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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09. 05. 목요일

햄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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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괜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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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국전 씨(대역 가명, 32)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이과 출신 회사원이었다. 연봉이 많지는 않았지만 좁지 않은 전세방에 살 형편은 되었고, 미인은 아니지만 여자 친구도 있었다. 가히 평균의 삶이라 할 만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봉씨는 2년 여 동안 사귀어 온 애인에게 큰 맘 먹고 청혼을 했다. 대단하진 않지만 자그마한 이벤트와 함께. 그러나 그녀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그의 예상과 달랐다. 그녀는 조금은 떨떠름한 표정과 함께 생각해볼게라고 말하며 무표정하게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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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과의 관계에 대해 급작스럽게 불안해진 봉 씨는 그만 저질러선 안 될 일을 저지르고 만다. 애인의 아이디와 비번으로 페이스북에 접속해서 그녀의 사생활을 사찰하고 만 것. 그는 그녀의 페이스북 쪽지 내역을 뒤지다가 자신 밖에 모른다고 생각하던 애인이 사실은 부동산 업자인 김씨와 자신을 저울질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충격에 빠진 그는 어둠의 깊고 깊은 딥 다크로 빠져들게 된다...

 

그는 결국 현실을 등지는 방법을 선택한다. 3D의 리얼 세계를 버리고 2D를 파기 시작한 것. 그는 매일 같이 애니메이션을 탐닉하며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렇다. 멀쩡하던 청년이 한 순간에 덕후가 되어버린 것이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더 무섭다고 했던가. 봉씨는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을 시작으로 <쓰르라미 울적에><페이스 스테이트 나이트>, <케이온>, <내 여동생이 이렇게 귀여울 리가 없어!>등과 같은 주옥 같은 작품들을 단시간에 섭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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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D에 확대도 모자라서 아주 현미경을 들여다볼 기세로 애니와 미연시 게임 등 각종 덕질을 하는 봉씨.

 

덕질로 인해 변해버린 삶의 리듬 덕분에 그와 애인은 자주 다투게 되고, 어느 날 말다툼 끝에 봉씨는 그녀의 페이스북을 사찰했던 사실을 들키고 만다. 분노한 그녀는 그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그의 예상과는 다른 결과였다. 그녀가 자신에게 매달리고 사과할 줄 알았다. 충실한 남자친구인 자신을 배신하고 뺀질이와 놀아난 일을 용서해달라고 말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떠나가고, 그에게 남은 것은 이번 분기 신작 애니메이션뿐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가 덕후라는 소문은 회사에까지 알려져 그나마 친하게 지내던 동료와 여직원들마저 그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에 휩싸인 봉 씨. 병가를 낸 그는 현실을 외면한 채 더욱 더 애니 감상에 몰두한다. 그러던 와중에 그는 문득 중학시절 겪었던 어떤 사건을 떠올리고 말았다. 용돈을 모아 구입했던 첫 만화책에 관한 일이었다. 그가 산 만화책은 지금 그가 탐닉하는 애니들처럼 씹덕스러운 내용도 아니었다. 당시 소년이라면 누구나 읽었을 법한 만화 <슬램덩크> 한 권이었다. 당시 키가 170센티미터도 넘지 못했던 사춘기의 봉 씨는 만화책으로나마 대리만족을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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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의 책장 구석에서 만화책을 발견한 그의 부모님은 귀한 아들의 타락을 용납하지 못했다. 어느 날 학원을 다녀온 그는 소중한 단행본이 갈가리 찢긴 채로 버려진 것을 목격한다. 아버지에게 빗자루로 엉덩이를 흠씬 두들겨 맞았음은 물론이며, 감히 부모님이 주신 용돈을 낭비하여 구입한 만화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다가 매를 두 배로 벌기까지 했다.

 

그날 밤,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눈물을 삼키며 그는 밤새도록 억울해 했다. 어째서 내게 만화책 한 권의 자유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인가. 마음대로 쓰지도 못하게 할 거라면, 용돈은 뭐하러 받는단 말인가. 부모님은 "S대에만 입학하면 뭘 사든 네 마음대로 해라.라고 말했다. 그는 남은 중학 생활과 고교 3년 동안 칼을 갈 듯이 공부했다.

 

그리고 그는 S대에 합격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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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중간한 대학에 들어가 어중간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어중간한 회사에 취직하여 어중간한 봉급을 받아가며 생활하고 있던 봉국전 씨. 남중남고 6년 연속 크리티컬에, 대학생활 내내 솔로였던 그에게 여자 친구의 존재는 삶의 한 줄기 빛과도 같았다. 그런 그녀마저 봉씨는 잃고 만 것이다. 그것은 절망 그 자체.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더 어두운 심연.

 

칠흑 같은 고요 속으로 침잠해가던 그는 어느 순간 자신 속에 숨어있던 또 다른 자신, 바로 중2 때의 자신과 다시 마주하게 된다. 의식 속의 또 다른 자신은 그날 밤 그때처럼, 여전히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때 부모님이 그에게 그 한 권의 만화책을 허락했더라면, 그의 삶은 어떻게 변해있을까? 그는 울고 있는 자신을 다독이며 안아주었다. 30대의 그와 중2의 그가 하나로 합쳐졌고,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났다. 봉 씨는 기어코 흑화(黑化)하고야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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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큭!”

 

이제 그는 완전히 뚜껑이 열리고 말았다. 자신들을 괴롭힌 리얼충 녀석들과 그들을 방관한 사회를 심판하기 위해 그는 매일 밤 인터넷에 접속하여 악플을 달기 시작한다.

 

봉 씨는 수많은 아이디를 만들어 놓고 다중이 놀이를 즐겼다. 그의 댓글 성향은 좌우를 가리지 않았다.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적이었다. 인터넷 세계 속에서 자신은 누구든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극한의 희열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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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단순한 악플만으로는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한 공허함이 채워지지 않았다. 그는 익명으로 블로그를 하나 개설했다. 그리고 그곳에 중2병의 기운이 물씬 넘치는 게시물들을 올리기 시작했다. 붕대를 휘감은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올리기도 했다. 매일 같이 일기도 써서 올렸다. 물론 내용은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을 사로잡은 분노와 슬픔, 터져버릴 것 같은 공허가 시키는 대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온라인 세계 속에서 완전한 익명상태가 된 그는 흑화한 자신, 진정한 자기 자신의 모습과 생각을 마구 배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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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는 자신을 다크맨이라 지칭하기 시작했다.

 

그의 블로그는 순식간에 유명해졌다. ‘웬 또라이가 나타났다며 그의 글과 사진을 여기저기 퍼 날라댔고 그가 한 번 글을 올릴 때마다 댓글은 수백 개씩 달렸다. 댓글의 종류도 제각각이었다. ‘이 미친놈아 정신 좀 차려라 ㅉㅉ 너네 부모님이 이러는 거 아시냐?’라는 비난형 댓글부터 컨셉 잡고 연극하지 말라는 취조형 댓글. 그리고 부디 힘든 시기 빨리 이겨내시고 현실세계로 돌아오시길 바랄게요’ 같은 걱정형 댓글까지.

 

30여 년 평생 조용하고 평범하게, 어중간하게 살아온 그는 이전까지 한 번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말을 걸어온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악플이든 걱정해주는 댓글이든 상관없었다. 그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글에 댓글을 달아줄까 고민하며 스스로가 자신이 즐겨보던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이 느껴졌다. 조금 짜증나는 점은, 그를 다크맨이라 부르지 않고 덕후맨이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동시에 그는 끝없이 불안하고 불행했다. 혹시나 신상이 털려 누군가 자신이 다크맨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진 않을까? 편견 가득한 시선으로 노려보지 않을까? 부모님이나 몇 안 되는 친구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는 앞으로 그들을 어떤 표정으로 마주해야 하는 것일까. 만에 하나, 그녀마저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그는 알 수 없는 희열과 불안이 교차하는 매일 밤을 지새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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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1년이 지났다. 그는 여전히 집 안에 틀어박혀 애니메이션과 악플, 그리고 블로그에 매달리며 시간을 보냈다. 회사를 그만둔 지도 오래됐다. 부모님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몇 안 되는 친구들의 연락도 받지 않다시피 하다 보니 저절로 연락이 끊겼다. 그러나 그립지 않았다.

 

생활비는 모아두었던 결혼자금을 까먹었다. 하루 한두 끼만 챙겨 먹을 뿐, 별 다른 활동도 없으니 돈을 쓸 일도 별로 없었다. 평생 이렇게 살 수 있을까. 로또라도 사야 하나... 하고 그는 막연히 생각했다.

 

그럴 때 즈음이었다.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연락처에서 이미 지워졌지만 익숙한 번호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헤어진 여자 친구의 전화번호였다.

 

1년 만의 재회였다. 그녀는 여전히... 어중간하게 생겼다. 엄청 예쁘지도 않고, 그렇다고 엄청 못생긴 것도 아닌 외모. 사귀는 동안 그는 그런 그녀의 존재를 당연하게만 생각했던 것 같다. 어중간한 자신에겐 어중간한 그녀가 딱이라고 생각하며. 그런데도 이렇게 다시 마주하니 가슴 어딘가가 저릿하며 아파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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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뼛대며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그에게 그녀는 부동산업자와의 관계는 모두 그의 오해였다고 했다. 1년  동안 다른 남자는 만나지도 않고 지냈으며 그의 청혼에 주저했던 건 단지 자신이 마음의 준비가 덜 되었던 것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를 원망했다. 어떻게 그동안 한 번도 연락하지 않을 수 있었느냐고. 그녀가 물었다.

 

“...다른 여자 만나는 거야?”

 

다른 여자라면 매일 만나고 있었다. 페이트, 미사카, 미오쨩... 매일 애니메이션 속에서 그는 현실보다 더 완벽한 여자들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그녀에게 그렇게 대답할 순 없었다. 말이 없는 그에게 그녀는 먼저 말을 건넸다.

 

다시 시작하자고.

 

그럴 수 있을까?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그녀와의 관계... 엔딩을 이미 본 것이라 생각했다. 만약 다시 시작한다면 그와 그녀의 사랑은 시즌 2가 된다고 봐야 하나.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그는 자신이 그녀를 꽤나 그리워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녀를 품에 안았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문제는 그가...지금의 자신을 포기할 수 있을까? 마도카쨩을, 미쿠루 센빠이를, 그리고 페이트를... 그녀들의 존재가 없었던 것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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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동안을, 마치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이 그는 그녀를 마주본 채 앉아있었다. 그녀도 그대로 앉은 채로, 재촉하지 않고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생각해볼게.

 

봉 씨는 한 마디를 남기고 돌아섰고

 

다음날 그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인터넷 세계에서도, 현실세계에서도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블로그는 폐쇄되었고, 그가 달았던 악플들도 모두 지워졌다. 그가 살던 원룸은 마치 원래 사람이 살지 않았던 것처럼 비어있었다. 사람들은 온갖 추측을 내놓았다. 그가 자살했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의견도 있었고, 마침내 애니메이션 세계 속에 들어가 완전한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개념 없는 주장도 있었다. 혹은 해외로 도주해서 여전히 익명의 공간 속에 숨어 악플을 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현재 그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는 곳은, 이제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오래된 미니홈피 뿐이다. 그나마 사진첩도, 방명록도 모두 닫혀있는 봉국전 씨의 미니홈피에는 프로필에 적힌 한 문장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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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촤

트위터 : @hamchw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