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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숙이 할머니(92)는 열여섯 살 때 바닷가에서 조개를 잡다가 영문도 모른 채 일본 나고야로 끌려갔다. 10여명의 조선 처녀들과 감금돼 있다가 중국 만주로 이동, 6년 동안 만주와 상하이의 위안소를 떠돌았다. 같이 끌려간 고종사촌은 해방을 맞은 해에 할머니가 보는 앞에서 일본군 총에 맞아 사망했다. 1948년에 귀국해 3년 만에 고향인 남해로 돌아와 1남2녀를 입양해 키웠다. 할머니는 현재 방 두 개와 조그마한 부엌이 딸린 집에서 혼자 생활한다. 수첩에 꽃ㆍ동물 그림을 그리고 공기놀이를 하면서 무료함을 달랜다.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려 기자가 무릎을 꿇고 자리를 잡자 "일본사람만 무릎을 꿇는다"며 호통을 쳤다. 이날 할머니는 열 손가락에 빨갛게 봉숭아 물을 들였다.

http://story.asiae.co.kr/comfortwomen/sub02_01.htm


지저분한 싸라기눈이 흩날리는 아침, 기사로 할머니의 별세를 접했다. 향년 95세, 한 달에 한 두 번 찾아뵈는 것으로 불효를 억지로 지우려 하는, 필자의 외할머니와 같은 연세시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별세 소식은 슬프지만 이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필자는 위안부 할머니로부터는 3번의 세대를 거쳐 온 세대이며, 오직 교과서와 개인적으로 찾아본 흑백사진들, 그리고 그분들이 고통을 되새기며 담아두신 글, 그림을 접한 것이 전부이다. 그것들로는 할머니들의 삶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 시절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고, 그것이 끝났을 줄로만 알았던 이후의 세월은 얼마나 인내해야 했으며, 최근의 세월은 또 얼마나 원통하셨을지. 다만 가슴 한쪽에서. 할머니들의 별세 소식을 들을 때마다 피어오르는 부끄러움, 그것이 요 몇 년 새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박숙이 할머니의 별세 소식은 지저분하게 내리는 눈 때문인지, 평소와는 다른 더 큰 부끄러움이 피어났고 그것이 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가슴에 대못을 심어버린 2015년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합의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제소했던, 또는 진행 중인 소송을 무색하게 만드는 합의였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나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그간 벌였던 소송이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 어떤 근거로 기각되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하고 또 알아볼 노력을 하지도 않았다. 하여 그동안 이뤄졌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법정 공방, 그것을 정리하고 앞으로의 과제를 공부하기로 했다.


먼저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했던, 90년대 초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될 무렵의 세 건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1991년 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소송, 1992년 부산 일본군 ‘위안부’·여자정신대 공식사죄 청구 소송, 1993년 재일동포 송신도(宋神道) 소송은 길고 긴 법정공방 끝에 모두 기각되었다. 각각의 판결을 간략히 들여다보겠다.



* 부산 일본군 '위안부'·여자정신대 공식사죄 청구 소송

1998년, 7년 만에 판결이 내려진 부산 일본군위안부 공식사죄 소송은 1심 판결에서 "기본적인 인권에 대한 침해가 중대하고 구제 필요성이 크다고 인정되어 국회가 입법의 필요성을 충분히 인식하면서 방치하고 있는 경우에는 입법부작위에 의한 국가배상을 인정할 수가 있다"고 판단했다. 또 일본군 위안소 제도에 대해 "철저한 여성차별·민족차별 사상의 표현이며 여성 인격의 존엄을 근저에서부터 침해하고 민족의 긍지를 유린하는 것”이라며, “배상입법을 해야 할 의무를 게을리 한 데 따른 정신적 손해배상금” 30만 엔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하였다. 1심 판결은 위안부의 성적 강제 행위 자체를 위법행위로서 손해배상 판결을 한 것은 아니지만, 전후 피해회복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에 대한 판결로써 주목할만한 판결이었다. 그러나 2심에서는 1심판결을 취소하고 원고 측 청구를 기각하였는데, 가장 중요한 이유는 1965 한일기본조약이었다. “일한 양국은 일한협정에서 자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 ‘청구권’에 관한 외교적 보호권을 상호 포기함에 따라 소위 전쟁손해 보상·배상 등의 문제에 대해 국제법상 양 국가 간에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라는 판결은 이후의 소송들에도 근거로 쓰인다.


* 재일동포 송신도씨 소송

1999년, 6년 만에 내려진 1심 판결은 위안부 사실 자체는 인정하나, 원고 측이 제기한 "노예를 금지한 국제관습법과 강제노동에 관한 조약 등의 국제법을 위반한다"는 주장을 "국제관습법이 당시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20년의 민법상 청구권도 이미 소멸했다", "국제법은 국가 간의 권리 의무를 정한 것이다."라는 판결로 개인 청구권을 부정했다. 2심 판결에서는 1심에서 부정했던 국제법상의 국가책임은 인정했으나, “개개의 성적 강제 행위는 군이 직접 지시한 것이 아니므로 국가의 직접적인 위법 행위라고는 볼 수 없으나 업자를 감독하고 위안소의 실질적 관리를 하고 있었던 것은 군이었으므로 군은 업자의 사용자로서 관리를 게을리 한 책임이 있다. 그 결과로 군과 국가는 ‘위안부’의 피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판결을 했다. 겉으로 보면 군과 국가의 위안부 배상 책임을 인정한 것이나, 들여다보면 개인에 대한 배상의무를 부정하였으며 특히 '국가의 직접적인 위법 행위라고는 볼 수 없으나'라는 문장은 지금까지도 '일본 정부는 위안부를 직접적으로 관리한 적이 없다'는 의식이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문장이다.


*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청구 소송

1991년, 일본 정부를 상대로 최초로 제기한 이 소송은 2001년, 10년 만에 1심 판결이 났다. 이 판결은 조금 상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1심판결에서 법원은 위안부의 강제성과 사실은 인정하였으나, 일본 정부의 인도적 책임을 강조한 원고 측 주장에 대해서 “인도에 반하는 죄는 국가에 대해 개인을 국제재판소의 처벌에 복종하게 하는 의무를 지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국가에 민사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2003년 2심 판결에서는 약간 진전해서, 위안부가 '노예 상태와 같은 중대한 인권침해', '그 의사에 반해서 성행위를 강요받았으므로 추업조약의 적용대상'이라고 했으나, 결국 개인 보상 의무는 없으므로 피해자에게 손해배상청구권을 인정할 수는 없다는 판결을 내린다. 국제법을 근거로 한 소송은 1심이나 이전의 다른 판결과 같이 해당 국제법이 국가에 대해 개인이 청구권을 취득되는 근거로 작용할 수 없으며, 국제관습법이 당시엔 성립되지 않았고, 있다 하더라도 피해자에게 보상 청구권이 인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판결을 내린다. 그나마 나은 점이라면, 국제법상 국가 책임을 다하는 한 방법으로 일본 국내의 보상입법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정도겠다. 여러 근거로 제기한 개인청구권 문제는 모두 기각되고, 또한 한일청구권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이 포기되었다는 사실은 결과적으로 아무런 역사적 책임도 다하지 못한 판결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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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신도 할머니의 10년간의 싸움을 담은 다큐,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위의 소송들이 진행되면서 그동안 일본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쉬쉬했던 일본군 위안부의 구체적인 피해 사례들이 수면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 그러나 중간중간 일본법원의 '심정적인 이해'는 여러 부분에서 드러났지만, 가장 중요한 개인청구권 문제는 국제법에 대한 판단과 한일청구권협정을 근거로 모두 기각되었다는 점이다. 일본 법원이 '독단적'으로 내린 국제법에 대한 판단도 문제가 되겠지만, 필자는 한일 청구권협정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고자 한다.


1.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런시스코우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3. 2의 규정에 따르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으로서 본 협정의 서명일에 타방체약국의 관할하에 있는 것에 대한 조치와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타방체약국 및 그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으로서 동일자 이전에 발생한 사유에 기인하는 것에 관하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


- 한일청구권협정 제2조


(a) 일본국 및 그 국민의 재산으로서 제2조에 열거하는 지역에 있는 것과 일본국 및 그 국민의 청구권(채권을 포함함)으로서 실제로 이들 지역에 시정을 행하고 있는 당국 및 그 주민(법인을 포함함)에 대한 것의 처리와 일본국에서 이들 당국 및 주민의 재산과 일본국 및 그 국민에 대한 이들 당국 및 주민의 청구권(채권을 포함함)의 처리는 일본국과 이들 당국 간 특별협정의 주제로 한다.


-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


⑴ 조선은행을 통해 반출해간 지금, 지은의 반환청구

⑵ 1945.8.9 현재 일본정부가 조선총독부에 지고 있는 채무 변제 청구 

⑶ 1945.8.9 이후 한국으로부터 이체 또는 송금된 금품의 반환 요구 

⑷ 1945.8.9 현재 한국에 본사, 본점 또는 주된 사무소가 있던 법인의 재일 재산의 반환청구

⑸ 한국법인 또는 한국자연인의 일본국 또는 일본국민에 대한 일본 국채, 공채, 일본 은행권, 피징용 한국인의 미수금 보상금 및 기타 청구권의 변제 청구 

⑹ 한국인(자연인, 법인)의 일본정부 또는 일본인에 대한 개별적 권리행사에 관한 항목

⑺ 전기 제재산 또는 청구권에서 발생한 법정 과실의 반환 청구 

⑻ 전기한 제재산과 청구권의 반환 및 결제는 협정성립 후 즉시 개시하여 6개월 이내 종료할 것


- 대일청구 8항목


청구권협정에서 근거로 쓰이고 있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4조(a)에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 청산에 대해서는 어떠한 규정이나 언급이 없다. 또한, 청구권 협정 내에서도 식민지 지배의 청산을 상정한 교섭은 없었다. 한국 정부가 협상 중 일본 정부에게 청구한 8항목을 보면, 협정 과정에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관련된 반인도적 불법 행위가 담겨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청구권 협정은 결국, 한일 양국 간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해결하기 위함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청구권 협정 제2조 1항, '재산 및 청구권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소멸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 정부의 이러한 태도는 자기모순이 발생하는데, 일본은 식민지 지배의 법적 책임을 한일협정 때나 지금이나 부인하고 있다. 따라서, 청구권 협정에서는 식민지 지배에 관련된 반인도적 불법 행위가 담겨 있지 않은 것은 지당해 보인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라는 문구 뒤에 숨어 이러한 모순을 외면하는 중이다.


또한, 일본 정부와 법원이 그토록 부정하는 개인청구권 문제를 보면, 먼저 1991년 8월 참의원 예산위에서 당시 야나이 순지 조약국장은 "청구권 협정 때문에 소멸한 것은 국가 간의 외교 보호권이지 개인의 청구권 자체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답변했다. 일본 정부는 1990년대 초, 즉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지고 법정공방이 본격화되기 전까지 개인청구권 문제는 남아있다는 입장이 확고했다. 그러나 위의 위안부 소송들을 거치며 법원과 일본 정부는 개인청구권 또한 말소되었다고 판단했으며, 이와 같은 판단의 배경에 일본 정부의 우경화가 있음은 당연하다. 또한, 학자들은 '국제법을 통해서 개인청구권을 취득할 수 없다'는 일본 법원의 판단에 대해, '최근에는 인도에 반하는 죄의 개념 자체가 피해자의 배상청구권도 포함하는 것으로 발전해 왔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2005년 한일회담 문서 공개가 이루어지면서 참여정부에서는 후속대책 관련 민관공동위원회를 개최하였고, 여기에서 '한일청구권협정은 기본적으로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 간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일본 정부, 일본군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청구권협정 때문에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2011년 8월, 헌법재판소는 “청구인들이 일본국에 대하여 갖는 일본군 ‘위안부’로서의 배상청구권이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제2조 제1항에 의하여 소멸되었는지 여부에 관한 한·일 양국 간 해석상의 분쟁을 위 협정 제3조가 정한 절차에 따라 해결하지 아니하고 있는 피청구인의 부작위는 위헌임을 확인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은 그동안 우리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관해 얼마나 소극적으로 대응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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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위안부 합의는 이전에 있었던 일본정부의 노력 보다 훨씬 퇴보한 합의였다.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723879.html)


20년이 넘도록 위안부 할머니들이 고통의 기억을 이겨내며 싸우시고 여러 학자들이 참여하여, 심지어 일본 학자들도 인정한 '불법 식민지배에 관한 개인청구권'의 당위성이 입증됨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정부가 택한 것은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였다. 위안부 합의 전, 할머니들의 심정을 담은 이 기사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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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이 지지부진한 사이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하나 둘 눈을 감고 있다. 올 들어서도 황금자ㆍ배춘희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피해자 등록을 한 238명 중 55명만 남았다. 국내외로 증언활동을 벌이는 할머니들도 지쳐가고 있다. 지난달 31일 기자와 만난 김복동(88) 할머니는 "잊어뿔만 하면 그 말을 되새기고 되새기고 하니깐 화가 난다. 늙은 사람은 과거사를 다 잊어뿌려야 하는 기라. 묻는 사람은 처음 묻제. 우리는 앵무새마냥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고…"라면서 한숨을 쉬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할머니는 박근혜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고도 했다. 김 할머니는 "아버지 때 해결 못한 거 딸이 대통령이 됐으니깐 딸이 해결해야 한다"며 "대통령이 나서야 해결이 나지 그렇지 않으면 일본이 계속 헛소리를 한다"고 성토했다.


아픈 기억을 자꾸 끄집어내는 것은 할머니들에게는 또 다른 상처다. 지난 6월에 만난 이수산(88) 할머니는 인터뷰 도중 이따금 울먹였다. "할매 오늘 또 잠 못 주무시겠네…." 누군가 한 명이 말했다. "할머니가 이야기하시는 것은 굉장히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에요." 안이정선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대구시민모임 대표가 귀띔했다.


"100년, 200년 안 죽고 살아서 (일본 정부의) 사죄를 꼭 받겠다." 이수산 할머니의 바람은 마지막 생존 할머니들의 하나같은 소원이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부의 노력이 필요한 대목이다. 그러나 정부의 노력을 국민들은 전혀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실제 본지의 설문조사(8월13일자 8면 참조) 결과, 위안부 문제에 관한 정부의 노력을 국민들은 10점 만점에 3.1점에 불과한 낙제점을 줬다.


http://story.asiae.co.kr/comfortwomen/sub03_0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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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6년 6월 21일, 미국 법원에서 2차 대전 당시 종군위안부 관련 가해자들에게 피해 배상을 요구한 집단 소송이 패소했다. 판결문의 "원고들이 참혹한 고통을 겪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법원은 인내심을 가지고 원고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자료를 제출하라고 여러 차례 기회를 줬는데도 자료를 제출하지 않았다. 법원은 더 이상 원고들의 주장을 논의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는 문구를 볼 때 변호인의 불성실한 변호 준비가 패소의 제 1원인으로 보인다. 2016년 1월, 2년간의 조정신청이 지지부진하자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은 정식 소송으로 넘어갔으나, 아직 정식 절차가 진행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아마 위안부 합의 때문에 더욱지지부진할 것이고, 위안부 합의가 정식으로 이행되면 승소 가능성이 희박해 보인다. 또한, 2016년 8월, 위안부 할머니 12분께서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소송 역시 진행 중이다.


지난 90년대에 진행했던 소송들은 약 10년이 걸렸다. 또다시 할머니들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지루한 법정 소송이 감내하면서도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 된 상황, 필자의 부끄러움은 바로 여기서부터 기인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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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내 인권변호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소송을 진행했다 패소한 김형진 변호사는 총선에 나섰었다.

이 사람에 대한 자세한 기사는 여기(링크)를 참조하시라



우리는,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여러 학자들의 지적과 헌재의 판결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문제를 풀어갈 첫 단추는 외교적 노력에 있다. 청구권 협정 제3조에는 다음과 같은 조항이 있다.


제 3 조

1. 본 협정의 해석 및 실시에 관한 양 체약국간의 분쟁은 우선 외교상의 경로를 통하여 해결한다.


2. 1의 규정에 의하여 해결할 수 없었던 분쟁은 어느 일방체약국의 정부가 타방체약국의 정부로부터 분쟁의 중재를 요청하는 공한을 접수한 날로부터 30일의 기간내에 각 체약국 정부가 임명하는 1인의 중재위원과 이와 같이 선정된 2인의 중재위원이 당해 기간 후의 30일의 기간내에 합의하는 제3의 중재위원 또는 당해 기간내에 이들 2인의 중재위원이 합의하는 제3국의 정부가 지명하는 제3의 중재위원과의 3인의 중재위원으로 구성되는 중재위원회에 결정을 위하여 회부한다. 단, 제3의 중재위원은 양 체약국중의 어느편의 국민이어서는 아니된다.


3. 어느 일방체약국의 정부가 당해 기간내에 중재위원을 임명하지 아니하였을 때, 또는 제3의 중재위원 또는 제3국에 대하여 당해 기간내에 합의하지 못하였을 때에는 중재위원회는 양 체약국 정부가 각각 30일의 기간내에 선정하는 국가의 정부가 지명하는 각 1인의 중재위원과 이들 정부가 협의에 의하여 결정하는 제3국의 정부가 지명하는 제3의 중재위원으로 구성한다.


4. 양 체약국 정부는 본조의 규정에 의거한 중재위원회의 결정에 복한다.


한일협정 자체가 '전략적 모호성'의 바탕 위에 세운 조약이기 때문에, 제3조의 내용들은 어쩌면 당연히 삽입된 최소한의 출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한일협정에 준거한 외교적 해결책 대신, 외교라인을 동원한 '담합'을 내려버렸다. 따라서 우리는 일단, 이미 대통령이라도 부르기 싫은 구라왕 대통령을 끌어내려야 한다. 빨리 좀 꺼져라 양심없는 인간아. 또한,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차기 정권을 만드는 것 또한 끌어내리는 것만큼, 아니 보다 더 중요한 과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정부에게만 달려있는 것도 아니다. 그동안 위안부 할머니들의 법정 소송은 정부의 방관 아래 민간단체나 개인의 지원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을 진행 중인 <정의기억재단>은 기부금을 통한 여러 활동을 전개 중이다. 박근혜 정부가 만드는 <화해 치유재단> 같은 단체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뜻에 반하는 목적을 가지고 설립되었기에, 빠른 시일 내에 없애야 한다.


그리고 가장 기초적인 것, 그것은 우리 내면의 부끄러움을 돌아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박근혜 정부를 욕하기는 쉽다. 아베와 일본을 욕하기는 쉽다. 그러나 우리는 위안부 문제를 얼마나 알고 있고, 어떤 노력을 하고 있으며, 위안부 할머니들의 역사를 어떻게 전하고 있는지 되새겨야 한다. 당연히 위안부 할머니들이 당한 역사적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기본이고, 한일협정이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출발지점이다. 협상 당사자인 일본의 국민들은 한일 협정에 대해 자세히 배워, 한국인들의 인식에 "이미 끝난 문제를 왜 자꾸 거론하냐"는 태도로 나오기 때문이다. 한일 양국의 인식 차이를 줄이는 것은 비단 정부의 노력 뿐 아니라 민간 차원의 끊임없는 상호 교류가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남해에는 박숙이 할머니를 위해 조성한 숙이공원과 평화의 소녀상이 있다고 한다. 박숙이 할머니는 95번째 생신을 맞아 이런 말을 하셨다.


박숙이 할머니는 숙이공원에 도착하자마자 소녀상의 손을 꼭 잡으시며 “니도 숙이가? 내도 숙이다!”라며 첫인사를 나누고는 이내 뜨거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어 소녀상 옆에 있는 바래가는 길에 사용해 온 바구니를 손으로 더듬으시고는 구수한 남해 사투리로 “바구리(바구니), 바구리다. 호메이(호미)!”라고 말하며 흐뭇한 미소를 보였다.


또 숙이공원 한 편에 자리 잡은 할머니와 나이가 같은 동백꽃인 숙이나무를 바라보며 “좋다. 좋다. 참 좋다. 오늘은 내 생애 가장 기억될만한 날”이라며 “건강만 허락되면 숙이공원에 자주 와 방문객들과 같이 이야기도 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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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gn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111283


소녀로서의 삶을 강탈당한 채 한 세기를 살아오신 박숙이 할머니. 하늘에서는 소녀로써의 꿈, 고통이 가득한 기억, 그것들이 모두 이루어지고 치유되기를 기원해본다. 

 

이제 할머니들의 존엄성을 되찾는 일은 우리에게 달렸다. 부족하지만 후손들에게 맡겨두시고 편히 쉬시길.




* 참고 및 출처

 

<한일협정 연구>, 최희식 (동북아역사재단)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구제에 관한 일고(一考)>, 김관원 (동북아역사재단)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한 실천적 지혜의 모색>, 최희식, (동북아역사재단)

<위안부보고서>, 아시아경제 / http://story.asiae.co.kr/comfortwomen






빵꾼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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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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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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