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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09. 02. 월요일

논설우원 파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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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음모.


그 짧은 며칠 새 상황은 이렇게 저렇게 오락가락했고 각계각층의 논평과 주장이 터져 나오다시피 했다. 허나 말은 분분하지만 진실은 아리송하고 그 속에서 합의나 공감대를 기대하기도 어려운 상태. 이쪽과 저쪽 사이에는 물론 이쪽 내에서도, 그리고 개개인도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할지 혼란스러운 게 지금 기분들일 거다.


우원에게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며칠이었고 이제 그 생각과 판단들을 글로 옮긴다. 가급적 차분하게, 하지만 솔직하게 접근할 생각이다. 지금은 무엇보다 그 두 가지가 필요한 시점이니까.


1. 녹취록


총기, 타격, 공격 등의 표현이 등장했다. 통진당 당사자들은 처음에는 그런 모임 자체가 없었으며 국정원의 발표는 완전히 소설이라고 주장했지만 녹취록의 구체적인 내용이 발표되자 실은 그날 모임이 있었고 이석기가 강의했던 것도 사실이라고 이야기를 바꿨다. 그러면서도 녹취록의 내용은 ‘날조 수준의 심각한 왜곡’ 이라고 주장하는 한 편, 녹취록의 특정 내용은 이석기 본인의 강의가 아닌 분반토론에서 나온 것이라고도 하는 등 내부에서도 미묘하게 핀트가 안 맞는 반응들이 교차하며 등장했다.


이런 정황들이나 한국일보가 입수한 녹취록의 디테일로 미뤄볼 때 모임은 분명히 있었고 그 속에서 오간 이야기들도 현재 알려진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 하다. 주지하듯 ‘소설’과 ‘날조’, ‘날조 수준의 왜곡’은 서로 전혀 다른 표현들이다. '소설'이나 '날조'는 아예 없는 말을 지어낸 거고 '왜곡'은 흔히 정치가들이 잘 쓰는 ‘진의가 왜곡됐다’는 표현에서처럼 단어와 문장은 맞지만 의도나 맥락이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결국 지금 통진당의 입장에는 일관성이 좀 없는 거다.

 

 

그리고 녹취록에는 이석기 본인은 아니더라도 이상호 경기진보연대 고문 등 몇몇이 총기, 공격 등의 이야기를 분명히 한 것으로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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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 경기진보연대 고문


허나 사안이 사안인 만큼 이 부분의 진실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타이핑한 원고에 불과한 녹취록이 아니라 편집되지 않은 녹음파일 원본의 확인이 필요하다. 그게 확인되어야 누가 어떤 흐름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가 비로소 정확히 규명되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당장 테입이나 파일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녹취록이란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 경우에 이 사건은 진지하게 논의할 가치가 없는, 말 그대로 국정원의 물타기 복수극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따라서 여기서부터는 '녹취록의 실제 녹취파일이 존재하고, 그 녹취파일 속에 녹취록의 내용과 동일한 표현들이 같은 맥락에서 진지한 어조로 들어있다'는 걸 전제한 이야기다.


2. 종북


이미 작년 총선 때의 통합진보당 분열사태에서 한 차례 크게 이슈가 됐던 문제다. 본지에서도 작년 봄, 물뚝심송이 그 문제를 이미 분열사태 이전에 기사화했던 만큼, 여기에 대해서 새삼 왈가왈부할 이유는 별로 없다고 본다.


종북은 존재한다.


허나 종북이라는 단어 자체에 화들짝 놀라 벌벌 떨 필요는 없다. 이 말 속에도 수십 가지의 스펙트럼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약한 쪽 끝에는 삼삼오오 모여 북한의 노선이나 주체사상 등을 지지한다며 중얼거리는 수준이 있고, 강한 쪽 끝에는 북한 정부와의 교류 하에 말 그대로 내란에 버금가는 준 군사작전을 준비하는 차원이 있을 거다.


생각해 보면 종북적 입장을 가진 사람이 이 땅에 전혀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남한과 북한은 휴전선을 맞대고 오랜 세월 대치해 왔다. 일단 큰 전쟁을 했고 그 이후에도 싸우기도 하고 대충 화해하는 듯도 하면서 긴 관계가 지속되어 온 거다. 이렇게 오래 관계하다 보면 그 정당성 여부를 떠나 죽일 만큼 싫어서 다 쓸어버려야 한다는 넘부터 저쪽 집안이 더 나은 거 아니냐며 동경하고 추종하는 넘까지 양 쪽에 다 있을 수 밖에 없다. 하물며 같은 민족으로서 통일 같은 공통의 지상 명제가 존재함에야.


암튼 종북은 분명히 있고 현재의 통합진보당(의 적어도 일부), 과거의 민노당 당권파(의 적어도 일부), 혹은 경기동부연합이나 유사 집단이 그 범주에 속한다는 점은 이번에 새로 나온 이야기가 아니다. 작년 분열사태 당시 그들이 종북이라는 지적이 되려 진보진영 쪽에서 제기되었음에도, 불법부정선거 부분만 부각되면서 의외로 공안당국이 움직이지 않는 걸 보고 ‘시점’을 노리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끝까지 참다가 터트려야 하는 이슈라는 점 말이다.


그렇다면 저 사람들은 위의 종북 스펙트럼 중 어디쯤에 있을까? 이 나라가 정상적인 나라라면 검찰과 국정원(...)의 수사상황 및 결과를 보고 이야기하자는 말이 맞겠지만, 작금의 현실이 결코 그렇지 않은 만큼 여기에도 우리 나름의 관점을 잡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 부분은 며칠간 화제가 된 그들의 ‘무기’ 조달 방식을 통해 대략 파악이 가능하다.


우원은 오래 전 비비탄을 쏘는 가스건이나 전동건에 관심이 있었고 합법적인 사양 내에서 보유한 적도 있기 때문에 그 중에 ‘극악총’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이 극악총은 인마살상용까진 아니더라도 맞는 부위에 따라 상당한 신체적 피해를 줄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하얀 플라스틱 말고 금속으로 만든 비비탄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것 몇 정으로 국가 시설을 ‘타격’한다는 건 절대적으로 어불성설인, 애들 전쟁놀이 수준의 발상일 뿐이다. 무엇보다 사냥용 공기총, 산탄총, 엽총, 석궁 등 합법적으로 구할 수 있는 훨씬 강력한 총포형 무기들이 얼마든지 있고, 경로만 안다면 암시장에서 권총이나 소총도 구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런 초(超) 아마추어적 발상을 하는 걸 보면 실제로 무기를 사용한 공격 행위를 진지한 차원에서 숙고하고 준비해 온 건 아니라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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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인터넷에서 AK-47 등 구조가 단순한 총기 설계도를 쉽게 구할 수 있다.

오른쪽 위는 밀반입하다 적발된 총기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에서 종북 스펙트럼상 그들의 위치가 은연중에 드러난다. 이들이 북한과 실질적으로 교류하면서 지령과 지원을 받고 움직이는 차원이었다면 자기들끼리 비비탄총 개조를 궁리하고 있을 이유란 전혀 없으니 말이다. 우리와 155마일의 길고 긴 휴전선을 사이에 둔 북에서 마음만 먹으면 기관단총이나 권총 수십 정 정도 보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런 것을 북에 요구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점이야말로 이들이 처한 현실과 위치를 드러내는 거다.


3. 공격


이석기 의원을 비롯한 통합진보당원 몇 명에게 내란음모라는 엄청난 죄목이 붙었는데, 이는 옛날로 치면 소위 '역적모의'에 가까운 이야기고 이에 대한 최고형량은 사형이다. 많은 구체적 증거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실제적인 성립은 어렵다는 의견이 우세하며, 우원도 전후 상황을 봤을 때 지나치다고 본다. 그럼에도 국정원과 검찰이 이런 명목을 단 것은 그 단어의 어감과 의미가 가진 무게와 선전효과 때문이다.


허나 법리 문제는 법리 문제고, 지금 우리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은 '음모'의 실행능력 여부를 떠나 그 모임에서 북한을 돕기 위한 무력 파괴 행위의 필요성이 실제로 토의되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대해 그건 이석기가 직접 말한 게 아니라는 지적이 있고 녹취록에 따르면 사실인 듯 하나, 까놓고 말해서 그건 이석기 본인과 관련된 법적인 공방에서는 핵심이 될 망정 우리에게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들은 이석기 개인에 대한 법적 판단이 아니라 그와 그가 속한 것으로 보이는 집단에 대한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판단을 내려야 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석기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모임이 그의 강의를 듣고 총기 마련이나 기간시설 공격의 필요성을 논의했다면, 우리가 생각해야 할 부분은 그런 집단이 존재한다는 점 자체다.


그리고 이 공격 운운 부분은 장난처럼 가볍게 넘어갈 성질의 것은 아니다. 어떤 집단이 실행력을 떠나서 우체국, 전화국 등의 공공시설에 대한 공격을 입에 올렸고, 그런 발상에 영감을 준 것이 현직 국회의원의 강의라는 점은 내란음모죄 성립 여부나 기존의 진영논리 등등을 다 떠나 분명히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우체국, 전화국, 유조창 등은 정치적 타켓도 아닌 우리 가족, 친구, 형제 등이 월급 받고 일하는 곳이다. 그런 곳들을 공격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적의 적은 우리의 친구'라는 식으로 쉴드를 쳐 줄 수는 없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아닌 건 아닌 거다.


4. 전쟁놀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공격 논의가 현실적으로는 그다지 두렵지 않은 이유는 녹취록의 비비탄&가스쇼바나 화학과 운운하는 부분을 읽고 열분들이 한 생각과 비슷하다. 우원의 경우는 녹취록을 다 읽고는 이문열의 소설 <황제를 위하여>가 떠올랐다. 이문열이 비뚤어진 극우적 언행을 쏟아놓기 전에 쓴 작품으로 우원이 무척 좋아했던 소설이다.


요약하자면 충청도 시골에서 태어난 주인공이 어릴 때부터 부모의 도참설적 환상에 영향 받아 자기가 이씨 왕조를 이을 새 나라의 황제가 될 운명을 타고났다고 믿고 사는 내용이다. 그렇다고 이 사람이 사기꾼이냐면 그건 또 아니어서 나름대로 총명하고 어진 인물이라 한 때는 만주의 널찍한 장원에 기백 명 정도로 이루어진 세력을 구축하기도 한다.


그렇게 영향력 있는 지역유지로 살면 괜찮은 삶이었을 것을, 이 양반은 본인이 언젠가 삼천리 강토를 다스리는 진짜 황제가 될 것이라는 믿음에 빠져 있을 뿐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와중에도 이미 황제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국민이 몇 백 명도 안 되는 남조선이라는 나라를 ‘개국’ 하고 ‘폐하’라는 칭호를 받는 등 소꿉장난적 착각과 미망 속에서 산다. 머 이런 식으로 대충 이야기할 소설은 아니지만 주된 내용의 흐름만 보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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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저 사람들의 상태는 이 소설 속의 인물이나 상황과 별로 다르지 않다. 비비탄 총은 황제의 군대가 일본군과 싸우겠다며 들고나간 낡은 화승총이고, 그들의 조직과 세력도 황제가 개국해 다스리던 한 때의 남조선보다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혁명에 대한 이들의 신념도 일단 나라만 세우면 백성들이 만세를 부르며 달려 올 거라는 황제의 착각이나 별반 다를 바 없다.


허나 큰 차이가 하나 있다. 야권통합의 시대적 구도 덕에 그들 내에서 정식 국회의원이 나왔다는 점이다. 이런 제도권 진입은 '황제'는 결코 이루지 못했던 무엇, 따라서 너무 소중하고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소꿉장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다. 종북적이지 않은 진보성향 사람들이 함께 했던 민노당 시절과 달리 지금은 그들만이 모여 정체성이 꽤 밝혀져 있는 상태라 더욱 그렇다.


그런 만큼 정면돌파와 두리뭉실 전법을 동시에 구사하며 어떻게든 제도권 내에 살아남는다는 것은 황제의 상상 속 남조선을 실제 ‘남조선 해방’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양질전환의 유일한 고리일 것이다.


5. 사상의 자유


작년 총선 전후 종북 이슈가 터졌을 때, 방송 토론에 나온 그들은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이야기했다. 그 말 자체는 잘못된 게 아니다. 그러나 그때 진중권이 지적했듯이 정치인으로서 정당을 만들고 국회에 진출하려 한다면 그 사상의 내용이 뭔지 국민이 알아야 하고 이건 이미 개인적인 자유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 된다. 따라서 누군가가 자신의 사상과 양심, 지향점을 숨기면서 국민의 대표 역할을 하려 드는 건 명백히 어불성설이다.


물론 이 경우에는 그걸 드러내면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함은 물론 국보법 등으로 잡혀 들어가게 될 테니 본인들 입장에서는 답답할 거다. 하지만 그래서 택한 전략이 국민을 속이는 거라면 그것은 결코 정당화되지 않는다. 이 나라의 현실은 주체사상까지 포용할 만큼 사상의 자유를 담보하지는 못하고 있고, 거기에는 마냥 무시할 수는 없는 역사적, 사회적 이유도 나름 있다. 단지 국가보안법 같은 법령의 문제만이 아니라 국민들의 정서도 그렇다.


그런데 앞서도 말했지만 막상 지금 이 문제의 포인트는 사상의 자유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녹취록에 담긴 이야기들은 단순한 사상의 문제가 아닌 파괴적 공격과 관련된 부분이다. 물론 애들 전쟁놀이 수준의 논의에 지나친 법리적 해석이 적용된다면 그건 그것대로의 문제다. 하지만 그와 무관하게 우원은 어떤 사상을 가진 사람이던 자국의 우체국, 철도, 전화국, 유조창 등의 공격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신뢰할 수도, 공감할 수도, 지지할 수도 없다. 이런 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사상이나 양심의 자유와는 전혀 상관 없는 이야기다.


6. 국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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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모든 논의에도 불구하고 국정원이라는 조직의 볼썽사나운 태도는 그것대로 남는다. 지금 국정원은 가지고 있는 모든 패들을 긁어 모아 싸우고 있다. 그 대상은 통합진보당도 범야권도 국민도 아닌, 아니 실은 그들을 모두 포함하는, 자신들에게 안티를 거는 사람들 전부다. 그래서 총선 당시 종북 문제가 불거져 나올 때는 물론, 박빙의 승부였던 대선 때조차도 써 먹지 않은 이 카드를 자신들 조직의 안위가 도마에 오르자 기꺼이 끌어낸 거다.


이런 태도는 지금의 국정원이 가진 속성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과거 철권 독재통치 하에서 오직 정권의 안위를 위해 복무하던 중앙정보부와 국가안전기획부는 이제 독립적인 생물이 된 것으로 보인다. 대선 개입 건도 정치권의 지시였다기 보다는 국정원 스스로의 득실을 잰 결과 내린 판단이었을 거다. 물론 지난 정권과 현 정권은 국정원의 본질과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지는 만큼 각각의 사안에 대한 긴밀한 소통을 유지하며 공생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러나 정보부가 이렇게 독립적인 생명력을 갖게 되면 그 위험성과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어찌 되었던 국민이 뽑고 국민 앞에 책임을 지는 사람들이다. 그러한 그들이 특정한 사안에 대해 판단하고 결정하고 시행하기 위해서는 정해진 절차들을 밟아야 한다. 하지만 정보부는 그런 모든 것들에서 한 걸음 떨어진 상태에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상황이나 사안을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막대한 힘을 휘두를 수 있다. 그런 상태가 계속되면 결국은 대통령이나 국회도 정보부를 두려워하고 눈치를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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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후버


민주주의 종주국이라고들 하는 미국의 FBI 초대 국장이었던 에드가 후버는 1935년부터 1972년, 그가 죽을 때까지 대통령들의 약점을 잡아 종신 국장으로 재직하며 무소불위의 전횡을 휘둘렀다. 흔히 CIA를 정보국이라고 생각하는데 CIA는 FBI의 힘이 너무 커지자 견제 차원에서 해외 정보 부분을 전담하게 만든 조직이다. 그나마 미국이니까 그 정도로 끝났지 한국에서 그런 사람이 나타났다면 실제로 나라 전체를 지배하게 됐을 거다. 지금 우리 국정원이 이런 류의 길로 들어서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확실한 것은 내란음모건의 본질과는 무관하게, 대선 개입 등 월권과 전횡으로 국정원이 수세에 몰린 시점에서 이 건을 들고 ‘명예 회복’의 반격에 나선 그들의 속보이는 모습이야말로 국정원 개혁과 권력 축소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7. 총정리 : 친구는 가고 원칙은 남는다


1994년, 서강대 총장이던 박홍이 갑작스럽게 주사파에 대해 발언하기 시작했다. 전국의 주사파가 15,000명에서 30,000명에 이르고 그들이 졸업 후 정치, 언론 등 각계에 진출했다는 주장이었는데, 이는 곧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몰고 왔다.


머 다들 알다시피 그 당시 운동권은 NL이 대세였고 그 중에 주사파도 분명 있었다. 물론 만 오천이니 삼 만이니 하는 말은 과장이고, 억압된 청소년기를 거치고 뭔가 새로운 것을 찾던 젊은 학생들이 '이건 뭔가' 하면서 잠깐 혹 했던 정도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할 때는 이미 전혀 다른 상태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름 옛 민주화 운동 출신이라는 박홍이 나서서 이런 이야기를 하니, 사람들 속에서 피어나는 생각들이 있었다. '그렇게 아니라더니, 용공 조작이라더니, 순수한 민주화 운동이라더니, 사실은 빨갱이 맞네'. 이런 류의 찝찝함 말이다. 이런 상황은 그 이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수시로 반복됐고 주사파와는 정말 무관한 김대중이나 노무현 등도 비슷한 덤터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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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 전 서강대 총장


그리고 2008년 민노당 분당 상황에서 종북이라는 단어가 다시 물 위로 떠오른다. 이 때는 진보진영 내부에서 이 말이 나왔기 때문에 그 무게가 가볍지 않았고 작년의 통합진보당 분열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그리고 급기야 이번 사태가 터져서 ‘진짜 빨갱이’론이 더욱 힘을 얻게 된 거다.


여기에서 사람들의 반응은 갈린다. 어떤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이 정부 여당과 국정원, 기득권층의 음모이자 조작이란다. 이번 사태의 경우 시점을 보면 일종의 음모인 건 맞는데 조작은 아닌 것으로 보이고, 따라서 그런 입장은 한 쪽만을 너무 순진한 눈으로 봐 주는 관점이다. 반대편에는 '결국 이 야당 놈들 모조리 종북 빨갱이 맞잖아' 같은 반응이 있는데, 그것은 더욱 사실이 아니다.


이러한 ‘진짜 빨갱이’론의 반복과 이 상황을 이용한 보수 언론과 기득권 세력의 전략, 가카와 그네옹주로 이어지는 거꾸로 가는 사회상이 모두 합쳐져 일베로 대변되는 극우 파시스트 집단의 출현을 낳았다. 이들은 소위 ’팩트’의 중요성을 내세우는데, 이를 논리적으로 적용하는 수준은 굉장히 낮다. 예컨대 옛날 학생 운동권의 대세는 NL(팩트) NL은 주사파(일부 팩트) 김대중, 노무현은 그 시대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인물(팩트) 그래서 김대중, 노무현은 물론 전라도, 친노, 그리고 친노를 지지하거나 비슷한 말이라도 하는 넘들은 전부 종북. 이런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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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의 좌파 연예인 리스트, 임슬옹은 영화 <26년>에 출연했다는 '팩트'만으로 좌파가 되었다.


어처구니 없지만 이러한 그들의 논리적 접근에는 '역사적 신뢰의 결여'라는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문제가 놓여져 있다. 독재와 군정 등 민주화 과정에서 우리가 극복하고 부정해 온 것들 대신 그 자리에 놓으려던 것이 충분히 단단하지 못했고, 그 사회적 실망감과 불신이 재부정의 형태로 확대 재생산화된 결과가 지금의 새로운 극우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순진한 믿음 속에서 ‘종북은 없어! 다 조작이야!’ 라고 단정하는 태도에도 상황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비슷한 심리가 깔려 있다.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순간 자칫 오랜 세월 믿어왔고, 지지해왔던 모든 게 무너질 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정말 그런 걸까?


단언컨대, 종북은 단지 우리 민주화 역사 속의 단단하지 못한 한 부분일 뿐이지 그것 때문에 민주화 과정 전체를 의심하거나 부정해야 하는 요소가 아니다. 만일 그들이 그토록 큰 힘을 갖고 있었다면 우리나라는 이미 북한의 일부가 되었어야 마땅한 일이다. 따라서 충격 받거나 두려워하거나 배신감 느낄 필요 없다.


그러나 이제 그 단단하지 못한 부분은 보내는 게 맞다. 어쨌든 우리 편이라는 건, 가는 방향이 비슷할 때나 성립하는 개념이다. 극복하려는 대상은 흡사할지 몰라도 그들이 목적하는 방향과 우리의 방향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게 확실한 데도 한 때 친구인 줄 알았다고 계속 미련을 가질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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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서로 가고자 하는 방향이 너무나 다르다


물론 이 사건과 관련해서도 인권은 인권대로, 법령은 법령대로, 진실은 진실대로, 국정원 문제는 국정원 문제대로 챙겨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동지이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항상 적용되어야 할 원칙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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