노이기에 그 황위는 덴노의 혈육으로만 한정될 수 밖에 없게 됐고, 결국 혈통만이 황위 계승의 유일한 근거가 된다.
이런 두 가지 이점을 얻은 대신 덴노는 한 가지를 포기하게 되는데, 바로 ‘권력’이다. 신의 입장에 선 덴노는 일종의 제사장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고, 실질적인 권력은 덴노의 신하들에게 넘기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바로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라 불리는 쇼군(將軍)들이다.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 에도 막부는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즉,
“쇼군은 덴노가 위임한 권력을 가지고 일본을 통치하는 존재.”
가 되는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개창한 마지막 막부인 에도 막부의 설립도 바로 이런 연유로 만들어진 것이다. 법적으로 쇼군은 덴노의 권력을 위임받아 행정부라 할 수 있는 ‘막부’를 구성하고 이를 통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다.
덴노가 있었기에 메이지 유신이 가능했다
우리의 기준으로 보면, 비합리적인 정치체제로 보이는 것이 덴노와 쇼군의 이중 정부 체제이지만 이 덕분에 일본은 메이지 유신에 성공할 수 있었고, 제국주의의 막차를 탈 수 있었다.
1853년 쿠로후네(黒船)가 일본에 들어온 것이다. 페리 제독에 의한 강제 개항은 일본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이어졌고, 260여년간 이어져 오던 에도막부는 흔들리게 된다. 이 당시 일본은 300개 정도의 자립성을 가진 번(藩)들로 이루어져 있는데(에도막부는 이들의 정점에 서서 통치하는 존재였다), 이들 중 서쪽에 있는 4개의 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위 말하는 서남웅번(西南雄藩 : 사쓰마, 조슈, 토사, 비젠)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까? 에도막부가 설립될 수 있었던 결정적 전투인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에게 반기를 들었던 사쓰마 번(薩摩藩)의 시마즈 가문과 조슈 번(長州藩)의 모리 가문은 영지의 상당부분을 빼앗긴 상태에서 칼을 갈았고, 250년 이후 에도막부를 타도하는 도막파(倒幕派)의 선봉에 서서 260여년 역사를 자랑하는 도쿠가와 가문을 쓰러뜨리게 된다. 이때 힘을 보탠 것이 토사 번의 무사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이다.
료마 역시도 역사의 아이러니를 온 몸으로 증명한 인물인데,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도쿠가와 편에 붙은 야마우치 가즈토요(山内一豊)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도사번(土佐藩)을 받게 된다. 문제는 이 도사 번의 토착세력들은 외지에서 들어온 야마우치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반목과 충돌이 이어지게 됐고, 외지에서 들어온 무사들은 상사(上士), 토착세력은 하사(下士)로 나누어지게 된다. 당연하게도 상사들은 하사들을 차별하고 억압하게 된다. 사카모토 료마는 하사 계급의 무사였다.
료마는 견원지간이었던 사츠마와 조슈를 연합시켜 삿초동맹(薩長同盟)을 결성하고, 에도막부를 타도한 것이다.
“2등과 3등이 손을 잡고 1등을 격파했다.”
라고 해야 할까? 260여년 전의 역사를 뒤엎은 패자의 반란이라고 해야 할까? 이때 사츠마와 조슈가 에도막부를 타도한 뒤에 큰 잡음 없이 일본을 통합하고, 메이지 유신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결정적 힘이 바로 ‘덴노’였었다. 덴노가 있었기에 메이지 유신이 성공하고, 큰 무리 없이 일본이 근대국가로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덴노, 근대 일본을 만들다
덴노란 존재와 천황제에 대한 존립이유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경우가 있지만, ‘메이지 유신’ 당시의 덴노의 활약만으로(?) 천황제는 충분히 그 가치를 인정받아 마땅하다. 일본은 덴노와 쇼군의 이중집권 체제였다. 실질적인 권한은 쇼군에게 있지만, 국가의 상징은 덴노에게 있다. 이 체제는 정치적으로 큰 함의(含意)를 가지는데,
“쇼군의 권력은 덴노가 위임한 것이다.”
라고 설명 가능하다. 이는 다시 말해, 그 권력을 언제든지 회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대정위임론(大政委任論)이다. 에도 막부의 마지막 때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덴노에게 반납하는 정치적 승부수를 던진다. 권력을 덴노에게 건넨 뒤에 새로운 정치체제 아래서 권력을 장악하겠다는 계산이었는데, 도막파의 손이 더 빨랐다. 만약 대정봉환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에도(도쿄)는 내전으로 불바다가 됐을지도 모른다. 그 이후에 있었던 폐번치현(廃藩置県 : 메이지 유신 시기인 1871년 8월 29일(메이지 4년 7월 14일)에, 이전까지 지방 통치를 담당하던 번을 폐지하고, 지방통치기관을 중앙정부가 통제하는 부(府)와 현(縣)으로 일원화한 행정개혁)도 마찬가지다.
그때까지 일본은 300여개의 번들이 난립한 지방자치의 연합체 같은 성격이었다. 메이지 정부는 이걸 3부 302현, 나중에는 3부 43현으로 정리했다. 이제 일본은 중앙집권 국가가 된 것이다. 이때 지방 다이묘들이 선선히 이에 동의한 것도 덴노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국의 영토와 백성들은 본래 덴노의 소유였다!”
바로 왕토왕민론(王土王民論)이다. 덴노의 걸 다시 덴노에게 돌려준다는 것이다. 대정봉환이란 곧 덴노가 위임한 권력을 돌려받은 뒤에 직접 나라를 통치하겠다는 선언이 아닌가?
만약 덴노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십중팔구 일본은 내전에 휩싸였을 것이다. 실제로 에도 막부와 도막파들 사이에서는 전투가 있었고, 이후에도 메이지 유신에 반대하는 세력들과의 전쟁이 있었지만,
“막부군은 조정의 적”
이라는 오명이 두려워 막부군은 제대로 힘도 쓰지 못하고 패퇴하게 된다. 덴노가 없었다면, 십중팔구 피로 피를 씻는 대살육전이 벌어졌을 상황에서 일본은 ‘덴노’라는 상징 앞에 모두 고개를 조아린 것이다.
대정봉환(大政奉還)
이렇게 막부 세력을 쓸어낸 후 메이지 정부는 덴노에 대한 신격화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근대 일본은 덴노라는 구심점 아래서 일치단결해 근대화로 달려간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천황제의 순기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덴노라는 절대권위가 존재했기에 일본은 대규모 내전을 피했고, 근대화로 나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은 없었다.
메이지 헌법을 보면,
“덴노는 신성하고 불가침한 존재이다.”
라고 명시화 돼 있다. 방금 전까지 근대화를 위해 온 몸을 내던졌던 일본이 다시 근대 이전의 신정정치(神政政治)체제로 돌아가는 걸까? 당시 메이지 헌법의 초안을 작성했던 이토 히로부미는 서방세계의 헌법들을 그대로 차용했다고 고백했다.
“구라파의 헌법정치의 기초에는 종교가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날카로운 분석이라고 해야 할까? 이토 히로부미는 서구 제국주의의 근간에 깔려 있는 기독교적 정서를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에는 기독교와 같은 종교가 없었다. 대신 ‘살아있는 신’인 덴노가 있었다. 이토는 메이지 헌법의 정서적 배경을 기독교 대신 덴노로 선택했다(이는 추밀원의 제국헌법초안 심의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발언했던 내용이다).
당시 메이지헌법을 만든 이들은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를 롤 모델로 헌법을 만들었는데, 헌법 내에서 최대한 인민의 간섭과 여론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들을 심어 놓았다. 그 결과 메이지 헌법은 입법, 사법, 행정의 각 기관들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형태가 아닌, 덴노가 직접 각 기관들을 통합하는 형태로 헌법을 만들게 된다. 문제는 덴노가 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행사하는데 무리가 따른다는 점이다. 그 보완책으로 나온 것이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사쓰마와 조슈 세력들의 원로들이다. 이들은 파벌을 만들어 덴노 대신 각 기관들을 통합하거나 조정하게 된다. 상당히 ‘이상한’ 정치 체제이다.
분명 헌법을 만들었다는 건 법치(法治)를 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인데, 그 안에서 이루어진 통치는 비제도적인 인맥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메이지 헌법 55조를 보면,
“국무대신은 덴노를 보필하고 그 책임을 덴노에게 묻는다.”
이걸 잘 살펴봐야 한다. 내각총리대신, 즉 수상은 ‘동배중(同輩中)의 수석’이라는 위치에 앉혀 놓았다. 한 마디로 말해 실질적인 권한을 위임한 게 아니라 각 대신들의 대표 격으로만 존재했다는 의미다. 즉, 총리가 직접적인 실권을 가진 게 아니라 조정자 역할로만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 각 대신들끼리의 개별적으로 덴노를 보좌하는 것이지, OO수상의 내각에 들어가 내각 전체의 연대책임을 지는 구성원으로서의 존재는 아니란 의미가 된다.
여기에 악명 높은 ‘현역무관제’가 더해진다.
“육해군 대신은 현역무관이어야 한다.”
는 조항 덕분에 군부는 내각에 대한 거부권과 통제권을 가지게 된다. 만약 군부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군부가 내각을 해산시킬 수도 있었고, 처음부터 아예 내각을 구성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이들은 덴노를 직접 알현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올릴 수 있는 권한도 가지고 있었다.
즉, 당시 일본의 권력은 두 개로 쪼개져 있었는데, 하나가 수면 아래에 있는 군부이고 나머지 하나가 대외적으로 활동하는 정부였다는 소리다. 이중권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이중권력도 오래가지 않았는데, 군부가 점점 더 정부의 영역을 파고들었다.
이중권력을 없애고, 덴노 유일의 통치 체제를 만든 일본이지만, 쇼와(昭和) 시절이 되면 다시 이중권력으로 회귀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궁금한 것이 당시 덴노였던 히로히토(裕仁)는 이런 권력의 누수와 군부의 전횡을 왜 통제하지 못했던 것일까? 태평양 전쟁 이후 일본은 줄기차게,
“덴노에게는 죄가 없다. 덴노는 전쟁을 막기 위해 애썼지만, 군부가 독단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
라고 주장했다. 과연 이 말이 사실일까?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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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3.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황금알
4.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이북스펍/ 이윤섭
5. 조선역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이상태
6. 다시 쓰는 한국근대사/ 평단문화사/ 이윤섭
7. 대본영의 참모들/ 나남/ 위텐런 지음, 박윤식 옮김
8. 나모위키
9.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 추수밭/ 이노세 나오키 지음
10. 『중일 전쟁』 용, 사무라이를 꺾다/ 미지북스/ 권성욱 지음
11.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 서해문집/ 김효순 지음
12. 석유전쟁/ 매일경제신문사/ 정기종 지음
13. 우리의 눈으로 본 일본제국 흥망사/ 궁리/ 이창위 지음
14. 연합함대 그 출범에서 침몰까지/ 가람기획/ 박재석, 남창훈 지음
15. 프레시안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4246
16. 일본의 이중권력, 쇼군과 천황/ 살림출판사/ 다카시로 고이치
17. 히로히토 신화의 뒤편/ 을유문화사/ 에드워드 베르 지음
18. 일본의 가장 긴 하루/ 가람기획/ 한도 가즈토시 지음
1부 2부
외전 3부 4부 |
펜더가 디비주는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펜더
편집: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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