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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6시에 노트북을 열고 쓴다. 기사를 부탁받았을 때, 바로 거절하기는 미안하고 수락하기엔 할 말이 없어 그냥 눙치고 갈 생각이었다. 탄핵에 찬성하지만 정의를 부르짖을 만큼 뜨거운 인간이 못 되어서다. 나는 내 행동으로 정의와 상식의 편에 섰다고 자부할만한 영수증을 발급받아본 적이 없다.

 

내 삶은 비루하고 부산하다. 어제 동네 패스트푸드점 앞 골목에 조용히 숨어 손톱으로 할인쿠폰을 잘랐다. 단돈 이천 원을 아끼고 싶었지만 그 모습을 형광등 불빛 훤한 매장 안에서 보이긴 싫어서 그랬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동서양의 만남인가. 나는 햄버거를 찍어내는 곳 근처에서 밥공기를 떠올렸다. 밥알을 씹기가 괴로울 만치 아픈 아버지 때문이다. 아버지는 월남전에 해병대로 참전해 부상을 입으셨다. AK소총탄에 여섯 번이나 몸을 데었고 베트콩의 마차에 치어 까무룩 실신하셨다. 마차를 힘껏 들이받은 가슴의 담증은 수년에 한 번씩 찾아와 두어 달 당신을 괴롭히고 떠나간다. 어김없는 재회를 약속하면서.

 

어릴 적, 아버지의 거인 같은 어깨가 움츠러드는 걸 처음 봤을 때 나는 당신의 담증을 보이지 않는 괴물이라 생각했다. 이 나이를 먹고 나니 괴물은 신비를 잃었다. 담증은 과학적 소견으로 퇴락했다. 그간 작아지고 약해진 아버지처럼.

 

아버지는 고국 땅을 밟고 민주화에 투신하셨다. 지방을 전전하는 도피생활이 십 년이었다. 이 시기 급히 지으신 가명이 아직도 본명을 대신하고 있다. 신경에 스며든 고엽제는 계단을 내려갈 때에만은 어김없이 아버지의 다리를 절게 한다. 상이유공자 자식의 신분으로 나와 동생 둘 중 하나는 군역을 피할 자격이 있었다.

 

법적 자격은 있지만 도의적 자격은 없다. 너희는 잘 먹고 잘 자란 신체 건강한 남자들이다. 아버지의 말씀이었다. 호적에서 파이면 큰일이라는 공포 하나로 두 형제가 군 생활을 마쳤다. 취직에 도움 안 되는 철학과 졸업을 앞두고 교사 임용고시를 기웃거렸다. 마침 부모 잘 만나 얻은 가산점이 공짜표 기능을 하던 때였다. 아버지는 꿈도 꾸지 말라고 하셨다. 다른 이들의 기회를 빼앗기 위해 나라에 헌신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호적에 파이기가 무서워 지금 나는 지적 허영심과 의무적인 겸손 사이를 오가는 빈한한 글쟁이가 되었다.

 

수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의 폐 속에서 일어난 일에 해답을 뒤늦게 찾았다. 폐암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는데, 완치 판정도 받았는데 폐 조직이 경화되었다. 굳고 또 굳어서 나중에는 한 숟가락 남은 폐 조직으로 한숨에 한 입씩 가쁜 숨을 쉬시며 27kg의 육신으로 돌아가셨다. 길고 고통스러운, 이해할 수 없는 과정이었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의 머리맡에 놓인 가습기에는 옥시크린 소독제가 몇 년간 24시간 꽂혀 있었다.


울화가 치밀어 반년을 침대에서 잠들지 못했다. 찬 바닥에 몸을 뉘이지 않으면 심신이 폭발해 공중분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추운 겨울이 오자 밤마다 내 몸은 침대로 복귀했다. 전기장판의 뜨듯한 온기까지 추가해서. 나는 그 정도 사람, 그 정도 자식이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군 복무와 임용고시 포기를 나름의 훈장으로 품고 살았다. 벌써 오래전, 친한 친구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녀석은 국가대표 주장까지 해 먹은 운동부였다. 그렇게 운동만 하다가 어깨뼈도 해 먹었다. 습관성 탈골의 연옥에 갇힌 친구는 운동을 그만두었다. 녀석이 빛나던 육체를 잃고 동네 유명한 술주정뱅이로 살던 때였다. 운동부에서 퇴출된 이유가 어깨뿐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부조리에 항거했다는 과거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친구의 운동경력은 쓸 만한 경험이었다. 사립 고등학교 코치라는 평생 일자리가 들어왔다. 다만 ‘분란’을 일으켜 ‘퇴출’된 인간으로서 치러야 할 대가가 있었다. 뇌물 4천만 원이었다. 녀석의 부모님은 득달같이 차를 팔고 일가친척의 안부를 물으며 그 돈을 마련했다. 하지만 친구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자신을 위해 부모님을 타락시킬 수 없다는 이유였다. 단언하건대 내게는 그만한 지조가 없다.

 

친구의 태도엔 말 많고 생색 많은 내가 닿을 수 없는 격조가 있었다. 그는 담담히 아닌 건 아닌 거라는 한 마디로 대화를 정리했고, 이후 한 번도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나라면 수도 없이 떠들어댔을 것인데, 배가 고파도 금욕의 자랑스러움이나마 즐겼을 텐데. 이것이 녀석과 나의 차이일 것이다. 나에겐 자랑거리가 그에겐 당연이었다.

 

친구는 지금 박봉의 중소기업 사원으로 가장의 피눈물을 팔며 살고 있다. 나도 금치산자는 아닌지라, 녀석과 육두문자를 섞은 걸쭉한 안부 전화를 마칠 때마다 겸손이라는 두 글자를 곱씹는다. 이제는 병든 아버지가 지키고 살아온 염치가 내게는 없음을 알아서 그렇다. 내게는 세월호의 한이 잠긴 차디찬 바다에 몸을 던진 잠수사들의 부지런한 정의가 없어서 그렇다.

 

나도 선량한 피해자라는, 이만하면 됐다는 안도감에 기대 더 마음껏 분노하고 저주했다. 나보다 숭고한 이들, 나는 견딜 수 없는 크기의 슬픔을 진 이들을 자주 잊고 살았다. 더는 외면할 수 없는 불의가 온 나라를 덮은 지금에서야 내가 그들보다 작았음을 확연히 느낀다. 백만 개의 촛불 사이에서 내가 아는 이들의 얼굴을 보았다. 그들에게 덜 부끄럽기 위해, 솔직하게 말하면 꿈자리의 편안함을 위해 촛불을 들고 행진하는 불편을 감수했다.

 

나보다 나은 사람들이 애써 올린 지붕 아래서 비를 피하며 살아왔다. 그들의 숭고함이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민망하지만 감히 자백컨대, 비루한 내 현실의 안위가 방해받아서도 안 된다. 이 기사가 언제 실릴지도, 탄핵이 가결될지도 알 수 없다. 다만 나는 너무나 이기적이고 비겁해서 전태일 열사의 육신을 덮은 불길 근처에도 얼씬거릴 자신이 없다. 정의에 애써 다가갈 기개가 없다.

 

나는 거꾸로 약간의 정의를 일상으로 초대하고 싶다. 이제 나는 나보다 저열한 인간들이 나보다 고상한 이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세상을 사는 데 지쳤다. 저 천박한 폭력이 내 얄팍한 체면을 위협하는 현실에 반대한다. 양심이 숱한 촛불을 밝히는 광화문 바닥으로 비양심을 끌어 내리자. 오늘이 아니면 다음에, 그것도 아니면 다다음에 소박한 상식을 일상에 초대하자. 대통령 탄핵을 갈망한다. 좀 더 마음 편히 비겁하게 살아도 될 상스럽고 성스러운 자유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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